진범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배지유를 향해 말했다.“제 아내가 방금 깨어났으니 두 분은 이쪽에서 잠시 쉬세요. 제가 배지유 씨를 데리고 아내에게 가겠습니다.”진범준은 배지유에게 안쪽 방으로 가자는 신호를 보내고 도우미에게 손님들에게 차를 대접하라고 지시했다.배건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성대호는 다소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구해준 사람의 오빠도 병문안 못 하게 하다니... 대체 누굴 경계하는 거야?”그러자 차를 내오던 도우미가 웃으며 설명했다.“저희 대표님께서는 사모님을 매우 아끼십니다. 사모님께서 방금 깨어나셔서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이 정돈되지 않았을까 봐 두 분이 보시고 놀라실까 봐요.”즉, 아내가 집에서의 편안한 모습이 외부 남자들에게 보여지기엔 부적절하다는 의미였다. 이건 확실한 보호욕이자 소유욕이었다.배건후는 성대호를 한 번 쓱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너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지.”“아니야!”성대호는 심장이 순간적으로 철렁했다.“내내 지유를 감싸고 있었잖아. 또 무슨 사고 친 거 아니야?”성대호는 깨달았다. 배건후는 차 안에서 아무것도 듣지 않은 게 아니라 그들의 대화를 일부러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아니야. 배지유는 아린 씨가 연회에 안 간 게 자기 때문이라고 네가 오해할까 봐 걱정한 거야. 사실은...”하지만 배건후가 피식 콧방귀를 뀌었고 성대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한편 병실 안.윤명희는 멍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듯한 표정이었다.발소리가 병상 옆에서 멈추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여보, 배지유 씨가 당신 보러 왔어.”진범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윤명희의 침대 머리를 높여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그들 부부의 다정한 모습을 보며 배지유는 더욱 자부심이 느껴졌다.자신이 우연히 윤명희를 구한 덕분에 배건후의 큰 사업을 성사시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사모님.”배지유는 침대 옆으로 다가가 손을 잡으며 말했다.“배지유라고 불러주세요.”윤
“사실 저는 부족한 게 없지만 진 대표님께서 성의로 주신다면 감사히 받을 순 있을 것 같아요.”배지유의 이 말은 모건 그룹과 협력을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합리적으로 들렸다.하여 진범준은 살짝 미소 지으며 블랙 카드를 내밀었다.“이건 한도가 없는 블랙카드입니다. 배지유 씨의 은혜에 보답하는 작은 성의입니다.”그러자 눈빛이 반짝이더니 배지유는 얼른 카드를 받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그럼 사모님을 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두 사람이 방에서 나오자 성대호는 재빨리 일어섰다.배지유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것을 보고는 안심하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혹시라도 배지유가 경솔하게 말을 잘못했을까 봐 걱정했던 것이다.“사모님은 괜찮으셔?”“아주 좋았어.”배지유는 성대호에게 장난스럽게 윙크하며 말했다.“진 대표님,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조심해서 가세요. 배 대표님, 나중에 차 한잔하시죠.”“좋습니다. 또 뵙겠습니다.”그렇게 배건후는 진범준과 다시 악수를 나누며 인사를 건넸다.병실을 나선 후, 성대호가 웃으며 말했다.“칭찬받으니까 그렇게 기뻐?”“당연하지!”배지유는 배건후를 힐끔 보며 불만스럽게 말했다.“우리 오빠는 나 한번도 칭찬해준 적 없거든.”결국 성대호가 대신해 그녀의 편을 들며 말했다.“지유는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제일 신경 써. 네가 한마디 칭찬해주면 남들이 열 번 말하는 것보다 효과가 클걸.”곧 배건후의 어두운 시선이 배지유의 얼굴에 떨어졌다. 마치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배지유는 순간적으로 가방을 꽉 쥐었다.“나 피곤해. 먼저 병실로 돌아갈게.”그녀가 입원한 곳도 윤명희와 같은 병원이었다.배건후가 자신을 칭찬해주지 않으니 배지유는 주현정에게 가서 위로를 받으려고 했다.여전히 배건후는 손에 핸드폰을 꽉 쥔 채 있었다.육하경이 보낸 몇 장의 사진을 확인했지만 그들 중 누구도 도아린이 아니었다.도아린이 일부러 자신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슨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그는 한
육하경은 도아린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이분이 내가 전에 말했던 아현 씨야.”“아현 씨?”배건후는 거의 이를 악물며 말했고 복도는 금세 싸늘해졌다.도아린은 얼굴을 돌리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했다. 그때 배건후의 차가운 비웃음이 들려왔다.“결혼해서도 남편 몰래 다른 이름을 사용하다니...”도아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성대호는 코를 만지며 침묵을 유지했다.마침내 육하경도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챘다.“건후야, 너 아현 씨랑 아는 사이였어?”배건후는 한 손을 뻗어 도아린의 허리를 감싸더니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도아린은 몸을 빼내려고 했지만 배건후는 오히려 더 세게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도아린의 당혹스러운 얼굴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혹시 하경이한테 결혼했다는 말 안 했어?”눈빛이 흔들리며 육하경은 성대호에게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묻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그러자 성대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건후야, 너 결혼할 때 하경이는 다른 지역에 출장 가 있어서 몰랐을 거야. 이분은 건후의 아내 도아린 씨야.”‘아현 씨가 도아린 씨라고?’육하경은 성대호의 고개 끄덕임을 보고 나서야 사실을 확인했다.순간 실망감이 스쳐 지나갔고 그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그래서 연회장에서 찾을 수 없었던 거구나.”배건후는 육하경의 말을 무시하고 도아린을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그 귀걸이 안 하고 싶었나 보네? 옷도 바꿔 입고.”도아린은 그를 노려보았다.‘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게 병이라면 어디서 치료받아야 하지?’육하경은 어색하게 손가락을 꼬면서 말했다.“아현... 아니, 아린 씨는 귀걸이를 계속 끼고 있었어. 다만 귀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서 잠시 뺐을 뿐이야.”육하경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배건후는 더욱 차가운 분위기를 내뿜었다. 그는 도아린의 붉어진 귀를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알레르기 있으면서 왜 말 안 했어?”“말한다고 해서 귀걸이 끼지 말라고 했을까요?”도아린은 그의 손을 떼려고 했
“내가 두렵긴 뭐가 두려워요!”성대호는 배건후를 빠르게 한 번 쳐다보고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외쳤다.“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쳐요. 하지만 사모님도 거짓말을 할 리는 없잖아요?”도아린은 여전히 냉소를 짓고 있었다.“스스로 거짓말한 거 인정하셨으니 이제 대호 씨 말은 신뢰할 수 없지 않겠어요?” 성대호는 도아린의 날카로운 반박에 얼굴이 파랗게 질렸고 주먹을 꽉 쥔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 순간 도아린은 배건후가 감싸고 있던 팔을 억지로 떼어내며 말했다.“내가 거짓말을 했는지 아닌지는 안에 들어가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하지만 배건후는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다시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며 경고했다.“진 대표님 앞에서 장난치지 마.”도아린은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아가씨가 날 휴게실에 가둔 것도 장난이 아니고 내 핸드폰을 빼앗은 것도 장난이 아니라고요? 그런데 내가 사실을 말하려고 하면 그게 장난이라고요?”뒤이어 차갑게 덧붙였다.“건후 씨, 참 멋대로네요.”배건후는 냉랭한 얼굴로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육하경이 침착하게 말했다.“사모님께 응급조치를 한 건 분명 아린 씨였어.”그러자 성대호가 다시 맞섰다.“구급차는 지유가 불렀잖아. 병원에 기록도 있어!”바로 이때 육하경의 핸드폰이 울리며 그들의 대화를 가로막았다.“네, 진 대표님. 저는 바로 병실 밖에 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전화를 끊은 육하경은 배건후를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난 진 대표님을 뵈러 들어가야 해. 같이 들어갈래?”진범준은 배건후와 성대호가 다시 병실을 찾은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하지만 그 놀라움은 도아린을 보자 더 커졌다.“이분은...?”“제 아내입니다.”배건후는 무심하게 말했다.“사모님의 사고 소식을 듣고 걱정돼서 함께 왔습니다.”도아린은 속으로 비웃었다.그는 도아린이 윤명희를 구했다는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이 모든 공이 배지유에게 돌아가길 원하고 있는 거겠지. 아니면 이미 사실을
“죄송해요. 제가 급한 마음에 팔찌를 한 상태로 응급처치했네요. 혹시 다치신 데 없을까요?”윤명희는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아니요.”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육하경과는 달리 성대호는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몰래 배지유한테 문자를 보냈다.[네가 사모님을 구한 거 맞아?]배지유가 답장 없는 것을 보면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배건후는 그만 주먹을 꽉 쥐었다.윤명희의 병실에 온 것이 이번이 두번째였다. 처음에는 동생과 함께, 두번째는 도아린과 함께 찾아왔다.아무리 그래도 모건 그룹의 대표인데 누가 윤명희를 구해줬는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떠돌면 사람들이 비웃을 것이 뻔했다.진범준은 쉰 살 가까이 되는 해남에서 유명한 사업가이자 피라미드 먹이사슬 중에서 가장 꼭대기에 서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그가 육하경한테 연락했다는 것만 봐도 배지유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 뻔했다.도아린이 아니었다면 나중에 진범준과 손잡으려면 하늘의 별 따기였을 것이다.윤명희는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내더니 도아린에게 조심스럽게 건넸다.“이게 드세요...”과일 맛나는 캔디였다.윤명희 목에 걸렸던 캔디와 똑같은 것이었다.지금은 시중에서 보기 드문 귤 모양의 캔디였고, 도아린은 어렴풋이 캔디 이름이 기억났다.어릴때 명절만 되면 엄마랑 같이 장 볼 때 늘 이 캔디를 한 웅큼 샀던 기억이 있었다.“감사합니다.”도아린은 포장을 벗겨 입에 넣자마자 셔서 눈을 찡그리고 말았다.“어릴 때 저희 엄마도 이 사탕을 자주 사주셨거든요.”윤명희는 멈칫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도아린은 육하경한테서 윤명희가 아이를 잃어버린 뒤로 우울증을 앓고 있어서 정신상태가 안 좋다는 사실이 떠올랐다.하지만 전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윤명희를 꽉 끌어안았다.“사모님께서는 좋은 분이셔서 꼭 따님분을 찾으실 거예요.”“네... 찾을 거예요.”윤형희는 울먹거리면서 도아린을 꽉 끌어안았다.그러다 너무 흥분해서인지 쓰러지고 말았다.진범준은 윤명희를 병실로 들여보내고는 뒤돌아 도아린에게 똑같은 말을 했다.
“그 말 내가 믿어봤자 진 대표님께서 너를 믿어줄 것 같아? 너희 오빠는 믿어줄 것 같냐고.”배지유는 아무 말 없이 이를 깨물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왜 또 도아린이야! 왜 나랑 죽고 못 살아서 안달인데?’도아린이 병원에 가지 않았다면 구급차만 불렀다는 사실을 알 사람이 없었다.배지유가 구급차를 부르지 않았다면 윤명희는 응급처치를 받지 못해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른다.‘왜 도아린은 한것도 없이 칭찬받아야 하는데? 왜 나는 좋은 일을 하면서 욕을 먹어야 하는데?’성대호는 배지유의 악독스러운 표정을 보지 못한 채 부드럽게 위로했다.“오빠 말 들어. 내일 진 대표님께 잘 설명해 드려. 그래도 네가 구급차를 불러드렸잖아. 사모님 은인이나 다름없는 거지. 나이도 어린 네가 먼저 사과를 해야지. 나중에 모건 그룹이 진씨 가문과 손잡으려면 어색한 관계로 남지 말아야지. 아린 씨가 두 집안을 이어주는데 너도 큰 역할을 했어.”배지유는 전화를 끊고 한참 망설여서야 1층으로 내려갔다.속으로 내키진 않았지만 성대호가 한 말이 일리있다고 생각했다.윤명희를 위해 구급차를 불러준 것도 사실이고, 배지유가 들어갔을 때 도아린이 휴게실에 있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도아린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가 윤명희를 살려준 사실도 몰랐고, 일부러 그 공을 빼앗으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다.그 카드를 진범준한테 돌려주면서 어쩌면 배건후와 손잡는 것을 한 번만 고려해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이렇게 되면 도아린이 윤명희의 생명 은인이라고 해도 자기가 모건 그룹의 귀인이 될수 있었다.배지유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윤명희의 병실로 향했다.문을 두드리려고 했을 때, 병실 안에서 한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서희랑 닮지 않았어요? 우리 세은이 맞죠?”윤명희는 진범준의 옷깃을 잡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진범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었다.조카가 고모를 많이 닮는다고 하는데 진세은은 어릴때 동생 진서희와 판박이와 다름없었다.최근 몇 년 동안 이목구비가 비슷
진범준은 배지유의 말뜻을 바로 알아차렸다.도아린을 위해 해명하는 것 같아 보여도 사실 도아린이 상식이 없다고 비웃고 있었다. 윤명희의 생명 은인은 자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저희 아내를 살려주셨기 때문에 이 카드를 가지셔도 됩니다.”배지유는 마음이 혹하긴 했지만 양심상 고개를 흔들었다.“아닙니다. 저희 오빠가 제가 새언니 공을 빼앗은 걸 알면 저를 욕할지도 몰라요.”윤명희가 나지막하게 물었다.“오빠가 새언니한테 잘해줘요?”“네. 새언니 어머님께서는 둘째를 낳는 도중에 돌아가셨고, 동생은 3살 되던 해 장애인이 되었고 10살 되던 해 건물에서 뛰어내리다 지금은 식물인간이 되어 병원에 누워계세요. 의료비는 저희 오빠가 계속 지원해 주고 있고요. 아저씨 디저트 가게도 오빠가 차려준 거예요.”배지유는 말하면서 계속 테이블 위에 있는 블랙 카드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성대호의 말이 맞았다. 잘못을 인정하면 공을 빼앗았다는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또 블랙 카드를 계속 가지고 있을 수도 있었다.배지유를 통해 도아린에게는 부모님도, 남동생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이로써 친딸일 확률이 절반 가까이 줄어든 것이다.진범준은 아내의 눈치를 보면서 배지유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배지유 씨, 이런 걸 알려줘서 고마워요. 블랙 카드는 저희 성의니까 받아주세요.”배지유는 말이 끝나기 바쁘게 바로 블랙 카드를 챙겼다.“감사합니다. 진 대표님, 내일 저희 새언니랑 쇼핑하러 가려고요. 평소에 별로 꾸미지 않거든요.”배지유가 병실을 떠나려고 할때, 진범준이 담담하게 말했다.“그 카드는 임시로 쓰는 카드에요. 해남으로 돌아가면 없애버릴 거니까 배지유 씨께서 원하시는 것이 있으면 얼마든지 사세요.”배지유는 멈칫하고 말았다.임시 카드를 선물하는 경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진씨 가문이 정말 통이 큰 줄 알았는데 이 정도로 야박할 줄 몰랐다.배지유는 얼른 명품백 사러 가고 싶었다.“감사합니다. 진 대표님, 사모님, 안녕히 주무세요.”배지유는 나가면서
육하경은 반응할 새도 없었다.피하는 건 불가능했고, 최대한 몸을 피해 보려고 했지만 결국 등에 맞고 말았다.목에서는 쇳내가 풍겨왔다.야구방망이가 또 한 번 날아오자, 육하경은 앞구르기로 공격을 피했다.상대방은 야구모자에 마스크까지 하고 살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그는 육하경의 손을 쳐다보더니 또 공격하려고 했다.육하경은 그래도 무술 실력이 있었기 때문에 두렵지는 않았다.다대일은 몰라도 일대일에는 자신이 있었다.육하경이 야구방망이를 빼앗고 발로 걷어차는 바람에 상대는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이 드레스를 빼앗으려고?”육하경이 슬금슬금 다가가면서 물었다.“누가 보냈어.”상대는 고통스럽게 배를 끌어안고 있었다.육하경은 다가가 그의 목덜미를 잡은 채 야구모자와 마스크를 벗겼다.상대는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이내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이때, 코를 자극하는 냄새와 함께 육하경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마이바흐 한 대가 길에서 달리고 있었다.가로등 때문에 차 안은 밝아졌다, 우두워졌다하고 있었다.배건후는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다 동작을 멈췄다.“어떻게 나왔어.”도아린은 그제야 배건후가 어떻게 휴게실에서 나왔는지 묻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걸어서요.”“똑바로 말해.”“말해봤자 믿어줄 거예요?”“일단 말해봐.”도아린은 피식 웃고 말았다.“아가씨가 저를 의무실로 유인하려고 했어요. 제가 싫다고 하니까 핸드폰을 빼앗았고, 갖고 싶으면 휴게실로 따라오라고 했어요. 제가 방심하고 있을 때 휴게실 문을 밖에서 잠가버렸고요. 문을 한참 두드렸는데 열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러다 어떤 아줌마가 바닥에 기절해 있는 것을 발견했고요.”배건후가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모르는 사람을 구해준 거야? 상대방이 심장병을 앓고 있거나 다른 병을 앓고 있었으면 그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다고. 윤 사모님이 목에 캔디가 걸렸기 다행이지. 응급조치에 실패했으면 책임을 져야 했을 수도 있다고.”‘말하지 말 걸 그랬네. 어차피
누군가는 사진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말했다.“도아린 곁에 있는 꽃미남이 사실 강재민이래.”과거, 두 사람이 함께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였다.그 말에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그러던 어느 날.도아린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신인 배우가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사진 속엔,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은 채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그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배건후의 정체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이번에도 역시 온갖 의심과 루머 그리고 비난이 따라붙었다.하지만 며칠 후, 연성 경찰청에서 공식 공지문이 게시되었다.바로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기 밀매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공지였다.공지문에는 고성만, 손보미, 자상훈 등이 인신매매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다 결국 장기 밀매까지 손을 뻗친 사실이 요약되어 있었고 그 수사에 협조한 익명의 자원자들에게 감사의 뜻도 함께 담겨 있었다.그 단 하나의 공지로, 여론은 완전히 반전됐다.정월 대보름, 해남엔 보기 드문 큰 눈이 내리고 있었다.도로는 차들로 가득 막혀 10분이 지나도 백 미터를 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천천히 가. 우린 여기서 내려서 좀 걸을게.”도아린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일북에게 말했다.그리고 배건후와 함께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까지 걷기로 했다.배건후는 우산을 펼쳐 도아린의 머리 위에 씌웠다.도아린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외투 주머니 속에 꼭 쥐어져 있었다.“춥지 않아?”그가 우산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안 추워요.”도아린은 입김을 내뿜으며 활짝 웃었다.발밑에서는 바삭거리는 눈이 소리를 냈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기억이 스쳐 갔다.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시절.어느 회사 대표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눈밭에서 몇 시간을 버텼던 그날, 발이 얼어 서 있지도 못하고 결국 쪼그려 앉았던 그 순간
그 여자는 바로 그날 수상 레스토랑에서 진경수에게 벨트를 빌렸던 그 여자였다.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짧은 티셔츠와 청 반바지 대신 격식을 갖춘 정장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얘, 내 여동생.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 제부.”진경수는 ‘제부’라는 단어에서 말끝을 흐렸다.여동생이 혼인신고까지 해놓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그건 진수혁도 마찬가지였다.“큰형님, 작은 형님.”배건후가 정중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고 도아린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오빠들, 호칭 바꿨으니까 용돈 좀 주셔야죠?”“혼인신고도 우리 몰래 해놓고, 무슨 용돈이야?”진경수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배건후를 노려보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도아린에게 내밀었다.“다시 내 동생 울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널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줄 거야. 명심해.”“고마워요, 둘째 오빠!”도아린은 싱긋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고 이번엔 진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진수혁 역시 말없이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봉투를 슬쩍 비춰보며 속으로 웃었다.‘안 봐도 이건 수표네.’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이건 제가 따로 보관할게요.”“감사합니다, 우리 아내님.”“...”진씨 형제들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쯧쯧, 벌써 아내한테 잡혀 사네...’하지만 상대가 도아린이라면, 뭐… 그럴 만했다.“근데, 여기 두 분은?”도아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진수혁은 변슬기를 소파에 앉히며 담담히 말했다.“예전 동료야.”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진경수가 옆에 있던 여자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기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부모님 말씀대로 아린이 일도 정리됐겠다... 이젠 내 차례지. 그래서 나도 결혼했어.”도아린과 배건후는 동시에 진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둘째 오빠를 좀 본받으세요. 뭐 하세요, 진짜.’“작은 올
“...”집사는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당연하다는 듯 도아린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고 도아린은 그런 그를 집사에게 소개했다.“이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서재랑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둘째 오빠 방만 빼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세요.”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자마자 곧장 외출에 나섰다.“앞에 있는 만둣가게, 진짜 맛있어요!”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도아린의 시선은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던 진수혁에게 향했다.그 맞은편에는 변슬기가 앉아 있었고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설득 중이었다.“여긴 패스트푸드점이에요, 카페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일하시는 건 좀...”“카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난 괜찮은데?”“그렇긴 해도 이렇게 계속 앉아 계시면 저희 가게 영업에 방해된다니까요!”그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변슬기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도 선생님! 대표님 좀 말려주세요!”그 말에 진수혁은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밥은 먹었어? 여기 만두 꽤 괜찮더라.”도아린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아 놓고선 정작 본인은 여기에 눌러앉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말할게.”도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변슬기와 함께 옆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그사이 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내 진수혁 앞에 내려놓았다.“제가 이겼어요.”“...”진수혁은 조용히 종이를 펼쳐보고는 이를 악물었다.“너 이거 반칙 아냐?”“우린 내기했잖아요. 졌으면 인정해야죠.”“유럽 연수 그 자리, 잊지 말고 제 이름으로 신청해 주세요.”진수혁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마침 도아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둘의 눈이 마주쳤고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이 분위기 뭐야... 완전 닭살 돋게 하네.’그 순간, 배건후는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형님도 제가 예전에
‘정말로 배고픈 거야? 아니면 날 원하는 거지?’도아린은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며 가위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끌려가 밥을 먹었다.배건후의 요리 실력은 한층 더 늘어 있었고 맛뿐만 아니라 음식의 모양새도 훨씬 좋아졌다.“이제 영양식은 안 드세요?” 도아린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고기도 안 먹고 기름진 것도 안 먹고 오래된 것도 안 먹고 부드러운 것도 안 드셨잖아요!”배건후는 매운 닭 요리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그때는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야. 그리고 몸매가 망가져서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도 됐고.”“그럼 이제는 몸매 망가지는 거 걱정 안 해요?”도아린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배건후는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 한 사람이 요리하면 다른 한 사람이 설거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설거지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그녀를 안아 위층으로 올라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쉽게 다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도아린은 그가 마음속 어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안고 몸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달랬다.“천천히 해도 돼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도아린의 위로는 곧 배건후에게 그대로 되돌아왔다.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그녀의 흰 목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아린, 힘 빼... 너무 긴장했어...”도아린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머릿속이 멍해졌고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를 본 배건후는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도아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마치 어젯밤 온몸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된 것처럼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특히 허리
“배 대표님! 모든 자산을 도 대표님께 넘기신 것은 이전에 하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셔서인가요? 손보미 씨가 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는데 손보미 씨를 꺼내줄 계획이 있으신가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기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챔피언십 선수들의 숙식 안전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기자들이 더 질문하려 하자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숙식 문제에 대한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제안서를 작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수한 의견을 채택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제공할 예정입니다.”도아린은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고 품위 있게 말했고 입가의 미소를 살짝 거두며 한층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제 개인적인 문제로 여러분의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건후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배건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도아린이 배건후에 대해 말하려 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마이크를 내밀었다.도아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배건후 씨는 여태까지 운영부의 팀장이었지만 오늘부터는 한경 그룹의 특별 자문입니다. 이후의 직책은 배건후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도아린의 시선은 배건후가 도아린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거냐고 묻던 기자를 향했다.“과학 연구자, 의학 전문가, 스포츠 선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그러자 그 기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갔다.다른 기자들도 더 이상 질문을 할 기세를 잃었고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고유리를 보며 말했다.“기자분들 고생 많으셨으니 저녁 식사 후 차량을 준비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고유리는 기자들을 데리고 나가며 각자에게 돈 봉투를 나눠 주었다.그들은 어떤 내용을 발표할 수 있고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