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권재민은 스미스로부터 비행기 탑승 준비를 마쳤으니 곧 그들이 있는 도시에 도착할 것이라는 문자를 받았다.권재민은 시간을 어림잡아 계산한 뒤, 강윤아와 은찬을 데리고 공항으로 마중 나갔다.공항, 강윤아는 갑자기 누군가 자신의 손을 잡는 느낌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녀와는 달리 권재민은 평범한 일처럼 무표정한 표정이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강윤아가 속삭였다.“제 아내 역할 하는 거 잊었어요?"권재민은 담담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그러자 강윤아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하••••••, 하지만 친밀한 스킨십은 하지 않기로 했잖아요.”그녀의 말에 권재민은 나지막이 웃었다.“설마 손도 친밀한 스킨십에 속해있는 거예요? 윤아 씨, 혹시 연애를 해본 적이 없나요?”“저••••••.”강윤아는 확실히 예전 약혼자 말고는 정말 연애를 한 경험이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잘 모르는 남자와 손을 잡는다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권재민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했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더욱 필사적으로 잡았다.“아파요.”권재민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입술을 오므리고는 얌전히 서서 그의 걸음에 발을 맞췄다.그때, 공항 안에서 한바탕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와, 저 외국인들 좀 봐. 카리스마 넘치네, 연예인 아니야?““그러니까요.”강윤아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스미스가 왔어요.”권재민이 말했다.스미스는 전형적인 서양 남자 외모로 얼굴이 조각처럼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그는 한 손으로는 아내를, 다른 한 손으로는 딸을 안고 있었다. 스미스의 딸은 금발에 파랗고 동그란 눈이 너무 예뻤다. 그의 아내 다이애나는 금빛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흩어진, 개성 있는 미인이었다. 권재민을 발견하자 스미스의 얼굴에는 흥분이 스쳤다. 그는 자신의 딸을 아내의 손에 쥐어주고는 다가와 그와 뜨거운 포옹을 했다.“권재민, 오랜만이야.”스미스의 한국어는 서툴렀지만, 외국인이 이렇게 말하기란 참
스미스가 식구를 데리고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권재민은 미리 5성급 호텔을 예약했다.그리고 그들 일행이 도착하자 그는 자연스레 그들을 호텔로 안내했다.“방은 예약해 뒀으니까 휴식 잘해. 시차 잘 적응하고.”“시차가 뭔 대수라고. 나도 매일이다시피 여기저기 출장 다니는 몸이라 이미 습관 됐어.”권재민의 걱정과 달리 스미스는 오히려 손을 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그래도 먼저 들어가서 짐 정리해야 하잖아. 얼른 가 봐.”계속되는 권재민의 말에 스미스는 부인 다이애나의 의견을 물은 다음 식구들을 데리고 호텔 방으로 향했다.그들의 편리를 위해 권재민은 저녁을 먹을 장소를 호텔 레스토랑으로 정했다. 그것도 모자라 레스토랑이 있는 2층 전체를 빌리기까지 했다.그의 통 큰 행동에 강윤아는 혀를 내둘렀지만 돈이 그녀 주머니에서 나가는 것도 아니기에 그저 즐기기만 하면 그만이었다.저녁 시간이 되자 강윤아와 은찬은 권재민과 함께 스미스네 식구를 맞이했다. 아래층으로 향하는 동안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 세 무리로 나뉘어졌다. 권재민과 스미스는 비즈니스에 관한 얘기를 주고받았고 강윤아는 다이애나와 일상적인 얘기를 주고받았고 은찬은 이제 안 지 얼마 되지 않는 엘리사와 어느새 친해졌는지 둘만의 세상에 빠져 저들끼리 놀고 있었다.하지만 그때, 아들이 곁에 있지 않는 게 습관이 되지 않아 두리번 거리다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강윤아는 엘리사가 자기 아들 얼굴에 입을 맞추는 장면을 보고 말았다.놀란 듯 잠시 멍하니 있는 그때, 다이애나도 아이들을 발견했는지 살짝 웃음을 터뜨리며 강윤아의 어깨를 두드렸다.“윤아 씨 아들 정말 귀엽네요. 우리 엘리사가 이렇게 남한테 먼저 다가가는 성격이 아닌데.”“은찬이 쟤는 예쁜 여자애들하고만 놀아요. 저것 봐요, 엘리사한테만은 미소를 잃지 않는 거.”강윤아는 피식 웃으며 마치 화라도 난 듯 푸념했다.두 사람이 입을 가리며 웃고 있던 그때, 마침 고개를 돌린 권재민과 스미스는 사이좋은 네 사람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재민
“그렇군요…….”다이애나는 조금 실망했지만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매니저를 일부러 난처하게 하지도 않았다.“괜찮아요. 이 음식들도 이미 엄청 푸짐해요.”하지만 그때, 강윤아가 다이애나를 힐끗 보더니 갑자기 툭 제안했다.“두부조림이라면 저희 어머니가 예전에 자주 해주던 거라 저도 할 줄 아는데…… 제가 모자란 실력이라도 한 번 대드려도 될까요?”방금 전 나눈 대화에서 다이애나에 대해 호감이 생긴 터라 강윤아는 그녀가 이대로 실망하는 걸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고민도 없이 나섰다.하지만 말을 내뱉고 바로 후회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솜씨는 당연히 호텔 주방장과 비교할 수 없을 거고 상대가 마음에 들어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실수를 한 건 아닌가라는 생각에 강윤아는 입을 꾹 다문 채로 긴장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다. 권재민은 그런 그녀를 힐끗 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런데 그때.“오, 재민, 놀라운데. 네 와이프가 음식도 할 줄 아나 봐?”스미스가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권재민을 툭툭 건드렸다.권재민도 그의 호들갑에 싱긋 미소지었지만 눈에는 여전히 불안함이 맴돌았다.“나도 저 용기에 감탄이 나오네. 그런데 본인이 할 수 있다고 하니 해보라고 해야지.”곧이어 다이애나도 깜짝 놀라며 강윤아를 바라봤다.“윤아 씨 음식도 할 줄 알아요? 그럼 저 기대하고 있을게요.”호텔 측 동의를 구한 강윤아는 곧바로 매니저를 따라 주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재료 손질을 거의 끝냈을 때 권재민이 안으로 들어왔다.강윤아의 능숙한 손놀림을 보자 그는 걱정을 조금 덜어냈지만 여전히 불신한 듯 물었다.“정말 할 수 있겠어요?”원래 자신이 없었던 강윤아는 권재민의 불신하는 눈빛을 보자 순간 그에게 자기 실력을 보여줘야겠다는 오기가 생겨났다.“제가 요리를 끝내면 알 거 아니에요.”“못 할 것 같으면 안 해도 돼요. 제가 전화로 다른 사람을 시키면 되니까.”“필요 없어요.”딱 잘라내듯 거절한 그녀는 더 이상 권재민의 말에 대꾸도
오후에 그들 일행은 계획대로 등산하기로 했지만 엘리사는 불만스러운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어린 여자애가 힘들기만 한 등산에 흥미를 느낄 리 없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엘리사, 기분 풀어. 은찬이 좀 봐봐, 얼마나 말 잘 듣는지. 너도 은찬이처럼 말 들으면 얼마나 좋아?”다이애나도 몸을 웅크리고 앉아 엘리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살살 달랬지만 앨리사는 여전히 입을 삐죽 내민 채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때 은찬이가 갑자기 엘리사 앞으로 다가와 자기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자신 있는 말투로 말했다.“앨리사, 무서워하지 마. 네가 힘들면 내가 너 업고 산에 오를게!”남자다운 그의 모습에 앨리사는 끝내 피식 웃으며 그제야 산에 오르는 것에 동의했다.곧이어 그들을 두 무리로 나뉘어져, 어른들이 앞장서고 은찬이와 앨리사가 뒤에서 손을 잡고 걸어가게 되었다. 두 아이가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보자 강윤아의 입가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해외에서 매일 일에 치여 살다 보니 많이 데리고 나다니지 못해 또래 애들과 어울리지 못할까 봐 걱정했는데 오늘 보니 내가 괜히 걱정했네.’자기만의 생각에 잠겨있던 강윤아는 미처 앞에 돌이 있다는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게다가 권재민이 앞으로 기우는 그녀를 부축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어버려 짧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습…….”이윽고 발목에 전해지는 통증에 저도 모르게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엄마, 괜찮아요? 어른이면서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요?”때마침 달려온 은찬은 곧바로 그녀에게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말투는 딱딱했지만 표정을 보면 그가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이에 강윤아는 고개를 저으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나 괜찮아.”“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발목도 다 부었는데.”권재민도 눈살을 찌푸리며 엄숙한 말투로 다그쳤다.옆에 있던 스미스 가족도 갑자기 벌어진 사고에 놀란 듯 다급히 말했다.“얼른 돌아가요. 윤아 씨가 이렇게 다쳤는데 등산은 더 이상 안 될 것
상황은 완전히 강윤아의 예상을 뛰어넘었다.권재민이 글쎄 여전히 “자는” 그녀를 보고 나서도 물러나기는커녕 그 자세 그대로 있는 게 아니겠는가?강윤아는 순간 미칠 것만 같았다. 심지어 1분이 1년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권재민이 당연히 자기의 반응을 보고 조용하게 잠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오히려 그녀와 끝까지 해보자는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한참을 기다린 강윤아는 심지어 눈을 떠서 상황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강한 승부욕이 그녀의 충동을 막았다.그 시각, 권재민은 눈을 가늘게 접은 채로 얌전히 누워있는 강윤아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심지어 그녀가 자는척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내가 뭐라도 할까 봐 그렇게 두렵나?’순간 드는 생각에 그의 기분은 순간 나빠졌다. 이윽고 눈살을 찌푸리더니 속으로 냉소했다.하지만 강윤아가 아무리 자는 척해도 그에게는 상대를 깨울 방법이 수도 없이 많았다!뜨거운 콧김이 얼굴을 덮쳐온 순간 강윤아는 위험이 점차 다가오고 있다는 걸 인지했다. 하지만 그녀의 뇌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부드럽고 말캉한 무언가가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너무 놀란 나머지 눈을 뜬 강윤아는 자기를 빤히 쳐다보는 권재민의 집요한 눈빛에 놀라 잠깐 넋을 잃었다. 하지만 그녀가 흐트러져 있는 틈에 권재민의 말캉한 혀가 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그녀의 호흡을 탐욕스럽게 빼앗았다.“읍…….”갑작스러운 키스를 받아들일 수 없어 강윤아는 손을 들어 권재민의 가슴을 마구 쳐댔다. ‘갑자기 왜 이렇게 됐지? 전에 분명 이러지 않기로 얘기했잖아…….’하지만 권재민은 몸부림치는 그녀를 무시한 채 손을 그녀의 등 뒤로 뻗더니 자기 쪽으로 바싹 끌어왔다. 순간 두 사람의 몸은 바싹 밀착되어 방 안에 이상한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그런데도 권재민은 만족하지 못했는지 손을 점점 그녀의 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 갑자기 느껴지는 낯선 감촉에 놀란 강윤아는 다급히 손을 뻗어 상대의 손을 눌렀다.그제야 권재민은 눈살을 찌푸리며 뒤로 살짝 물러나더니 기나
물속에서 떠다니며 물을 몇 모금 들이켠 엘리사는 기침을 해대더니 점점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는지 버둥댐을 멈추고 물을 따라 흘러 내려갔다.그때 그녀를 향해 힘껏 헤엄쳐 가던 강윤아는 급류 구간을 지나 겨우 평류 구간에 진입했고 가까이에 있는 엘리사를 보는 순간 큰 소리로 외쳤다.“엘리사, 손 이리 줘!”하지만 엘리사는 기침을 너무 해대 힘이 빠졌는지 그녀의 말을 듣지조차 못하고 본능대로 손발을 버둥대며 가라앉지 않도록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긴박한 상황에 강윤아는 할 수 없이 힘껏 헤엄쳐 빠른 속도로 엘리사 쪽으로 다가갔다. 어렵사리 아이의 손을 잡은 그녀는 엘리사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애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이에 그녀는 이를 악물고 엘리사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자기 자신이 물속으로 빠지는 건 고려하지도 않은 채 말이다.그렇게 그녀의 힘이 점차 빠져나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할 때쯤 팔을 누르고 있던 무게가 없어지더니 팔 하나가 그녀를 들어 수면 위로 떠올랐다.젖은 머리를 털고 확인해 보니 그녀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권재민이었다.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표정을 찡그린 채 그녀를 나무랐다.“왜 매사에 그렇게 충동적이에요? 이런 일은 저한테 맡기면 되지 혼자서 애쓸 필요 없었잖아요. 이러다가 엘리사도 못 구하고 당신도 목숨이 위험하면 어쩌려고 그랬어요?”정면으로 퍼붓는 욕지거리에 강윤아는 한참을 어리둥절해 있다가 멍하니 입을 열었다.“그래도…… 구해냈잖아요.”두 사람이 투닥거리며 말다툼하고 있을 때, 마침 구조대원이 달려와 세 사람을 강변으로 건져냈다.그 시각 강변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스미스 부부는 그들이 모두 무사히 올라온 걸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엘리사, 무사해서 다행이야.”말을 마친 다이애나는 엘리사를 내려놓더니 곧바로 강윤아 쪽으로 달려가 그녀를 꼭 안았다.“윤아 씨, 정말 고마워요. 윤아 씨 덕에 우리 엘리사가 살 수 있었어요.”한참 동안 말하던 다이애나는 끝내 참지 못하
가는 내내 강윤아는 침묵을 지켰다. 이에 백미러로 그녀를 관찰하던 권재민은 그녀가 여전히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을 기미를 보이자 먼저 입을 열었다.“어머니의 병세가…… 심각한가요?”갑자기 관심을 보이는 그의 모습에 강윤아는 잠깐 어리둥절했다. 전에는 자기한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고 냉담하기만 하던 그가 먼저 말을 병원 앞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전에는 심각했는데,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그때 옆에 있던 은찬이 강윤아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엄마, 저 외할머니 본 적 없는데. 저를 보시면 좋아하실까요?”그 말에 강윤아는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만지며 웃어 보였다.“당연하지. 은찬이가 이렇게 귀여운데 외할머니가 어떻게 좋아하지 않겠어?”조용하던 차 안에 드문드문 대화가 오가던 중, 어느새 병원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하지만 강윤아가 은찬을 데리고 내리며 감사 인사를 건네려던 찰나, 권재민도 같이 차에서 내리는 게 아니겠는가?이에 강윤아는 의아한 듯 그를 바라봤다.“뭐 하시는 거예요?”“저도 어머님 뵈러 가려고요.”“가서 뭐 하려고…….”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능청스럽게 말하는 권재민의 모습에 강윤아는 입을 삐죽거리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그 말에 권재민은 그녀를 힐끗 째려보더니 언짢은 기색이 역력한 말투로 쏘아붙였다.“왜요? 저는 가면 안 돼요?”“아니요.”강윤아는 얼른 손사래를 치며 부인했다.“재민 씨처럼 바쁜 분한테는 시간 낭비인 것 같아 그러죠.”“공교롭게도 오늘 저 시간 많아요.”권재민은 말하면서 먼저 병원으로 걸어갔다.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는 게 말문이 막혔지만 강윤아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세 사람이 엘리베이터 문 앞에 이르렀을 때, 강윤아는 권재민을 힐끗 쳐다보더니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목소리를 내리깔며 부탁했다.“혹시,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어요?”“뭐요?”강윤아가 자기한테 이런 부탁을 할 거라고 생각지 못했는지 권재민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강윤아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잠시 생
“지금 뭐 하는 거예요?”놀란 듯 권재민의 손목을 확 낚아챈 강윤아와 달리 당사자는 오히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속삭였다.“저 윤아 씨 남자친구잖아요. 그러니까 여자친구를 위해 이런 일을 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그…… 그렇지만…….”‘이건 그저 연기잖아요.’강윤아는 속마음을 내뱉고 싶었지만 서만옥이 보는 앞에서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됐어요. 저 얼른 의사 선생님 따라갔다 올게요.”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그녀를 보던 권재민은 그녀를 안심시키듯 한마디를 하고 이내 몸을 돌렸다.그런데 그때, 강윤아가 그를 뒤따르며 낮게 불렀다.“잠깐만요, 저도 같이 갈게요.”어머니의 앞에서 사이좋은 척 연기하는 건 괜찮았지만 돈까지 상대더러 부담하게 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판단이 앞섰다.하지만 권재민은 이내 그녀를 막아섰다.“괜찮아요. 윤아 씨는 병실에서 어머님 잘 돌봐요. 며칠 만에 보는 거잖아요.”거절하지 못하게 딱 잘라 말하고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강윤아는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맸다. 그리고 그가 시선에서 사라지자 다시 눈길을 거두고 어머니의 병상 옆에 앉았다.그런데 그때, 서만옥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농담을 내뱉었다.“왜? 한시도 눈을 못 떼겠어?”강윤아는 어머니가 자기를 오해했다는 걸 알아챘지만 어머니의 눈에 권재민은 그저 그녀의 남자친구일 뿐이기에 할 수 없이 낮은 소리로 부정했다.“아니에요…….”8천만 원 가까이 되는 병원비를 낼 때 권재민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돈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계산 명세서를 확인하더니 진지한 어투로 되물었다.“이참에 약값까지 모두 계산할게요. 그래도 되죠?”그 말에 병원 측 직원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의 카드를 받아들었다.모든 일을 끝낸 권재민은 강윤아의 어머니를 더 좋은 병실로 옮기는 게 어떻겠는지 얘기해 보기 위해 얼른 병실로 돌아왔다.하지만 병실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웬 남자 하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