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전 내내 업무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컴퓨터 모니터 위에 띄워진 수많은 숫자와 도표들은 그저 하얀 배경 위의 의미 없는 얼룩처럼 보일 뿐이었다.
유진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정도로 스마트폰 화면을 확인하며 벽에 걸린 시계를 살폈다. 시침과 분침이 이토록 느리게 움직이는 기계였던가?
평소라면 산더미처럼 쌓인 기획 서류를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겠지만, 오늘의 유진은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몇 시간 뒤에 만날 서연의 얼굴과 그녀의 청초한 미소로 가득 차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간지러움이 피어올라 자꾸만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사내 방송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자마자 유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평소 같으면 팀원들과 함께 당연하다는 듯 구내식당으로 향했겠지만, 오늘만큼은 미리 양해를 구한 상태였다.
중요한 개인 사정이 있어서 나가봐야 한다는 유진의 말에 팀원들은 무언가 눈치챈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유진은 그 시선조차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옷걸이에 걸어둔 단정한 코트를 챙겨 입고 회사를 나서는 그의 발걸음은 마치 봄바람을 탄 것처럼 한없이 가벼웠다.
서연이 메시지로 알려준 회사는 유진의 직장에서 도보로 고작 10분 거리에 있는 번화가의 대기업 빌딩이었다.
하늘 높이 솟은 거대한 유리 건물 앞에 도착하자 유진의 심장이 다시금 세차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을 맞아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직장인 인파 속에서, 유진은 서연을 찾기 위해 시선을 바삐 움직였다.
어제는 어두운 밤하늘과 흐릿한 가로등 불빛 아래서 만났지만, 이렇게 밝은 낮에 햇살을 받으며 마주할 그녀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유진은 기대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 회전문이 천천히 돌아가며 낯익은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정한 베이지색 블라우스에 깔끔한 슬랙스를 매치한 서연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머리를 자연스럽게 풀어 내린 그녀의 모습은 어제 버스에서 보았던 청초함에 커리어 우먼 특유의 세련된 분위기까지 더해져 있었다.
유진은 순간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저렇게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아름다운 여자가 정말 나와 점심을 먹기로 한 게 맞을까? 유진은 스스로에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 질문을 던지며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서연 씨."
유진이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부르자, 서연이 고개를 돌렸다. 유진을 발견한 그녀의 맑은 눈이 반짝이며 입가에 화사한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 하나만으로 유진은 주변의 수많은 인파가 전부 배경으로 흐려지고, 오직 서연만이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유진 씨! 일찍 오셨네요? 많이 기다렸어요?"
서연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유진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서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밝은 햇살 아래서 마주한 그녀의 눈동자는 어제보다 훨씬 더 투명하고 예뻤다.
"아니요, 저도 방금 도착했습니다. 낮에 보니까 훨씬 더 아름다우시네요."
유진의 솔직하고 진중한 칭찬에 서연의 하얀 뺨이 순식간에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 손으로 뺨을 살짝 감싸며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여심을 자극하는 다정하면서도 직진하는 남자의 태도에 서연의 심장도 세차게 뛰고 있었다.
"정말요? 고마워요. 유진 씨도 오늘 되게 멋있으세요. 정장이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서연의 부끄러운 칭찬에 이번에는 유진의 귀끝이 붉어졌다. 두 사람은 잠시 수줍은 설렘이 교차하는 침묵을 공유하다가, 서연이 먼저 싱그럽게 웃으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제가 오늘 맛있는 곳으로 모신다고 했죠? 이 근처 골목에 정말 아기자기하고 숨겨진 파스타 맛집이 있어요. 거기로 가요."
서연이 이끄는 대로 유진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
복잡한 직장가 골목을 지나 아담한 유럽풍 외관의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가게 안은 은은한 주황빛 조명과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흐르고 있어 번잡한 바깥 세상과 완전히 차단된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서연이 미리 예약을 해둔 덕에 두 사람은 햇살이 화사하게 들어오는 창가의 좋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메뉴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긴장감과 달콤한 기류가 감돌았다. 유진은 테이블 위에 놓인 물잔을 만지작거리며 서연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오늘 오전 업무는 힘들지 않았어요?"
유진이 다정하게 묻자, 서연은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유진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유진 씨랑 점심 먹을 생각 하니까 오전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어요. 부장님이 잔소리를 해도 그냥 웃음이 나더라고요. 유진 씨는요?"
서연의 솔직하고 귀여운 고백에 유진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만 그렇게 온종일 설렜던 게 아니었을까? 유진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며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계 바늘이 그렇게 느리게 가는 건 태어나서 처음 알았습니다. 빨리 점심시간이 되어서 서연 씨를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유진의 진중하고 깊은 눈빛이 서연의 시선과 얽혔다. 서연은 그의 뜨거운 시선에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부러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서로의 마음이 어제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묵직하게 와닿고 있었다.
이윽고 주문한 음식이 테이블 위로 깔끔하게 차려졌다. 정갈하게 담긴 파스타와 신선한 샐러드는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웠다. 유진은 자연스럽게 집게를 들어 서연의 앞접시에 음식을 먼저 덜어주었다. 매너가 몸에 밴 듯한 그의 다정한 행동에 서연은 감동한 듯한 눈빛을 보냈다.
"고마워요, 유진 씨. 정말 다정하시네요."
"서연 씨에게만 다정한 겁니다."
유진은 장난스럽지만 진심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나직하게 받아쳤다. 서연은 파스타를 돌돌 말아 한 입 먹더니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했다.
"음, 역시 맛있어! 유진 씨도 얼른 드셔보세요.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유진도 음식을 입에 넣었다. 서연의 말대로 훌륭한 맛이었지만, 사실 유진에게는 음식의 맛보다 눈앞에서 복스럽고 예쁘게 먹고 있는 서연의 모습이 훨씬 더 달콤하게 다가왔다. 입가에 소스가 살짝 묻은 줄도 모르고 행복하게 웃는 그녀가 한없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버스가 출발하며 거칠게 덜컹거렸다. 뒤쪽에서 승객들이 한꺼번에 밀려들면서 유진의 등으로 강한 압박이 가해졌다. 유진은 온몸에 힘을 주어 흔들림 없이 버티었지만, 밀려오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상체가 서연의 방향으로 깊숙이 기울어졌다.툭, 하는 소리와 함께 유진의 단단한 가슴과 서연의 부드러운 몸이 빈틈없이 밀착되었다. 서연의 두 손이 중심을 잡기 위해 유진의 가슴팍을 꼭 짚었다. 손바닥을 통해 서로의 체온과 거친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교환되며, 만원 버스 안의 소음은 어느새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읏..."서연이 작은 신음을 흘리며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너무나 가까운 거리였다.입술과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완벽하게 얽혔다. 서연의 맑은 눈동자가 춤추듯 흔들리고 있었고, 그녀의 하얀 뺨은 이미 터질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 유진 역시 이성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주말의 첫 키스, 어제 버스 안과 가로등 아래서 나누었던 뜨거웠던 숨결이 뇌리를 스치며 서연에 대한 통제 불능의 갈증이 일었다.유진은 짚고 있던 팔을 내려 서연의 가녀린 허리를 단단하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더 깊숙이 끌어당겼다."서연 씨."유진이 낮게 가라앉은 매력적인 중저음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네, 유진 씨.""처음 이 버스에서 서연 씨를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습니다. 매일 끔찍했던 이 퇴근길 버스가 서연 씨 덕분에 내 인생에서 가장 기다려지는 공간이 되었어요."
유진은 걸음을 멈추고 서연을 품에 꽉 안아주었다. 차가운 밤바람 속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체온은 그 무엇보다 포근하고 뜨거웠다."내일은 벌써 목요일이네요. 이번 주가 지나가는 게 이렇게 아쉬운 적은 내 평생 처음입니다."유진이 서연의 귀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서연은 유진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저도요, 유진 씨. 하지만 우리에게는 내일 퇴근길 버스가 또 있잖아요. 그리고 다가올 주말도 있고요. 그러니까 너무 아쉬워하지 말아요."서연은 유진의 품에서 천천히 물러나 그의 입술에 아주 가볍고 달콤하게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었다. 예고 없는 그녀의 귀여운 기습에 이번에는 유진이 단단히 얼어붙었다. 서연은 부끄러운 듯 환하게 웃으며 아파트 로비 안으로 도망치듯 걸어 들어갔다.유진은 입술에 남은 그녀의 촉촉한 온기를 음미하며, 멀어지는 서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슴속이 온통 윤서연이라는 존재로 가득 차올라 터질 것만 같았다.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유진은 스마트폰을 켰다. 서연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유진 씨, 오늘 맥주도 너무 맛있었고, 버스에서의 입맞춤은 평생 못 잊을 것 같아요. 내일 저녁 퇴근 버스에서는 내가 먼저 유진 씨 꽉 안아줄 테니까 기다려요! 조심히 들어가고 내 꿈 꿔요, 내 사랑. ❤”목요일 저녁의 도시는 주말을 하루 앞둔 사람들의 들뜬 온기와 일주일 동안 쌓인 피로가 묘하게 뒤섞여 교차하고 있었다.유진은 평소보다 훨씬 일찍 서류 정리를 마치고 코트를
유진은 서연의 뺨을 감싸 쥔 손가락에 아주 미세하게 힘을 주며, 그대로 그녀의 입술을 깊숙이 머금었다.어제 가로등 아래에서 나누었던 입맞춤이 애틋한 구원의 확인이었다면, 지금 이 빽빽한 만원 버스 한구석에서 나누는 입맞춤은 서로를 향한 거침없는 중독의 선언이었다.유진은 뒤에서 밀려드는 사람들의 압박을 굳건한 등으로 전부 받아내며, 오직 서연만을 위한 완벽하게 차단된 은밀한 영토를 유지했다. 그의 넓은 가슴팍 안에서 서연은 유진이 전해오는 뜨거운 열기에 온몸의 힘이 풀려나가는 것을 느꼈다.서연은 유진의 목덜미를 두 팔로 감싸 안으며 그에게 더욱 깊이 매달렸다. 단단하고 억센 그의 어깨가 손끝에 닿을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형언할 수 없는 벅찬 독점욕이 차올랐다.이 삭막하고 지루한 퇴근길 버스 안에서, 이토록 완벽하고 다정한 남자가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고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두 사람의 혀끝이 부드럽게 얽히고설키며 타액이 달콤하게 섞여 들었다.만원 버스라는 일상적인 공간이 주는 아찔한 스릴과, 서로를 향한 거침없는 직진이 더해져 로맨틱한 텐션은 이미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얼마나 깊게 서로를 탐닉했을까. 버스가 다음 정류장에 멈춰 서며 크게 덜컹거리는 바람에 두 사람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서연은 숨이 가쁜지 유진의 가슴에 이마를 댄 채 잔뜩 흐트러진 숨을 몰아쉬었다. 유진 역시 목줄기가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붉게 달아오른 서연의 뺨을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서연 씨, 내 마음이 멈추질 않아서 큰일이네요. 버스 안이라는 것도 잊어버릴 만큼 서연 씨한테 미쳐있는 것 같습니다."
저녁 6시 45분. 예의 그 주황빛 가로등이 밤의 도시를 은은하게 비추는 정류장에 유진이 도착했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겨울바람이 제법 매섭게 옷깃을 파고들었다. 유진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인파 속에서 걸어올 서연의 실루엣을 찾기 위해 시선을 고정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단정한 하프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종종걸음으로 걸어오는 서연이 보였다. 차가운 바람에 코끝과 뺨이 살짝 붉어져 있었지만, 유진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세상 그 어떤 조명보다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유진 씨!"서연이 다가와 유진의 앞에 멈춰 섰다. 유진은 아무런 말도 없이 주머니에서 따뜻한 손을 꺼내 서연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차가운 공기에 노출되어 있던 그녀의 얼굴에 유진의 큼직하고 뜨거운 손바닥이 닿자, 서연은 기분 좋은 온기에 눈을 살짝 감으며 그의 손길에 얼굴을 기대었다."많이 추웠죠? 오늘 바람이 제법 차네요."유진의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서연의 귓가에 부드럽게 감겨들었다. 서연은 눈을 뜨고 유진의 깊은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유진 씨 손이 이렇게 바로 녹여주는데 추울 리가 없잖아요. 오늘 하루 종일 유진 씨 보고 싶어서 혼났어요.""내가 더 그랬습니다. 1분이 한 시간 같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매일 서연 씨를 통해 배우고 있어요."유진은 서연의 손을 찾아 제 코트 주머니 속으로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비좁은 주머니 안에서 두 사람의 손가락이 단단하게 얽히며 깍지가 껴졌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깊이 중독되어 가고 있는지, 맞잡은 손끝의 미
유진이 서연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튕기며 미소 지었다.서연은 아쉬운 마음에 유진의 품에서 천천히 물러나 아파트 자동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유리문이 닫히고 로비 불빛 아래 서서 서연이 뒤를 돌아보자, 유진은 여전히 그 자리에 굳건하게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서연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유진 역시 다정한 미소와 함께 화답했다.엘리베이터를 타고 집 앞에 도착해 도어락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까지도 서연의 심장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가방을 거실 소파에 던져두고 침대에 대자로 엎어진 서연은 손에 쥔 스마트폰 화면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유진 씨, 지금 집으로 가고 있겠지? 날씨가 많이 추울 텐데 걱정되네.'그때 스마트폰이 기분 좋게 진동했다. 유진에게서 온 메시지였다."서연 씨, 나 지금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중입니다. 오늘 서연 씨 없는 만원 버스를 혼자 타려니 벌써부터 버스가 너무 넓고 춥게 느껴지네요. 오늘 밤은 서연 씨 꿈을 꿀 것 같습니다. 잘 자요, 내 수호천사."유진의 다정하고도 애틋한 멘트를 읽는 순간, 서연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발을 동동 굴렀다. 가슴속에서 차오르는 이 폭발적인 설렘과 행복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퇴근길의 끔찍했던 만원 버스가 이어준 이 특별한 인연은, 이제 서연의 온 삶을 지탱하는 가장 거대하고 찬란한 사랑의 기적으로 완벽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서연은 자판을 누르는 손가락 끝에 자신의 온 진심을 가득 담아 답장을 보냈다."유진 씨, 조심히 들어가요. 오늘 밤에는
번화가의 소란스러운 소음이 완전히 소거된 한적한 주택가 골목길에는 오직 두 사람의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만이 나직하게 울려 퍼졌다.서연은 유진의 커다란 코트를 어깨에 걸친 채 그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걸었다. 유진의 체취가 듬뿍 배어 있는 코트는 서연에게 단순한 방한용 의류가 아니었다.조금 전까지 그녀를 가로막고 있던 거칠고 불쾌한 상황으로부터 완벽하게 격리해 주는 가장 안전하고 거대한 방벽이었다.술기운 탓인지, 아니면 안도감에서 오는 긴장 풀림 때문인지 서연의 걸음걸이가 연신 조금씩 휘청였다. 그때마다 유진은 맞잡은 손에 묵직하게 힘을 주며 그녀의 중심을 단단히 잡아주었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는 뜨거운 온기가 서연의 손끝을 타고 심장 깊은 곳까지 빠르게 스며들었다."유진 씨, 옷 안 추워요? 날씨가 많이 쌀쌀한데."서연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유진은 얇은 셔츠와 슬랙스 차림이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가로등 조명을 받아 그의 단단한 턱선과 넓은 어깨가 밤공기 속에서 한층 더 다부지게 도드라져 보였다."서연 씨가 내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가슴이 더워져서 하나도 안 춥습니다. 오히려 아까는 너무 화가 나서 온몸에 열이 날 지경이었어요."유진의 솔직한 고백에 서연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아까 고깃집 앞에서 한 대리의 손목을 부수어 버릴 듯 꽉 움켜쥐던 유진의 서늘한 눈빛이 떠올랐다.평소 버스 안에서 보여주던 다정하고 매너 있는 강 대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야수처럼 사나운 독점욕을 뿜어내던 그 순간의 아우라가 가슴을 사정
유진은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붙잡고 몸을 조금 뒤로 물리려 했다. 하지만 뒤에 선 승객들이 꽉 막고 있어 더 이상 물러설 공간이 없었다. 결국 유진은 서연을 품에 안은 듯한 자세를 유지한 채, 그녀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미안해요. 뒤에서 너무 밀어서... 조금만 이러고 있을게요. 불편해도 참아줄 수 있어요?"유진의 낮고 매력적인 중저음 목소리가 서연의 귀가에 닿자, 서연은 어깨를 가볍게 떨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유진의 가슴에 이마를 살짝 기댄 채,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네... 괜찮아요. 유진 씨 품이 넓어서..
회사의 업무 시간 내내 유진의 시계 바늘은 평소보다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오직 퇴근 시간, 그리고 서연을 다시 만날 그 버스 정류장만이 유진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마침내 퇴근을 알리는 시계가 울렸고, 유진은 망설임 없이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정류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한없이 가벼웠다. 멀리서 익숙한 번호의 버스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정류장 가로등 아래, 어제와 같은 네이비색 코트를 입고 서 있는 서연의 모습이 유진의 시야에 들어왔다.서연 역시 다가오는 유진을 발견하고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버스 정류장 근처의 가로등 아래에 멈춰 서서 가방을 뒤적였다. 유진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주먹을 꽉 쥔 채 그녀에게 다가갔다. 구두 굽 소리가 밤공기를 가르고 그녀의 귀에 닿았을 때, 그녀가 고개를 돌려 유진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 놀라움과 함께 알 수 없는 기대감이 스쳤다.유진은 그녀의 앞에 서서 똑바로 눈을 맞추었다. 도망치지 않겠다는 듯이,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전하겠다는 듯이 단호하고 진중한 눈빛이었다."저기, 잠시만요."유진의 목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그녀는 가방을 쥐고 있던 손을 멈추고 유진
퇴근길의 만원 버스는 언제나 불쾌한 소음과 눅눅한 공기로 가득했다. 피로에 지친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드는 좁은 공간 속에서, 유진은 그저 창밖으로 흘러가는 회색빛 도시의 풍경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이었고, 오늘도 특별할 것 없는 하루의 마무리가 될 터였다.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 서고, 앞문이 열리며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축 처진 어깨로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던 유진의 시선이 한순간에 멎었다. 버스 계단을 밟고 올라온 그녀를 본 순간, 거짓말처럼 주변의 모든 소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