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04.
정적을 깨는 조용한 질문에 서류를 뒤적이려던 데미안의 손끝이 우뚝 멈췄다. 사내의 서늘한 흑안이 로젤리아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로 향했다. 숨이 턱 막힐 만큼 날카로운 시선이었으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의외로 덤덤하기 짝이 없었다.
“글쎄. 황제가 하라니 하는 거지. 그런 걸 왜 묻지?”
마치 오늘 저녁 메뉴가 무엇인지 묻는 말에 대답하듯 건조한 어조였다. 황제의 억지스러운 정략결혼 칙명조차 그에게는 귀찮은 일과 중 하나에 불과한 모양이었다.
로젤리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좋아, 이 결혼에 아무런 애착도, 기대도 없다는 뜻이지.’ 그녀는 침을 꼴깍 삼킨 뒤, 미리 준비해 두었던 승부수를 당돌하게 던졌다.
“그렇다면 공작님, 저와 ‘6개월’ 간의 계약 약혼을 맺는 건 어떻겠습니까?”
“…뭐?”
순간, 데미안의 미간이 좁혀지며 낮게 긁는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난생처음 듣는 기상천외한 소리라는 듯, 사내의 눈빛에 찰나의 당혹과 흥미가 스쳐 지나갔다. 로젤리아는 기세를 몰아 차분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앞으로 6개월 뒤 제국에 신성한 ‘성녀’가 나타날 예정입니다.”
“성녀?”
“네. 27년간 끊겼던 신의 축복이 다시 강림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성녀의 힘이라면… 공작가를 오랜 세월 옭아매 온 그 지독한 저주 또한 온전히 씻어낼 수 있을 겁니다.”
‘저주’라는 단어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순간, 집무실 내부의 공기가 순식간에 영하로 곤두박질치는 듯 살벌한 한기가 감돌았다. 데미안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가늘어졌다. 하지만 로젤리아는 물러서지 않고 말을 맺었다.
“저주가 풀리고 진정한 자유를 얻으신 뒤에, 공작님께 걸맞은 훌륭한 혼처를 찾으시는 편이 훨씬 이득이지 않겠습니까? 그때까지만 제가 완벽한 방패막이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사내의 숨결마저 얼어붙은 적막 속에서 로젤리아는 생존을 건 도박의 주사위를 던진 채 데미안의 입술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타닥거리는 장작 소리만이 맴도는 집무실 안, 데미안은 턱을 괸 채 로젤리아를 가만히 응시했다.
당돌하기 짝이 없는 제안이었다. 어린 영애가 온 제국이 두려워하는 공작 앞에서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성녀’와 ‘저주’를 입에 올리며 거래를 요구하다니.
어이가 없다 못해 헛웃음이 새어 나올 지경이었지만, 동시에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서린 확신은 묘하게 시선을 잡아끌었다.
“…좋아.”
마침내 데미안의 굳게 닫혔던 입술이 열렸다.
“6개월 후 그 성녀라는 자가 나타나 공작가의 저주를 푼다면, 그대를 아무런 대가 없이 온전히 보내주지. 막대한 위자료와 함께.”
로젤리아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번지려던 찰나, 데미안이 낮게 덧붙였다.
“하지만 성녀가 나타나지 않거나 거짓으로 드러난다면, 그때는 계약 약혼이 아니라 진짜 ‘결혼’이 될 거네. 에블린 백작가의 딸이 아니라, 온전한 펠릭스 공작부인으로서 평생, 이 북부에 뼈를 묻어야 한다는 뜻이지.”
서늘하게 꽂히는 경고에 등골이 오싹해졌지만, 로젤리아는 물러서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원작 속 성녀는 반드시 나타날 테니까.
“상관없습니다. 좋습니다, 받아들이지요.”
“제법 배짱이 두둑하군. 그럼, 세부 조건을 맞추어 보지. 공작가의 약혼녀로서 그대가 원하는 것은 뭐지?”
기다렸다는 듯 로젤리아가 반짝이는 눈으로 손가락을 하나씩 꼽기 시작했다.
“첫째, 굶지 않고 삼시 세끼 따뜻하고 맛있는 식사를 챙겨주실 것. 둘째, 북부의 추위를 막아줄 푹신하고 포근한 침대와 따뜻한 방을 배정해 주실 것. 셋째, 제가 필요할 때 적당한 자금을 빌려주실 것. 이상입니다!”
“…….”
비장한 표정으로 쏟아낸 요구치고는 지나치게 소박하고 현실적인 조건에 데미안의 입꼬리가 피식 비틀려 올라갔다. 어이가 없다는 듯 터져 나온 나지막한 실소였다.
“약혼녀를 굶기거나 얼어 죽게 할 만큼 공작가가 가난하진 않네. 저택에서 볕이 가장 잘 들고 따뜻한 본관 침실을 내줄 것이고 옷과 식사 또한 공작부인에 준하도록 신경 쓸 것이네. 돈 역시 빌려주는 게 아니라, 약혼녀로서 품위 유지비 명목으로 매달 넉넉히 지급될 테니 걱정하지 말게.”
공작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로젤리아의 입꼬리가 절로 귀에 걸렸다. ‘월급까지 주는 꿀알바라니!’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던 그녀를 향해 데미안이 물었다.
“더 원하는 건 없나?”
순간 로젤리아의 뺨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저… 계약 약혼이니까, 남녀 간의 의무라거나… 저를 건드리거나 하지는 않으실 거죠?”
데미안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이내 자기 귀를 의심했다는 듯 헛숨을 들이켠 그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당연한 말을. 어린 영애에게 손을 댈 만큼 파렴치한은 아니네만.”
“그렇다면 안심이네요.”
“하, 참나… 그럼, 이렇게 정리하도록 하지.”
데미안은 책상 서랍에서 백색 양피지를 꺼내 들었다. 깃펜을 집어 든 그의 단단한 손놀림에 따라 검은 잉크가 유려한 필체로 양피지 위를 빠르게 수놓아 갔다. 계약 조항들이 거침없이 적혀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로젤리아가 문득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공작님은… 원하시는 다른 조건이 없으신가요? 저한테만 너무 유리한 것 같아서요.”
사각거리던 펜촉이 멈췄다. 데미안은 펜을 내려놓고 양피지 끝에 자신의 인장을 꾹 찍어 누른 뒤, 나른하면서도 맹수처럼 깊은 눈빛으로 로젤리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나는 이거 하나면 충분하네.”
그가 서늘한 저음으로 계약서의 마지막 문장을 읊조렸다.
“약조된 6개월의 기한 내에 성녀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로젤리아 에블린은 로젤리아 펠릭스가 된다. 알겠지만, 공작가는 저주받은 가문으로 유명하니까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말도록 해.”
계약서가 로젤리아의 앞으로 스르륵 밀려왔다. 로젤리아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책상 한편에 놓인 붉은 인주함을 열었다. 그러고는 새하얗고 가녀린 오른손 엄지끝에 붉은 인주를 듬뿍 묻혔다. 그러고는 데미안의 서명 바로 아래에 거침없이 엄지손가락을 꾹 눌렀다.
05.데미안은 양피지를 집어 서랍에 보관한 뒤, 집무실 문가에 대기하고 있던 집사를 불렀다.“헨리.”“예, 공작님.”단정하게 백발을 넘긴 중년의 집사가 소리 없이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데미안은 턱짓으로 로젤리아를 가리키며 담담하면서도 엄숙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내 약혼자이시니 지내는 동안 한 톨의 불편함도 없어야 할 것이다. 손끝 야무지고 일 잘하는 전담 하녀를 붙여주고 미리 정돈해 둔 침실로 안내하도록.”“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지시를 마친 데미안이 시선을 돌려 로젤리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무심한 눈동자에 옅은 배려가 스쳐 지나갔다.“영애, 장시간 이동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방에 올라가 씻고 쉬도록 하게. 저녁 식사 때 다시 보지.”“감사합니다, 공작님.”로젤리아는 정중히 고개를 끄덕인 뒤, 앞장서는 집사 헨리의 뒤를 따랐다. 묵직한 카펫이 깔린 복도를 지나 도착한 곳은 웅장한 금박 장식이 새겨진 거대한 문 앞이었다. 집사가 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로젤리아는 저도 모르게 작게 탄성을 내지를 뻔했다.‘…세상에.’백작가에서 그녀가 쓰던 방은 명색이 영애의 처소라기엔 너무도 협소하고 볕조차 잘 들지 않는 음침한 별채 구석방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공작저의 침실은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광활하고 호화로웠다.폭신한 최고급 양탄자가 바닥 전체에 깔려 있었고 성인 서
04.정적을 깨는 조용한 질문에 서류를 뒤적이려던 데미안의 손끝이 우뚝 멈췄다. 사내의 서늘한 흑안이 로젤리아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로 향했다. 숨이 턱 막힐 만큼 날카로운 시선이었으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의외로 덤덤하기 짝이 없었다.“글쎄. 황제가 하라니 하는 거지. 그런 걸 왜 묻지?”마치 오늘 저녁 메뉴가 무엇인지 묻는 말에 대답하듯 건조한 어조였다. 황제의 억지스러운 정략결혼 칙명조차 그에게는 귀찮은 일과 중 하나에 불과한 모양이었다.로젤리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좋아, 이 결혼에 아무런 애착도, 기대도 없다는 뜻이지.’ 그녀는 침을 꼴깍 삼킨 뒤, 미리 준비해 두었던 승부수를 당돌하게 던졌다.“그렇다면 공작님, 저와 ‘6개월’ 간의 계약 약혼을 맺는 건 어떻겠습니까?”“…뭐?”순간, 데미안의 미간이 좁혀지며 낮게 긁는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난생처음 듣는 기상천외한 소리라는 듯, 사내의 눈빛에 찰나의 당혹과 흥미가 스쳐 지나갔다. 로젤리아는 기세를 몰아 차분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제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앞으로 6개월 뒤 제국에 신성한 ‘성녀’가 나타날 예정입니다.”“성녀?”“네. 27년간 끊겼던 신의 축복이 다시 강림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성녀의 힘이라면… 공작가를 오랜 세월 옭아매 온 그 지독한 저주 또한 온전히 씻어낼 수 있을 겁니다.”‘저주’라는 단어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순간, 집무실 내부의 공기가 순식간에 영하로 곤두박질치는 듯 살벌한 한기가 감돌았다. 데미안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가늘어졌다. 하지만 로젤리아는 물러서지 않고 말을 맺었다.“저주가 풀리고 진정한 자유를 얻으신 뒤에, 공작님께 걸맞은 훌륭한 혼처를 찾으시는 편이 훨씬 이득이지 않겠습니까? 그때까지만 제가 완벽한 방패막이가 되어 드리겠습니다.”사내의 숨결마저 얼어붙은 적막 속에서 로젤리아는 생존을 건 도박의 주사위를 던진 채 데미안의 입술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타닥거리는 장작 소리만이 맴도는 집무실 안, 데미안은
03.마침내 약조된 열흘째 되던 날 아침. 백작저의 정문 앞 흙먼지를 가르며 웅장한 마차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펠릭스 공작가의 상징인 흑색 늑대 문장이 선명하게 새겨진 마차였다. 칠흑처럼 매끄러운 흑마 네 필이 이끄는 마차는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질 만큼 거대했다.“아가씨, 짐입니다.”시녀 하나가 문가에 툭 던지듯 내려놓은 것은 한 손으로도 가볍게 들릴 만큼 초라하고 낡은 가죽 가방 하나뿐이었다. 귀족 영애가 시집을 가며 챙겨갈 패물이나 두터운 옷가지는커녕, 며칠 치 갈아입을 얇은 옷 몇 벌이 전부였다.로젤리아는 말없이 그 가방을 집어 들었다. 시녀도 호위 기사도 딸려 보내지 않는 백작가의 노골적인 방치였으나, 오히려 그녀에겐 거추장스러운 감시자가 없는 편이 홀가분했다. 그녀는 미련 한 점 남지 않은 백작저를 등지고 거대한 마차에 올랐다.덜컹거리는 마차는 쉼 없이 북쪽을 향해 달렸다. 창밖의 푸르른 녹음은 반나절 만에 앙상한 침엽수림과 거친 암벽으로 바뀌었고 어느덧 차창 틈새로 살을 에는 듯한 서늘한 한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제국의 최북단, 만년설이 녹지 않는 펠릭스 공작령에 도착한 것이었다.묵직한 마차 바퀴가 눈 덮인 자갈밭을 긁으며 멈춰 섰다. 마부의 부축을 받아 마차 문을 열고 발을 내딛는 순간, 로젤리아는 숨이 턱 끝까지 막히는 추위에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발목을 스치는 것은 얼음장 같은 북부의 칼바람이었다. 수도에서 입던 얇은 면 드레스와 굽 낮은 실크 구두는 영하를 밑도는 북부의 혹한을 막기엔 종잇장이나 다름없었다. 살갗이 얼어붙는 고통에 로젤리아는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잇새가 맞부딪치며 딱딱 소리를 냈다.그때, 저택의 거대한 철문 너머에서 규칙적이고 묵직한 군화 소리가 눈을 밟으며 다가왔다. 로젤리아는 시린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었다.눈앞에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그림자. 흑요석처럼 짙은 흑발에 날렵하게 뻗은 콧날, 그리고 심해처럼 깊고 서늘한 흑안을 지닌 사내였다. 떡 벌어진 어깨와 위압
02.그 물음에 시녀는 기가 찬다는 듯 한쪽 눈썹을 비스듬히 치켜올렸다. 그러고는 혀를 차듯 비아냥을 섞어 말했다.“그럼요. 제국에 공작가가 여럿 있는 것도 아니고. 펠릭스 공작님 한 분뿐이시죠. 하긴, 아가씨야 사교계 문턱 근처에도 못 가보셨으니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 턱이 없으시겠지만요. 듣자, 하니 저주를 받아서 몇 년째 저택 밖으로 발도 안 붙이신다더군요. 밤만 되면 이성을 잃고 피를 탐하는 끔찍한 괴물로 변한다는 소문도 파다하고요.”시녀는 짐짓 팔짱을 끼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명백한 조소였다.“그래도 아가씨, 사생아 신분으로 무려 제국 최고 권력가의 안주인 자리에 오르시는 거잖아요? 가문의 경사네요. 남들 눈에는 분에 넘치는 출세일 테니 미리 축하라도 드려야겠어요.”비수를 꽂듯 내뱉는 냉소적인 말에 로젤리아는 백작이 내뱉었던 ‘가문의 수치’라는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단번에 와닿았다.‘사생아로 태어난 게 내 탓인가? 처신 똑바로 못 한 백작 놈 탓이지.’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냉소를 삼키며, 로젤리아는 짐짓 무표정하게 받아넘겼다.“그래, 참으로 대단한 경사로구나. …아, 혹시 성녀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니?”“성녀님이요? 27년째 감감무소식인 걸 온 제국민이 다 아는데 새삼 성녀님은 왜요?”순간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성녀의 구원》 속 제국은 신전의 권능이 절대적인 세계였다. 건국 이래 제국에는 늘 성녀가 존재하며 세상을 정화해 왔지만, 데미안이 태어난 바로 그날 마지막 성녀가 숨을 거두었다. 그 후로 27년간 단 한 명의 성녀도 탄생하지 않았다.세간에는 ‘저주받은 괴물 후계자가 태어나 신의 축복이 끊겼다’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고 데미안이 스물여덟 살이 되는 해에 비로소 새로운 성녀가 강림한다. 원작의 여주인공이자, 외로운 공작을 구원할 유일한 빛.“…펠릭스 공작님의 생일이 언제지?”“글쎄요. 아직 반년쯤 남지 않았나요? 벌써 남편 생일을 챙기시는 건가요?”“뭐, 그렇다고 치자꾸나. 그만 나가보아
01.“아가씨, 일어나세요. 백작님께서 집무실로 부르셨습니다.”낯설고 서늘한 목소리에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떠졌다.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난생처음 보는 고풍스러운 레이스 캐노피와 코끝을 스치는 은은한 라벤더 향이었다. 그리고 침대 곁에는 딱딱하게 굳은 무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중세풍 하녀복 차림의 여인들이 서 있었다.‘…어라? 여기가 어디지?’분명 어젯밤, 야근을 마치고 좁은 원룸 침대에 쓰러져 로판 소설을 읽다 잠들었을 터였다. 생생한 악몽인가 싶어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사이, 하녀들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해 침대 밖으로 일으켜 세웠다. 그들은 장미수를 띄운 대야와 수건을 가져와 말 한마디 없이 세수시키기 시작했다.눈을 비빌 틈조차 없이 얼굴에 닿는 미온수와 물기를 훔쳐내는 거친 손길에 그녀는 영문도 모른 채 입을 헹구어 냈다. 몰래카메라나 연극이라기엔 쌀쌀맞은 시선과 주변 풍경이 지나치게 이질적이고 선명했다.“멍하니 계실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팔을 벌리세요.”세안이 끝나기 무섭게 하녀들은 그녀의 얇은 슬립 위로 코르셋을 얹고 사정없이 끈을 조여 맸다. 숨이 턱 막히는 압박감에 신음이 새어 나왔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품위 있는 귀족 영애용 드레스를 덧씌운 뒤 리본과 단추를 일사천리로 채워 내려갔다.마침내 옷 단장이 끝나자, 하녀들은 그녀를 화장대 거울 앞에 털썩 앉혔다. 빗으로 머릿결을 정돈하고 분을 톡톡 두드리는 사이,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똑똑히 마주한 순간 그녀는 숨을 멈추었다.허리선까지 부드럽게 물결치며 쏟아져 내리는 탐스러운 연분홍빛 머리카락. 그리고 당혹감으로 크게 뜨인 영롱한 에메랄드빛 녹안. 가녀린 목선과 화려한 이목구비를 지닌, 난생처음 보는 눈부신 미인이 거울 너머에서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누구야, 이 사람? 내 얼굴이 아니잖아?’떨리는 손발을 내려다보며 극심한 충격에 휩싸여 있는 사이, 하녀들은 인정사정없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어 방 밖으로 내몰았다.“백작님께서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서두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