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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Autor: ALL장르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11-04 01:54:27

03.

마침내 약조된 열흘째 되던 날 아침. 백작저의 정문 앞 흙먼지를 가르며 웅장한 마차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펠릭스 공작가의 상징인 흑색 늑대 문장이 선명하게 새겨진 마차였다. 칠흑처럼 매끄러운 흑마 네 필이 이끄는 마차는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질 만큼 거대했다.

“아가씨, 짐입니다.”

시녀 하나가 문가에 툭 던지듯 내려놓은 것은 한 손으로도 가볍게 들릴 만큼 초라하고 낡은 가죽 가방 하나뿐이었다. 귀족 영애가 시집을 가며 챙겨갈 패물이나 두터운 옷가지는커녕, 며칠 치 갈아입을 얇은 옷 몇 벌이 전부였다.

로젤리아는 말없이 그 가방을 집어 들었다. 시녀도 호위 기사도 딸려 보내지 않는 백작가의 노골적인 방치였으나, 오히려 그녀에겐 거추장스러운 감시자가 없는 편이 홀가분했다. 그녀는 미련 한 점 남지 않은 백작저를 등지고 거대한 마차에 올랐다.

덜컹거리는 마차는 쉼 없이 북쪽을 향해 달렸다. 창밖의 푸르른 녹음은 반나절 만에 앙상한 침엽수림과 거친 암벽으로 바뀌었고 어느덧 차창 틈새로 살을 에는 듯한 서늘한 한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제국의 최북단, 만년설이 녹지 않는 펠릭스 공작령에 도착한 것이었다.

묵직한 마차 바퀴가 눈 덮인 자갈밭을 긁으며 멈춰 섰다. 마부의 부축을 받아 마차 문을 열고 발을 내딛는 순간, 로젤리아는 숨이 턱 끝까지 막히는 추위에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발목을 스치는 것은 얼음장 같은 북부의 칼바람이었다. 수도에서 입던 얇은 면 드레스와 굽 낮은 실크 구두는 영하를 밑도는 북부의 혹한을 막기엔 종잇장이나 다름없었다. 살갗이 얼어붙는 고통에 로젤리아는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잇새가 맞부딪치며 딱딱 소리를 냈다.

그때, 저택의 거대한 철문 너머에서 규칙적이고 묵직한 군화 소리가 눈을 밟으며 다가왔다. 로젤리아는 시린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그림자. 흑요석처럼 짙은 흑발에 날렵하게 뻗은 콧날, 그리고 심해처럼 깊고 서늘한 흑안을 지닌 사내였다. 떡 벌어진 어깨와 위압적인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벌한 기운은 그가 왜 제국 제일의 검으로 불리는지 단숨에 이해하게 했다.

데미안 펠릭스 공작이었다. 데미안의 날카로운 시선이 로젤리아의 위아래를 훑어내렸다. 시퍼렇게 질린 창백한 입술, 뼈마디가 드러나도록 가볍게 쥔 낡은 손가방, 그리고 뒤따라 내리는 시종이나 시녀 하나 없이 휑한 마차의 내부까지. 순간, 사내의 짙은 눈썹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백작가는 영애를 북부로 보내며 이런 옷을 입혀 보낸 건가?”

얼음장을 깨부수는 듯 낮고 서늘한 저음이 허공을 갈랐다. 데미안의 턱선이 불쾌감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딸려 보낸 시녀는?”

“그, 그게…….”

추위로 굳어버린 혀 탓에 로젤리아는 제대로 된 문장을 잇지 못하고 웅얼거렸다. 파랗게 질려 바들바들 떠는 모습은 금방이라도 눈밭 위에 부러져 쓰러질 어린 나뭇가지 같았다. 데미안은 그런 로젤리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이내 낮게 혀를 차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가 손을 들어 올려 자기 어깨를 덮고 있던 묵직한 흑표범 털 망토의 버클을 거칠게 풀어냈다. 스르륵.

어깨 위로 묵직하고 거대한 온기가 쏟아져 내렸다. 데미안의 체온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두터운 모피 망토가 로젤리아의 왜소한 몸 전체를 빈틈없이 감싸 안았다.

차가운 눈바람 대신 코끝을 맴도는 것은 은은한 향과 옅은 쇳내, 그리고 사내의 뜨거운 온기였다. 순식간에 얼어붙었던 온몸에 피가 돌며 따스한 온도가 차올랐다. 로젤리아가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데미안은 미간을 찌푸린 채 턱짓으로 따스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저택 안쪽을 가리켰다.

“일단, 들어오지.”

돌아서서 앞장서는 사내의 단단한 등 뒤로 새하얀 입김이 길게 흩날렸다. 소문 속 잔혹한 괴물이라기엔 첫 온기는 지나치게 다정했다.

공작의 집무실 한편에 마련된 커다란 벽난로에서 장작이 붉은 불꽃을 튀기며 타오르고 있었다. 데미안의 안내를 받아 집무실 안 소파에 앉은 로젤리아는 하인이 내온 따뜻한 홍차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입가에 가져가 한 모금 넘기자, 얼어붙어 있던 목구멍과 속이 사르르 녹아내리며 비로소 온기가 돌았다.

그사이 데미안은 집무용 책상 상석에 털썩 앉아 겉옷 단추를 가볍게 풀어내고 있었다. 차를 마시며 겨우 진정한 로젤리아는 문득 자신이 제대로 된 통성명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허울뿐인 사생아에 팔려 온 신세라지만, 명색이 상대는 제국 최고의 권력자이자 공작가의 가주였다.

로젤리아는 조심스럽게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얇은 드레스 자락을 양손으로 살짝 쥐어 잡은 채 허리를 숙였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에블린 가문의 로젤리아라고 합니다.”

전생에 로맨스 판타지 소설들을 읽으며 대충 눈대중으로 익혔던 귀족 영애들의 인사 예법을 떠올려 흉내 낸 동작이었다. ‘이게 맞나? 혹시 너무 어설프거나 우스꽝스러워 보이면 어쩌지?’ 속으로 조마조마한 긴장감이 스쳤지만, 데미안은 별다른 지적도 없이 그저 무심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형식적인 예절 따위엔 애초에 티끌만 한 관심도 없다는 태도였다. 로젤리아는 다시 소파에 앉으며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부터가 진짜 본론이었다. 이 거칠고 위험한 사내의 입에서 무슨 말이 떨어질지 몰라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그녀는 최대한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데미안을 똑바로 응시했다.

“…공작님께서는 이번 혼담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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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일 밤 침실에 다른 남자가 온다.   02.

    02.그 물음에 시녀는 기가 찬다는 듯 한쪽 눈썹을 비스듬히 치켜올렸다. 그러고는 혀를 차듯 비아냥을 섞어 말했다.“그럼요. 제국에 공작가가 여럿 있는 것도 아니고. 펠릭스 공작님 한 분뿐이시죠. 하긴, 아가씨야 사교계 문턱 근처에도 못 가보셨으니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 턱이 없으시겠지만요. 듣자, 하니 저주를 받아서 몇 년째 저택 밖으로 발도 안 붙이신다더군요. 밤만 되면 이성을 잃고 피를 탐하는 끔찍한 괴물로 변한다는 소문도 파다하고요.”시녀는 짐짓 팔짱을 끼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명백한 조소였다.“그래도 아가씨, 사생아 신분으로 무려 제국 최고 권력가의 안주인 자리에 오르시는 거잖아요? 가문의 경사네요. 남들 눈에는 분에 넘치는 출세일 테니 미리 축하라도 드려야겠어요.”비수를 꽂듯 내뱉는 냉소적인 말에 로젤리아는 백작이 내뱉었던 ‘가문의 수치’라는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단번에 와닿았다.‘사생아로 태어난 게 내 탓인가? 처신 똑바로 못 한 백작 놈 탓이지.’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냉소를 삼키며, 로젤리아는 짐짓 무표정하게 받아넘겼다.“그래, 참으로 대단한 경사로구나. …아, 혹시 성녀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니?”“성녀님이요? 27년째 감감무소식인 걸 온 제국민이 다 아는데 새삼 성녀님은 왜요?”순간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성녀의 구원》 속 제국은 신전의 권능이 절대적인 세계였다. 건국 이래 제국에는 늘 성녀가 존재하며 세상을 정화해 왔지만, 데미안이 태어난 바로 그날 마지막 성녀가 숨을 거두었다. 그 후로 27년간 단 한 명의 성녀도 탄생하지 않았다.세간에는 ‘저주받은 괴물 후계자가 태어나 신의 축복이 끊겼다’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고 데미안이 스물여덟 살이 되는 해에 비로소 새로운 성녀가 강림한다. 원작의 여주인공이자, 외로운 공작을 구원할 유일한 빛.“…펠릭스 공작님의 생일이 언제지?”“글쎄요. 아직 반년쯤 남지 않았나요? 벌써 남편 생일을 챙기시는 건가요?”“뭐, 그렇다고 치자꾸나. 그만 나가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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