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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Autor: ALL장르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11-04 01:54:13

02.

그 물음에 시녀는 기가 찬다는 듯 한쪽 눈썹을 비스듬히 치켜올렸다. 그러고는 혀를 차듯 비아냥을 섞어 말했다.

“그럼요. 제국에 공작가가 여럿 있는 것도 아니고. 펠릭스 공작님 한 분뿐이시죠. 하긴, 아가씨야 사교계 문턱 근처에도 못 가보셨으니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 턱이 없으시겠지만요. 듣자, 하니 저주를 받아서 몇 년째 저택 밖으로 발도 안 붙이신다더군요. 밤만 되면 이성을 잃고 피를 탐하는 끔찍한 괴물로 변한다는 소문도 파다하고요.”

시녀는 짐짓 팔짱을 끼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명백한 조소였다.

“그래도 아가씨, 사생아 신분으로 무려 제국 최고 권력가의 안주인 자리에 오르시는 거잖아요? 가문의 경사네요. 남들 눈에는 분에 넘치는 출세일 테니 미리 축하라도 드려야겠어요.”

비수를 꽂듯 내뱉는 냉소적인 말에 로젤리아는 백작이 내뱉었던 ‘가문의 수치’라는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단번에 와닿았다.

‘사생아로 태어난 게 내 탓인가? 처신 똑바로 못 한 백작 놈 탓이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냉소를 삼키며, 로젤리아는 짐짓 무표정하게 받아넘겼다.

“그래, 참으로 대단한 경사로구나. …아, 혹시 성녀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니?”

“성녀님이요? 27년째 감감무소식인 걸 온 제국민이 다 아는데 새삼 성녀님은 왜요?”

순간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성녀의 구원》 속 제국은 신전의 권능이 절대적인 세계였다. 건국 이래 제국에는 늘 성녀가 존재하며 세상을 정화해 왔지만, 데미안이 태어난 바로 그날 마지막 성녀가 숨을 거두었다. 그 후로 27년간 단 한 명의 성녀도 탄생하지 않았다.

세간에는 ‘저주받은 괴물 후계자가 태어나 신의 축복이 끊겼다’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고 데미안이 스물여덟 살이 되는 해에 비로소 새로운 성녀가 강림한다. 원작의 여주인공이자, 외로운 공작을 구원할 유일한 빛.

“…펠릭스 공작님의 생일이 언제지?”

“글쎄요. 아직 반년쯤 남지 않았나요? 벌써 남편 생일을 챙기시는 건가요?”

“뭐, 그렇다고 치자꾸나. 그만 나가보아라.”

시녀를 내보내고 방 안에 홀로 남겨지자마자, 로젤리아는 서둘러 책상 앞에 가 앉았다.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소설의 설정과 타임라인을 정리해야 했다. 로젤리아는 새하얀 양피지 위에 기억나는 원작 소설의 주요 사건과 설정을 하나씩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깃펜 펜촉은 손에 설익고 어색했지만, 종이 위를 사각사각 긁어내리는 소리만큼은 혼란스럽던 그녀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등장인물

남주 : 데미안 펠릭스 공작

특징 : 피를 보면 이성 날아가고 폭주함 (괴물 소문)

대처 : 주기적으로 최전방 마수 토벌 나가서 폭주 해소

치료법 : '성녀'의 신성력 정화뿐

여주 : 성녀 비올렛 에반스

등장 시점 : 데미안 28세 생일 (★앞으로 약 6개월 남음!★)

결말 : 성녀 강림 → 데미안 저주 해제 & 구원 → 둘이 찐사랑 해피엔딩

나 : 로젤리아

신분 : 백작가의 구박받는 사생아

비중 : 원작에 이름 한 줄도 안 나오는 엑스트라 중의 엑스트라

로젤리아는 펜촉을 굴리며 턱을 괴었다. ‘앞으로 약 6개월’이라는 글자에 굵게 동그라미를 쳤다. 머리가 빠르게 계산을 굴리기 시작했다. 냉정하게 따져보자.

백작가에 남아 있어 봤자 돌아올 것은 뻔했다. ‘사생아’라는 낙인, 아버지라는 작자의 차가운 멸시와 학대, 그리고 언제 다른 늙은 귀족에게 정략결혼으로 팔려 갈지 모른다는 불안감.

반면 공작가는 어떤가? 세간에는 ‘피를 탐하는 괴물의 소굴’이라 불리지만, 어차피 낯설고 두렵기는 백작저나 공작저나 도긴개긴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여기서 시녀에게까지 무시당하며 말라 죽어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로젤리아는 양피지 아래쪽에 굵은 글씨로 다음 계획을 적어 내려갔다.

생존 플랜

공작저 입성 & 데미안과 '비밀 계약' 체결

- [내 몫] 6개월 동안 완벽한 가짜 약혼자 역할 (사교계 방패막이)

- [공작 몫] 신변 안전 보장 + 생활비 지원 + 터치 절대 금지

- ★핵심 조항★ : 성녀 등장 당일, 군말 없이 즉시 파혼/이혼해 줄 것!

6개월 동안 꿀 빨며 벼락부자 되기 (비자금 확보)

- 원작 치트키 풀가동하기

* 북부 폐광 (다이아몬드 광산 터짐)

* 남부 향신료 무역 대박 건 선점

* 황실 채권 폭등 시기 노리기

- 6개월간 공작 돈 + 원작 지식으로 막대한 자산 챙기기

D-Day (성녀 등장)

- 성녀 나타나면 쿨하게 공작 넘겨주고 퇴장

- 모아둔 돈 들고 따뜻한 남부 영지로 은퇴 라이프 직행!

- 배 따뜻하고 등 따실 때 현실로 돌아갈 방법 천천히 찾기

※ 당면 과제 : 공작저 도착하자마자 데미안 공작부터 확실하게 구워삶을 것!!

로젤리아는 양피지 가득 빽빽하게 적힌 메모를 찬찬히 훑어내렸다. 어지럽게 얽힌 화살표와 굵직한 밑줄들을 가만히 응시하자, 짙은 안개처럼 흐릿했던 앞날의 윤곽이 점차 또렷하게 잡히기 시작했다.

‘원작 속 데미안 공작은 말수가 적고 냉혹할지언정 이유 없이 약자를 핍박하는 파렴치한은 아니었어.’

비록 정략과 소문으로 엮인 가짜 약혼자일지라도 명색이 공작가의 안주인으로 데려가는 마당에 다짜고짜 굶겨 죽이거나 내쫓기야 하겠는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그녀는 긴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양피지를 다시 읽어 숙지하고 향초에 가져다 댔다.

양피지에 불이 붙자, 난롯가에 던져 양피지가 전부 재가 되는 걸 바라보았다. 그 뒤로 백작저에서의 열흘은 숨 막히는 침묵과 눈칫밥의 연속이었다. 백작은 로젤리아를 마주칠 때마다 투명 인간을 보듯 차갑게 시선을 돌렸고 고용인들은 곧 괴물 공작의 제물이 될 사생아라며 뒤에서 수군거리기 바빴다.

그 누구도 그녀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고 로젤리아 역시 굳이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 애쓰지 않은 채 조용히 숨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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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일 밤 침실에 다른 남자가 온다.   01.

    01.“아가씨, 일어나세요. 백작님께서 집무실로 부르셨습니다.”낯설고 서늘한 목소리에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떠졌다.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난생처음 보는 고풍스러운 레이스 캐노피와 코끝을 스치는 은은한 라벤더 향이었다. 그리고 침대 곁에는 딱딱하게 굳은 무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중세풍 하녀복 차림의 여인들이 서 있었다.‘…어라? 여기가 어디지?’분명 어젯밤, 야근을 마치고 좁은 원룸 침대에 쓰러져 로판 소설을 읽다 잠들었을 터였다. 생생한 악몽인가 싶어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사이, 하녀들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해 침대 밖으로 일으켜 세웠다. 그들은 장미수를 띄운 대야와 수건을 가져와 말 한마디 없이 세수시키기 시작했다.눈을 비빌 틈조차 없이 얼굴에 닿는 미온수와 물기를 훔쳐내는 거친 손길에 그녀는 영문도 모른 채 입을 헹구어 냈다. 몰래카메라나 연극이라기엔 쌀쌀맞은 시선과 주변 풍경이 지나치게 이질적이고 선명했다.“멍하니 계실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팔을 벌리세요.”세안이 끝나기 무섭게 하녀들은 그녀의 얇은 슬립 위로 코르셋을 얹고 사정없이 끈을 조여 맸다. 숨이 턱 막히는 압박감에 신음이 새어 나왔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품위 있는 귀족 영애용 드레스를 덧씌운 뒤 리본과 단추를 일사천리로 채워 내려갔다.마침내 옷 단장이 끝나자, 하녀들은 그녀를 화장대 거울 앞에 털썩 앉혔다. 빗으로 머릿결을 정돈하고 분을 톡톡 두드리는 사이,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똑똑히 마주한 순간 그녀는 숨을 멈추었다.허리선까지 부드럽게 물결치며 쏟아져 내리는 탐스러운 연분홍빛 머리카락. 그리고 당혹감으로 크게 뜨인 영롱한 에메랄드빛 녹안. 가녀린 목선과 화려한 이목구비를 지닌, 난생처음 보는 눈부신 미인이 거울 너머에서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누구야, 이 사람? 내 얼굴이 아니잖아?’떨리는 손발을 내려다보며 극심한 충격에 휩싸여 있는 사이, 하녀들은 인정사정없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어 방 밖으로 내몰았다.“백작님께서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서두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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