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밤 침실에 다른 남자가 온다.

매일 밤 침실에 다른 남자가 온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5
By:  ALL장르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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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백작가의 멸시받는 사생아, '로젤리아'에 빙의했다. 빙의하자마자 공작가와의 정략결혼이 성사 되었다. 어차피 6개월 뒤면 공작의 저주를 풀어줄 진짜 성녀(원작 여주)가 나타날 터. 로젤리아는 공작에게 당돌한 제안을 건넨다. 계약은 성사되었고 며칠 후 침실 문이 열리고 공작이 완전히 딴사람처럼 요염하게 웃으며 다가오는데……! 무뚝뚝한 절제미의 공작, 능글맞고 퇴폐적인 남자, 순진하게 매달리는 짐승 연하남까지! 하나의 몸에 깃든 세 명의 남자와 벌이는 아찔하고 위험한 계약 동거. 저기요, 공작님들… 저 6개월 뒤에 나가야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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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01.

01.

“아가씨, 일어나세요. 백작님께서 집무실로 부르셨습니다.”

낯설고 서늘한 목소리에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떠졌다.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난생처음 보는 고풍스러운 레이스 캐노피와 코끝을 스치는 은은한 라벤더 향이었다. 그리고 침대 곁에는 딱딱하게 굳은 무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중세풍 하녀복 차림의 여인들이 서 있었다.

‘…어라? 여기가 어디지?’

분명 어젯밤, 야근을 마치고 좁은 원룸 침대에 쓰러져 로판 소설을 읽다 잠들었을 터였다. 생생한 악몽인가 싶어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사이, 하녀들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해 침대 밖으로 일으켜 세웠다. 그들은 장미수를 띄운 대야와 수건을 가져와 말 한마디 없이 세수시키기 시작했다.

눈을 비빌 틈조차 없이 얼굴에 닿는 미온수와 물기를 훔쳐내는 거친 손길에 그녀는 영문도 모른 채 입을 헹구어 냈다. 몰래카메라나 연극이라기엔 쌀쌀맞은 시선과 주변 풍경이 지나치게 이질적이고 선명했다.

“멍하니 계실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팔을 벌리세요.”

세안이 끝나기 무섭게 하녀들은 그녀의 얇은 슬립 위로 코르셋을 얹고 사정없이 끈을 조여 맸다. 숨이 턱 막히는 압박감에 신음이 새어 나왔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품위 있는 귀족 영애용 드레스를 덧씌운 뒤 리본과 단추를 일사천리로 채워 내려갔다.

마침내 옷 단장이 끝나자, 하녀들은 그녀를 화장대 거울 앞에 털썩 앉혔다. 빗으로 머릿결을 정돈하고 분을 톡톡 두드리는 사이,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똑똑히 마주한 순간 그녀는 숨을 멈추었다.

허리선까지 부드럽게 물결치며 쏟아져 내리는 탐스러운 연분홍빛 머리카락. 그리고 당혹감으로 크게 뜨인 영롱한 에메랄드빛 녹안. 가녀린 목선과 화려한 이목구비를 지닌, 난생처음 보는 눈부신 미인이 거울 너머에서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누구야, 이 사람? 내 얼굴이 아니잖아?’

떨리는 손발을 내려다보며 극심한 충격에 휩싸여 있는 사이, 하녀들은 인정사정없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어 방 밖으로 내몰았다.

“백작님께서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서두르세요.”

백작이라니.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길게 뻗은 대리석 복도를 지나 도착한 곳은 육중한 문 앞이었다. 똑똑.

“백작님, 아가씨를 모셔 왔습니다.”

“들어오너라.”

문이 열리자, 책상 너머에서 차가운 인상의 중년 남성이 서류를 넘기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단 한 톨의 온기나 애정조차 찾아볼 수 없는 뼛속까지 시린 시선이었다. 그는 찻잔 옆에 놓인 황금빛 황실 인장이 찍힌 서한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로젤리아.”

‘로젤리아…? 그게 이 몸의 이름인가?’

하지만 낯선 이름 하나만으로는 도무지 이곳이 어디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혼란에 빠져 마른침을 삼키던 찰나, 백작의 입에서 청천벽력 같은 말이 툭 떨어졌다.

“펠릭스 공작과의 혼담이 들어왔다. 황실의 명이니 군말 없이 따르도록 해라.”

‘…펠릭스 공작?!’

숨이 멎을 듯한 충격에 굳어버린 그녀를 향해 백작은 한 치의 자비도 없이 냉정하게 쐐기를 박았다.

“열흘 뒤에 공작저에서 마차가 올 것이다. 가문의 수치인 네가 감히 공작부인 자리에 오르게 되었으니, 나가서 백작가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도록 처신 똑바로 해.”

‘갑자기 결혼이라, 이게 무슨…….’

로젤리아가 대답할 틈조차 주지 않은 채, 백작은 이미 책상 위의 서류로 시선을 떨군 뒤였다. 더 이상 볼일 없으니 당장 눈앞에서 꺼지라는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쫓겨나듯 집무실을 빠져나온 그녀는 넋이 나간 채 침실로 돌아왔다. 문이 닫히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침대 끝에 털썩 주저앉았다.

‘침착하자. 일단 상황 파악부터 해야 해…….’

머릿속을 샅샅이 헤집어 보아도 몸의 원래 기억은 티끌만큼도 잡히지 않았다. 지금 그녀가 쥐고 있는 정보라곤 오직 두 가지뿐이었다. 이 몸의 이름이 ‘로젤리아’라는 것, 그리고 조금 전 싸늘하게 쏘아보며 멸시를 쏟아내던 중년 남자가 그녀의 아버지인 백작이라는 사실.

하지만 단 하나, 귓가를 스친 이름만큼은 낯설지 않았다. ‘펠릭스 공작.’ 잠들기 전 읽었던 로판 소설, 《성녀의 구원》 속 남자 주인공의 이름이었다.

만약 이곳이 정말 그 소설 속 세계라면, ‘로젤리아’는 원작에 이름 한 줄조차 등장하지 않는 무명의 엑스트라였다.

‘설마 진짜 책 속으로 빙의한 건가? 그런데 왜 펠릭스 공작의 혼담 상대가 로젤리아지? 아직 원작이 시작되기 전인 건가……?’

불확실한 추측만 굴려대서는 아무런 답도 얻을 수 없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건 확인 가능한 구체적인 정보였다.

그러나 이 저택의 구조는커녕 고용인들의 이름조차 알 리 만무했다. 로젤리아는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굳게 닫힌 방문을 향해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밖에… 누구 있니?”

잠시 후, 둔탁한 달칵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조금 전 거친 손길로 내게 옷을 입혀주었던 시녀 중 하나였다. 문턱을 넘어서는 그녀의 얼굴에는 숨길 생각조차 없는 귀찮음과 은근한 불만이 역력했다.

‘가문의 수치’라 말하던 백작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로젤리아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사용인조차 이토록 대놓고 멸시하는 걸까.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형식적인 존대 속에 묻어나는 싸늘함에 목구멍이 바짝 말라붙었다. 로젤리아는 기억을 잃은 티를 내지 않으려 마른침을 삼키며, 최대한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너도 전해 들었겠지만, 혼담 이야기가 나와서. 펠릭스 공작님에 대해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단다.”

혹시 평소의 로젤리아와 어투가 다르진 않을까 조마조마했지만, 시녀는 별다른 의심조차 하지 않은 채 삐딱한 태도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뭘 묻고 싶으신데요?”

“그 펠릭스 공작님이… 내가 아는 데미안 펠릭스 공작님이 맞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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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아가씨, 일어나세요. 백작님께서 집무실로 부르셨습니다.”낯설고 서늘한 목소리에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떠졌다.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난생처음 보는 고풍스러운 레이스 캐노피와 코끝을 스치는 은은한 라벤더 향이었다. 그리고 침대 곁에는 딱딱하게 굳은 무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중세풍 하녀복 차림의 여인들이 서 있었다.‘…어라? 여기가 어디지?’분명 어젯밤, 야근을 마치고 좁은 원룸 침대에 쓰러져 로판 소설을 읽다 잠들었을 터였다. 생생한 악몽인가 싶어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사이, 하녀들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해 침대 밖으로 일으켜 세웠다. 그들은 장미수를 띄운 대야와 수건을 가져와 말 한마디 없이 세수시키기 시작했다.눈을 비빌 틈조차 없이 얼굴에 닿는 미온수와 물기를 훔쳐내는 거친 손길에 그녀는 영문도 모른 채 입을 헹구어 냈다. 몰래카메라나 연극이라기엔 쌀쌀맞은 시선과 주변 풍경이 지나치게 이질적이고 선명했다.“멍하니 계실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팔을 벌리세요.”세안이 끝나기 무섭게 하녀들은 그녀의 얇은 슬립 위로 코르셋을 얹고 사정없이 끈을 조여 맸다. 숨이 턱 막히는 압박감에 신음이 새어 나왔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품위 있는 귀족 영애용 드레스를 덧씌운 뒤 리본과 단추를 일사천리로 채워 내려갔다.마침내 옷 단장이 끝나자, 하녀들은 그녀를 화장대 거울 앞에 털썩 앉혔다. 빗으로 머릿결을 정돈하고 분을 톡톡 두드리는 사이,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똑똑히 마주한 순간 그녀는 숨을 멈추었다.허리선까지 부드럽게 물결치며 쏟아져 내리는 탐스러운 연분홍빛 머리카락. 그리고 당혹감으로 크게 뜨인 영롱한 에메랄드빛 녹안. 가녀린 목선과 화려한 이목구비를 지닌, 난생처음 보는 눈부신 미인이 거울 너머에서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누구야, 이 사람? 내 얼굴이 아니잖아?’떨리는 손발을 내려다보며 극심한 충격에 휩싸여 있는 사이, 하녀들은 인정사정없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어 방 밖으로 내몰았다.“백작님께서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서두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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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2.그 물음에 시녀는 기가 찬다는 듯 한쪽 눈썹을 비스듬히 치켜올렸다. 그러고는 혀를 차듯 비아냥을 섞어 말했다.“그럼요. 제국에 공작가가 여럿 있는 것도 아니고. 펠릭스 공작님 한 분뿐이시죠. 하긴, 아가씨야 사교계 문턱 근처에도 못 가보셨으니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 턱이 없으시겠지만요. 듣자, 하니 저주를 받아서 몇 년째 저택 밖으로 발도 안 붙이신다더군요. 밤만 되면 이성을 잃고 피를 탐하는 끔찍한 괴물로 변한다는 소문도 파다하고요.”시녀는 짐짓 팔짱을 끼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명백한 조소였다.“그래도 아가씨, 사생아 신분으로 무려 제국 최고 권력가의 안주인 자리에 오르시는 거잖아요? 가문의 경사네요. 남들 눈에는 분에 넘치는 출세일 테니 미리 축하라도 드려야겠어요.”비수를 꽂듯 내뱉는 냉소적인 말에 로젤리아는 백작이 내뱉었던 ‘가문의 수치’라는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단번에 와닿았다.‘사생아로 태어난 게 내 탓인가? 처신 똑바로 못 한 백작 놈 탓이지.’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냉소를 삼키며, 로젤리아는 짐짓 무표정하게 받아넘겼다.“그래, 참으로 대단한 경사로구나. …아, 혹시 성녀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니?”“성녀님이요? 27년째 감감무소식인 걸 온 제국민이 다 아는데 새삼 성녀님은 왜요?”순간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성녀의 구원》 속 제국은 신전의 권능이 절대적인 세계였다. 건국 이래 제국에는 늘 성녀가 존재하며 세상을 정화해 왔지만, 데미안이 태어난 바로 그날 마지막 성녀가 숨을 거두었다. 그 후로 27년간 단 한 명의 성녀도 탄생하지 않았다.세간에는 ‘저주받은 괴물 후계자가 태어나 신의 축복이 끊겼다’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고 데미안이 스물여덟 살이 되는 해에 비로소 새로운 성녀가 강림한다. 원작의 여주인공이자, 외로운 공작을 구원할 유일한 빛.“…펠릭스 공작님의 생일이 언제지?”“글쎄요. 아직 반년쯤 남지 않았나요? 벌써 남편 생일을 챙기시는 건가요?”“뭐, 그렇다고 치자꾸나. 그만 나가보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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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03.마침내 약조된 열흘째 되던 날 아침. 백작저의 정문 앞 흙먼지를 가르며 웅장한 마차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펠릭스 공작가의 상징인 흑색 늑대 문장이 선명하게 새겨진 마차였다. 칠흑처럼 매끄러운 흑마 네 필이 이끄는 마차는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질 만큼 거대했다.“아가씨, 짐입니다.”시녀 하나가 문가에 툭 던지듯 내려놓은 것은 한 손으로도 가볍게 들릴 만큼 초라하고 낡은 가죽 가방 하나뿐이었다. 귀족 영애가 시집을 가며 챙겨갈 패물이나 두터운 옷가지는커녕, 며칠 치 갈아입을 얇은 옷 몇 벌이 전부였다.로젤리아는 말없이 그 가방을 집어 들었다. 시녀도 호위 기사도 딸려 보내지 않는 백작가의 노골적인 방치였으나, 오히려 그녀에겐 거추장스러운 감시자가 없는 편이 홀가분했다. 그녀는 미련 한 점 남지 않은 백작저를 등지고 거대한 마차에 올랐다.덜컹거리는 마차는 쉼 없이 북쪽을 향해 달렸다. 창밖의 푸르른 녹음은 반나절 만에 앙상한 침엽수림과 거친 암벽으로 바뀌었고 어느덧 차창 틈새로 살을 에는 듯한 서늘한 한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제국의 최북단, 만년설이 녹지 않는 펠릭스 공작령에 도착한 것이었다.묵직한 마차 바퀴가 눈 덮인 자갈밭을 긁으며 멈춰 섰다. 마부의 부축을 받아 마차 문을 열고 발을 내딛는 순간, 로젤리아는 숨이 턱 끝까지 막히는 추위에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발목을 스치는 것은 얼음장 같은 북부의 칼바람이었다. 수도에서 입던 얇은 면 드레스와 굽 낮은 실크 구두는 영하를 밑도는 북부의 혹한을 막기엔 종잇장이나 다름없었다. 살갗이 얼어붙는 고통에 로젤리아는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잇새가 맞부딪치며 딱딱 소리를 냈다.그때, 저택의 거대한 철문 너머에서 규칙적이고 묵직한 군화 소리가 눈을 밟으며 다가왔다. 로젤리아는 시린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었다.눈앞에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그림자. 흑요석처럼 짙은 흑발에 날렵하게 뻗은 콧날, 그리고 심해처럼 깊고 서늘한 흑안을 지닌 사내였다. 떡 벌어진 어깨와 위압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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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04.정적을 깨는 조용한 질문에 서류를 뒤적이려던 데미안의 손끝이 우뚝 멈췄다. 사내의 서늘한 흑안이 로젤리아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로 향했다. 숨이 턱 막힐 만큼 날카로운 시선이었으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의외로 덤덤하기 짝이 없었다.“글쎄. 황제가 하라니 하는 거지. 그런 걸 왜 묻지?”마치 오늘 저녁 메뉴가 무엇인지 묻는 말에 대답하듯 건조한 어조였다. 황제의 억지스러운 정략결혼 칙명조차 그에게는 귀찮은 일과 중 하나에 불과한 모양이었다.로젤리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좋아, 이 결혼에 아무런 애착도, 기대도 없다는 뜻이지.’ 그녀는 침을 꼴깍 삼킨 뒤, 미리 준비해 두었던 승부수를 당돌하게 던졌다.“그렇다면 공작님, 저와 ‘6개월’ 간의 계약 약혼을 맺는 건 어떻겠습니까?”“…뭐?”순간, 데미안의 미간이 좁혀지며 낮게 긁는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난생처음 듣는 기상천외한 소리라는 듯, 사내의 눈빛에 찰나의 당혹과 흥미가 스쳐 지나갔다. 로젤리아는 기세를 몰아 차분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제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앞으로 6개월 뒤 제국에 신성한 ‘성녀’가 나타날 예정입니다.”“성녀?”“네. 27년간 끊겼던 신의 축복이 다시 강림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성녀의 힘이라면… 공작가를 오랜 세월 옭아매 온 그 지독한 저주 또한 온전히 씻어낼 수 있을 겁니다.”‘저주’라는 단어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순간, 집무실 내부의 공기가 순식간에 영하로 곤두박질치는 듯 살벌한 한기가 감돌았다. 데미안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가늘어졌다. 하지만 로젤리아는 물러서지 않고 말을 맺었다.“저주가 풀리고 진정한 자유를 얻으신 뒤에, 공작님께 걸맞은 훌륭한 혼처를 찾으시는 편이 훨씬 이득이지 않겠습니까? 그때까지만 제가 완벽한 방패막이가 되어 드리겠습니다.”사내의 숨결마저 얼어붙은 적막 속에서 로젤리아는 생존을 건 도박의 주사위를 던진 채 데미안의 입술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타닥거리는 장작 소리만이 맴도는 집무실 안, 데미안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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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05. 데미안은 양피지를 집어 서랍에 보관한 뒤, 집무실 문가에 대기하고 있던 집사를 불렀다. “헨리.”“예, 공작님.” 단정하게 백발을 넘긴 중년의 집사가 소리 없이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데미안은 턱짓으로 로젤리아를 가리키며 담담하면서도 엄숙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내 약혼자이시니 지내는 동안 한 톨의 불편함도 없어야 할 것이다. 손끝 야무지고 일 잘하는 전담 하녀를 붙여주고 미리 정돈해 둔 침실로 안내하도록.”“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지시를 마친 데미안이 시선을 돌려 로젤리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무심한 눈동자에 옅은 배려가 스쳐 지나갔다. “영애, 장시간 이동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방에 올라가 씻고 쉬도록 하게. 저녁 식사 때 다시 보지.”“감사합니다, 공작님.” 로젤리아는 정중히 고개를 끄덕인 뒤, 앞장서는 집사 헨리의 뒤를 따랐다. 묵직한 카펫이 깔린 복도를 지나 도착한 곳은 웅장한 금박 장식이 새겨진 거대한 문 앞이었다. 집사가 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로젤리아는 저도 모르게 작게 탄성을 내지를 뻔했다. ‘…세상에.’ 백작가에서 그녀가 쓰던 방은 명색이 영애의 처소라기엔 너무도 협소하고 볕조차 잘 들지 않는 음침한 별채 구석방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공작저의 침실은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광활하고 호화로웠다. 폭신한 최고급 양탄자가 바닥 전체에 깔려 있었고 성인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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