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별장에서 본사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부터 채령은 지독한 이물감을 느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의 피부와 다름없었던 검은 가죽 장갑은 이제 조수석 콘솔 박스 안에 처박혀 있었다. 진혁이 직접 자신의 넥타이를 만지게 하며 내린 ‘비접촉 분석 금지’ 명령은 단순한 지시가 아니라, 채령의 세계를 지탱하던 유일한 방패를 빼앗은 사형 선고와 같았다.
장갑이 없는 채령의 맨손은 공기 중에 떠다니는 모든 입자의 진동을 읽어내고 있었다. 에어컨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공적인 냉기, 진혁이 핸들을 꺾을 때마다 시트 가죽이 마찰하며 내는 미세한 열, 그리고 차창 너머로 쏟아지는 정오의 햇살이 자아내는 불규칙한 온도들. 그 모든 것이 ‘소음’이 되어 채령의 신경계를 찔러댔다. 하지만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옆자리에 앉은 진혁의 존재감이었다. 그는 완벽하게 재단된 감청색 수트를 차려입고, 다시 차가운 CSO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어제의 그 광기 어린 열기는 흔적조차 없었으나, 채령의 손끝은 알고 있었다. 그의 수트 안쪽, 심장이 뛰는 그곳은 여전히 39도의 끓는점을 유지하며 자신을 유혹하고 있다는 것을. 본사 80층 대회의실. 퀀텀 테크의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는 이사회 멤버들이 타원형의 거대한 대리석 테이블 주위에 둘러앉아 있었다. 공기는 질소처럼 차갑고 무거웠다. ‘멜팅 포인트’ 프로젝트의 중간 보고 및 은채령 수석 분석가의 자질 검증이 오늘의 주된 안건이었다. “은 수석. 이번 보고서를 검토해 봤는데, 여전히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 많군요.” 이사회에서 진혁과 대척점에 서 있는 마 이사가 서류 뭉치를 테이블 위로 툭 던지며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기름기 낀 가래가 섞인 듯 불쾌한 온도를 품고 있었다. 채령은 테이블 아래로 맨손을 꽉 맞잡았다. 장갑이 없는 손바닥에서는 자꾸만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신소재의 임계점을 파악하는 데 ‘직관적 감각’을 활용한다니. 이게 과학입니까, 아니면 무속 신앙입니까? 퀀텀 테크가 수천억을 쏟아붓는 프로젝트에 이런 검증되지 않은 방식을 도입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군요.” 마 이사의 비아냥에 회의실 여기저기서 낮은 조소와 수군거림이 터져 나왔다. 채령은 시야가 좁아지는 것을 느꼈다. 수십 명의 이사진이 내뿜는 각기 다른 감정의 온도—탐욕의 열기, 멸시의 냉기, 의심의 미지근함—가 그녀의 맨살을 사정없이 할퀴고 지나갔다. 과부하였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이 방을 뛰쳐나가 어두운 분석실에 숨어 장갑을 끼고 싶었다. 그때였다. 회의 내내 침묵을 지키던 진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펜을 내려놓고 의자 깊숙이 몸을 묻으며 마 이사를 빤히 응시했다. “마 이사님. 과학과 무속의 차이는 ‘결과’로 증명되는 것 아닙니까?” 진혁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고 서늘했다. 회의실의 온도가 단숨에 몇 도는 떨어진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은 수석의 ‘감각’은 기계가 잡아내지 못하는 나노 단위의 미세 균열을 0.1초 만에 찾아냅니다. 지난달, 마 이사님이 추진하시던 L-3 라인의 결함을 잡아내 수백억의 손실을 막은 것도 은 수석의 그 ‘검증되지 않은 방식’ 덕분이었죠. 잊으셨습니까?” 진혁의 단호한 옹호에 마 이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채령은 옆자리에 앉은 진혁을 바라보았다. 그는 채령을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그의 존재 자체가 거대한 방벽이 되어 그녀를 감싸 안고 있었다. 하지만 진혁의 보호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테이블 아래로 자신의 손을 뻗어, 채령의 떨리는 맨손을 덥석 잡았다. “...!” 채령은 비명을 삼키며 몸을 떨었다. 이사들이 지켜보는 공식적인 회의 석상, 테이블 아래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진 갑작스러운 접촉. 진혁의 뜨겁고 단단한 손바닥이 채령의 땀 젖은 손바닥과 빈틈없이 밀착되었다. 순간, 주변의 모든 소음과 불쾌한 온도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진혁의 36.5도, 아니 39도에 육박하는 그 절대적인 열기가 채령의 신경계를 단숨에 장악해버린 것이다. 그것은 지배인 동시에 구원이었다. 채령은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 진혁이라는 필터를 거치지 않은 세상의 온도는 이제 그녀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은 수석, 보고 계속하지.” 진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마 이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명령했다. 하지만 테이블 아래에서 그는 채령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자신의 손가락으로 파고들어 깍지를 꼈다. 그리고는 그녀의 예민한 손바닥 중심부를 엄지손가락으로 느리게, 아주 집요하게 문질러댔다. 채령은 입술을 깨물며 일어섰다. “...네. 보고 계속하겠습니다. 이번 멜팅 포인트 시편의 열팽창 계수는...”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명료했다. 테이블 위에서는 이성적이고 차가운 비즈니스가 오갔지만, 테이블 아래에서는 진혁의 손길에 의해 채령의 몸 안쪽이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진혁은 그녀의 손등을 손가락 끝으로 긁거나, 손목의 맥박이 뛰는 곳을 지그시 누르며 그녀의 반응을 즐겼다. 채령은 보고를 이어가면서도 온 신경이 아래쪽의 접촉에 집중되었다. 진혁의 지문 하나하나가 피부 신경을 자극할 때마다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전율 때문에 다리에 힘이 풀릴 것만 같았다. 그는 지금 이사들 앞에서 채령을 보호하는 척하며, 동시에 그녀를 자신의 온도로 ‘사육’하고 있었다. 회의가 끝난 후, 이사들이 모두 빠져나간 회의실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채령은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에 주저앉았다. 진혁은 여전히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채였다. “잘했어. 은 수석.” 진혁은 채령의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손등에 깊게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이 닿은 부위가 화상을 입은 듯 화끈거렸다. “장갑이 없어도 충분히 훌륭하군. 아니, 장갑이 없으니 내 온도가 더 깊이 전달되는 것 같아 만족스러워.” “...진혁 씨, 미쳤어요. 여기서 누가 보기라도 했다면...” “보는 게 무슨 상관이지? 당신은 내 전용 분석가고, 나는 당신의 온도를 관리할 의무가 있는데.” 진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채령을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가두었다. 그는 채령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이사들이 당신을 공격할 때마다 내 온도가 얼마나 치솟았는지 알아? 지금 당장이라도 이 테이블 위에 당신을 눕히고, 그 결백한 표정이 무너지는 걸 확인하고 싶을 만큼.” 진혁의 거친 숨결이 채령의 귓가를 자극했다. 그는 채령의 수트 재킷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어제 별장에서 탐닉했던 그곳, 채령의 겨드랑이와 배꼽 주변을 옷감 너머로 강하게 압박했다. “아, 윽...!” 채령은 그의 어깨를 밀어내려 했지만, 이미 그녀의 몸은 그의 열기에 길들여져 있었다. 장갑 없이 지낸 반나절 동안 쌓인 감각적 피로가 진혁의 접촉을 만나 폭발적인 쾌락으로 변하고 있었다. 진혁은 채령의 입술을 집어삼키며 그녀를 회의실 벽으로 밀어붙였다. 차가운 대리석 벽의 냉기와 진혁의 뜨거운 가슴이 대비되며 채령의 이성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진혁은 그녀의 다리 사이로 자신의 한쪽 무릎을 밀어 넣으며, 그녀의 가장 민감한 곳을 압박했다. “분석해 봐, 채령아. 지금 네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이 반응이... 이사회의 압박 때문인지, 아니면 나 때문인지.” 진혁의 손가락이 채령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회의실의 폐쇄회로 TV(CCTV)가 두 사람을 비추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오히려 채령의 감각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미래 시점: 에필로그 - 감각의 완전한 종속) 어느덧 채령에게 장갑은 과거의 유물이 되었다. 그녀는 이제 수많은 군중 속에서도 오직 진혁의 체온만을 이정표 삼아 걸을 수 있었다. 침실의 옅은 조명 아래, 진혁은 채령의 전신을 자신의 혀로 훑어 내렸다. 그는 채령의 배꼽 아래, 가장 예민한 신경이 모여 있는 곳을 손가락 끝으로 튕기듯 자극하며 그녀의 신음을 유도했다. “하아, 진혁... 씨... 제발... 아!” 채령은 이제 더 이상 수치를 느끼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진혁의 온도에 의해 재구조화되는 과정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진혁의 혀가 그녀의 핵심부를 강하게 타격하자, 채령은 자신의 영혼이 36.5도의 액체가 되어 그의 품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완벽한 열적 평형이었다. 더 이상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오직 두 사람만이 공유하는 영원한 용해의 상태.[1] 성공의 잔향과 서늘한 전조 새로운 기업 ‘멜팅 포인트’의 첫 번째 신소재, ‘MP-01’의 런칭은 업계의 판도를 뒤흔들었다. 퀀텀 테크의 유산을 물려받았으면서도 그 부패한 구조를 완전히 도려낸 진혁의 결단력과, 소재의 영혼까지 읽어내는 채령의 감각이 만들어낸 합작품은 시장의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성공이 가져다준 빛이 강할수록, 그 뒤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더욱 짙고 서늘했다. “은 수석, 오늘 오후 스케줄은 비워둬. 연구실이 아니라 본사 근처 프라이빗 라운지에서 외부 인사를 만나야 하니까.” 진혁의 지시였다. 채령은 장갑 없는 맨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가볍게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혁이 새겨놓은 열꽃은 옷감 아래 숨겨져 있었지만, 그의 온도가 남긴 감각적 기억은 그녀의 전신 신경계에 상주하며 매 순간 그녀를 자극하고 있었다. 라운지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인물은 퀀텀 테크 시절부터 마 이사와 결탁했던 ‘엔트로피 클럽’의 핵심 멤버, 한준호 사장이었다. 그는 진혁과는 다른, 끈적하고 기분 나쁜 미지근함을 내뿜는 남자였다. “은채령 수석. 아니, 이제는 전략적 파트너라고 불러야 하나? 진혁이가 당신을 대단히 아끼는 모양입니다. 하긴, 당신의 그 ‘감각’이 없었다면 멜팅 포인트는 시작도 못 했을 테니까요.” 한준호는 태블릿 하나를 테이블 위에 밀어 놓았다. 채령의 맨손이 태블릿의 차가운 액정 화면에 닿자, 기분 나쁜 노이즈가 손가락 끝을 타고 뇌로 전달되었다. “하지만 궁금하지 않습니까? 강진혁이 왜 그 수많은 분석가 중에서 하필 ‘당신’을 택했는지. 당신의 아버지가 사고를 당했던 그 공장의 데이터베이스... 그곳의 최종 책임자가 누구
[1] 잿더미 위의 왕국: ‘멜팅 포인트’의 탄생퀀텀 테크라는 거대한 공룡이 비자금 스캔들과 강 회장의 실각으로 쓰러진 자리에는 거대한 권력의 공백이 생겼다. 진혁은 주저 없이 그 잔해를 헐값에 매각하거나 해체했다. 그가 원한 것은 비대한 제국의 왕관이 아니었다. 오직 은채령의 감각을 지탱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하고 정밀한 ‘실험실’이었다.서울 강남의 중심부, 퀀텀 테크의 화려했던 고층 빌딩 대신 세워진 ‘멜팅 포인트’ 본사는 외관부터 이질적이었다. 칠흑 같은 무광 블랙 외벽은 빛조차 흡수하며 그 안의 온도를 철저히 숨기고 있었다.“이제 이곳이 우리의 시작점이야, 채령아.”진혁은 CEO 집무실의 통유리창 앞에 섰다. 이제 그는 수트 대신 편안하지만 고급스러운 캐시미어 니트를 입고 있었다. 채령은 그의 곁에서 장갑 없는 맨손으로 자신의 목등뼈 근처를 매만지고 있었다. 알래스카에서의 동상 흔적은 진혁의 지독한 ‘열적 치료’ 덕분에 사라졌지만, 그 극한의 추위가 남긴 심리적 각인은 여전히 그녀를 진혁의 온도에 집착하게 만들었다.“사람들은 우리가 미쳤다고 해요. 그 거대한 자산을 다 포기하고 고작 소재 분석 회사 하나를 차리다니.”“그들은 모르지. 이 세상 모든 가치는 결국 네 손끝에서 정의된다는 걸.”진혁은 채령을 뒤에서 안았다. 니트의 부드러운 질감 너머로 전해지는 그의 36.5도는 이제 채령에게 생명 유지 장치와 같았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퀀텀 테크를 분할 점령하려던 기존의 대기업 연합군, 일명 ‘엔트로피 클럽’이 멜팅 포인트의 첫 번째 신소재 발표를 앞두고 대규모 공매도와 기술 유출 소송을 제기하며 압박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2] 위기 속의 공명: 감각의 예열중요한 투자자 미팅을 앞둔 오후, 채령은 회의실의 차가운 시선들에 노출되어 과민해진 신경계를 다스리기 위해 진혁의 전용 휴게실로 도망치듯 들어왔다. 장갑 없는 맨손은 이미 주변의 부정적인
어제의 폭풍 같은 정사가 남긴 열기는 여전히 채령의 살결 위에서 미세한 파동을 그리며 넘실거리고 있었다. 장갑 없는 그녀의 맨손은 이제 단순한 분석 도구를 넘어, 퀀텀 테크라는 거대한 유기체의 혈류를 읽어내는 정밀 탐침이 되어 있었다.“진혁 씨, 회장님의 비자금은 디지털 기록이 아니라 ‘열적 기록’으로 남아 있을 거예요.”특수 분석실 깊숙한 곳, 퀀텀 테크의 중앙 서버실 입구에서 채령이 속삭였다. 진혁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묵직한 신뢰를 보냈다.“무슨 뜻이지?”“거대한 자금이 이동할 때마다 서버는 비정상적인 연산을 수행하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특정한 패턴의 열기... 그건 지울 수 없는 흔적이에요. 장갑을 벗은 제 손이라면, 그 열역학적 노이즈 속에서 회장님의 비밀 계좌를 찾아낼 수 있어요.”채령은 주저 없이 서버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수만 대의 서버가 뿜어내는 거대한 열풍이 그녀의 전신을 덮쳤다. 보통 사람이라면 숨이 막힐 듯한 고온이었으나, 진혁의 온도에 동기화된 채령에게 이 열기는 오히려 명료한 데이터의 흐름으로 읽혔다.채령은 서버 랙 하나하나에 자신의 맨손을 갖다 댔다. 그녀의 날개뼈가 미세하게 떨리며 수집된 정보를 뇌로 전송했다.“아직 부족해요. 더 깊은 곳의 온도를 읽으려면... 제 신경계를 더 예열해야 해요.”채령이 진혁을 돌아보며 간절하게 속삭였다. 진혁은 그녀의 의도를 단번에 파악했다. 그는 채령을 차가운 서버 랙 벽면에 밀착시켰다. 서버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공적인 열기와 진혁의 뜨거운 체온이 채령을 양면에서 압박했다.진혁은 채령의 귓바퀴를 입술로 머금고 느리게 빨아들였다.“지금부터 네 신경계를 서버의 박동과 일치시켜 주지. 네가 그 비자금 루트를 찾아낼 때까지, 난 네 몸을 멈추지 않을 거다.”진혁의 손가락은 채령의 목덜미를 지나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그는 그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며, 드러난 하얀 살결 위로 자신의 뜨거운 지문을 각인시켰다.“아, 윽... 진혁 씨... 데
서울의 하늘은 잿빛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퀀텀 테크 80층, 회장실의 문이 열리자마자 뿜어져 나온 냉기는 32층 CSO실의 그 어떤 시스템으로도 막을 수 없는 ‘절대 영도’의 폭력성을 띠고 있었다. 강진혁의 아버지이자 퀀텀 테크의 창업주인 강 회장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주변의 모든 분자 운동을 멈추게 하는 거대한 빙산과 같았다.“제네시스 테크를 공중분해 시켰더구나. 내 허락도 없이.”강 회장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그 안에는 자식에 대한 애정이나 비즈니스적인 칭찬 따위는 없었다. 오직 자신의 제국에 생긴 균열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노회한 포식자의 경고만이 서려 있었다.진혁은 그 서슬 퍼런 위압감 앞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그의 36.5도는 견고했다. 하지만 그의 등 뒤에 선 채령의 상태는 달랐다. 장갑 없는 채령의 맨손은 강 회장이 내뿜는 그 지독한 ‘지배의 냉기’를 실시간으로 수집하며 과부하를 일으키고 있었다.“백승호는 선을 넘었습니다. 제 파트너를 건드린 대가를 치렀을 뿐입니다.”“파트너?”강 회장의 시선이 채령을 향했다. 그것은 인간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쓸모 있는 부품인지, 아니면 폐기해야 할 불량품인지를 가려내는 감별사의 눈이었다.“은채령 수석 분석가. 10년 전 네 아비의 사고를 덮어준 대가로 이만큼 컸으면 감사할 줄 알아야지. 그런데 감히 내 아들의 신경계를 흔들어놓아?”강 회장의 한마디에 채령의 온도가 급격히 하강했다. 10년 전의 진실. 진혁의 가문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그 위에서 제국을 쌓아 올렸다는 사실이 강 회장의 입을 통해 다시금 확인되자, 채령의 세계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진혁아, 저 아이를 치워라. 내 제국에 감정이라는 노이즈가 섞이는 건 용납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저 아이의 ‘감각’ 자체를 내가 영원히 꺼버릴 수도 있으니까.”강 회장의 경고는 차가운 칼날이 되어 채령의 목줄기를 겨눴다. 진혁은 채령의 차가워진 손을 꽉 쥐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퀀텀 테크 32층의 아침은 여느 때보다 시리고 무거웠다. 복도를 가로지르는 직원들의 발걸음 소리는 기계적인 리듬을 띠고 있었으나, 그들의 대화는 은채령 수석 분석가의 ‘파트너 승격’이라는 전례 없는 소문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정작 그 소문의 중심인 채령은 자신의 연구실 창가에 서서, 장갑 없는 맨손으로 차가운 유리창을 더듬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서울의 풍경은 흐릿한 안개에 잠겨 있었다. 채령은 손가락 끝에서 전해지는 유리의 ‘열전도율’을 무의미하게 계산했다.열전도 계수 값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녀의 신경계는 이미 물리 법칙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 어제 밤, 진혁이 그녀의 전신에 남긴 그 지독한 ‘열적 낙인’은 아침 공기 속에서도 식지 않고 그녀의 살결 위를 맴돌았다.“은 수석. 분석 준비는 끝났나.”등 뒤에서 들려오는 낮고 서늘한 목소리. 채령은 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강진혁. 그는 이제 그녀에게 단순한 상사가 아니었다. 그녀의 세상을 구성하는 유일한 ‘열원’이자, 그녀의 감각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법칙이었다.진혁은 채령의 뒤로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수트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단단한 체온이 채령의 얇은 실크 블라우스 자락을 뚫고 들어왔다. 장갑이 없는 그녀의 맨손이 그의 소매를 꽉 쥐었다.“백승호 실장이 오늘 제네시스 테크의 신소재 샘플을 가지고 오기로 했다. 네 그 예민한 감각으로 그 소재의 ‘치명적인 결함’을 찾아내야 해. 그게 오늘 네가 해야 할 유일한 업무이자, 복수의 시작이다.”진혁의 입술이 채령의 귓바퀴를 스치며 속삭였다. 그의 숨결에 담긴 열기가 고막을 진동시키자, 채령은 전신이 바르르 떨리는 전율을 느꼈다.진혁은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되기 전, 채령을 특수 분석실로 이끌었다. 외부의 모든 소음이 차단된 그 방에서, 진혁은 채령을 분석용 테이블 위에 앉혔다.“백승호의 소재를 분석하기 위해선 네 신경계를 ‘가장 예민한 상태’로 예열해야 해. 노이
청담동의 한 프라이빗 바. 조명조차 닿지 않는 어두운 구석 자리에 최서윤과 백승호가 마주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도수가 높은 위스키와 함께 낡은 서류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진혁이가 그런 파격적인 선언을 할 줄은 몰랐네. 파트너라니, 사실상 공인된 정부(情婦) 선언이나 다름없잖아?” 서윤이 얼음을 잔잔하게 흔들며 냉소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모욕감과 함께 서늘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 맞은편의 백승호는 서류 봉투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강진혁이 간과한 게 하나 있죠. 은채령이라는 정교한 기계는 ‘과거’라는 노이즈에 아주 취약하다는 겁니다. 10년 전, 그녀의 아버지가 근무하던 화학 공장의 폭발 사고. 그 사고의 원인을 은폐한 배후가 퀀텀 테크의 전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과연 그 뜨거운 온도를 견뎌낼 수 있을까요?” 백승호가 꺼내놓은 사진 속에는 앳된 채령과 그녀의 아버지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서윤은 그 사진을 가차 없이 짓이기며 속삭였다. “보내줘. 은채령에게 이 ‘선물’을. 진혁이가 만든 그 완벽한 분석실 안에서, 그녀가 어떻게 스스로 녹아내려 자멸하는지 특수 분석실의 공기는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채령의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 조금 전, 익명의 발신자로부터 전송된 한 장의 사진과 짧은 데이터 파일. 10년 전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과 사고 당시의 은폐된 열역학 수치들이 그녀의 망막을 어지럽혔다. ‘사고가 아니었어... 아니, 진혁 씨의 가문이...’ 채령의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장갑 없는 맨살이 분석실의 냉기를 그대로 흡수하며 ‘콜드 쇼크(Cold Shock)’를 일으켰다. 평소라면 진혁의 온도에 즉각적으로 동기화되었을 그녀의 신경계가, 과거라는 지독한 냉기에 얼어붙어 작동을 멈췄다. 그때, 금속 문이 열리며 진혁이 들어왔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채령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비정상적인 ‘냉기’를 포착했다. “은채령, 상태가 왜 이래. 온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