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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굿
마침내 한 시진이 지났다. 곁에 있던 궁녀들이 나를 부축해 일으켰다.

내 무릎은 살점이 짓물러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망가져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아무런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통도 극에 달하면 감각조차 마비되는 모양이다.

예전, 손목 굵기만 한 몽둥이로 다리를 얻어맞았을 때도 이와 같았다. 그때 나는 나를 걱정할 이형주를 안심시키려 피가 흐르는 다리로 억지로 춤을 추어 보였었다.

“소인은 괜찮습니다. 정말 하나도 안 아픕니다.”

당시 그는 새빨개진 눈으로 나를 끌어안으며 맹세했다.

“명월아, 맹세할게. 내가 보위에 오르는 날, 다시는 너에게 어떤 상처도 주지 않겠다.”

귓가에 선명하게 되살아난 그 애틋한 목소리가, 지난 시절의 모든 기억을 산산조각 내며 내 가슴을 짓눌렀다. 그때의 맹세는 지금 어디로 갔는가.

저 멀리 병풍 너머에서 이형주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네가 풍등을 좋아한다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등을 보여줄 터이니 함께 가자.”

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궁궐 담벼락을 짚고, 한 걸음씩 천천히 발을 옮겼다. 밤이 깊자 수만 개의 풍등이 밤하늘을 수놓으며 화려하게 떠올랐다.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긴 복도를 지나던 궁녀들과 내관들은 머리 위를 가득 메운 풍등을 보며 저마다 부러움 섞인 탄성을 내뱉고 있었다.

“폐하께서 마마를 참으로 아끼시는구나. 황후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시간문제겠어.”

“말해 뭐 해. 마마가 입만 열면 내일이라도 당장 황후로 책봉해 주실걸?”

“그럼 명월 언니는 어쩌고? 너희들에게만 몰래 말하는 건데, 지난번 당직 때 폐하께서 몰래 언니 방으로 드시는 걸 봤어. 그날 밤 신음 소리가 끊이질 않더라니까. 폐하께서 절대 떠나지 말라고 속삭이는 것도 들었어.”

“그게 무슨 소리야. 폐하가 어떤 분인데 일개 궁녀 방에 몰래 드셔서 그런 말씀을 하셔? 내가 보기엔 명월 언니는 어려서부터 폐하 곁에 있었으니, 그냥 밤시중이나 드는 것뿐이야.”

“맞아. 그러니 폐하께서 명월 언니를 후궁으로 들이지 않으시는 거겠지.”

“그 출신으로 집사 궁녀 자리에 오른 것만 해도 과분하지. 설마 본인이 후궁이라도 될 거라 꿈꾸는 건 아니겠지?”

그들의 비웃음 섞인 속닥거림이 웅웅거리며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피하려 고개를 숙인 채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나는 자리에 멈춰 서서 씁쓸한 웃음을 삼켰다.

나와 폐하, 우리는 대체 무슨 사이인가... 요즘 들어 스스로에게 수없이 던지던 질문이었으나, 그 결론은 언제나 나지 않았다.

‘결국 저들의 말대로 나는 그저 밤시중이나 드는 존재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왜 내게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 절대 떠나지 말라던 그 말은 무엇이었고, 나를 끌어안으며 세상에 오직 너뿐이라며 울먹이던 그 진심은 대체 무엇이었나.’

하고 싶은 말은 너무나 많았지만 감히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폐하, 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폐하의 고귀한 신분과 제 미천한 처지를 모르는 바 아니나, 십 년을 곁에 두셨다면 제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이토록 앗아가 버리지는 말아야 하지 않습니까.’

나는 방으로 돌아와 상처에 대충 약을 바르고는 곪아 터진 감정을 억누른 채 잠을 청했다.

...

깊은 밤, 창가에서 기척이 느껴지더니 이내 이형주가 침상으로 올라와 내 곁에 누웠다. 그는 익숙한 듯 나를 꼭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명월아, 이제는 이것이 습관이 된 모양이다. 밤마다 너를 안지 않으면 도무지 잠이 오질 않는구나. 그동안 잔혹한 기억들에 시달려 늘 괴로웠는데, 네가 곁에 있으면 마음이 한결 놓인단다.”

나는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몸을 비틀어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폐하, 이는 예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오늘은 마마의 곁에 계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는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혹 오늘 낮에 네 편을 들어주지 않아 화가 난 것이냐? 시연이는 워낙 곱게 자란 아이라 내가 함부로 나무랄 수가 없구나. 네가 조금만 더 참아다오. 너에게 줄 좋은 연고를 가져왔다. 바르면 금방 나을 것이야.”

곱게 자랐으니 당연히 사랑받아야 하고 미천하게 자란 나는 상처받아도 마땅하다는 뜻인가. 나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설움을 삼키며 다시 한번 그를 밀어냈지만, 그는 나를 더욱 단단히 옭아맸다.

“명월아, 이제 그만하거라. 나는 오늘 진정 행복했단다. 시연이가 나를 위해 손수 다과를 만들고, 내 품에 폭 안겼거든. 이 순간을 내가 얼마나 고대해 왔는지 네가 알까. 시간이 지나면 시연이도 기꺼이 내 황후가 되어주겠지?”

나는 눈을 감고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그가 꿈꾸는 찬란한 미래에 내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예. 머지않아 폐하의 뜻대로 되실 것입니다.”

이형주는 마침내 연모하던 여인을 얻을 것이고, 나는 이곳을 떠날 것이다.

지난 세월 동안 그의 앞길을 막던 수많은 장애물들을 나는 내 손으로 하나씩 치워 왔으나, 정작 마지막으로 치워야 할 유일한 장애물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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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tuellstes Kapitel

  • 명월에 비친 눈물   제24화

    한 시진 뒤, 궁에서 보낸 이들이 도착하여 이형주를 데려갔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날 들이닥친 자객들은 멸문당한 유씨 가문의 잔당들이었다.머리를 부딪친 충격 때문이었을까. 깨어난 이형주는 지난날의 모든 기억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바쁜 날에도 매일같이 이화원을 찾아 말리화를 가꾸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마을의 시간은 여전히 평온하게 흘렀고, 나와 진현무는 변함없는 일상을 이어 갔다.그러던 어느 날, 자수방에서 모란도를 수놓는 데 몰두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문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바늘을 내려놓고 밖을 내다보니, 마차 한 대가 자수방 앞에 멈춰 서고 있었다.곧이어 마차의 휘장이 걷히고 우아한 기품을 지닌 여인이 걸어 내려왔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녀는 뜻밖에도 순이였다.옅은 녹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머리에는 화려한 장신구를 얹은 순이는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귀티가 흘렀다. 나를 발견한 그녀의 눈에 경악과 반가움이 동시에 스쳤다."명월 언니! 드디어 찾았네요."순이가 나의 두 손을 꽉 붙잡고 상기된 목소리로 외쳤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나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순아, 네가 어찌 이 먼 곳까지 왔느냐?"순이는 대답 대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언니도 아시겠지만 폐하께서는 예전부터 저를 언니의 대역으로 여기셨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기억을 잃으신 뒤로는 저를 단 한 번도 찾지 않으셨지요. 매일 정무를 마치면 이화원으로 가, 말리화만 하염없이 바라보실 뿐입니다. 더는 이대로 지켜볼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혹시 언니께서 궁으로 돌아가 폐하를 한 번만 만나 주실 수는 없을까요?”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혹여 마음이 흔들릴까 싶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내 마음속에는 티끌만 한 파문조차 일지 않았다.“순아, 그만 돌아가거라. 나는 다시는 궁궐에 발을 들이지 않을 것이다.”내 완고한 뜻을 확인한 순이는 결국 낙담한 얼굴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날

  • 명월에 비친 눈물   제23화

    이형주는 문턱에 멈춰 선 채, 그토록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목 끝까지 차오른 수많은 후회의 말들은 서로 뒤엉켜, 정작 아무것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는 떨리는 걸음으로 안마당 안으로 들어섰다.“명월아...”낯익은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달빛 아래에서 이형주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 내리는 듯했다.곁에 있던 진현무는 본능적으로 내 앞을 막아서며 나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그리고 경계 어린 눈빛으로 이형주를 노려보았다.하지만 이형주는 진현무를 눈에 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그 너머에 선 나에게만 머물러 있었다.“명월아...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아느냐.”언젠가 그와 다시 마주하게 된다면, 내 마음속에는 원망과 미움만 가득할 것이라 생각했다.하지만 막상 눈앞에서 그를 마주한 순간, 내 마음은 의외로 고요했다. 마치 오랜 세월 일렁이던 파도가 마침내 잦아든 것처럼...이형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참지 못하겠다는 듯 다가왔다.“명월아, 네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그러니 함께 돌아가자. 궁으로 돌아가 다시 내 곁에 있어다오. 내 황후가 되어주면 안 되겠느냐?”나는 조용히 그의 손을 밀어내며 답했다.“폐하, 부디 돌아가십시오.”거절당한 이형주의 눈빛이 집착으로 얼룩졌다. 그는 나를 다시 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이번에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강박적인 힘이었다.참다못한 진현무가 이형주의 팔을 붙잡아 떼어내며 쏘아붙였다."폐하께서 진정으로 명월 낭자를 아끼신다면, 그녀의 마음부터 헤아리셔야 합니다.""네놈이 감히 짐의 일에 간섭하려 하느냐?"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은 그대로 뒤엉켜 몸싸움을 벌였다. 무예가 뛰어난 진현무의 공격에 이형주는 몇 걸음이나 밀려났다. 얼굴에는 상처가 번지고 옷자락은 흐트러졌지만 그는 악착같이 진현무에게 달려들었다.“그만하십시오!”나의 단호한 외침이 떨어지고서야 두 사람은 겨우 움직임을 멈췄다.

  • 명월에 비친 눈물   제22화

    한편, 나와 진현무는 마을에 머무는 동안 한시도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우리는 노인이 건네준 고서를 샅샅이 파헤치며 유씨 가문이 반역을 꾀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그러던 어느 날, 고서의 낡은 갈피 속에서 누렇게 변색된 양피지 한 장이 툭 떨어졌다. 그 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부호와 표식이 빼곡히 그려져 있었다.“이리 와서 이것 좀 보십시오!"내가 흥분 섞인 목소리로 진현무를 불렀다. 그는 곁으로 다가와 양피지를 찬찬히 살피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이 부호들은 평범한 글자가 아닙니다. 은밀히 소통하기 위한 암어인 듯합니다. 분명 유씨 가문의 음모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우리는 곧장 관련 자료를 뒤지고 마을에서 식견이 높은 이들을 찾아다니며 자문을 구했다. 밤낮으로 머리를 맞댄 끝에 마침내 그 부호들의 비밀을 풀어낼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 양피지에는 유씨 가문이 각지의 반란 세력과 비밀리에 결탁해 온 은밀한 회합 장소와 시간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이건 유씨 가문을 무너뜨릴 결정적인 단서입니다! 이 정보만 있다면 그들의 세력을 뿌리째 뽑아낼 수 있습니다."우리는 이 사실을 대신에게 알리기로 뜻을 모았다. 그는 진현무가 처음 증거를 수집할 때부터 줄곧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던 인물이었다.우리는 기밀 유지를 위해 서신을 보내는 대신 직접 증거를 품고 진양으로 향했다. 유씨 가문의 잔당들이 도중에 습격해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행로 내내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진양에 도착한 우리는 곧장 대신을 알현했다. 증거를 확인한 대신은 사안의 중대함을 직감하고, 즉시 정예 병력을 배치해 양피지에 기록된 단서를 토대로 토벌 작전을 개시했다.조정의 군사는 그의 명을 받들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유씨 가문이 각 세력과 결탁해 은밀히 운영하던 비밀 거점들은 같은 시각, 각지에서 동시에 기습을 받으며 하나둘씩 무너지기 시작했다.그 기습은 유씨 가문의 잔당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이었

  • 명월에 비친 눈물   제21화

    문득 침전의 문이 열리며 유시연이 안으로 들어섰다."폐하, 저를 찾지 않으신 지가 너무 오래되..."말이 채 맺어지기도 전, 유시연의 가녀린 목덜미가 이형주의 손아귀에 사정없이 낚아채였다."짐이 정녕 너를 죽이지 못할 것이라 여겼느냐?"숨이 턱 막혀오는 극심한 고통에 유시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폐, 폐하... 아픕니다! 놓아주십시오!"이형주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손아귀에 더욱 힘을 실었다. 숨통이 조여들고 뼈가 으스러질 듯한 통증이 밀려오자, 유시연은 비명을 지르며 본능적으로 그의 손등을 세게 깨물었다.살점이 뜯겨 나갈 듯한 통증에 이형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내 분노에 휩싸여 유시연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그녀를 침상 기둥에 사정없이 내리찍었다.한 번, 그리고 두 번...유시연의 이마가 찢어지며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선혈은 그녀의 뺨을 타고 번져 내려 고왔던 얼굴을 순식간에 엉망으로 물들였다.이형주의 눈빛은 이미 이성을 잃은 듯했다. 핏발 선 두 눈에는 억눌러 온 분노와 살기가 뒤엉켜, 마치 통제할 수 없는 맹수와도 같았다.유시연은 의식이 흐려지는 순간에도 마지막 남은 본능으로 버텼다. 그리고 머리에 꽂혀 있던 날카로운 비녀를 뽑아 들었다.다음 순간, 그녀는 망설임 없이 이형주의 가슴을 향해 비녀를 내질렀다."아아아악! 게 누구 없느냐! 당장 호위들을 들라 하라!"검을 뽑아 든 호위들이 들이닥쳐 유시연을 바닥에 메치고 제압했다. 이형주는 비녀가 박힌 가슴을 움켜쥔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명령했다.“이 독사 같은 년이 감히 짐을 시해하려 하였다! 즉시 끌어내어 처형하라!”유시연은 피가 섞인 침을 뱉어 내며 악을 썼다."폐하! 저희 유씨 가문이 없으면 폐하의 권세도 없습니다! 저를 죽이시면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닥쳐라! 짐은 너뿐만이 아니라, 유씨 가문 전체를 대역죄로 다스려 멸문할 것이다!"유시연의 온몸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뭐, 무엇이라 하셨습니까?"유시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이형주를

  • 명월에 비친 눈물   제20화

    눈앞의 절경에 취해 있던 찰나, 진현무가 갑자기 주위를 경계하며 말했다."조심하십시오. 근처에 누군가 있습니다."그 말에 나는 진현무의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때 웅성거리는 덤불 속에서 소복을 입은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나이가 무색할 만큼 기운이 정정했고, 눈빛에는 깊은 지혜가 서려 있었다. 노인은 우리를 가만히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두 젊은이, 놀라지 마십시오. 저는 해를 끼치려는게 아닙니다."진현무는 나를 등 뒤로 감싸안으며 물었다."어르신은 누구십니까? 어찌하여 이런 깊은 산중에 계신 겁니까?"노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저는 이 산에 은거한 지 수십 년이 된 사람입니다. 오늘 두 사람이 이곳에 들어온 것을 보고 나와 보았는데, 기색을 보아하니 보통 풍파를 겪은 것이 아닌 듯싶군요.”나와 진현무는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잠시 망설인 끝에, 우리는 유씨 가문의 악행과 현재 우리가 처한 위급한 상황을 간략히 털어놓았다.우리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노인의 안색이 서서히 굳어졌다."유씨 가문의 작태는 실로 이 나라의 기둥을 갉아먹는 좀벌레와 같지요. 정의를 위해 그 험난한 길을 마다하지 않는 그대들의 용기가 참으로 가륵합니다."말을 마친 노인은 품 안에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빛바랜 고서 한 권을 꺼내 진현무에게 건넸다.“이것은 제가 오래전 우연히 얻은 책입니다. 군사를 운용하는 법과 진법, 그리고 정교한 병기를 만드는 방법까지 기록되어 있지요. 유씨 가문이 군세를 키우며 병력을 훈련시키고 있다 하니, 필시 그와 관련된 많은 비밀을 감추고 있을 것입니다. 부디 이 책이 유씨 가문의 악행을 밝혀내고, 그들을 무너뜨리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진현무가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고서를 받아들며 고개를 숙였다."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노인과 작별한 후, 나와 진현무는 서둘러 하산길에 올랐다. 길을 재촉하는 와중에 틈틈이 고서를 살펴보니, 그 안에 담긴 계

  • 명월에 비친 눈물   제19화

    나와 진현무는 마을에 머물던 중, 유씨 가문이 무려 삼천 명에 달하는 병사를 은밀히 이동시켰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들이 현재 진을 치고 머무는 곳은 자죽산이라 했다.그 소식을 들은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자죽산은 지세가 워낙 험준하여 공격하기는 어렵고 방어하기에는 더없이 유리한 곳이었다. 유씨 가문이 병력을 그곳으로 옮겼다는 것은, 이미 반역을 위한 치밀한 대비를 끝마쳤다는 뜻이다.하지만 이는 우리가 유씨 가문을 단번에 몰락시킬 결정적인 반역의 죄증을 찾아낼 수도 있다는 유일한 희망이기도 했다.“이번 길은 필시 죽음을 넘나드는 험난한 여정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유씨 가문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낼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릅니다.”나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저는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백성들의 피땀을 착취해 온 유씨 가문을 무너뜨리고 당신의 짐을 나눌 수만 있다면, 저는 지옥 끝까지라도 함께하겠습니다.”우리는 행장을 꾸려 즉시 자죽산을 향해 떠났다. 가파른 산길은 험악했고 숲은 칼날처럼 우거져 한 걸음 한 걸음이 고난의 연속이었으나, 우리의 마음속에 품은 신념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마침내 자죽산 깊은 자락에 도착했을 때, 사방에는 유씨 가문의 병사들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숲 곳곳을 촘촘히 오가는 병사들의 모습에, 우리는 숨을 죽인 채 풀숲에 몸을 웅크리고 틈을 엿보았다.이윽고 짙은 밤의 장막이 산천을 뒤덮자, 우리는 샛길을 따라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그때, 저 멀리 앞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진현무는 재빨리 내 어깨를 끌어당겨 우거진 덤불 뒤로 숨겼다.횃불을 든 병사 무리가 우리가 숨은 덤불 바로 앞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자네도 들었나? 유씨 가문이 이번에 큰 곤경에 빠진 모양이 걸세. 결정적인 증거를 누군가에게 잡히는 바람에, 대감께서 요새 밤낮으로 안절부절못하신다더군.”“쯧쯧, 우리 같은 일개 병사들이야 알 바 아니지. 위에서 목숨 걸고 지키라 하니 지킬 뿐, 괜히 헛소문 퍼뜨리다 목이나 날아가지 말게나.”나는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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