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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리는 첩이 아니라 황태자비였다

내 자리는 첩이 아니라 황태자비였다

بواسطة:  뚜야مكتمل
لغة: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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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헌은 과거를 보러 도성으로 떠나기 전, 장원급제하는 날 십 리에 걸친 화려한 혼례 행렬로 나를 맞으러 오겠다고 약속했다. 나 역시 집안의 재산을 모두 쏟아부어 도성의 연줄을 마련해 주며 그의 벼슬길을 닦아 주었다. 그가 장원급제자로 도성을 누비던 날, 나는 도성에서 가장 좋은 주루를 통째로 빌렸다. 하지만 그곳에서 본 것은 승상의 여식과 시를 주고받으며 다정히 웃는 고재헌이었다. 혼약은 언제 지킬 것이냐고 한마디 물었을 뿐인데, 그의 낯빛이 싸늘하게 굳었다. "온몸에 돈 냄새나 풍기는 천박한 여자가 어찌 장원급제자의 부인 자리를 넘봐?" "이제 폐하의 총애를 받는 몸이라 앞날이 창창하거늘, 내가 누구와 혼인할지를 일개 장사치 계집이 감히 입에 올려?" 장원 잔치에서 그는 내가 준비한 축하 선물이 속물스럽다며 일부러 깎아내렸다. 그러고는 승상의 여식이 그린 난초 그림은 맑고 고아하다며 극찬했다. "이토록 재주가 빼어난 귀한 규수라야 내 배필이 될 만하지." "그 장사치 계집에게서는 그저 돈 냄새만 날 뿐이지." 그는 내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상인의 딸이라 여겼다. 하지만 내가 돌아서는 순간... 삼 년 동안 애타게 구애해 온 동궁의 황태자에게 시집가겠노라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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الفصل الأول

제1화

"정화 아가씨의 축하 선물은 정말... 남다르네요."

장원 잔치에서 승상의 여식 서정란이 입을 가리고 작게 웃더니, 내가 가져온 순금 장원급제 기원 장식품을 가리켰다.

"금빛이 번쩍번쩍하니, 상인 집안 출신인 정화 아가씨에게 참 잘 어울려요."

그 곁에는 오늘 막 장원급제한 고재헌이 서 있었다.

내 모든 것을 쏟아부어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놓은 남자였다.

그 말에 고재헌의 미간이 아주 희미하게 찌푸려졌다.

그는 술잔을 들어 올렸으나 내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정란의 그림이야말로 오늘 최고의 작품이지."

"<고산유수>의 깊은 뜻과 꼿꼿한 기품을 이런 천박한 물건에 어찌 견주겠느냐?"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연회장 구석구석까지 또렷이 퍼졌다.

연회장에 있던 유생들과 관리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동정과 멸시가 뒤섞인 시선이었다.

술잔을 받친 손가락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재헌, 저는..."

"방자하다!"

고재헌이 매섭게 말을 끊었다.

눈에는 차가운 혐오가 가득했다.

"감히 일개 장사치 계집이 내 이름을 입에 올려?"

"문정화, 네 분수를 알아라."

나는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한때 그는 달빛 아래서 내 손을 붙잡고 맹세했다.

내 이름 두 글자가 평생 가슴에 새길 낙인이라고.

그러나 이제 그 이름은 내가 그에게 들러붙으려 한다는 죄의 증거가 되었다.

서정란은 애교 섞인 웃음을 흘리며 그의 곁에 기대었다.

"장원 나리, 어찌 그리 노하세요? 정화 아가씨도 성의를 보인 거예요. 다만... 타고난 신분 때문에 보는 눈이 조금 좁을 뿐이죠."

"풍류도 모르고 금은밖에 모르는 것 역시 어쩔 수 없잖아요."

고재헌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서정란을 향한 눈길에는 내가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한 다정함과 애정이 어려 있었다.

"정란의 말이 맞아. 내가 잠시 흥분했군."

그가 다시 나를 돌아보자 방금 전의 온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냉랭한 눈빛뿐이었다.

"네가 가져온 축하 선물은 받겠다."

"문씨 가문이 그동안 베푼 도움도 잊지 않으마."

"내가 조정에서 자리를 잡고 승상부에 혼담을 넣은 뒤에도 네가 원한다면, 동쪽 별채로 들여 첩으로 삼아 주마."

"그래야 지난 정분도 저버리지 않는 셈이겠지."

고재헌의 목소리는 무심했다.

그저 흔한 상 하나를 내리는 듯했다.

연회장이 순식간에 술렁였다.

"첩이라고? 문정화도 참 딱하네. 그자를 위해 집안 재산을 거의 다 쏟아부었다던데."

"딱하긴 뭐가 딱해? 상인의 딸이 장원 나리의 첩이 된다니, 감지덕지해야지!"

"맞아. 승상의 여식이 어떤 신분인데 감히 경쟁할 생각을 해?"

귓가를 파고드는 수군거림을 들으며, 서로를 향해 애틋한 눈길을 주고받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던 마지막 온기마저 끝내 싸늘하게 식었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을 들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장원 나리와 정란 아가씨께 미리 축원드리지요. 백년해로하시고 귀한 자식도 어서 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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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정화 아가씨의 축하 선물은 정말... 남다르네요."장원 잔치에서 승상의 여식 서정란이 입을 가리고 작게 웃더니, 내가 가져온 순금 장원급제 기원 장식품을 가리켰다."금빛이 번쩍번쩍하니, 상인 집안 출신인 정화 아가씨에게 참 잘 어울려요."그 곁에는 오늘 막 장원급제한 고재헌이 서 있었다.내 모든 것을 쏟아부어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놓은 남자였다.그 말에 고재헌의 미간이 아주 희미하게 찌푸려졌다.그는 술잔을 들어 올렸으나 내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정란의 그림이야말로 오늘 최고의 작품이지.""의 깊은 뜻과 꼿꼿한 기품을 이런 천박한 물건에 어찌 견주겠느냐?"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연회장 구석구석까지 또렷이 퍼졌다.연회장에 있던 유생들과 관리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동정과 멸시가 뒤섞인 시선이었다.술잔을 받친 손가락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재헌, 저는...""방자하다!"고재헌이 매섭게 말을 끊었다.눈에는 차가운 혐오가 가득했다."감히 일개 장사치 계집이 내 이름을 입에 올려?""문정화, 네 분수를 알아라."나는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한때 그는 달빛 아래서 내 손을 붙잡고 맹세했다.내 이름 두 글자가 평생 가슴에 새길 낙인이라고.그러나 이제 그 이름은 내가 그에게 들러붙으려 한다는 죄의 증거가 되었다.서정란은 애교 섞인 웃음을 흘리며 그의 곁에 기대었다."장원 나리, 어찌 그리 노하세요? 정화 아가씨도 성의를 보인 거예요. 다만... 타고난 신분 때문에 보는 눈이 조금 좁을 뿐이죠.""풍류도 모르고 금은밖에 모르는 것 역시 어쩔 수 없잖아요."고재헌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서정란을 향한 눈길에는 내가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한 다정함과 애정이 어려 있었다."정란의 말이 맞아. 내가 잠시 흥분했군."그가 다시 나를 돌아보자 방금 전의 온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남은 것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냉랭한 눈빛뿐이었다."네가 가져온 축하 선물은 받겠다.""문씨 가문이 그동안 베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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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나는 잔을 단숨에 비운 뒤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첩으로는 다른 이를 들이시지요, 장원 나리.""저는 첩으로 살지 않습니다."말을 마친 나는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연회장을 가득 채운 경악과 조롱은 모조리 등 뒤로 내던졌다.등 뒤에서는 비웃음이 끊이지 않았다."겨우 상인의 딸 주제에 뭘 믿고 저리 뻐기는 거야?""그러게. 장원 나리의 첩이 되는 게 그리 억울하대?"나는 그들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저택으로 돌아온 나는 집사에게 말했다."황태자 전하께 전해 주세요. 제가 혼인하겠다고요."삼 년 전, 문씨 가문의 별원 뒤편 산에서 죽어 가던 한 소년을 구했다.그저 몰락한 유생인 줄 알고 사람을 시켜 저택으로 데려와 치료하게 했다.그런데 상처가 낫자, 자신이 이 나라의 황태자라며 나를 아내로 맞겠다고 했다.그때는 열이 심해 정신이 흐려졌다고만 여겼다.그를 데리러 금위군이 찾아오고 나서야 그 말이 사실임을 알았다.그 뒤 삼 년 동안, 이찬은 매달 사람을 보내 서신을 전했다.글자마다 진심 어린 구혼의 뜻이 가득했다.하지만 마음속에 고재헌을 품고 있던 나는 줄곧 답을 주지 않았다.이제 와 돌이켜보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다음 날, 도성을 뒤흔든 소식이 퍼졌다.당대 황태자 이찬이 곧 황태자비를 맞이한다는 것이었다.혼례는 사흘 뒤로 정해졌다.온 도성은 어느 집안의 귀한 규수가 그 엄청난 복을 누리게 되었는지 궁금해했다.바깥의 온갖 소문은 아랑곳하지 않고, 혼례복을 고르러 도성에서 가장 큰 비단 가게 자수각으로 향했다.참으로 공교로웠다.문턱을 넘자마자 고재헌과 서정란을 마주쳤다.두 사람은 다정히 붙어 서서 비녀 하나를 고르고 있었다.눈이 밝은 서정란이 단박에 나를 발견했다.그녀는 곧바로 고재헌의 팔을 끌어안고 간드러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자수각 안의 손님 모두에게 정확히 들릴 만큼의 크기였다."어머, 정화 아가씨 아니세요?"서정란은 놀란 척 입을 가렸다."정화 아가씨, 어제 장원 잔치에서 '저는 첩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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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서정란은 물론, 그 자리에 있던 귀부인들마저 혼례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세상에, 이건... 전설로만 듣던 봉우하피(鳳羽霞帔: 봉황 깃털 무늬 혼례복) 아닌가요?""이... 이게 대체 얼마짜리야?"서정란의 눈에 강렬한 탐욕이 번뜩였다.혼례복을 뚫어지게 바라보느라 숨까지 가빠졌다.그녀는 곧바로 고재헌을 돌아보며 그의 팔을 세차게 흔들었다.목소리에는 애교가 뚝뚝 묻어났다."재헌 오라버니, 저 혼례복, 제가 갖고 싶어요. 사 주세요. 저걸 입고 오라버니께 시집갈래요."고재헌의 허영심은 한껏 채워졌다.그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내게 명령했다."문정화, 옷 한 벌일 뿐이다. 정란에게 양보해라."잠시 말을 멈춘 고재헌의 눈에 멸시가 어렸다."네 신분에는 애초에 이런 혼례복이 어울리지 않는다. 나중에 붉은 천 몇 척을 끊어 주는 것만도 더없는 은혜로 여겨라.""이런 진상품은 정란처럼 귀한 규수라야 걸칠 자격이 있다."나는 여전히 침묵한 채 혼례복만 가만히 바라보았다.고재헌은 내 침묵을 말없는 항거로 받아들였다.마침내 인내심이 바닥난 그의 목소리에 위협이 실렸다."문정화, 마지막 기회다. 양보하지 않으면 절대 내 저택에 첩으로 들이지 않겠다."내가 물러서지 않자 서정란은 품에서 승상부의 패를 꺼내 탁 소리가 나도록 계산대에 내려쳤다."주인장, 눈을 똑바로 뜨고 이게 뭔지 봐라! 나는 승상부의 적녀다.""이 혼례복은 내가 갖겠다! 누가 감히 싫다고 입이라도 뻥긋해?"서정란은 승상부의 이름만 내세우면 온 도성이 벌벌 떨 줄 알았다.하지만 주인장은 가볍게 허리를 굽혔을 뿐이었다.얼굴에 띤 미소는 예의 바르면서도 거리감이 분명했다."정란 아가씨, 참으로 송구합니다.""이것은 정화 아가씨께서 석 달 전에 주문하신 혼례복입니다. 저희 자수각에서 가장 솜씨 좋은 자수 장인 서른 명이 밤낮없이 만든 것입니다.""저희는 무엇보다 약조를 중히 여깁니다. 이 물건은 정화 아가씨의 것입니다."주인장은 고개를 들고 한 자 한 자 더없이 또렷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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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소식을 들은 고재헌은 예상대로 찾아왔다.곤경에서 구해 주러 온 것이 아니었다.나를 비웃으러 온 것이었다.그는 병사가 봉인한 문씨 저택 대문 앞에 오만한 자세로 서 있었다."문정화, 무엇 하러 이 고생을 자초하느냐?""그 혼례복을 정란에게 양보하라고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 순순히 들었다면 어찌 오늘 같은 꼴이 되었겠어?"고재헌은 몹시 가슴 아프다는 듯 꾸며 낸 표정을 지었다."이제라도 고개만 끄덕여라. 정란에게 사과하고 혼례복을 보내면, 내가 승상부에 가서 사정해 문씨 가문을 지켜 주마.""봐라. 내 마음에는 아직 네가 있다."그 위선적인 낯짝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구역질이 치밀었다.고재헌은 내가 막다른 길에 몰려 무릎 꿇고 빌 수밖에 없다고 여긴 듯했다.그때, 질서 정연한 말발굽 소리가 멀리서부터 다가오며 긴 거리를 뒤덮은 정적을 깨뜨렸다.금빛 갑옷을 두른 황실 친위군이 화려한 가마를 호위해 문씨 저택 앞에 멈춰 섰다.선두에 선 내관이 황금빛 칙서를 펼쳐 높이 외쳤다."황제폐하의 칙서가 도착하였소!"고재헌과 구경하던 사람들이 모두 얼어붙었다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하늘의 뜻을 받들어 황제페하께서 칙서를 내리노라. 황태자의 혼례를 준비하고자 문씨 명의의 모든 상점을 오늘부로 '황실 조달처'로 삼아 혼례에 필요한 물자를 전담하게 하노라. 누구도 이를 방해하거나 소란을 피워서는 안 된다. 칙명을 받들라!"칙서가 선포되자 문씨 저택을 포위했던 병사들이 넋을 잃었다.이내 털썩털썩 주저앉아 바닥 가득 무릎을 꿇었다.가마의 휘장이 걷히고, 검은 망포(蟒袍: 이무기 무늬의 황족 예복)를 입은 이찬이 내려섰다.그는 사람들을 가로질러 곧장 내 앞까지 걸어왔다.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한없이 다정했다.이찬은 손을 들어 내 어깨에 내려앉은 잎 하나를 살며시 털어 주었다."두려워하지 마라."그가 나직이 말했다."다 내가 처리하마."그가 가져온 것은 포위를 풀어 줄 칙서만이 아니었다.옥새가 찍힌 계약서도 한 묶음이나 되었다.강남 지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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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술이 관복을 흠뻑 적셨지만 고재헌은 알아차리지도 못했다.머릿속이 웅 울렸다.동료도, 시회도, 앞날도...모조리 머릿속에서 사라졌다.'그럴 리 없어!''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돈 냄새가 진동하는 장사치 계집 문정화가 어떻게 황태자비가 된단 말이야?'고재헌은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시회장을 뛰쳐나갔다.사람들을 밀쳐 내며 미친 듯이 성 남쪽의 문씨 저택으로 내달렸다.'믿을 수 없어. 단 한마디도 믿지 못해!''나를 굴복시키려고 꾸민 비열한 수작일 거야!'거친 숨을 몰아쉬고 머리카락까지 흐트러진 채, 고재헌은 비틀거리며 문씨 저택이 있는 골목 어귀에 도착했다.그 순간 걸음이 우뚝 멎었다.열여섯 사람이 메는 봉황 장식 혼례 가마가 문씨 저택 앞에 선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천하의 여인에게 허락된 가장 높은 영광을 상징하는 가마였다.그가 '속되고 천박하다', '첩감밖에 안 된다'고 했던 여인이 눈부시게 화려한 봉우하피를 걸치고, 구룡사봉관(九龍四鳳冠: 용 아홉과 봉황 넷을 장식한 관)을 쓴 채 부축을 받으며 대문을 나서는 모습도 똑똑히 보았다.차갑고 고고하기로 이름난 황태자 이찬이 한없이 소중한 것을 대하듯 내 손을 잡아 봉황 가마에 올려 주는 모습도 똑똑히 보았다.그 순간, 소란스러운 인파 너머에서 고재헌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담담히 한 번 바라보았다.아무런 파문도 일지 않는 고요한 눈이었다.그 눈길은 벌겋게 달군 쇠꼬챙이처럼 고재헌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고재헌은 끝내 이성을 잃었다."안 돼!"그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인파를 헤치고 황실 친위군의 저지를 뚫었다.모든 것을 내던진 채 혼례 가마 앞을 가로막았다."문정화! 당장 내려와!"고재헌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가마의 창을 노려보았다.얼굴은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왜? 왜 그런 거냐고?""대체 무슨 요사스러운 수작으로 황태자 전하를 홀린 거야? 정숙하지도 못한 년!"도성의 백성들은 미쳐 날뛰는 새 장원급제자를 보며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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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호위들이 고재헌을 끌고 간 뒤, 이찬은 가마 앞으로 돌아와 안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놀라게 했구나. 이제 다시 출발하자."의장대가 다시 혼례 음악을 연주하자 장대한 행렬은 황궁을 향해 나아갔다.그 자리에는 고재헌과 구경꾼들의 경악만 남았다.혼례 가마가 고재헌의 곁을 지날 때에도 나는 다시는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고재헌은 온 도성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거리에서 황태자의 혼례 가마를 가로막고, 황태자비를 모욕하고, 황태자 전하의 발길에 나가떨어진 데다 사람들 앞에서 뺨까지 맞았다.그는 부임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새 장원급제자였다.그러나 기린아에서 모두가 피하는 미치광이로 추락했다.반면 나는 순조롭게 동궁의 안주인이 되어 정식 황태자비의 자리에 올랐다.이찬은 내게 더없이 잘해 주었다.귀한 물건이라면 거의 모조리 내 처소로 보냈다.도성이 아직 황태자의 혼례가 남긴 기쁨에 젖어 있던 무렵이었다.작지도 크지도 않은 소란 하나가 조용히 일기 시작했다.도성과 그 주변 여러 곳의 소금값이 아무런 조짐도 없이 치솟았다.불과 보름 만에 소금값이 세 배로 뛰자 백성의 원성이 들끓었다.상소문은 눈보라처럼 황궁으로 날아들었다.폐하께서 진노하시어 호부와 승상부에 이 일을 함께 처리하라고 명하셨다.하지만 대현국의 소금 유통로가 강남 지방의 몇몇 거대 소금 상인에게 장악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누구도 선뜻 손대지 못할 골칫거리가 되었다.강남 지방에 연줄이 제법 있다고 자부하던 고재헌은 자진해서 그 일을 맡겠다고 나섰다.그는 자신이 장원급제자이고 나와 지난 인연도 있다는 사실을 대단한 밑천으로 여겼다.그 정도면 소금 상인들에게 가격을 내리게 하는 일도 손쉬우리라 믿었다.그러나 세상을 지나치게 쉽게 보았다.고재헌은 관아의 공문을 들고 들뜬 채 각 소금 상단의 도성 책임자들을 찾아다녔다.결과는 문턱조차 넘지 못한 것이었다."주인어른은 계시지 않습니다.""주인장께서 외출하셨습니다.""송구하지만 오늘은 손님을 받지 않습니다."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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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고재헌의 얼굴은 푸르락붉으락했고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그는 연거푸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이마는 금세 벌겋게 부어올랐다."모두 죄인의 잘못입니다. 제 입이 방정맞아 망발을 내뱉었습니다!""마마, 부디... 지난 정분을 보아서라도 이번 한 번만 죄인을 도와주십시오!""지난 정분?"나는 차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십 리에 걸친 혼례 행렬로 나를 맞겠다 약조하고는 승상의 여식과 시를 주고받던 그 정분을 말하는가?""아니면 내 축하 선물은 속물스럽다 깎아내리고 나를 첩으로 들이겠다던 정분을 말하는가?"내가 한마디를 보탤 때마다 고재헌의 몸은 더욱 심하게 떨렸다."내가 무슨 이유로 그대를 도와야 하지?"나는 그를 굽어보았다.눈에는 더 이상 한 점의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관직을 지켜 줘야 그대가 서정란이든 다른 귀한 규수든 또 성대하게 맞아들이지 않겠나?"고재헌의 얼굴은 잿빛으로 질렸다.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나는 목소리를 높였다."여봐라."전각 밖에서 기다리던 호위들이 곧장 안으로 들어왔다."고재헌과 그가 가져온 이 '속물스러운 축하 선물'을 모조리 밖으로 내던져라.""예!"호위 둘은 고재헌의 양팔을 붙잡고 죽은 개를 끌듯 동궁 밖으로 끌어냈다.그가 가져온 금은보화 상자도 인정사정없이 궁문 밖으로 내던져졌다.보물이 바닥 가득 흩어졌다.사흘 뒤, 고재헌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죄로 폐하께 관직을 박탈당하고 조사를 받았다.다시는 등용하지 말라는 명도 내려졌다.승상은 고재헌에게 아무런 쓸모도 남지 않았다고 판단하자 즉시 서정란과의 혼약을 깨뜨렸다.하룻밤 사이 고재헌의 공명과 혼인, 앞날이 모조리 물거품이 되었다.구름 위에서 진창으로 처참하게 추락했다.고재헌이 파직된 뒤, 승상의 무리도 그리 오래 득의양양하지 못했다.황태자 이찬은 소금값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는 기회에 단서를 따라 깊이 파고들었다.그 결과 승상 서윤석의 무리가 수년간 거액을 횡령하고 당파를 꾸려 사익을 챙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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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나는 곁에 있던 시녀에게 한마디 분부했다."찐빵 하나를 내려 주어라."시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곧 내 뜻을 알아차리고 분부대로 움직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밀가루 찐빵 하나가 서정란의 발치에 던져졌다.서정란은 그 찐빵과 품에 안은 더럽고 딱딱한 쉰 찐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조금 전까지 쏟아 내던 저주가 뚝 끊겼다.갑자기 처절한 비명을 지른 그녀는 머리를 감싸 쥐고 바닥에 웅크렸다.끝내 무너져 목 놓아 울었다.대수롭지 않은 그 하사품이 어떤 매질이나 욕설보다도 그녀를 처참하게 무너뜨렸다.그 찐빵은 거울처럼 지금의 비천하고 참담한 모습을 비추며, 마지막으로 남은 우스운 자존심마저 산산이 깨뜨렸다.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녀는 관아의 아전들에게 그 자리에서 끌려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광증을 일으켰고, 그해 겨울 어느 허물어진 사당에서 죽었다고 했다.숨을 거둘 때에도 손에는 찐빵 반쪽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승상의 무리를 제거한 뒤 이찬의 조정 내 입지는 더욱 굳건해졌다.황태자비인 나도 동궁의 여러 일을 처리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하지만 상인의 딸이라는 출신은 끝내 궁중 몇몇 사람의 눈엣가시가 되었다.그중에서도 이찬의 생모인 황후가 가장 마음에 걸렸다.황후는 면전에서 나를 곤란하게 만들지는 않았다.대신 수시로 불러 가르침을 내린다는 명목으로 실상은 내 언행을 규율하려 했다."정화, 이제 그대는 황태자비이니 신분이 지극히 귀하네. 언제나 말과 행동을 삼가야 하네.""황태자는 나라의 후계자이니 자손을 널리 이어 황실의 대를 잇는 것이 가장 중대한 일일세.""정비인 그대가 다른 이를 받아들일 도량을 보이고, 어질고 덕망 있는 측비를 먼저 골라 올려야 황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네."황후는 차를 마시며 느긋하게 규수들의 초상화 몇 폭을 꺼냈다.그림 속 여인들은 하나같이 집안이 쟁쟁한 귀한 규수였다."이들을 보게. 성품과 용모가 모두 으뜸이니 둘을 고르게. 훗날 동궁에 들이도록 하지."나는 그림들을 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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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그리고 나는 참으로 운이 좋았다.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마음을 얻었으니 말이다.영안 5년 겨울.또다시 함박눈이 쏟아지는 날이었다.나는 바닥 밑 난방 화도 덕분에 따뜻한 전각에 앉아 각지에서 올라온 백성의 사정이 담긴 상소문을 살펴보았다.이찬과 내가 나눈 약조였다.그는 바깥에서 군사와 나라의 큰일을 맡고,나는 안에서 후궁을 다스렸다.각지의 민생도 함께 살펴 그가 놓친 빈틈을 메웠다.우리의 맏아들인 일곱 살 황태자 이선은 곁의 낮은 탁자 앞에 앉아 한 획 한 획 글씨본을 따라 쓰다가, 이따금 고개를 들어 내가 든 상소문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전각 안에는 평온한 세월이 고요히 흘렀다.외딴 령주에서 올라온 보고를 펼쳤을 때 손이 잠시 멈췄다.조정에 재해 구휼금을 내려 달라고 청하는 글이었다.사정은 절절했고 글자마다 피눈물이 맺힌 듯했다.그곳에 눈 재앙이 닥쳐 백성들이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는 참상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연명으로 올린 청원서 끝에서 앞장선 이의 이름을 발견하는 순간, 눈앞이 아득해졌다.고재헌.필체에는 지난날의 날카로운 오만함이 남아 있지 않았다.떨리고 지친 흔적이 역력했지만 옛 기개만은 희미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그는 그토록 먼 곳까지 가 있었던 것이다.청원서 아래에는 나에게 따로 쓴 얇은 편지 한 장도 끼워져 있었다.봉투에는 이름 대신 '정화 친전' 네 글자만 적혀 있었다.나는 봉투를 열었다.편지에는 지난 정분을 들먹이는 말도, 내게 무언가를 청하는 말도 없었다.고재헌은 잠꼬대 같은 문장으로 어린 시절 소운성에서 함께 보낸 날들을 회상할 뿐이었다.살구꽃 위로 가랑비가 내리던 어느 해, 그에게 유지우산을 받쳐 주었던 일.추운 방에서 학문에 매달리던 어느 해, 따끈한 탕을 가져다주었던 일....편지 끝에는 령주에 작은 서당을 열어 아이들에게 글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아이들에게 자주 이런 구절을 가르친다고도 했다.'큰 바다를 본 뒤에는 다른 물이 눈에 차지 않고, 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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