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이 일이 정후부까지 연루된다면, 그녀는 원경릉의 가족들이 비난의 대상이 될까봐 두려웠다. 별전에 도착한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구사는 바로 맞은편에 서서 두손을 모은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과연 사람을 감시하는데는 일가견이 있군.’그녀는 고개를 들어 구사에게 물었다. “태상황께서 무엇 때문에 중독 증세가 있는지 알려주실 수 없습니까?” 구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원경릉 역시 그가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을 줄 알았다. 원경릉은 푸바오의 사건을 미루어보아 궁 안에 누군가가 태상황이 죽기를 바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다만 건곤전은 외부와 내부가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기에 누군가 음식이나 약에 독을 탔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만약 독을 탔다고 해도 모든 음식이나 약이 태상황 입에 들어가기 전, 희상궁이나 상선이 먼저 기미를 하고 태상황이 먹는다. 그렇다면 향로를 이용해 독을 살포 한 것인가……. 그러나 건곤전에는 태상황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선도 줄곧 곁에 있기에 만약 태상황이 중독이 됐다면, 상선도 중독 증상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늘 태감이 드나들고, 태후와 명원제 그리고 예친왕까지 항상 문안을 가기에 향로에 독을 넣었다면 진작에 발각됐을 것이다.목여태감이 태상황이 혼수상태라고 했는데, 도대체 누가 원경릉이 태상황에게 약을 주었다고 말했을까?상선? 하지만 상선은 원경릉과 우문호가 함께 들어갔을 때 원경릉이 태상황에게 약을 주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이 일은 우문호를 제외하고는 아는 사람이 없는데, 그는 이 일을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을 뿐더러, 그는 최근 며칠동안 궁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문호가 다른 사람에게 말했을까? 우문호가 멍청하다고 해도, 자신이 연루된 일을 다른 사람에게 발설할 사람은 아니었다. 만약 우문호가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사람이라면 혹시 모를까. 만약 그가 말한것이 아니라면 누군가가 추측을 했다는 건데, 도대체 누가 그녀의 행동을 주시했을까? 그녀의 머릿속에 두명이 스쳤다. 기왕과 주명취.기왕의
“가만히 지켜 본다고 판세가 뒤집히겠느냐?” 탕양의 말에 우문호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하지만 적어도 판세를 읽고 대비를 할 수 있겠지요.”탕양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왕야, 지금 이 풍랑을 맞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왕야께서 지금 몸이 안좋으니 굳이 황제께서도 양해 해주실겁니다. 지금 이 모양으로 입궐하신다면 오히려 일부러 왕야가 고육지책을 쓴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서일아, 가마를 마련하거라” 우문호는 직접 서일에게 분부했다. 서일은 난처한 표정으로 탕양을 바라보았다. 성치도 않은 몸으로 어떻게 궁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왕야, 심사숙고하십시오!”탕양이 말했다. 우문호가 어찌 심사숙고 하지 않았겠는가. 수천번을 생각해도 답은 같았다. 목여태감이 원경릉을 데려가는 순간부터 그의 머릿속에는 수천가지의 생각이 떠올랐다. 어떻게 하면 이 고비를 넘길 수 있을지 수천번을 생각해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우문호는 원경릉이 자기 혼자 살겠다고 초왕인 자신을 모함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했다. 원경릉은 그와 혼인 한 후, 궁 안에서 그녀의 뜻을 한번도 펼치지 못했고, 원경릉과 그의 사이는 늘 안좋았다. 이를 미루어보아 그녀가 그를 배신할 가능성이 충분했다. 우문호가 입궁을 하려고 하는데 문지기가 급하게 달려왔다. “왕야, 경조부 오대감(吴大人)이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탕양이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왕야를 해하려고 한 놈을 찾았을지도 몰라!” 서일은 기쁜 표정으로 눈을 반짝였다.우문호는 그 말을 듣자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오대감은 경조부의 포졸을 데리고 왔다. 여섯명의 포졸들이 문앞에 서자, 오대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탕양은 “오대감님, 왕야를 해하려고 한 자객들은 찾았습니까?” 라고 물었다. 오대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앞으로 한걸음 다가와 우문호를 보고 절을 했다. “하관(下官)이 왕야에게 인사드리옵니다.”“예의는 생략하게!” 우문호는 그를 보며 “범인이 자백을 한
소월각은 긴 정적 속에 잠겼다. 우문호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고개를 들어 탕양에게 말했다. “태상황님이 무슨 독에 중독 된건지. 가서 알아보거라”“왕야, 아마 어려울 것 같습니다.”“구사는 알고 있을 것이야!” “지금 구사는 어전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어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방금 구사도 함께 왔다 갔는데 만약 알고 있었다면 알려줬을겁니다.”우문호의 눈에 독기가 가득찼다. “본왕이 죄를 인정한다고 궁에 가서 알리거라.”“왕야!” 서일과 탕양이 동시에 그를 보았다. 왕이 미친 것일까? 죄를 인정한다니!“본왕이 죄를 인정한다. 원경릉이 저지른 일도 다 내가 지시한 일이다.” 우문호가 담담하게 말했다. 우문호가 자객을 사주했다는 것을 인정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서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왕이 왕비에게 태상황의 병을 치료하게 했다고 해도 그 방식이 옳지 않다.“안됩니다. 왕야. 지금 편치않은 몸을 이끌고 어찌 죄를 인정하시려고 합니까.”서일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한참 생각에 빠져있던 탕양이 고개를 들었다. “왕야께서는 왕비를 믿으십니까?”“다른 방도가 없다!” 우문호가 쏘아붙였다. “왕야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으니 왕비님과 한배를 탄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만약 왕비께서 판을 뒤집지 못한다면 왕야의 처지는 더 곤란해지실 겁니다. 이런 결과는 예상하셨습니까?” 탕양은 우문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 말고 다른 방법이 있느냐?” 우문호는 격분하여 소리쳤다. 그에 목구멍에서 피가 끓어 올랐다. 그는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기왕(纪王)은 비밀이 새지 않도록 철저하게 준비했을 것이다. 이미 자객도 자결한 마당에 달리 다른 증거도 없을 것이다. 이번 일로 인해 우문호만 죽어나게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원경릉이 황조부를 잘 치료하기를 바라는 수 밖에 없다. 만약 황조부의 병세가 호전된다면 그 공(功)으로 죄를 덮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문호는 부황의 냉철하고 모진 성격인지 알고 있다. 서일은 도대체
가마는 어서방 문 앞에 멈췄다. 예친왕은 탕양에게 “본왕은 황제를 뵈러 갈테니. 너랑 왕야는 여기서 기다리거라.” 라고 말했다.예친왕은 두루마기를 펄럭이며 어서방 안으로 들어갔다. 탕양은 얼굴이 잿빛이 된 정후가 궁 앞에 벌벌 떨고있는 모습을 보았다. 탕양은 그에게 가까이 걸어갔다. “후작(侯爷)나리?”정후는 누군가 자신을 부른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쭉 뻗고 그를 보았다. “탕양!”“후작나리 여기서 무엇하십니까?” 탕양이 물었다. 정후가 울상이 되어 말했다. “황제의 부름에 기다리고 있는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황제께서 사람을 시켜 저를 이리로 오라고 하셨는데 만나 뵙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오는 길에 황제께서 보낸 신하가 원경릉에 대해서 몇 마디 물어보고는……. 그냥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그가 말을 하는 도중에 목여태감이 나왔다. “초왕은 안으로 들어와 알현하라.”탕양과 서일이 우문호를 부축해 가마 밖으로 나왔다. 정후는 우문호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의 모습이 마치 종잇장처럼 닿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았다.“황제께서는 초왕만 들라하셨다!” 목여태감이 서일과 탕양을 보며 말했다.서일과 탕양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우문호를 힐끗 보았고, 우문호는 천천히 중심을 잡고 일어섰다. “태감님 안내해주시지오.”우문호가 말했다.궁으로 들어가 스무 걸음만 가면 어서방 정전에 이른다. 우문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바닥에 피가 흘렀고, 다리의 상처가 모두 터져서 걸음마다 바닥에는 섬뜩하게 피가 묻었다. 목여태감은 이런 우문호를 보고 놀랐다. 눈썹뼈 부근과 귓가에만 상처가 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심하게 다친 줄을 몰랐다. 명원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우문호가 걸어온 자리에 묻은 피를 보니 마음이 답답했다.다친지 이틀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상처에서 피가 나다니, 우문호가 나를 바보로 아는 것인가?아들 놈이 머리를 꽤나 썼구만. 우문호의 미간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걸어들어오는 길에
예친왕은 피투성이가 된 우문호를 도저히 볼 수 없어 자신의 소매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 우문호의 입에 넣었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명원제에게 말했다.“황제, 신제(臣弟)는 다섯째가 스스로 자해한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이 상처는 어의들도 치유할 수 없을텐데, 한낱 눈속임이라고 하기엔 상처가 심각합니다.”이 말을 들은 원경릉은 가슴이 철렁했다. 황제는 우문호가 스스로 자해한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다고? 예친왕의 말이 끝나자 원경릉을 감시하던 구사도 황제에게 사정했다. “폐하. 소인이 보아도 자해는 아닌 것 같습니다. 어의도 왕야가 중상을 입었다고 말했으며 후사(后事)를 준비해야 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태상황께서 왕비를 출궁시켜 왕야를 치료하게 한 것입니다. 소인이 무예를 연마해 본 적이 있어 압니다만, 칼에 베인 상처들은 생명에 큰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명원제는 담담한 눈빛으로 “모두 일어나거라.” 라고 말했다. 구사의 눈빛이 어두웠고, 황제는 시종일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어의가 급히 달려왔다. 그는 그간 궁 안에서 태상황의 병을 돌볼 정도로 실력이 있는 어의였다. 그는 급하게 무릎을 꿇고 인사를 했다. 위급한 상황이니 어의는 명원제가 일어나라고 명령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어의는 우문호의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는 약상자를 꺼냈다. 원경릉은 황제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어의가 가져온 약상자를 열고 가위를 꺼내 우문호의 옷을 자른 다음 가제로 우문호의 상처 위쪽을 강하게 감아 지혈했다. 그녀는 빠르게 그의 신발을 벗기고 바지를 잘랐다. 명원제는 우문호의 허벅지 안쪽에 난 상처를 보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직 지혈하지 못한것인가?” 그가 어의에게 물었다. 어의는 재빨리 일어나 원경릉을 거들었다. 예친왕이 자금단을 꺼내 우문호의 입에 넣은 덕에 피는 서서히 멎고 있었지만, 상처와 봉합한 곳을 잘 처리해야만 했다. 명원제는 자리에 앉아 원경릉이 능숙하게 상처를 치료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조금도 망설
우문호를 다시 살려내다원경릉은 심장 맛사지를 계속 하며, 우문호가 그저 쇼크를 일으킨 것이길 바랬다.명원제는 줄곧 우문호를 생각하면 안타까움과 슬픔이 밀려왔다. 전에 가장 아꼈던 아들 우문호가 아닌가. 비록 마지막엔 실망시켰지만 부자의 정이란 것이 그렇게 잘라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명원제는 우문호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비틀거리자 예친왕이 즉시 그를 부축했다.“떨어뜨려 놓아라!” 명원제는 머리가 어질어질한 가운데 피맺힌 목소리를 뱉는다. 이때 “현비(賢妃) 마마가 초왕 전하를 보러 온다 합니다.” 구사는 앞으로 나가 원경릉을 왕야에게서 떼 놓으려 하는데 어의가 옆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왕야께서 숨을 쉬십니다. 왕야께서 숨을 쉬세요.”명원제는 홱 고개를 돌려 초왕의 가슴이 천천히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봤다.명원제가 직접 코에 호흡이 있는지 확인했다.원경릉은 젖 먹던 힘까지 모두 쥐어짜낸 뒤라 침대에 쓰러져 후후 숨을 몰아쉬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며, 참았던 슬픔에 목 놓아 울고 싶었다. 사실 원경릉은 이미 울기 시작했다.원경릉도 자신이 예를 어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한쪽으로 무릎을 끓고 울면서 잘못을 빌었다. “아바마마, 소신이 예를 어긴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울고 싶었어요. 아바마마 잠깐만 우는 것을 허하여 주시옵소서.” 원경릉의 말은 예의에도 어긋나고, 우는 모습도 흉해서 눈물 콧물이 엉망진창이지만, 방금 아들을 잃었다가 다시 찾은 명원제는 조금도 개의하지 않고, 오히려 전에는 예뻐 보이지 않던 며느리가 귀엽게 느껴졌다.어의는 진맥을 마치고 연신 탄성을 지르며, “신기해, 정말 신기한 일이야, 하늘이 도우셨어!”예친왕은 어의를 흘겨 보며, “초왕은 살아날 운명이었군.”어의가 황급히 말을 바꾸며, “맞습니다, 초왕 전하께서 살아나실 운명이셨나 봅니다.”“뭐라고?” 명원제가 어의에게 물었다.어의는 손을 모으고: “폐하께 아룁니다, 초왕 전하는 점점 안정되어 가고 있습
태상황에게 독을 쓴 자는 누구인가“이리 돌아봐!” 우문호가 조용히 말했다.원경릉은 턱을 침대에 걸치고 웃으며 눈물을 떨군다. “죽음에서 살아 온 걸 환영한다.”“넌 짐이 죽기를 간절히 바라는 거 아냐?” 우문호는 환하게 웃는 그녀를 보았다. 이마엔 멍이 들었고, 눈 밑은 울어서 복숭아처럼 퉁퉁 부은 데다, 눈물이 더러웠던 얼굴을 타고 내려 두 줄기 하얀 피부가 드러나 있다. 사실 상상조차 못한 것이, 요 며칠 둘은 물과 불처럼 서로 싸우지 않았던가.“그래, 네가 죽길 간절히 바란 게 사실이야.” 원경릉은 눈물을 훔치며 결국 유치하게, “하지만 내 눈 앞에서 죽는 거 말고, 난 의사이고 환자가 내 앞에서 죽으면, 내 직무상 과실이 되거든.”우문호는 원경릉을 보고 슬그머니 웃었다.구사가 옆에서 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웃었다. 웃고 나서 복잡한 심경으로 원경릉을 응시했다.이 왕비는 사실 그렇게 싫지 않다.우문호가 마음을 가라앉히자, 자금단이 몸 속에서 작용하며, 단전의 기운이 서서히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우문호는 구사를 향해, “태상황 폐하는 무슨 독에 중독 되셨느냐?”구사는 앞으로 한 걸음 나와 말하길,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제 밤 태상황 폐하께서 갑자기 피를 토하시고 혼수상태에 빠지셨다는 것만 알 뿐입니다. 어의는 독에 당하셨다고 진단했습니다.”우문호는 원경릉을 보고, “네가 할바마마께 드린 약이 토혈과 혼수상태를 불러온 것은 아니냐?”원경릉은 “절대 그럴 리 없어.”“그럼 아바마마께서 조사하신 게 반드시 결과가 나와야 하겠구나.” “할바마마를 가서 뵙게 해달라고 아바마마께 말씀드리려고” 원경릉이 말했다.구사는 고개를 흔들며, “왕비 마마, 서두르지 말고 잠시 기다리시지요. 황제 폐하도 손을 쓰셨을 것이고, 분명 예친왕 전하도 말씀하실 겁니다.”밖에 서있던 정후는 마음속으론 딸 원경릉을 수백번도 더 혼을 냈다. 갖은 수단을 동원해 딸을 초왕부에 시집을 보냈더니, 좋은 일이 생기긴 커녕 안 좋은 일만 앞다투어 찾아올 줄 누가
정후의 집과 주명취의 집정후는 속으로 화가 치밀었다. 결국 원경릉 이것이 일을 치고 말았어!집으로 돌아와 충부인(冲夫人, 정후의 부인)에게 화풀이를 하며, “딸 자식을 어떻게 가르친 거야, 온 집안의 힘을 기울여 왕비 자리에 앉혀 놨더니, 우리 집안에 보답한 게 뭐가 있어? 오늘 황제 폐하께서 기분이 좋으셔서 내가 벌을 받지 않았을 뿐이지, 안 그랬으면 이번 기회에 관직이 떨어질 뻔 했다고.”정후의 부인은 줏대가 없는 사람으로 남편이 딸을 호통치자 자신도 같이 분개하며, “앞으로 걔 혼자 죽든 살든 알아서 하라고 합시다, 우리는 상관하지 말아요.”“상관은 무슨? 앞으로 만약 우리집에 와서 돈 달라고 하거든 일체 줘선 안돼.” 생각해보니 전에 원경릉에게 돈을 주고 병부(兵部)에 뇌물을 주게 한 게 떠올랐으나 그 돈은 이미 떼인 돈이나 다름 없다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정후 부인은 덩달아 “알겠어요.” 대답했다.정후가 차를 한 잔 마시며 계속 생각에 잠겼다. 원경릉이 초왕의 총애를 얻지 못하면 왕비의 지위도 믿을 게 못되니 다음 수를 잘 두는 수밖에 없다. 정후는 병부 시랑(侍郎)을 몇 년간 역임하며 상서(尚書) 자리가 3명째 바뀌는 것을 봤지만, 그가 승진할 기회는 오지 않고,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주씨 집안 쪽은 조정에 이미 적지 않은 사람이 앞자리에 몰려 있다는 소문이 돌고, 제왕이 태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서, 만약 주씨 집안 쪽에 돈을 써서 줄을 대면 어쩌면 일이 성사될 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쓸 수 있는 은자가 얼마나 되는가?” 정후가 부인에게 물었다.“2만 2천냥쯤 됩니다.” 정후 부인이 대답했다.“가서 3천냥만 좀 가져 오구려. 주씨 집에 좀 다녀와야 겠어.”정후 부인은 어리둥절해 하며, “주씨 집이요? 거긴 아닌 거 같아요. 주씨 집 큰 딸 주명취가 원래 초왕한테 시집가려던 걸 경릉이 때문에 깨졌잖아요. 주씨 집안이 우리를 원망해도 모자를 판에 우리를 상대나 하겠어요?”정후 부인은 주부인(周夫人, 주명취의 어머니)
우문호 일행은 강북부로 향하는 내내 북방의 풍경과 풍속을 경험했다. 그로 인해 속도는 매우 느리긴 했지만 말이다.그날 밤, 우문호는 갑자기 악몽에서 깨어나 온몸에 땀을 흘리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했다.그러자 원경릉이 벌떡 일어나 그를 껴안으며 물었다.“무슨 일이오? 악몽을 꾼 것이오?”우문호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아직 날씨가 덥지 않은 데다가 북방에 있어 오히려 날씨까지 쌀쌀했기에, 그는 아직도 악몽이 생각나는 듯, 창백한 표정을 지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꿈에서 셋째 형님이 피투성이인 채 죽어가고 있었소…”원경릉은 그저 꿈이라 생각하고 위로해 주려 했지만, 이내 우문호의 강한 감응 능력을 떠올렸다. 갑자기 나타난 이 꿈이 형제간의 영적 감응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우문호도 점점 불안한 생각에 빠졌다.“강북부가 비록 평온해 보여도 사실 북당에서 가장 복잡한 곳이오. 온갖 사람들이 섞여 있고, 북막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네. 게다가 셋째 형님도 무모한 사람이니, 진짜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지 걱정되오. 원 선생, 어서 빨리 가야겠소.”원경릉이 서둘러 옷을 입으며 말했다.“아니, 내가 먼저 가겠소. 정말 상처를 입었다면, 내가 가야지 도움이 되지 않겠소? 게다가 난 빨리 갈 수 있잖소.”“좋소. 그럼 먼저 가시오. 우리도 곧 출발하겠소.”우문호는 너무 생생한 꿈 탓에, 더 이상 천천히 갈 수 없었다.“사람을 불러야겠소.”원경릉은 재빨리 옷을 입은 후, 우문호에게 포옹하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먼저 가겠소.”“조심하시오.”우문호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 원경릉은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원경릉이 사라지자마자 우문호는 방 문을 두드리며, 출발하자고 소리쳤다.우문호의 소리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이 밤중에 출발이라니, 무슨 큰 일이 생긴 걸까?이때 수보가 겉옷을 걸치고 나오며, 우문호의 팔을 잡고 물었다.“무슨 일입니까?”우문호가 답했다.“나도 모르네. 하지만 셋째 형님에게 무슨 일
스무 명이 넘는 자 중 단 한 명만 생포하고 나머지는 전부 섬멸되었다.안왕은 재빨리 위왕의 혈을 눌러 지혈한 후, 중상을 입은 위왕을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먼저 의원을 찾으러 간 사람이 있었기에, 의원은 이미 저택에 도착해 있었다. 이때 안왕이 피투성이가 된 채, 의원의 옷깃을 움켜잡았다.“살리시게, 살려야 하네. 꼭 살아야 하네.”의원이 바로 약상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진정하십시오.”의원이 위왕의 옷을 가위로 자르자마자, 상처가 바로 드러났다. 다행히도 먼저 지혈한 덕분에 저택까지 돌아올 수 있었다.하지만 심각한 부상 상태와, 깊은 복부의 자상 때문에 장기를 다친 것으로 판단한 의원은 간단한 처리를 마친 후, 안왕에게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소인의 의술이 부족한 탓에, 치료를 감당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경성에서 다치셨다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강북부는 의료가 낙후된 지역이다. 비록 혜민서를 설립한 이후 의사를 집중적으로 양성하긴 했지만, 경성에 비하면 여전히 많이 부족했다.안왕이 숨을 헐떡이며 눈에 핏줄을 세우고 소리쳤다.“중상을 입었는데 어찌 도성으로 돌아가란 말인가? 긴 여정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은가?”의원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그것도 참 문제입니다. 황실 친왕이 자금단을 가지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혹시 저택에 있습니까?”“없네!”안왕은 위왕의 호흡이 점점 미약해지는 모습을 보며 절망감에 휩싸여 털썩 주저앉았다.“내가 갖고 있던 자금단은 이미 먹은 지 오래된 것이네.”“경성… 경성으로…”의식을 잃은 위왕은 그저 경성이라는 말만 중얼거렸다.안왕은 눈물을 닦으며 무릎을 꿇었다.“형님, 조금만 더 버티십시오. 의원이 약을 썼으니, 황후가 오실 때까지 며칠만 버티십시오.”심각한 상황이니, 경성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돌아가려면 최소 일주일 이상은 걸리지만, 황후는 아마 사흘 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경성으로……”위왕은 의식을 잃기 전까지 계속해서 경성을 찾았다. 그곳은 그가 너무
위왕은 마음속에 또 하나의 걱정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다섯째가 곧 강북부에 오는 것이었다. 비록 이 일은 소문내지 않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순행했으니, 소문이 새어나가게 마련이다.설령 그가 강북부에 온다고 밝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의 최종 목적지가 강북부라는 것은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북막인들이 다섯째에게 해를 가하려는 것은 아닐지 걱정되었다.아무래도 단 한 순간도 북막인의 야심은 멈춘 적 없었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는 방심하지 않고, 허점을 찾아내겠다는 결심을 다지며 이들을 감시했다. 확실한 증거가 없는 어디까지나 본인의 추측일 뿐이기에, 그는 이 일을 아직 넷째에게 말하지 않았다.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 그들이 진짜 금나라 상인이라는 것이 밝혀지기라도 한다면, 두 나라의 사이만 영향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무장이지만, 외교적인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아주 작은 불씨라도, 마음먹은 자가 부추기면 걷잡을 수 없는 큰불이 될 수 있는 법이기에,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감시 끝에 마침내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 처음엔 열댓 명 정도였던 이들 무리는 이틀 사이 스무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새로 온 자들은 앞선 사람들과는 다르게, 군인이라기보다는 강호 인사의 분위기를 풍겼으며, 무공 또한 약하지 않아 보였다.위왕은 경계심을 품고, 밤새 직접 사람들을 이끌어 조사에 나섰다.앞서 만났던 금나라 사람들은 여전히 질문에 순순히 응했지만, 새로 온 강호인들은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위왕의 질문에도 그저 시큰둥한 태도만 보이며 북당인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위왕은 건방진 그들의 태도에, 몇 마디 호통을 쳤고, 그 모습에 강호인들은 참지 못하고 바로 위왕에게 손을 쓰려고 했다.위왕은 조사하기 위해 온 터라, 데리고 온 부하도 단 몇 명 뿐이었기에, 상대가 일반적인 조사에도 이렇게 쉽게 공격하려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앞서 온 금나라인들이 말리려 했지만, 그들이 손을 쓰자, 사태가 수습되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남강에 며칠 머무는 동안, 아홉째와 함께 남강의 풍경을 둘러보고, 북강에도 다녀왔다.지금 북강 백성들은 조정에 대한 소속감이 아주 강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남강을 다스린 정책이 정말 훌륭했기에, 백성들 모두 좋은 날을 보낼 수 있었기에, 자연스레 황제에 대한 존경심도 깊어진 것이었다.황제와 황후가 지나가는 곳마다 백성들은 길가에 모여서 열렬히 환영했다.그들은 이번 순행 내내 오계부에서 신분을 밝힌 것 외에는 항상 미복으로 다녔다. 하지만 남강에서 우문호는 황제의 신분을 드러냈다.우문호는 백성들의 신뢰와 경외심에서 큰 성취감을 느꼈고, 매우 기뻤다. 그는 줄곧 원경릉의 손을 잡고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과거 북강은 방어를 위해 무술 함정이 많았지만, 이제는 모두 제거되었다. 그리고 많은 백성이 산 아래 평원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마을을 이루었다. 정화를 구하러 왔을 때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기쁜 마음과 함께 우문호는 감사함도 느꼈다. 이것은 결코 그 혼자만의 공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남강을 떠나야 하는 날이 다가오자, 원경릉은 만아와 여덟째를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곧 변성으로 가야 했기에, 아쉬움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잠시였다. 남강을 벗어나자마자, 그녀는 아이들과 만날 생각에 들뜨기 시작했다."원 선생, 그들에게 말했소?"길에서 우문호가 물었다."아니, 몰래 가는 것이오."원경릉은 웃으며 말했다."교활하구먼. 그래도 만두가 이미 알려줬을 수도 있을 텐데."지금은 경단과 찰떡, 그리고 계란이 셋만 그곳에 있었다."셋이 다섯 개 성을 다스린다니, 분명히 힘들 것이오."원경릉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그렇소.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아졌네. 이제는 태평해 보이니."우문호도 아이들이 안쓰러웠다."이번에 가서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며 충분히 쉬게 해줘야 하오."사실 성하나를 다스리는 것과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점 없이, 매우 힘든 일이었다.한편, 강북부에서는 최근 강북부 무구산 주변에 신비한 상단
그러자 홍엽이 그를 바라보며 멈칫했다."자네가 중매를 서겠다고?""안 되오?""말도 안 되는 소리 말게. 자기 혼사도 해결 못 하는데 중매는 무슨. 난 못 믿네!"냉정언이 어깨를 으쓱였다."못 믿으면 말고. 이래 봬도 내가 명문가 아가씨나 협녀를 많이 알고 있소."홍엽은 손으로 그의 목을 움켜잡으며 소리쳤다."알고 있는 아가씨가 있으면 진작 말했어야지! 경성으로 돌아가자마자, 당장 소개해 주시게!"냉정언은 웃으며 그의 손목을 옆으로 밀어냈다."중매 값이 워낙 비싸서. 십만 냥 아니면 쉽게 안 나서오.""돈이 대수요?"홍엽이 교활하게 웃으며 말했다."우린 지금 한집에 살고 있소. 그러니 자네가 돈을 어디에 숨겼는지, 다 알고 있네. 그동안 꽤 많이 챙겼으니, 돌아가서 돈은 두둑이 주겠네."그 말에 냉정언이 깜짝 놀랐다."내 돈을 노리고 있었소? 진짜 도둑을 집에 들였군! 늙어서 쓸 돈이네, 그 돈을 혼사에 쓸 생각은 하지 마시오!""명여가 우리를 챙길 테니, 그렇게 쩨쩨하게 굴지 마시오."홍엽이 새침하게 말했다."나도 돈이 많소. 다만 남의 돈을 쓰는 게 훨씬 재밌을 뿐이네."냉정언이 숨을 들이쉬었다."안 되겠네. 경성에 돌아가자마자 자네를 쫓아내야겠소."홍엽이 말했다."쫓아낼 수 있으면 쫓아내 보시게. 게다가 자네가 나를 청할 때, 뭐라고 했는가? 얼마든지 살아도 된다고 했잖소. 이제 와서 후회하는 것이오?""이야, 홍엽, 어찌 이리 뻔뻔스러워진 것이오?""뻔뻔하지 않으면, 어찌 당신 집에서 이렇게 공으로 먹고살 수 있겠나?"홍엽은 크게 웃으며 그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수보, 신을 모시는 건 쉬워도 보내는 건 어렵다고 하잖소. 이미 집안에 들어갔으니, 쫓아내기는 힘드네. 후회해도 소용없소. 수보의 등골 빼먹다 죽을 것이오. 관에 수의까지 얻어 쓸 생각이라, 죽으면 자네가 장례식까지 마련해줘야 하네."수보는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애써 이를 악물며 말했다."진짜 뻔뻔하오!"홍엽은 박장대소했다.멀리 복도 끝에
“예, 그립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놀고 싶기도 합니다.”그는 말하다가, 갑자기 신이 난듯 몸을 들썩이며 말을 이어갔다.“여긴 정말 재미있습니다. 아홉째와 나가면 큰 산도 있고, 꽃도, 나무도 많습니다. 물고기도 많고, 사람도 많고, 뭐든지 엄청 많았습니다.”우문호는 웃으며, 못내 안쓰러움을 느꼈다. 예전에 그를 궁 안에 가두고, 거의 밖으로 데리고 나가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사람이 그를 데리고 나가는 것도 신경 쓰였다.“이곳이 마음에 들면, 좀 더 오래 있어도 된다.”우문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예, 정말 좋습니다. 다만, 형님과 형수님이 그리웠습니다. 이렇게 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여덟째는 흥이 오른 상태로 그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어서 들어가시지요! 아홉째가 형님이 내일 오신다고 맛있는 음식을 많이 준비했습니다.” 그는 뒤돌아 원경릉에게 외쳤다.“형수님, 빨리 따라오십시오. 맛있는 거 많습니다.”미색은 웃으며 꾸짖었다.“이 무심한 녀석, 다섯째 형수님만 챙기고, 여섯 형수가 배고픈지는 묻지도 않는 것이냐?” 여덟째는 그제야 미색을 본 듯,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여섯째 형수님도 오셨습니까? 여섯째 형님도 오신 것입니까? 와, 너무 좋습니다!”“질투하다니?”원경릉은 미색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미소를 지었다.“여덟째는 너보다 나를 더 좋아하는 것이다.”“아유, 참!”미색은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여덟째는 바로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항상 그림과 책자를 선물하는 여섯째 형수님도 좋아했기 때문이다.그는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그... 그럼 같이 드시지요. 음식 많습니다.”“장난이다. 난 질투 안 해.”미색은 기쁘게 말했다.여덟째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고, 다들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원경릉이 만아에게 말했다.“정말 이곳에서 즐겁게 지내고 있구나. 예전보다 훨씬 활발해졌고, 말도 많이 하네. 이 모든 게 아홉째 덕분이다.”만아는 웃으며 말했다.“예, 둘이 시간이 날 때마다 밖으로 나가, 더
원경릉은 발끝을 들어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우문호는 그런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원 선생, 행복하오?”“행복하오.”“하하하. 지금이 아닌, 나와 함께했던 모든 날이 행복했냐고 물어보는 것이오.”“모든 순간이 당연히 행복하고, 기쁘오!”원경릉은 스스로를 자조하듯 웃었다.“나 같은 집순이가 이렇게 결혼생활이 행복할 줄 누가 알았겠소?”한때 그녀는 자신이 평생 결혼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고, 사랑 없는 삶도 부족함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그녀는 사랑을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었지만, 사랑은 사실 정말로 중요했다.산꼭대기에 앉아, 차가운 바람을 맞고 있었지만,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의 풍경을 눈에, 그리고 마음에 깊이 새기고 싶었다.그리고 함께 늙어간 후, 다시 천천히 되새기고 싶었다.영산에서 내려온 후, 그들은 다시 여정을 이어나갔다. 이번 목적지는 바로 남강이었다.명절이 지난 뒤, 아홉째는 여덟째를 데리고 먼저 남강으로 돌아갔다. 다들 그가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남강 땅은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으로 발을 디딘 건, 정화를 구하러 갔을 때였다.남강으로 가는 내내 홍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냉정언이 물었다.“남강에 가면, 못난이를 만날 것이오?”“만나야지.”홍엽이 답했다.“물론 만나야지!”못난이는 오랜 시간 그와 함께했던 사람이니, 만나야 했다. 못난이가 종종 편지를 보내오긴 했지만, 자기 상황은 거의 말하지 않았다.반면 아홉째는 편지에서 북강의 소식을 자주 전해주었다.지금의 남강은 어느 정도 통일되어 있었고, 북강과 남강도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다. 그동안 이익 문제로 양측의 왕래가 더욱 빈번해졌다.아홉째는 편지에서 못난이가 북강의 민심을 얻었고, 성격도 예전보다 훨씬 밝아져,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하다고 전했다.홍엽의 마음엔 기대와 기쁨이 섞여 있었다. 그도 지금 잘 지내고 있으니, 못난이도 잘 지내길 바랐다.우문호는 남강에서 돌아온 후, 변방으로 갈
그 일을 떠올리자, 꿈에서 본 일이라 그런지 마치 얼마 전에 있었던 일처럼 느껴졌다.그때 그들은 죽을 만큼 힘든 소년들이었는데, 지금은 한없이 한가한 노인이 되었다.세월은 덧없이 흘러갔고, 그동안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잃었다.무상황은 자신의 황후였던 소봉을 떠올렸다.그들은 줄곧 전형적인 황제와 황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나라를 다스렸고, 그녀는 후궁을 다스렸다. 비록 그가 그녀를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많은 애정을 주지도 않았다.그렇게 평범하게 평생을 함께했지만, 그녀가 떠나는 날, 그는 마음속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간 듯한 슬픔을 느꼈다.평생 함께했던 사람이 자신보다 먼저 떠날 거라 생각하지 못했기에 더욱 아팠다.세 사람은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있다, 다시 길을 나섰다.유아독존과 관련된 일이 생각보다 커졌지만, 모든 소란은 결국 가라앉게 될 것이다. 모든 소문도 점점 사그라들기 마련이니, 그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세 사람이 여행하는 영상이 점점 유명해지면서, 유아독존은 더 심하게 비난을 받았다.현실에서 함부로 욕설을 내뱉으면 얻어맞을 수도 있지만, 인터넷에서는 당당한 명분이 있었기에 악성 댓글을 다는 자들은 마음껏 욕을 퍼부었다.그리고 어느 날, 추 어르신이 오래도록 인터넷의 댓글을 훑어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는 이내 해가 지는 장면을 찍어 짧은 영상을 올렸다. 그리고 영상에 한마디만 덧붙였다.“분쟁 없이, 오직 평화만 있기를.”그는 모든 다툼이 끝나길 바랐고, 누군가를 벼랑 끝으로 몰지 않기를 바랐다. 단지 말로만 승부를 겨루는 사람은 그들의 적이 아니기 때문이다.음... 무엇보다 적이 될 자격도 없었다!영상이 올라간 지 이틀 뒤, 유아독존은 마침내 사과 영상을 올렸다. 그는 질투와 시기로 무술을 모독한 것을 사죄했고,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직접 그들의 계정을 태그해 진심으로 사과했다.진심 어린 사과는 항상 용서를 가져오는 법이다. 그리고 악성 댓글을 달던 사람들도 마침내 욕설을 멈췄다.
삼대 거두는 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일어났고, 숙취에서 깨어나니, 이미 날이 밝아져 있었다. 그들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아, 눈앞의 모든 것이 몽롱해 오늘이 무슨 날인지조차 모를 정도였다.태양이 서서히 떠오르며 하늘에 떠 있는 주황빛 구름은 점점 짙은 금빛으로 변했고, 금빛 가장자리에는 붉은색이 덧씌워져, 눈부시게 아름다웠다.소요공이 눈을 비비며 말했다."꿈을 꿨네."추 어르신과 무상황은 동시에 그를 바라보며 이구동성으로 물었다."무슨 꿈을 꿨는가?""꿈에서 숭이가 사내에게 속았는데, 우리가 직접 나서서 복수를 해줬다네."추 어르신과 무상황은 놀라서 동시에 숨을 들이켜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귀신이 곡할 노릇이네."말이 끝나자,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깜짝 놀라 외쳤다."자네도 꾼 것인가?""그렇네!""그렇네!""설마 우리 셋이 똑같은 꿈을 꾼 것이오?"소요공도 깜짝 놀랐다.그 일은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니었고, 어떻게 된 일인지 가물가물할 정도로,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할 정도였는데, 꿈에서는 그 장면 장면이 또렷하게 떠올랐다.그리고, 이 꿈은 당시 엄청난 부담을 받고 있던 그들에게 정말 훌륭한 감정 해소가 되었다. 그들은 모든 고통과 억울함, 스트레스를 주먹질로 시원하게 풀어냈다.한편, 무상황은 자신이 황후를 소홀히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때 무슨 상황이었는지 기억하는가?"추 어르신이 흥분한 듯 말했다."물론 기억은 나네. 당시엔 소봉이가 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적성루 사람들을 많이 그리워했네. 게다가 나도 자네들과 어울리느라 바빠서 황후를 소홀히 했네. 그래서 적성루 상궁과 숭이를 궁으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게 했지."사실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꿈속에서 다시 겪은 덕분에 자세히 생각났다.그때 어서방의 회의가 끝나고, 소복이 무심히 물었다."폐하, 황후 마마를 오랫동안 못 뵙지 않으셨습니까?"그는 소복의 말이 소봉을 보러 가자는 암시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