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태윤이 떠난 뒤 나는 세명의료원 담당 의료진에게 먼저 연락했다.
며칠 전부터 혹시 오늘 움직여야 할 상황이 생길 수 있다고 상담해 둔 상태였다. 검사 결과를 확인한 담당 교수는 조건을 붙였다. 이동 중에는 최대한 기대어 있을 것. 현장에서는 휠체어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 체류는 90분 이내. 복통이나 출혈, 어지럼 증상이 있으면 즉시 돌아올 것. 간호 인력이 동행할 것. 나는 조건을 하나씩 확인했다. 무리해서 이기고 싶은 게 아니었다. 아이를 위험하게 하면서까지 현강을 지킬 생각도 없었다. 그래도 내가 가진 자료를 내 손으로 전달하고 싶었다. 박현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주총장으로 갑니다. 담당 교수 조건 확인했고 간호 인력 동행합니다. 태윤에게도 전달해 주세요. 회의 전이라 못 보면 도착해서 말할게요.’시간 감각이 흐려졌다. 창밖이 조금씩 밝아지는 것 같았지만 시계를 볼 여유는 없었다. 진통은 점점 강해졌다. 나는 몇 번이나 ‘못 하겠다’고 말했고, 그때마다 의료진은 지금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차분히 알려 줬다. 태윤은 내 손을 놓지 않았다.“아파…… 진짜 너무 아파.”“알아.”“넌 모르잖아.”“맞아. 내가 똑같이 알 수는 없어.” 태윤이 숨을 삼켰다.“그래도 여기 있을게.” 그 답이 마음에 들었다.‘괜찮아’라고 쉽게 말하지 않아서. 다시 강한 수축이 왔다. 나는 눈을 감고 숨을 내쉬었다. 태윤의 손을 너무 세게 잡았는지 손등의 힘줄이 선명하게 튀어나왔다.“손 아파?”“지금 그게 중요해?”“부러지면 곤란하잖아.”“회사보다 먼저 고칠게.” 평소라면 어이없다고 했을 말에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나왔다. 의료진이 진행 상황을 확인한 뒤 말했다.“이제 많이 진행됐어요. 다음 단계부터는 제가 호흡과 힘주는 타이밍 알려 드릴게요.” 나는 겁이 났다. 숨이 너무 가빠져서 가슴이 아팠다. 태윤이 내 손등에 이마를 잠깐 댔다.“무서워?”“응.” 처음으로 솔직하게 말했다. 태윤이 고개를 들었다.“나도.” 그의 얼굴도 창백했다.“그래도 같이 있자.”“응.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나는 몇 번이나 태윤의 팔을 붙잡았다. 통증이 올 때마다 그는 휴대폰 시계를 확인했고, 내가 숨을 내쉴 때 같이 숫자를 세었다.“하나, 둘, 셋…… 천천히.”“네가 더 숨 못 쉬는 것 같아.”“나도 알아.” 통증 사이 짧은 틈에 그 대답이 우스워 웃음이 났다. 병원에 도착하자 분만실 직원이 바로 우리를 안내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조명은 밝았고, 의료진의 움직임은 차분했다. 진찰과 모니터링이 이어졌다.“규칙적인 진통이 맞습니다. 진행 상황 계속 볼게요.” 담당 의료진의 설명을 듣자 오히려 마음이 조금 놓였다. 내가 누운 침대 옆에서 태윤은 질문을 쏟아낼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먼저 나를 봤다.“뭐 필요한 거 있어?”“물.” 그는 곧바로 빨대가 꽂힌 물병을 가져왔다.“천천히.” 몇 모금 마신 뒤 또 통증이 시작됐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태윤이 잡았다.“세게 잡아도 돼?”“부러져도 돼.”“그건 안 돼.” 그의 손은 크고 따뜻했다. 통증이 허리까지 번지자 그는 의료진에게 배운 대로 허리 쪽을 눌러 줬다.“여기?”“조금 아래…… 응, 거기.”“이 정도?”“더 세게.” 태윤이 조심스럽게 힘을 조절했다. 예전 구로 원룸에서 내가 허리가 아픈 날이면, 서툴게 마사지해 주던 손이었다
태윤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자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가 들렸다.“주주총회 때보다 긴장했지?” 내가 묻자 그가 잠깐 침묵했다.“비교가 안 돼.”“그렇게까지?”“주주총회는 부결되면 다시 싸우면 되잖아.” 그가 내 머리 위에 턱을 가볍게 얹었다.“너한테 거절당하는 건 다시 싸우면 안 되는 문제고.” 그 말을 듣고 나는 팔에 힘을 조금 더 주었다.“잘 배웠네.”“선생이 무서워서.”“누가 누구더러.”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한참 뒤 태윤이 몸을 조금 떼고 내 얼굴을 내려다봤다.“키스해도 돼?”“또 묻네.”“계속 물을 거야.”“응.” 그의 입술이 조심스럽게 닿았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 유일하게 따뜻한 곳 같았다. 길지 않은 입맞춤 뒤, 태윤의 이마가 내 이마에 닿았다.“고마워.”“뭐가?”“내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준 거.” 나는 고개를 저었다.“기회는 우리가 같이 만든 거야.” 태윤의 시선이 내 배로 내려갔다. 그가 손을 올려도 되냐는 듯 나를 보았다. 내가 먼저 그의 손을 끌어 배 위에 놓았다.“그리고 이제 셋이 만들 거고.” 마침 안쪽에서 작게 움직이는 느낌이 왔다. 태윤의 얼굴이 순간 밝아졌다.“움직였어.”“네 목소리가
공사장 소음이 갑자기 멀게 느껴졌다. 나는 태윤과 반지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가 이렇게 긴장한 얼굴을 한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임시주주총회에서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대답하기 전에 하나 물어봐도 돼?”“몇 개든.”“예전에 작성했던 혼인신고서나 계약서 때문에 하는 말 아니지?” 태윤이 곧바로 정색했다.“아니야.” 대답은 즉시 나왔다.“그 서류들은 내 욕심으로 만든 거였어. 법적으로 필요한 정리도 끝냈고, 그걸 이유로 네게 요구할 건 아무것도 없어.” 그가 잠깐 숨을 고르고 말했다.“7년 전 나는 널 밀어냈고, 다시 만난 뒤에는 돈과 일자리와 계약을 이용해 널 붙잡으려 했어.” 찬바람에 그의 앞머리가 흔들렸다.“그걸 사랑이라고 부르면서도 네가 무슨 답을 하는지는 듣지 않았어.” 태윤은 벨벳 상자를 든 손을 천천히 내려 자신의 가슴 앞에 두었다.“그래서 이번에는 그냥 묻는 거야.” 그의 검은 눈이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내가 가진 것 때문이 아니라, 잃은 것 때문도 아니라…… 지금의 나와 앞으로 같이 살아 줄래?” 눈앞이 조금 흐려졌다. 나는 어제의 원룸을 떠올렸다. 좁은 테이블과 미지근한 국, 세탁물 냄새, 새벽에 함께 들었던 냉장고 소리. 그리고 지금 눈앞의 거대한 집 골조. 둘 중 어느 쪽도 우리 관계의 답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 안에 누가 함께 있느냐였다.“응.” 내가 말했다. 태윤의 눈이 커졌다.“
다음 날 오후. 차에서 내리자 찬바람과 함께 젖은 흙 냄새가 올라왔다. 나는 운동화 바닥으로 아직 포장되지 않은 길을 조심스럽게 밟았다.“천천히.” 태윤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는 다시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어제 회색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작은 싱크대 앞에서 달걀을 뒤집던 사람과 같은 남자라는 게 조금 우스웠다. 내가 그의 손을 잡았다. 눈앞에는 공사가 다시 시작된 새 집의 골조가 서 있었다. 한명금융과의 분쟁 과정에서 자금 집행과 일부 자산 사용이 묶이며 몇 달 동안 멈춰 있던 현장. 이제는 작업자들이 다시 오가고 있었다. 금속 부딪히는 소리, 중장비의 낮은 엔진음, 잘린 목재 냄새. 멈췄던 시간이 다시 움직인다는 게 눈에 보였다.“……크다.” 나도 모르게 말했다. 태윤이 내 옆에서 건물을 올려다봤다.“너무 커?”“구로 원룸에서 바로 오니까 더 그렇게 보여.” 그가 피식 웃었다.“그 방이 5평 조금 넘었으니까.”“그래도 거기서 잘 살았잖아.”“잘 살았다는 표현은 조금 과장인데.”“난 좋았어.” 태윤의 시선이 내 얼굴로 돌아왔다.“진짜?”“돈이 없어서 좋은 게 아니라, 거기서 우리가 처음으로 같은 생활을 했으니까.” 회사 대표와 전속 하우스키퍼도 아니고, 보호하는 사람과 보호받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날 먹을 걸 같이 고민하고, 빨래를 널고, 서로의 컨디션을 확인하는 두 사람이었다. 태윤이 내 손을 조금 더 단단히 잡았
“나도 할 말 있어.” 태윤의 손이 멈췄다.“그때 나는 너를 사람보다 내 자존심처럼 여겼어.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다는 걸 못 견뎠고.”“서린.”“내 몫까지 네가 다 짊어지지는 마.” 나는 그의 손을 내 가슴 앞에 놓고 말했다.“우리 둘 다 잘못한 건 맞아. 그렇다고 같은 잘못은 아니고.” 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그리고 한 가지는 분명히 하고 싶어.” 나는 숨을 고른 뒤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재회한 뒤에도 널 좋아했던 건 사실이야. 네 옆에서 안심했던 밤도 있었고.” 태윤의 시선이 흔들렸다.“하지만 좋아했다고 해서 무서웠던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야.”“……응.”“지금 행복하다고 해서, 예전의 방식까지 옳았던 일로 만들고 싶지 않아.” 태윤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내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다시는 돈이나 두려움으로 네 답을 빼앗지 않을게.”“그 약속은 기억할 거야.”“평생 기억해.”“또 평생이래.” 내가 웃자 태윤의 얼굴도 조금 풀렸다. 그가 내 입술을 바라보다가 멈췄다.“……키스해도 돼?” 나는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다.“지금 와서 묻는 거야?”“지금이라서 묻는 거야.” 나는 대답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