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며칠 뒤.해가 서산 너머로 기울기 시작할 무렵, 중궁전은 평소와 달리 이른 시간부터 분주했다.나인들은 방 안을 정갈하게 정돈했고, 상궁들은 준비된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혹여빠진 것은 없는지 확인했다.그리고 그 모든 모습을 지우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을 궁인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오늘따라 유난히 신경 쓰였다.그 이유는 하나였다.오늘이 바로 상선이 잡아온 합방 기일이었기 때문이다.‘……진짜 이날이 와버렸네.’지우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종친들이 합방 날짜를 정해왔다며 몰려온 것이 그저 황당하고 우스웠다.단종과 서로를 놀리며 웃기까지 했다.그런데 막상 그날이 되자 이야기가 달랐다.아침부터 가슴 한쪽이 괜스레 두근거렸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두근거림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마마.”옆에서 지우의 옷매무새를 살피던 소하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왜?”“아까부터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계시옵니다.”“내가?”그제야 지우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어느새 손가락으로 치맛자락 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지우는 황급히 손을 놓았다.“그냥…… 옷이 조금 불편해서 그래.”“그러시옵니까?”“응. 그것뿐이야.”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소하의 눈빛에는 전혀 믿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지우가 괜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아니, 뭐가 이렇게 긴장되는 건데.’단종이 낯선 사람도 아니었다.수없이 이야기를 나눴고, 서로의 마음도 이미 확인했다.죽을 고비까지 함께 넘겼으며 이제는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마음 역시 변함이 없었다.그런데도 오늘 밤을 생각하면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다.그때였다.밖에서 궁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중전마마.”“……왜 그러느냐?”“전하께서 곧 중궁전에 드실 것이옵니다.”“…….”순간 지우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소하는 그런 지우를 바라보다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었다.“마마.”“왜?”“옷이 불편하신 것뿐이라 하지 않으셨사옵니까?
수양대군의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궁에는 아침부터 종친들이 찾아와 단종과 지우를뵙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형님, 우리가 너무 서둘러 온 것이 아니오?”“서두르긴. 전하께서 직접 약조하신 일이 아니던가. 그 약조를 확인하러 왔을 뿐인데무엇이 문제란 말인가.”“그래도 이른 아침부터 이리 몰려오면 전하께서 부담스러워하실 수도 있지 않소.”“그리 걱정되면 자네는 돌아가게. 자네 몫까지 내가 받으면 될 터이니.”“아니, 누가 돌아간다고 했소?”종친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그때, 문밖에서 상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전하와 중전마마 드시옵니다.”종친들은 그 말에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을 바라보았다.이윽고 문이 열리고 단종과 지우가 나란히 안으로 들어왔다.“이른 아침부터 모두 모이셨구려. 무슨 일로 오셨소?”단종의 말에 종친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 그중 가장 나이가 많은 종친이 먼저 입을 열었다.“전하,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보다시피 나도 중전도 잘 지냈소. 헌데 이른 아침부터 이리 모인 까닭이…….”“전하.”종친이 기다렸다는 듯 단종의 말을 끊었다.“혹시 저희 종친들과 지난번에 하신 약조를 기억하고 계시옵니까?”“…….”순간 단종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흠흠.”단종이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그 옆에 있던 지우 역시 무슨 약조인지 떠올랐는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그게…… 기억은 하고 있소.”“그렇다면 이야기가 쉬울 듯하옵니다. 이것을 받아주시지요.”종친이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단종에게 건넸다.단종은 의아한 표정으로 봉투를 받아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다.안에는 날짜와 시각이 적힌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이것이 무엇이오?”단종이 종이를 바라보며 묻자 종친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전하와 중전마마의 합방 길일이옵니다.”“…….”“저희가 심사숙고하여 정해왔사오니, 합방은 이날 하시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단종의 시선이 종이 위에서 그대로 멈췄다.그 옆에 서 있던 지우 역
철컥.고요하던 옥 안에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이내 끼이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옥문이 천천히 열렸다.“수양대군은 나와 전하의 어명을 들으시오.”“어명이라…… 알겠소.”수양대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옥 밖으로 나왔다.그리고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얼마 만에 제대로 바라보는 하늘인지 알 수 없었다.한동안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에 허탈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도승지는 그런 수양대군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왕의 명을 전하기 시작했다.“수양대군은 그 죄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은바, 이 시간부로 대군의 작호를 거두고그 식솔들은 목숨을 부지하게 하되 평민으로 강등한다.”수양대군의 눈빛이 아주 잠시 흔들렸다.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도승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마지막 명을 읽어 내려갔다.“또한 그 죄가 중대하므로 사약을 내려―”도승지의 목소리가 조용한 의금부 안에 울렸다.“목숨으로 그 죄를 묻고자 한다.”“……그렇군.”수양은 짧게 웃었다.“결국 전하께서 내 목숨까지 거두시는군.내 식솔들의 목숨을 살려주신 것은…… 전하의 뜻이오?”“그러하옵니다.”“…….”“알겠소. 그 또한 전하께 감사드린다고 전해주시오. 그리고…… 이 말도 함께 전해주오.”“말씀하시오.”수양대군은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처음부터 왕좌가 탐났던 것은 아니었다고…….”도승지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말을 기다렸다.“다만 내 옹졸한 마음이 문제였던 게지. 어린 왕보다는 내가 더 나을 것이라 생각했소. 내가 왕이 된다면 이 나라를 더 잘 이끌 수 있을 거라 믿었고.”수양대군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그 생각이 하나둘 욕심을 만들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기까지 와버렸구려.”잠시 침묵하던 수양대군이 나지막이 덧붙였다.“그리 전해주시오.”도승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한때 수많은 군사를 움직여 궁을 장악했던 사
며칠 뒤, 편전.평소라면 대신들의 목소리가 오가야 할 편전 안은 유난히 고요했다.좌우로 늘어선 대신들 역시 입을 굳게 다문 채 어좌만을 바라보고 있었다.오늘 이 자리에서 결정될 일이 무엇인지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수양대군의 처분.궁을 군사로 장악하고 왕을 위협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죄.그 죄를 어떻게 물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날이었다.단종의 앞에는 며칠 동안 대신들이 올린 상소들이 수북이 놓여 있었다.그 대부분에 적힌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대역의 죄를 물어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것.단종은 한동안 말없이 상소들을 바라보았다.이미 몇 번이나 읽은 글들이었다.그럼에도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죄가 가벼워서가 아니었다.수양대군이 자신의 숙부이기 때문만도 아니었다.한번 내려진 왕의 명은 되돌릴 수 없었다.그리고 지금 자신이 내려야 할 것은 한 사람의 관직을 빼앗거나 유배지를 정하는 정도의 명이 아니었다.한 사람의 목숨을 거두는 명이었다.잠시 후 단종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대신들의 뜻은…… 모두 같은 것인가?”영의정이 앞으로 나와 허리를 숙였다.“그러하옵니다, 전하.”“수양대군이 저지른 죄가 중하니, 종친이라 하여 달리 처분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 조정의 뜻이옵니다.”단종의 손끝이 상소 한 장 위에 가만히 머물렀다.종친.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양대군이 마지막 방패처럼 내세웠던 말이었다.하지만 이제 그 이름조차 그가 저지른 일을 가려줄 수는 없었다.단종이 낮게 물었다.“……사약을 내려야 한다는 것인가?”순간 편전 안의 공기가 더욱 무거워졌다.“그러하옵니다.”짧은 대답이 넓은 편전 안에 울렸다.단종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그의 시선이 천천히 어좌 아래로 향했다.숙부를 살리고 싶은가.그렇게 묻는다면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하지만 왕으로서 수양대군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그 물음에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었다.단종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망설임은
두 사람은 단종의 말에 각기 다른 표정으로 단종과 지우를 바라보았다.그때 지우가 잡고 있던 단종의 손을 천천히 놓았다.“전하.”단종이 지우를 바라보았다.“저는…… 먼저 나가 있을게요.”“중전.”지우는 애써 옅은 미소를 지었다.“괜찮아요. 다만 지금은…… 제가 여기 없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단종은 잠시 지우를 바라보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소.”지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문으로 향하던 지우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하지만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이내 문이 열리고 지우가 밖으로 나갔다.끼이익―.문이 다시 닫혔다.방 안에는 단종과 한명회, 백윤만이 남았다.조금 전까지 지우의 손을 잡고 있던 단종의 표정에서 서서히 온기가 사라졌다.이제 이 자리에 남은 것은 남편이 아니라―두 사람의 죄를 판단해야 할 왕이었다.“한명회. 자네는 수양대군의 편에 서서 그의 명에 따라 김종서 장군을 죄인으로 몰았네.결국에는 납치해 감금하기까지 했지.”단종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그 과정에서 군사 한 명과 중궁전에 직접 불을 놓았던 자까지 죽였고 말이야.”단종의 말을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듣고 있던 한명회가 이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결국 그것까지 다 아셨군요.”“김종서 장군이 그러더군. 현장에서 자네가 즐겨 입던 옷의 천 조각이 발견되었다고.”단종이 한명회를 똑바로 바라보았다.“그리고 숙부의 휘하에 있던 군사 한 명도 실토했네. 자네가 그리했다고.”“부인하지 않는군.”“증거까지 찾으셨는데 제가 아니라고 우긴들 달라지겠습니까.”“증거가 없었다면 부인했겠다는 말처럼 들리는군.”한명회가 피식 웃었다.“……그랬을지도 모르지요.”한명회에게 처분을 내린 단종의 시선이 이번에는 백윤에게 향했다.한동안 아무 말 없이 백윤을 바라보던 단종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백윤.”“예, 전하.”“자네가 수양대군의 편에 서서 저지른 일은 결코 가볍지 않네.”백윤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부원군의 죽음에 관여했고, 중궁전 화재를 수양대
-의금부 문초실-두 사람 모두 한때 수양대군의 편에 섰던 자들이었다.그러나 공교롭게도 지금은 둘 다 그의 곁을 떠나 있었다.같은 사람을 따랐고, 같은 사람에게서 돌아섰다.하지만 그들이 걸어온 길까지 같은 것은 아니었다.그리고 오늘,그 서로 다른 죄에 대한 처분이 같은 자리에서 내려질 예정이었다.“자네나 나나 이제 보니 묘한 인연이긴 하네. 이리 서로 처분도 한 공간에서 받게 되었으니 말일세.”“묘한 인연이라…… 그럴 수도 있겠네요.”“처분이 두렵지 않은가? 나보다 자네에게 내려질 벌이 더 무거울 수도 있네.”그 말에도 백윤은 아무런 대답 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한명회 역시 굳이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두 사람 사이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끼이익―.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중전과 단종이 안으로 들어왔다.두 사람은 한명회와 백윤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한명회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이제는 두 분께서 제법 함께 다니시는군요.”단종이 옅게 웃었다.“아, 중전이 자네와 백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하여 함께 왔네.”그 말에 한명회는 무언가 짐작한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혹시 상궁 소하가 화살에 맞았던 일과 중궁전에서 있었던 일을 묻고자 하시는 겁니까?”지우가 한명회를 빤히 바라보았다.“처분을 앞둔 사람치고는 꽤 여유로워 보이네요.”“긴장한다고 벌이 가벼워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그건 그렇네요.”단종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 작게 헛기침했다.“중전.”“알았어요. 이제 물어볼게요.”지우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그 사건들 뒤에 수양대군이 있다는 걸 짐작하고 있어요. 제 짐작이 맞나요?”여태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백윤이 지우의 질문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예, 맞습니다. 그 사건들 뒤에는 수양대군이 계셨습니다.”백윤이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그리고 중궁전 화재는…… 제가 수양대군의 명을 받아 벌인 일입니다.”지우의 시선이 한명회에게 향했다.“한명회, 자네는?”한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