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왕의 사랑을 믿었던 여인, 서령. 그러나 궁궐은 그녀에게 사랑보다 깊은 상처를 남겼고, 결국 모든 것을 버린 채 궁 밖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품고 떠난 것은 왕조차 알지 못하는 아이였다. 몇 년 후, 이름난 조향사로 살아가던 서령 앞에 자신을 버렸던 왕이 다시 나타난다. 잃어버린 여인을 되찾으려는 왕과 아이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비밀을 감추려는 서령. “내게서 도망친 것은 용서하겠다. 하지만 그 아이는 누구의 핏줄이냐?” 왕의 집요한 추적이 시작되고, 궁궐에 묻힌 음모와 숨겨진 진실이 하나씩 드러난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으려는 여인과 그녀를 놓지 못하는 왕. 두 사람의 운명이 다시 얽히기 시작한다.
View More희원궁에 저녁 안개가 내려앉을 무렵, 한서령은 작은 약장 앞에 앉아 말린 약재를 골라내고 있었다.
열어 놓은 창으로 늦가을 바람이 스며들었다. 뜰에 심은 국화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희미한 꽃향기가 방 안까지 흘러들었지만, 서령의 손끝에서는 그보다 깊고 은은한 백단향이 묻어났다.
그녀는 잘게 썬 향목을 손바닥에 덜어 향을 확인한 뒤 말린 귤껍질을 조금 섞었다. 향이 지나치게 무거워지지 않도록 비율을 맞추는 일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갔다.
“마마, 또 향낭을 만드십니까?”
따뜻한 찻물을 가져오던 난희가 물었다.
서령은 푸른 비단 주머니에 향목을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것은 향이 거의 빠졌을 거야.”
“전하께서 가져가신 지 열흘도 되지 않았는데요. 지난번에도 밤새 만드셨으면서 이번에는 좀 쉬시지요.”
“전하께서는 향이 진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잖니. 처음부터 연하게 만들었으니 벌써 향이 옅어졌을 거야.”
난희는 주인의 손에 들린 향낭을 바라보았다. 왕이 평소 즐겨 입는 상복과 같은 빛깔의 비단이었다.
희원궁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삼 년이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서령은 궁녀들에게 약초 이름을 묻고, 직접 약재를 말리다가 상궁에게 꾸중을 듣곤 했다. 의관이었던 아버지 곁에서 자란 탓에 몸에 밴 습관이었다. 집안이 몰락하고 궁에 들어온 뒤에도 약재를 만지는 일만큼은 쉽게 놓을 수 없었다.
후궁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궁에서는 후궁이 직접 약재를 손질하는 일을 곱게 보지 않았다. 하인에게 시키면 될 일을 굳이 제 손으로 한다며 흉을 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서령은 개의치 않았다.
사람마다 몸에 맞는 향이 다르고, 같은 약재라도 얼마나 말리고 어떻게 배합하느냐에 따라 효능이 달라진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특히 도겸은 정무에 시달리는 날이면 머리가 무겁고 잠을 깊이 이루지 못했다. 서령이 처음 향낭을 만들어 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난희야, 오늘 전하께서 어느 전각에 드신다고 하셨지?”
“대전에서 대신들과 늦게까지 의논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오늘도 침전으로 바로 드실 듯합니다.”
서령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향낭의 입구를 여몄다.
왕이 희원궁을 찾는 날은 일정하지 않았다. 사흘 연속 찾아오는 때도 있었고, 보름 가까이 얼굴을 보지 못할 때도 있었다.
처음에는 발소리만 들려도 문 쪽을 돌아보았지만, 이제는 기다리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 법을 배웠다.
그렇다고 기다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마마, 저녁 수라를 들이시겠습니까?”
“조금 있다가.”
“점심도 제대로 못 드셨습니다.”
“낮에 먹은 약과가 아직도 속에 남아 있는 것 같구나.”
서령은 웃으며 대답했지만 난희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며칠째 입맛이 없다며 수라를 물리고, 평소 좋아하던 생선국 냄새에도 얼굴을 찌푸렸기 때문이다.
“내일은 의녀를 불러 보셔야겠습니다.”
“그럴 정도는 아니야. 환절기라 그런가 보지.”
서령이 찻잔을 들어 입술에 가져가려던 순간이었다.
뜰 바깥에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 내관의 다급하면서도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전하 납시오!”
난희가 놀라 찻상을 내려놓았다.
서령 역시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오늘은 오시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녀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고치는 사이, 방문이 열리고 검은 곤룡포 차림의 사내가 안으로 들어섰다.
도겸이었다.
“어젯밤 그 아이가 생선국 냄새를 맡고 속이 좋지 않다 하였지?”“예, 전하.”“평소에도 그런 적이 있었느냐?”“소인은 잘 알지 못하옵니다.”도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서령은 자신의 몸이 좋지 않아도 쉽게 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젯밤에도 얼굴이 창백해졌으면서 괜찮다고만 했고, 오늘 아침에도 기운을 차렸다는 말만 전해 왔다.그녀의 성정을 아는 도겸으로서는 그 말을 그대로 믿고 넘어가기가 어려웠다.“희원궁에 보낼 만한 음식이 무엇이 있겠느냐?”내관이 잠시 망설였다.“마마께서 평소 과일을 즐기신다고 들었사옵니다.”“그렇지. 지난번에는 배가 달다며 좋아하였지.”도겸은 곁에 놓인 상소문을 정리했다.“수라간에 일러 배와 대추를 보내라. 배를 부드럽게 익혀 올리는 것도 좋겠구나. 음식은 희원궁에서 원하는 대로 준비하게 하고.”“분부 받들겠사옵니다.”도겸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해가 아직 기울지 않았으니 지금 일을 서둘러 마치면 희원궁에 들를 수 있을지도 몰랐다.그러나 그때 북쪽 고을에서 올라온 급보가 전해졌다.흉년으로 떠돌던 백성들이 관아 앞에 몰려들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곡식을 실은 수레를 막아 세우는 일까지 벌어졌다는 내용이었다.도겸은 자리에서 일어나 대신들을 다시 부르라고 명했다.희원궁에 가려던 생각은 접어야 했다.그는 잠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가 내관에게 말했다.“서령에게 오늘은 가지 못할 듯하다고 전하여라. 그리고 내가 보낸 음식은 꼭 들게 하라고.”내관이 물러가려는데 도겸이 다시 불렀다.“잠깐.”“예, 전하.”“내일 아침 희원궁에 의녀를 보내라. 서령의 몸을 자세히 살피게 하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내게 직접 아뢰도록 하라.”“어느 의녀를 보내시겠사옵니까?”도겸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희원궁의 몸 상태를 이미 살펴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좋겠구나. 같은 사람이라야 변화를 알 수 있을 테니.”“알겠사옵니다.”도겸은 다시 장부로 시선을 돌렸다.그가 서령을 걱정하여 내린 명령은 곧 내의원으로 전해
그날 오후, 서령은 희원궁 뒤편의 작은 뜰에 나와 있었다.바람이 차가워졌지만 방 안에만 앉아 있자니 답답했다. 그녀는 난희에게 두툼한 겉옷을 가져오게 한 뒤 햇볕이 드는 돌계단에 앉아 말린 귤피를 살폈다.햇빛을 충분히 받은 껍질은 빛깔이 고르고 향도 맑았다. 서령은 상태가 좋은 것만 골라 작은 그릇에 담았다.“마마, 이제 그만 들어가시지요. 바람이 차갑습니다.”“조금만 더 있다가.”난희는 서령의 곁에 앉아 약재를 함께 골랐다.“마마, 제가 수라간에 다녀왔습니다.”서령이 손을 멈췄다.“무엇을 알아보았느냐?”“수라 기록은 매일 중궁전으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평소와 달리 음식을 많이 물리거나 새로 올리면 담당 상궁이 따로 표시한다고 하였습니다.”“그렇겠지.”“그리고 어젯밤에는 전하께서 직접 죽을 가져오라 명하셨으니 수라간에서도 이야기가 많았다고 합니다.”서령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정도라면 정 상궁이 찾아온 경위는 설명이 되었다.하지만 아직 한 가지가 남아 있었다.“의녀가 다녀간 일은?”“내의원에서 출입 장부를 관리한다고 합니다. 중궁전에서는 필요할 때 그 장부를 확인할 수 있고요.”“최 의녀가 오늘 내게 무슨 처방을 내렸는지는?”“그것까지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서령은 잠시 생각하다가 난희에게 약재를 건넸다.“그 정도면 됐다. 더 알아보려다 눈에 띄지 말거라.”난희는 약재를 받아 들면서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마마, 이렇게까지 조심해야 합니까?”서령은 뜰에 떨어진 국화 꽃잎을 바라보았다.지난봄 아이를 잃었던 숙원의 얼굴이 떠올랐다.그 여인은 회임 사실이 알려진 뒤 누구보다 행복해했다. 배 속의 아이에게 입힐 옷을 고르며 웃었고, 날마다 배를 어루만지며 태어날 날을 기다렸다.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이를 잃었다.궁에서는 몸이 약해 생긴 일이라고 했지만, 서령은 그 뒤에 일어난 몇 가지 일을 잊지 못했다.후궁의 탕약을 맡았던 의관이 서둘러 지방으로 떠났고, 약을 달이던 궁녀도 다른 전각으로 옮겨졌다.그때
왕비의 명을 받은 사람이 처방과 탕약을 관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화경은 자신이 무엇을 지시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고, 정 상궁 역시 그 뜻을 알아들었다.그날 이후 후궁에게 올리는 탕약이 바뀌었다.며칠 동안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후궁은 평소처럼 정원을 거닐었고, 궁녀들은 아이에게 입힐 배냇저고리를 준비했다.그러다 어느 날 밤, 후궁의 처소에서 다급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급히 달려온 의관들이 밤새 분주히 움직였지만 끝내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 침상과 이불은 피로 젖었고, 후궁은 의식을 잃었다 깨어나기를 반복했다.화경은 그 소식을 새벽에 들었다.정 상궁이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하는 동안 그녀는 침상 가장자리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마, 아이를 잃었다 하옵니다.”화경은 손에 쥐고 있던 염주를 천천히 내려놓았다.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를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며칠 뒤 처방을 맡았던 의관은 지방으로 떠났고, 약을 달였던 궁녀는 다른 전각으로 옮겨졌다. 관련 장부에는 후궁의 몸이 본래 약하여 생긴 일이라는 기록만 남았다.궁에서는 안타까운 유산이라며 입을 모았고, 누구도 왕비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도겸은 한동안 그 후궁의 처소에 발길을 끊지 않았다.화경은 처음에 그것을 다행이라 여겼다.하지만 어느 날 중궁전에서 도겸을 마주했을 때, 그가 이전보다 훨씬 말수가 적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는 유산에 관해 그녀를 추궁하지 않았다.그저 아이를 잃은 후궁의 몸이 회복될 때까지 필요한 것을 아끼지 말라고 당부했을 뿐이었다.화경은 그 말을 듣는 동안 차마 그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지 못했다.도겸이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안도감을 주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을 짓눌렀다.그 일에 관해 직접 아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정 상궁은 모든 과정을 지켜본 유일한 측근이었고, 화경 역시 그날 이후 그녀를 더욱 가까이 두었다.하지만 비밀이 지켜졌다고 해서 기억까지 사라지
그는 희원궁에서 돌아온 날이면 어쩐지 표정이 부드러워졌고, 정무에 지친 밤에도 그곳에 들를 시간을 만들었다.화경은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자신은 왕비였다. 도겸의 곁에 설 수 있는 유일한 정실이었고, 온 나라가 그 자리를 인정하고 있었다.그런데 정작 남편의 다정함은 다른 여인의 것이었다.“수라 기록을 다시 가져오너라.”정 상궁이 준비해 온 종이를 내밀었다.화경은 며칠 동안의 기록을 차례로 살폈다.사흘 전 점심 수라를 절반 이상 물렸고, 그 전날에는 아침을 거의 들지 않았다. 어젯밤에는 생선국을 물리고 흰죽을 다시 올렸다.그 아래에는 수라를 물린 시각과 담당 궁녀의 이름까지 적혀 있었다.“생선국 냄새를 맡고 속이 불편했다 하였느냐?”“예. 마마께서도 그리 말씀하셨습니다.”화경의 손끝이 기록 한 줄에 멈췄다.“의녀는 오늘 언제 다녀갔느냐?”“오전 진시 말경에 들어가 사시가 되기 전에 나왔다고 하옵니다.”“그리 오래 머물렀느냐?”“맥을 살피고 나왔다고 합니다.”화경은 종이를 접어 정 상궁에게 돌려주었다.“희원궁에서 무슨 말을 하더냐?”“보내신 약재는 감사히 받겠으나 탕약은 의녀와 상의한 뒤 먹겠다고 하였습니다.”“내가 보낸 약을 거절한 것이냐?”“그런 뜻은 아니라 하였사오나, 당장 드실 생각은 없어 보였습니다.”화경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한서령은 의관의 딸이라 하였지?”“예. 어려서부터 약재를 다루었다고 들었습니다.”“그러니 제 몸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도 남보다 빨리 알아차렸을 수 있겠구나.”정 상궁은 조심스럽게 왕비의 얼굴을 살폈다.“마마께서도 회임을 의심하시는 것이옵니까?”화경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녀의 친정인 파평 윤씨 가문은 대대로 조정의 요직을 차지해 온 명문가였다. 부친 윤정국은 현직 좌의정이었고, 큰오라비는 이조참판으로 조정의 인사를 다루고 있었다. 숙부와 사촌들 역시 여러 관직에 포진해 있었다.화경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가 장차 왕비가 될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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