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반나절 만에 수양대군의 저택에 도착한 지우와 족장은 말에서 내렸다.저택은 고요했다.마치 두 사람이 찾아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문 앞에는 인기척 하나 없었다.족장이 대문을 세차게 두드리자 잠시 후 하인 하나가 문을 열었다.하인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두 사람을 한 번 훑어본 뒤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주인어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서재로 모시겠습니다."그 말에 족장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기다리고 있었다는 건가.'지우도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 없이 하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서재 앞.백윤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지우가 그를 바라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당신들이 원한 결과가 결국 이것인가요?"백윤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정말 모르시겠습니까?"잠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하지만 백윤은 끝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서재 문을 열었다."들어가시지요."서재 안.수양대군은 태연한 얼굴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마치 오래전부터 두 사람을 기다렸다는 듯 조금의 긴장도 보이지 않았다."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그 순간.쾅!족장의 장검이 탁자를 뚫을 듯 깊숙이 박혔다.찻잔이 크게 흔들리며 차가 넘쳐흘렀다."감히..."족장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울렸다."내가 데려온 의원까지 건드렸더냐."수양대군은 넘쳐흐른 찻물을 힐끗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그토록 아끼는 의원이 제 사람의 형이라는 사실은 모르셨습니까?"스릉.이번에는 검끝이 그의 목을 겨눴다.서늘한 칼날이 피부에 닿으며 가느다란 핏방울 하나가 맺혔다.그러나 수양대군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죽고 싶은 것이냐."족장의 목소리는 살기 그 자체였다.그때 지우가 앞으로 나섰다."그만두십시오."족장이 그녀를 돌아봤다."여기서 칼을 쓰면 우리가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잠시 침묵.족장은 이를 악문 채 검을 내렸다.하지만 칼은 끝내 칼집에 넣지 않았다.수양대군은 천
금성대군은 무사 몇 명과 함께 저잣거리 시장통 끝자락으로 말을 재촉했다."중전마마께서 말씀하신 의원집이 저곳입니다."금성대군은 말에서 내리자마자 대문을 두드렸다."의원 계시오!"몇 번을 불러도 대답은 없었다."...이상하군."그는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마당에는 아직 김이 남은 약탕기가 놓여 있었고, 방 안에는 펼쳐진 의서와 붓, 막 식사를 하다 만 듯한 밥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급히 사라진 흔적이군."그때 밖에서 무사가 외쳤다."대군마마! 이리 와 보십시오!"금성대군이 달려가자 흙바닥에는 여러 사람의 발자국과 무거운 짐을 끌고 간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납치다."바로 그때였다."의원 양반, 계시오?"낯익은 목소리와 함께 김종서가 군사들을 이끌고 들어섰다."김 대감."김종서는 집 안을 둘러본 뒤 곧장 물었다."의원은?""이미 끌려간 듯합니다.""확실하오?"금성대군은 발자국을 가리켰다."몸싸움 흔적도 있습니다."김종서는 흔적을 내려다보다 낮게 말했다."...아직 멀리 가지 못했겠군."그는 곧바로 군사들에게 명했다."흔적을 따라라! 반드시 의원을 찾아내라!"군사들이 움직이려는 순간, 금성대군이 김종서를 불러 세웠다."대감, 먼저 아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무슨 일이오?""전하와 중전마마는 지금 거란족 사신단과 함께 있습니다."김종서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거란족이 전하를 보호하고 있다고?""족장께서 먼저 도움을 청하셨습니다."잠시 침묵이 흘렀다.금성대군이 다시 입을 열었다."전하께서는 탈출하시던 중 독화살을 맞으셨습니다.""...독화살?""예. 상처가 이미 검푸르게 변하고 있습니다."김종서의 표정이 굳었다."그래서 의원을...""예. 지금 당장 찾아야 합니다."김종서는 잠시 입술을 깨문 뒤 바닥에 남은 흔적을 바라보았다.백현이 사라지고, 의원까지 납치되었다.그리고 전하는 독화살에 쓰러졌다."...놈들이 처음부터 노린 것이 이것이었군."그는 검자루를 움켜쥐며
그날 밤.백현은 백윤과 헤어진 뒤 무거운 발걸음으로 모화관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밤이 깊어져서인지 모화관 주변은 적막했다.간간이 벌레 우는 소리만 들릴 뿐, 사람의 기척은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아니요. 저는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형님께서는 더는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백윤의 마지막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백현은 자신도 모르게 길을 멈추었다."...역시 한 번만 더 붙잡아 볼 걸 그랬나."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녀석은... 끝내 혼자가 되어 버렸구나.“그 순간.뚜벅뚜벅적막한 밤길 너머에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백현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했다."누구냐.“뚜벅, 뚜벅.적막한 밤길에 다시금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백현은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그의 앞에는 검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 하나가 말없이 서 있었다."누구냐?"백현이 입을 열어 신분을 묻는 순간이었다.사내는 기다렸다는 듯 품속에서 천 한 장을 꺼내 순식간에 백현의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백현은 본능적으로 사내의 팔을 밀쳐 내며 몸을 뒤로 뺐다.하지만 천에서 풍겨 나오는 익숙한 향이 순식간에 코끝을 파고들었다."...몽화초?"백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그는 몇 걸음 비틀거리더니 끝내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쿨럭…."시야가 점점 흐려졌다.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또 다른 검은 그림자였다.그 시각.백현을 덮쳤던 검은 두건의 사내들은 저잣거리 끝에 있는 의원의 집에도 모습을 드러냈다.쿵, 쿵.적막한 밤을 깨는 노크 소리가 대문을 울렸다.잠시 후 대문이 조심스레 열리더니 의원이 얼굴을 내밀었다."뉘시오?"의원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대문 뒤에 숨어 있던 검은 두건의 사내가 순식간에 앞으로 뛰쳐나왔다.그는 미리 준비해 둔 천을 의원의 코와 입에 그대로 들이밀었다."으... 윽!"의원은 다급히 사내의 팔을 밀쳐 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천에서 풍
석실 밖은 어느새 붉은 노을이 산등성이를 물들이고 있었다.백현은 백윤이 보낸 서신을 품속에 넣은 채 천천히 모화관에서 나와 약속한 장소로 걸음을옮겼다.산기슭에는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묵묵히 서 있었다.어린 시절, 형제가 함께 활을 만들고 약초를 캐던 곳이었다.백현은 잠시 나무를 올려다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이곳으로 부를 줄은 몰랐구나."그때."형님."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백현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검은 도포를 걸친 사내 하나가 나무 그늘 아래 서 있었다.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 얼굴은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백윤.“두 형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바람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먼저 입을 연 것은 백윤이었다."형님은... 변함이 없으시군요.“"밥은 잘 먹고 다니느냐.“백현의 말에 잠시 멍하니 있던 백윤은 이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형님은... 아직도 그런 말씀부터 하시는군요.”"아무리 그래도 넌 내 아우다.“백윤은 아무 말 없이 백현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나무 아래에 걸터앉았다.그는 눈을 감은 채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형님… 기억나십니까?"어릴 적 나무 아래에서 함께 약초를 다듬고, 피곤하면 나란히 누워 잠들곤 했지요."백현은 잠시 말없이 동생을 바라보았다."기억한다."짧은 대답이었다.잠시 침묵이 흘렀다.백현은 동생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낮게 입을 열었다."백윤.혹시… 수양대군 밑으로 들어간 것이냐?"백윤은 대답하지 않았다.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었다.그 침묵만으로도 백현은 이미 답을 얻은 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그렇군."그는 깊은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물었다."그자를 위해… 사람의 목숨까지 거두었느냐."“그 길이 제가 모시는 분을 위한 길이었습니다.”백윤이 천천히 눈을 떴다.두 형제의 시선이 조용히 마주쳤다.백현의 얼굴에는 안타까움과 자책이 서서히 번져 갔다.그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동생을 바라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식사를 마친 단종과 지우는 아무 일도 없는 듯 뒤편 숲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겉으로는 산책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지만, 두 사람의 시선은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다행히도 식사 내내 두 사람을 지켜보던 사내들은 더 이상 뒤를 따르지 않았다.지우는 그 점이 오히려 마음에 걸렸다.'이상해…. 아무리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해도 우리를 이렇게 쉽게 풀어 놓을 리가 없어.''마치 이미 잡아 놓은 물고기는 달아나지 않을 거라 믿고 일부러 놓아둔 것 같아…. 아니면….'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늦추며 단종을 바라보았다."전하.""왜 그러시오?""아무래도 불안합니다."지우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이렇게 쉽게 우리를 풀어놓을 이유가 없습니다."그녀는 주변을 한 번 더 살핀 뒤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마치 우리가 어디로 가든 결국 다시 잡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 같습니다.“그 말에 담담한 표정을 한 단종이 지우에게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압니다."단종은 주변을 한 번 더 살핀 뒤 나지막이 대답했다."나 역시 같은 생각을 했소."그는 잠시 숲 너머를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하지만 이곳에 계속 머무는 것은 더 위험하오.상대가 무슨 계획을 꾸미는지 알 수 없는 이상, 마냥 다음 상황만 기다릴 수는 없소.하루라도 빨리 궁으로 돌아가야 하오."지우는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단종의 손을 꼭 잡았다.단종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안심시키려는 듯 옅게 미소 지었다."너무 걱정하지 마시오.실은 조금 전 산책을 나왔을 때 따로 노 스님께 연락을 남겨 두었소."지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노 스님께요?"단종은 고개를 끄덕였다."예. 노 스님은 선왕께서도 신뢰하시던 분이오. 그분이라면 믿을 수 있소.계획대로라면 이 숲 중간쯤에서 노 스님이 보내신 분들과 합류하게 될 것이오."그는 지우의 손을 가볍게 잡아 주며 덧붙였다."그러니 조금만 더 힘을 내시오.이제 궁까지 얼마 남지 않았소.“지우는 단종의 말을 듣고서야
석실 안은 짙은 약 냄새로 가득했다.바르칸이 누워 있는 침상 맞은편에서 백현은 네 번째 침술을 이어 가고 있었다.침끝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혈자리를 정확히 찾아들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쿠란이 팔짱을 낀 채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이봐, 백현.""벌써 네 번째 침인데 혈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괜한 헛수고를 하는 것 아니냐?"하지만 백현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그는 조용히 바르칸의 손목을 짚어 맥을 살핀 뒤 나지막이 말했다."죽음의 문턱까지 간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몇 번의 침으로 끝날 만큼 쉬운 일이었다면, 진작 다른 의원들이 살려 냈겠지요."말을 마친 백현은 침 한 자루를 집어 바리칸의 목 아래 혈자리와 가슴 부위를 차례로 찔렀다.방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해졌다.잠시 뒤."쿨럭!"바르칸이 갑자기 몸을 들썩이며 검붉은 피를 토해 냈다.막혀 있던 숨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고, 희미하던 맥박도 서서히 힘을 되찾았다.쿠란의 눈이 커졌다.조금 전까지 시큰둥한 표정을 짓던 그는 백현과 바리칸을 번갈아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설마... 정말 살려 낸 건가.“"맥이 끊어진 것이 아닙니다.아직 몸이 삶을 포기하지 않았을 뿐입니다."백현은 바르칸의 혈색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을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꽂아 두었던 침을 하나씩 빼기 시작했다.그는 마지막 침까지 거둔 뒤 손을 털며 쿠란을 바라보았다."쿠란.""예.""제가 적어 드리는 처방을 족장께 전해 주십시오."백현은 붓을 들어 종이 위에 약재 이름을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침술은 여기까지입니다.""이제부터는 이 약재들을 달여 꾸준히 복용하면 몸속에 남아 있는 어혈과 독기가 서서히 빠질 것입니다."그는 처방전을 건네며 차분하게 덧붙였다."앞으로 사흘이 고비입니다. 그 시간을 무사히 넘기면 바르칸도 목숨은 건질 수 있을것입니다."쿠란은 처방전을 무심한 표정으로 훑어본 뒤 품속에 집어넣었다.그는 몸을 돌려 나가려다가 문득 걸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