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강소연이 유승헌에게 시집온 지도 어느덧 삼 년.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온 정성을 다했지만, 끝내 얼어붙은 그의 마음을 녹이지는 못했다. 비가 쏟아지던 어느 밤, 강소연의 어머니는 중병에 쓰러졌다. 그런데 유승헌은 외실 하나 때문에 태의를 전부 불러들였고, 그녀는 도움을 청할 곳조차 없게 되었다. 그의 노골적인 편애와 외실의 끊임없는 도발 앞에서,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우스운 존재인지 실감했다. ‘이렇게 서러운 왕비 노릇, 이제 그만하겠어’ 유승헌은 처음부터 원치 않았던 혼인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강소연을 사랑하게 될 일 따위는 절대 없을 거라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그녀의 화리 요구에, 그는 오히려 당황하고 말았다.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러 왔는지를 깨달았다. 그러나 다시 만난 그녀는, 다른 이의 부인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 된다! 차라리 미움을 사더라도, 내 곁에 붙잡아 두어야겠구나!’
View More“여기가… 어디예요?”강소연이 발길을 돌리려 했다.그러나 유문인은 말릴 틈도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안으로 걸어갔다. 물러설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문턱을 넘는 순간, 강소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온몸의 피가 한꺼번에 얼굴로 몰려드는 듯했다.아래 대청 한가운데 무대 위에서, 하얀 옷을 입은 소년 하나가 검무를 추고 있었다.검술이 그리 화려하지는 않았다. 다만 옷고름을 제대로 매지 않아, 동작을 할 때마다 가슴과 배의 근육이 은근히 드러날 뿐이었다. 반쯤 드러나고 반쯤 가려진 그 은근한 모습이, 오히려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았다.예전에 경성에 귀족 부인들의 소일거리를 위한 기루가 있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직접 발을 들인 적은 없었다. 더구나 뼛속까지 보수적인 그녀는, 남색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당장 도망치고 싶었다.“어머, 공주마마 아니신가요?”가늘고 부드러운 목소리의 남자가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다가와, 교태를 부리듯 말을 건넸다.“오랜만에 오셨네요.”남자는 강소연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이 아가씨는 처음 뵙는데, 어느 가문 따님인지요?”유문인이 그를 흘겨보았다.“쓸데없는 거 그만 묻고 길이나 안내해라.”강소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어들고 싶었을 것이다.남자가 두 사람을 위층 정중앙의 아담한 방으로 안내했다. 참으로 좋은 자리였다. 생각보다 공간은 넓었고, 아래에서 하는 공연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예쁜 소년 몇이 술과 다과를 들고 들어와, 자연스럽게 유문인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는 술을 따르고 포도를 까 주었다.그중 연두색 얇은 비단옷을 입은 소년 하나가 강소연 앞에 무릎을 꿇고, 조심스럽게 술잔을 그녀의 입가로 가져다 댔다.겨우 열다섯 여섯쯤 되어 보인 소년의 큰 눈에 물기가 그렁그렁하여, 여느 여인보다 더 애처로웠다.강소연은 남자도 이렇게 교태를 부릴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강소연이 화제를 돌렸다.“그런데 왕야께서는 제 그림을 보신 적이 없으시니, 제가 수묵화를 그리지 않는 것을 모르신 모양입니다. 서예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이 벼루는 아마 쓸 일이 없을 듯합니다.”유승헌은 무어라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들썩였다.강소연이 말을 이었다.“쓸데없는 벼루에, 시기를 놓친 선물까지. 왕야께서는 저를 고작 이런 것밖에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여기시는 모양이군요.”수척해진 그녀는 한 줄기 바람에도 쓰러질 듯 가냘팠지만, 등을 꼿꼿이 세우고,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이.유승헌은 무어라 반박하려 했으나, 어디서부터 입을 떼야 할지 알 수 없었다.“왕야께서 이리 주셨으니, 물건은 쓸모 있게 써야겠지요.”강소연이 상자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실로 걸어갔다.“왕야께서 주신 귀한 벼루보다는 제가 가지고 있던 벼루를 쓰는 편이 낫겠습니다.”그녀는 종이를 창가 아래의 탁자 위에 펼치고, 이화에게 먹을 갈게 한 뒤 붓을 들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두 사람의 연분이 여기서 다하였으니, 화리하고자 이 글을 씁니다. 삼 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하였으나, 부부 사이 어긋남이 쌓여 끝내 하나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고심 끝에, 서로 얽매여 고생하기보다는 이쯤에서 놓아주는 것이 서로를 위한 길이라 여깁니다. 이 글을 증거로 남기니, 이후로는 서로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손에 힘을 줄 때마다 살을 에는 듯 아팠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종이 한 장을 다 써 내려갔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강소연이 숨을 깊게 들이쉬고, 종이 오른쪽 아래에 ‘강소연’ 석 자를 반듯하게 적은 뒤 유승헌에게 건넸다.분노한 유승헌이 화리장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예전처럼 자신에게 고함을 지를 줄 알았건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오히려 종이 위의 글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눈빛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고, 속을 알 수 없었다.그러던 그가, 한참 만에 종이를 구겨 쥐더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구겨
왕부로 돌아온 유승헌은 창고를 빠짐없이 뒤졌지만, 마음에 드는 물건 하나 찾지 못했다.그는 강소연의 방에 있던 시녀를 불러 물었다.“왕비는 평소에 무엇을 좋아하느냐?”시녀가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왕비마마께서는 평소 집안일을 돌보시는 것 외에, 가장 오래 머무시는 곳이 화실입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시는 듯합니다.”‘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유승헌은 그녀가 그림을 그릴 줄 안다는 사실도 몰랐다.심지어 자신의 왕부에 화실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그러나 한가하게 화실이나 구경할 수 없었다. 탁자 위를 훑던 그의 시선이, 마침내 벼루 하나에 멈췄다.그 벼루는 몇 년 전 강남에서 사들인 것으로, 조그마한 한 조각이 만금이나 하는 귀중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먹을 가까이하지 않던 그는 한 번도 그것을 쓰지 않았다.호위에게 벼루를 들게 한 그는 최상급 화선지 한 묶음을 골라 함께 상자에 담아 강씨 가문으로 향했다.때마침 강소연은 사당에 무릎 꿇고 경문을 외고 있었다.“아가씨, 혜왕께서 아가씨의 방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강씨 가문의 하인들은 조 어멈의 분부에 따라 그녀를 부르는 호칭을 바꾸었다. 더 이상 혜왕을 친근하게 부르지 않았다.자리에서 일어난 강소연은 시큰거리는 무릎을 주무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승헌 때문에 그녀는 어제 생에서 가장 처참한 장면을 목격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좀처럼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밤새 경문을 외울 지경이었다.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는데, 또 무슨 일로 온 것인가. 내가 얼마나 우스운 꼴인지 구경이라도 온 것인가.’“아가씨, 뵙기가 거북하시면 사람을 시켜 쫓아내겠습니다!”이화가 분을 못 이겨 말했다.강소연이 웃으며 대꾸했다.“어디 그렇게 쉽게 쫓겨날 사람이냐?”이화는 말없이 볼을 부풀린 채 조용히 그녀를 부축해 안채로 걸어갔다.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던 강소연이 돌연 멈춰 섰다.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담담히 물었다.“왕야께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빛을 등지고 서 있던 그녀
“뭐라고?”한참을 벙쪄 있던 유승헌이 입을 열었다.유문인이 분에 못 이겨 손에 쥐고 있던 옥팔찌를 그에게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옥팔찌는 딸그랑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어찌 언니의 생신날에 다른 여인을 위한 연화를 준비하실 수 있단 말이에요? 오라버니, 정말 실망했습니다.”유문인의 눈에는 짙은 실망과 경멸이 서려 있었다.유승헌은 애써 태연한 척하며 입을 열었다.“그녀의 생일인 줄 몰랐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수련의 소원을 이뤄 주는 게 그리 잘못이냐?”‘내가 왜 강소연의 생일까지 알아야 한단 말인가. 내가 시집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내가 누구에게 잘해주든, 남들이 참견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이렇게 자신을 설득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고, 눈빛도 차가워졌다.그러나 가슴 한켠은 여전히 아팠다. 마치 가시 하나가 깊숙이 박혀, 숨을 쉴 때마다 살을 파고드는 듯했다.“무슨 잘못이냐고요? 오라버니, 오라버니에게 마음이라는 게 있긴 해요?”자리에서 일어난 유문인이 허리에 손을 얹고 따져 물었다.그녀는 손가락으로 유승헌의 가슴을 가리키며 화를 냈다.“어제 언니께서 제게 뭐라고 하셨는지 아세요? 오라버니의 생신을 매년 정성스레 준비했는데도, 오라버니께서 눈길도 주지 않으셨다더군요. 게다가 형님의 생신이 언제인지 한 번도 묻지 않으셨고, 아무것도 주시지 않으셨다지요?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형님께서 이미 익숙해지셨답니다. 오라버니께서는 이렇게 부군 노릇을 하신 겁니까?”유문인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고, 무어라 반박할 수 없었던 유승헌은 그저 퉁명스럽게 말했다.“내가 시집오라고 한 것도 아니지 않느냐.”사실 유승헌은 생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해마다 생일이면 관리들이 아부하려고 온갖 잔치를 벌였고, 술을 마시다 보면 항상 잔뜩 취한 채로 집에 돌아와 잠만 자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강소연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리 없었다.“예, 오라버니께서 시집오라 한 적은 없으니, 모두 언니께서 자초한 일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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