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그 태도가 워낙 분명했던 탓에, 사회성이 좋기로 소문난 지우조차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괜히 입을 열었다가 선을 넘은 것만 같은 기분.
결국 지우는 더 말을 꺼내지 못한 채, 다시 조용히 수저를 들었다.
수라를 다 먹고 나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궁녀가 조용히 상을 물렸다.
문밖에 상을 내어놓은 뒤, 다시 돌아와 지우 앞에 공손히 섰다.
“저기… 그럼 이름은?”
지우는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 보려는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름 정도는 알아도 괜찮지?”
‘이 정도는 괜찮겠지…’
잠시 망설이던 궁녀가 입을 열었다.
“소인은… 소하라 하옵니다.”
“소하.”
지우는 한 번 이름을 되뇌듯 불러보았다.
“좋네, 이름. 앞으로 잘 부탁해, 소하.”
그 말에 소하는 순간 시선을 살짝 떨구었다.
볼이 희미하게 붉어진 채, 더 작아진 목소리로 답했다.
“예, 마마.”
‘하… 봐라. 너무 귀엽잖아.’
잠시 흐뭇하게 바라보던 지우는 문득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밖이 좀 소란스러워졌네. 무슨 일 있어?”
지우의 물음에 소하는 금세 표정을 가다듬고 다시 단정한 태도로 돌아왔다.
“아마 수양대군께서 폐하께 주청하여 개최된 사냥대회 때문일 것이옵니다.”
“사냥대회?”
지우가 잔뜩 굳은 표정으로 궁녀의 말에 반응하자,
궁녀는 순간 자신이 무언가 잘못 말했는지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예… 사냥대회 준비로 인해 다소 소란스러울 뿐이옵니다.
혹 불편하시다면, 조용히 하라 전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까진 없어.”
지우는 짧게 답하고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런데, 이걸 수양대군이 주최했단 말이지?”
“예, 마마.”
궁녀의 대답이 떨어지자,
지우의 얼굴에 드리워진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굳어 있던 기색 위로,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이 천천히 번져갔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지우는 이내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하를 뵈러 가야겠네.”
짧게 내뱉은 말이었다.
그 말에는,
지금 이 상황을 그냥 넘길 수 없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지우는 급히 겉옷을 걸치고 문밖으로 나섰다.
뒤따르던 소하는 한 걸음 물러선 거리에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마, 전하를 뵈려면 먼저 승정원을 거쳐야 하옵니다.”
“…그래, 안내해.”
낯선 말들이었지만, 지우는 더 묻지 않았다.
지금은 하나라도 더 빨리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궁의 복도를 걷는 동안, 마주치는 궁인들은 하나같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마마를 뵙습니다.”
그 인사가 이어질수록, 지우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갔다.
‘이 분위기… 생각보다 훨씬 무겁네.’
단순한 궁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규율과 시선들이 공간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다.
잠시 후, 넓은 전각 앞에 도착했다.
“여기가 전하께서 계신 곳이옵니다.”
문 앞을 지키던 내관이 두 사람을 확인하자 곧장 안으로 들어가 알렸다.
“마마께서 입시를 청하시옵니다!”
잠깐의 정적.
그리고—
“들라 하신다.”
문이 열렸다.
지우는 잠시 숨을 고르고 안으로 들어섰다.
전각 안은 고요했다.
말 한마디 없이도 긴장이 흐르는 공간.
그 중심에—
단종과 수양대군이 같이 있었다.
지우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수양대군이… 왜’
의아함을 거둔 지우는 두 사람을 단호히 쳐다보았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 지우를 향하고 있었다.
“마마께서 이른 시각에 폐하를 찾으시다니…
금슬이 각별하신 모양입니다.”
낮고 담담한 목소리가 울렸다.
지우는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했다가,
이내 어설프게나마 예를 갖췄다.
“…전하를 뵙습니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최소한 무례하지는 않게.
수양대군은 그런 지우를 잠시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이리 급히 왔습니까”
짧은 질문.
하지만 그 안에는
단순한 궁금함이 아닌,
상대를 시험하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지우는 잠시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저야말로 묻고 싶습니다.
수양대군께서 어찌 이 시간에 폐하를 알현하러 오신 겁니까?”
그 순간—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수양대군의 눈이 아주 잠깐, 가늘어졌고 단종은 그런 수양대군의 얼굴을
얼핏 쳐다보고는 지우에게로 시선을 돌려 입을 열었다.
“아마도 중전께서 갑작스러운 사냥대회 소식에 놀랐나 봅니다, 숙부님
그리고 중전께서도 그러고 있지 말고 앉으세요”
단종의 말이 무색하게
전각 안의 공기가 한층 더 무거워졌다고
단종은 잠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짧은 침묵.
그러나 그 침묵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지우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확신했다.
이건 단순한 행사가 아니다.
“예, 전하.”
지우는 한 발짝 더 나아가 앉으며 말을 이었다.
“혹 수양대군께서는 제 말이 불편하게 들리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순간, 전각 안의 시선이 모두 지우에게 꽂혔다.
수양대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지우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큰 압박으로 다가왔다.
숨조차 쉽게 내쉴 수 없는 공기였다.
몇 년 후.-경복궁-“아바마마!”고요하던 궁 안에 아이의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작은 발로 회랑을 달려가는 아이의 뒤를 지우가 다급히 쫓고 있었다.“거기 서! 뛰면 안 된다고 했지!”“싫사옵니다!”“쟤는 대체 누굴 닮아서 저렇게 말을 안 듣는 거야?”그 모습을 멀찍이 바라보던 단종의 입가에 슬며시 웃음이 번졌다.“글쎄. 과인은 짐작 가는 사람이 한 명 있기는 하오.”지우의 시선이 곧장 단종에게 향했다.“……설마 저 말하는 거예요?”“과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전하.”단종이 웃음을 참으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그 모습에 살짝 눈을 흘긴 지우는 이내 피식 웃더니 다시 아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그리고 자신의 곁에 있는 단종과 아이가 주는 순간순간의 기쁨을 새삼 느꼈다.“전하.”“왜 그러시오?”“그냥…… 지금 전하와 저 아이가 제게 와준 게 너무 고마워서요.”단종은 뜻밖의 말이었는지 잠시 지우를 바라보았다.“갑자기 그런 말을 하니 조금 당황스럽구려.”“그냥 말하고 싶었어요.”지우가 아이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제가 알던 미래에는…… 이런 모습은 없었거든요.”단종의 표정이 조금씩 부드러워졌다.“그렇다면 잘된 일 아니오?”“예?”“중전이 알지 못하는 미래가 생겼으니 말이오.”지우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리고 문득 오래전 무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이제부터는 정해진 길이 없다는 뜻이겠지요.’그때는 그 말이 막연하게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웃고 있는 단종과 궁 안을 뛰어다니는 아이를 바라보니,이제야 그 말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참, 금성 숙부가 곧 조선으로 돌아온다더군.”“금성대군이요? 드디어 거란에서 돌아오시는군요.”“그러게 말이오. 과인은 하도 돌아오지 않기에 아예 그곳에 눌러살 생각인 줄 알았소.”지우는 단종의 볼멘소리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그래도 결국 돌아오시잖아요.”“그러니 다행이지. 이번에는 또 어디를 다녀오겠다고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오.
-김종서 사저-김종서의 사저는 오랜만에 술과 음식을 나르는 사람들로 꽤나 분주했다.게다가 이번에는 김종서의 특별한 지시로 북방에서 즐겨 먹던 술과 음식들까지 정성껏 준비되어 있었다.“차린 건 없지만 많이들 드시오.”“마지막 인사차 초대한 것치고는 내놓은 음식들이 하나같이 먹음직스럽소.”족장의 말에 김종서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허허허, 입에 맞으셨다면 다행이오. 내 거란족 사신단과 북방 마을 사람들에게 이번 일에 대한 답례를 꼭 하고 싶었소. 전하께서도 그리하라 하셨고 말이오.”“답례라…….”족장은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올리며 희미하게 웃었다.“그렇다면 오늘만큼은 사양하지 않고 마음껏 받아야겠구려.”“허허, 그래야 내가 준비한 보람이 있지 않겠소.”“김종서 대감께서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된 게 어지간히 기분이 좋으신가 봅니다. 평소에는 이리 사저에까지 사람들을 초대하지 않던 분 아닙니까?”금성대군의 말에 김종서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게 말이오. 내 이번 일을 겪으며 북방 사람들의 기개와 용맹을 다시 보게 되었소.”김종서는 술을 한 모금 넘긴 뒤 금성대군을 바라보았다.“헌데 대군께서 이번에 거란족 사신단과 함께 거란으로 간다는 말을 들었소.”김종서의 말에 금성대군 역시 잔을 들어 천천히 술을 넘겼다“예. 그러기로 결정했습니다.”“무슨 특별한 연유라도 있으시오?”“지금껏 북방 여러 곳을 다녀보긴 했지만, 정작 거란 땅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금성대군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족장을 한번 바라보았다.“이번 일을 겪으며 저들의 삶이 어떤지도 궁금해졌고요. 마침 사신단이 돌아간다 하니 이번 기회에 직접 가보려 합니다.”“전하께서 섭섭해 하시겠구려”김종서의 말에 빙그레 웃은 금성대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평생 그곳에 살겠다는 것도 아니고, 잠시 다녀오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제가 궁에 가만히 붙어 있지를 못한다며 한참을 잔소리하시더군요.”“그럴 만도 하겠소. 지난번에는 한
며칠 뒤.해가 서산 너머로 기울기 시작할 무렵, 중궁전은 평소와 달리 이른 시간부터 분주했다.나인들은 방 안을 정갈하게 정돈했고, 상궁들은 준비된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혹여빠진 것은 없는지 확인했다.그리고 그 모든 모습을 지우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을 궁인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오늘따라 유난히 신경 쓰였다.그 이유는 하나였다.오늘이 바로 상선이 잡아온 합방 기일이었기 때문이다.‘……진짜 이날이 와버렸네.’지우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종친들이 합방 날짜를 정해왔다며 몰려온 것이 그저 황당하고 우스웠다.단종과 서로를 놀리며 웃기까지 했다.그런데 막상 그날이 되자 이야기가 달랐다.아침부터 가슴 한쪽이 괜스레 두근거렸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두근거림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마마.”옆에서 지우의 옷매무새를 살피던 소하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왜?”“아까부터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계시옵니다.”“내가?”그제야 지우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어느새 손가락으로 치맛자락 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지우는 황급히 손을 놓았다.“그냥…… 옷이 조금 불편해서 그래.”“그러시옵니까?”“응. 그것뿐이야.”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소하의 눈빛에는 전혀 믿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지우가 괜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아니, 뭐가 이렇게 긴장되는 건데.’단종이 낯선 사람도 아니었다.수없이 이야기를 나눴고, 서로의 마음도 이미 확인했다.죽을 고비까지 함께 넘겼으며 이제는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마음 역시 변함이 없었다.그런데도 오늘 밤을 생각하면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다.그때였다.밖에서 궁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중전마마.”“……왜 그러느냐?”“전하께서 곧 중궁전에 드실 것이옵니다.”“…….”순간 지우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소하는 그런 지우를 바라보다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었다.“마마.”“왜?”“옷이 불편하신 것뿐이라 하지 않으셨사옵니까?
수양대군의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궁에는 아침부터 종친들이 찾아와 단종과 지우를뵙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형님, 우리가 너무 서둘러 온 것이 아니오?”“서두르긴. 전하께서 직접 약조하신 일이 아니던가. 그 약조를 확인하러 왔을 뿐인데무엇이 문제란 말인가.”“그래도 이른 아침부터 이리 몰려오면 전하께서 부담스러워하실 수도 있지 않소.”“그리 걱정되면 자네는 돌아가게. 자네 몫까지 내가 받으면 될 터이니.”“아니, 누가 돌아간다고 했소?”종친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그때, 문밖에서 상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전하와 중전마마 드시옵니다.”종친들은 그 말에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을 바라보았다.이윽고 문이 열리고 단종과 지우가 나란히 안으로 들어왔다.“이른 아침부터 모두 모이셨구려. 무슨 일로 오셨소?”단종의 말에 종친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 그중 가장 나이가 많은 종친이 먼저 입을 열었다.“전하,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보다시피 나도 중전도 잘 지냈소. 헌데 이른 아침부터 이리 모인 까닭이…….”“전하.”종친이 기다렸다는 듯 단종의 말을 끊었다.“혹시 저희 종친들과 지난번에 하신 약조를 기억하고 계시옵니까?”“…….”순간 단종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흠흠.”단종이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그 옆에 있던 지우 역시 무슨 약조인지 떠올랐는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그게…… 기억은 하고 있소.”“그렇다면 이야기가 쉬울 듯하옵니다. 이것을 받아주시지요.”종친이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단종에게 건넸다.단종은 의아한 표정으로 봉투를 받아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다.안에는 날짜와 시각이 적힌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이것이 무엇이오?”단종이 종이를 바라보며 묻자 종친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전하와 중전마마의 합방 길일이옵니다.”“…….”“저희가 심사숙고하여 정해왔사오니, 합방은 이날 하시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단종의 시선이 종이 위에서 그대로 멈췄다.그 옆에 서 있던 지우 역
철컥.고요하던 옥 안에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이내 끼이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옥문이 천천히 열렸다.“수양대군은 나와 전하의 어명을 들으시오.”“어명이라…… 알겠소.”수양대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옥 밖으로 나왔다.그리고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얼마 만에 제대로 바라보는 하늘인지 알 수 없었다.한동안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에 허탈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도승지는 그런 수양대군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왕의 명을 전하기 시작했다.“수양대군은 그 죄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은바, 이 시간부로 대군의 작호를 거두고그 식솔들은 목숨을 부지하게 하되 평민으로 강등한다.”수양대군의 눈빛이 아주 잠시 흔들렸다.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도승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마지막 명을 읽어 내려갔다.“또한 그 죄가 중대하므로 사약을 내려―”도승지의 목소리가 조용한 의금부 안에 울렸다.“목숨으로 그 죄를 묻고자 한다.”“……그렇군.”수양은 짧게 웃었다.“결국 전하께서 내 목숨까지 거두시는군.내 식솔들의 목숨을 살려주신 것은…… 전하의 뜻이오?”“그러하옵니다.”“…….”“알겠소. 그 또한 전하께 감사드린다고 전해주시오. 그리고…… 이 말도 함께 전해주오.”“말씀하시오.”수양대군은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처음부터 왕좌가 탐났던 것은 아니었다고…….”도승지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말을 기다렸다.“다만 내 옹졸한 마음이 문제였던 게지. 어린 왕보다는 내가 더 나을 것이라 생각했소. 내가 왕이 된다면 이 나라를 더 잘 이끌 수 있을 거라 믿었고.”수양대군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그 생각이 하나둘 욕심을 만들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기까지 와버렸구려.”잠시 침묵하던 수양대군이 나지막이 덧붙였다.“그리 전해주시오.”도승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한때 수많은 군사를 움직여 궁을 장악했던 사
며칠 뒤, 편전.평소라면 대신들의 목소리가 오가야 할 편전 안은 유난히 고요했다.좌우로 늘어선 대신들 역시 입을 굳게 다문 채 어좌만을 바라보고 있었다.오늘 이 자리에서 결정될 일이 무엇인지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수양대군의 처분.궁을 군사로 장악하고 왕을 위협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죄.그 죄를 어떻게 물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날이었다.단종의 앞에는 며칠 동안 대신들이 올린 상소들이 수북이 놓여 있었다.그 대부분에 적힌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대역의 죄를 물어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것.단종은 한동안 말없이 상소들을 바라보았다.이미 몇 번이나 읽은 글들이었다.그럼에도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죄가 가벼워서가 아니었다.수양대군이 자신의 숙부이기 때문만도 아니었다.한번 내려진 왕의 명은 되돌릴 수 없었다.그리고 지금 자신이 내려야 할 것은 한 사람의 관직을 빼앗거나 유배지를 정하는 정도의 명이 아니었다.한 사람의 목숨을 거두는 명이었다.잠시 후 단종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대신들의 뜻은…… 모두 같은 것인가?”영의정이 앞으로 나와 허리를 숙였다.“그러하옵니다, 전하.”“수양대군이 저지른 죄가 중하니, 종친이라 하여 달리 처분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 조정의 뜻이옵니다.”단종의 손끝이 상소 한 장 위에 가만히 머물렀다.종친.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양대군이 마지막 방패처럼 내세웠던 말이었다.하지만 이제 그 이름조차 그가 저지른 일을 가려줄 수는 없었다.단종이 낮게 물었다.“……사약을 내려야 한다는 것인가?”순간 편전 안의 공기가 더욱 무거워졌다.“그러하옵니다.”짧은 대답이 넓은 편전 안에 울렸다.단종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그의 시선이 천천히 어좌 아래로 향했다.숙부를 살리고 싶은가.그렇게 묻는다면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하지만 왕으로서 수양대군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그 물음에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었다.단종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망설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