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마틸다 시점
오늘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날이다.
2017년 3월 1일.
내 인생에서 가장 끔찍하고 가슴 아픈 날.
지금 차가운 흙 아래 놓여 있는 관이 아직도 악몽처럼 느껴진다.
나는 엄마를 잃었다.
이제 학교에서 완벽한 삶을 가진 아이들이 나를 비웃고 모욕할 때,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은 더 이상 없다.
나는 앞으로 이 눈물과 끝없이 짓눌러오는 괴로움을 어디에 쏟아내야 할까.
아버지는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오늘 아침부터 방 안에 틀어박힌 채 나오지 않았다.
엄마의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관 뚜껑이 열렸을 때조차 엄마를 보려 하지 않았다.“마틸다, 정말 안됐구나.”
묘지에 도착한 로사 여사가 따뜻하게 나를 안아주었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난 15분 동안 멈추지 않던 눈물을 닦아냈다.
“감사해요, 로사 여사님.”
그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 엄마의 무덤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엄마가 정말 떠났다는 게.
“아버지는 어디 계시니?”
로사 여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오셨어요. 아직 집에 계세요. 저도, 친척들도 계속 설득했지만… 엄마가 묻히는 걸 차마 볼 수 없다고 하셨어요.”
로사 여사는 조용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녀의 슬픔도 내 것만큼 깊다는 게 느껴졌다.
“인생은 참 이상해요, 로사 여사님.”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전 그냥… 진심으로 절 아껴주고 지켜줄 사람 하나만 있으면 됐어요. 그런데 이제 그 사람마저 사라졌어요. 아시죠? 전 학교에서 늘 못생긴 여자애라고 놀림받았어요. 엄마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버티지도 못했을 거예요. 정말 신은 제가 이렇게 잔인한 세상을 견딜 만큼 강하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마치 내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멀리서 천둥소리가 울렸다.
검은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었고, 가느다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빗줄기는 점점 거세졌다.
“마틸다, 이제 가자꾸나. 비가 많이 오겠어. 하늘 좀 보렴.”
로사 여사가 내 팔을 부드럽게 잡았다.
하지만 나는 천천히 그녀의 손길을 떼어냈다.
“로사 여사님은 먼저 가세요. 전 여기 있을래요.”
나는 떨리는 숨을 삼켰다.
“비를 맞으면서 울고 싶어요… 그리고 이 외로움을 느끼고 싶어요.”
“할머니!”
커다란 목소리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프레드릭이었다.
그는 우산을 든 채 우리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로사 여사는 손자가 다가오자 곧바로 내 곁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할머니, 집에 가요! 왜 아직도 여기 계세요?!”
프레드릭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지 않았다.
시선은 끝까지 엄마의 무덤에 머물러 있었다.
잠시 긴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들이 돌아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갑자기 프레드릭이 내 손목을 거칠게 붙잡았다.
“놔요!”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뿌리쳤다.
솔직히 화가 났다.
이렇게 억지로 끌려가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걱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나는 내 방식대로 이 슬픔을 견디고 싶었다.
빗속에서.
왜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정말 고집 세네! 비 오는데 여기서 뭐 하겠다는 거야? 하루 종일 여기 서 있어 봤자 네 엄마는 돌아오지 않아. 현실을 받아들여야지.”
나는 천천히 그를 바라보았다.
프레드릭도 이미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우산은 로사 여사에게 넘겨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처음으로—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화가 났다.
“당연히 받아들일 거예요, 프레드릭. 저도 그 정도는 알아요. 굳이 당신이 말해주지 않아도 돼요. 그래도 전 여기 있고 싶어요. 그게 그렇게 잘못됐나요? 그냥 가세요. 절 억지로 데려가려는 것보다 할머니 건강 챙기는 게 더 중요하잖아요.”
“하… 됐어! 내가 네 걱정이라도 하는 줄 알아? 젠장, 할머니 갑시다! 제가 말했잖아요. 이 여자한테 무슨 말을 해봤자 소용없다고!”
프레드릭은 짜증스럽게 돌아서서 걸어갔다.
로사 여사가 작게 그를 나무라며 다시 나를 설득해보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끝내 무시했다.
그는 빗속으로 사라졌고—
나는 엄마 무덤 앞에 앉아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았다.
**
2017년 5월 4일
나는 로사 여사의 저택 마당으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졌다는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엄마가 죽은 이후 아버지는 완전히 달라졌다.
지난 세 달 동안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아버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나 역시 텅 빈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삶은 색을 잃었고, 무의미해졌다.
심지어 한때 그렇게 뜨겁던 프레드릭에 대한 감정마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젠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가 더 깊은 절망 속으로 가라앉지 않도록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몇 번이나 몸져누웠다.
나는 계속 쉬라고 말했지만, 그는 집에 있는 걸 싫어했다.
집 안 곳곳에 엄마의 흔적이 남아 있었으니까.
로사 여사의 가정부가 나를 맞이했고, 뒤편 작은 별채로 안내했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침대 위에 힘없이 누워 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얼굴은 창백했고, 숨소리도 불안정했다.
“아빠…”
“가까이 오지 마.”
나는 그 말에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애써 무시한 채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러자 아버지의 눈이 크게 흔들리더니 갑자기 소리쳤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 순간 로사 여사가 급히 나를 붙잡아 방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머릿속이 엉망으로 뒤섞였다.
아버지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마틸다, 지금은 아버지 말을 들어야 해.”
로사 여사가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는 우울증이 아주 심해졌단다… 깊은 상실감과 충격 속에 계셔.”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로사 여사는 그런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럼 전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아버지 곁에는 누군가가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전 어떻게 해야 하죠, 로사 여사님? 정말 모르겠어요…”
“조금만 더 견뎌야 해, 마틸다. 네 아버지가 가장 두려워했던 건 네 어머니를 잃는 거였단다. 그런데 결국 그 일이 일어나버렸으니… 지금은 슬픔에 잠식된 상태야. 내가 천천히 이야기해볼게.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렴.”
“할머니, 어디 계세요?”
익숙한 목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
고개를 들자 프레드릭이 한 여자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폴라.
나는 단번에 알아봤다.
요즘 가장 유명한 모델.
모두가 아름답다고 떠들어대는 여자였다.
나는 천천히 로사 여사의 품에서 몸을 떼어냈다.
그들을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게 편했다.
“잘 왔구나, 프레드릭.”
로사 여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작은 부탁 하나만 들어주겠니?”
“뭔데요?”
프레드릭은 벌써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틸다랑 같이 집에 다녀와서 짐 좀 가져와 주렴. 앞으로 여기서 지낼 거란다.”
나는 깜짝 놀라 급히 고개를 저었다.
“뭐요?! 제가 얘랑 같이 가라고요? 전 지금 폴라랑 점심 약속 있는데요. 할머니 모시러 온 거지 마틸다 돌보러 온 게 아니라고요! 혼자 못 가나? 자기 집 어딘지도 기억 못 하는 거예요?!”
프레드릭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공기를 날카롭게 갈랐다.
표정 역시 노골적으로 불쾌해 보였다.
“죄송해요, 로사 여사님. 하지만 프레드릭 씨 말이 맞아요. 저 혼자—”
“프레드릭, 같이 가라고 했지.”
로사 여사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언제부터 내 말을 안 듣기 시작했니? 아니면 마틸다를 돕는 게 그렇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야?”
그녀는 곧 폴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폴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 알았어요! 가면 되잖아요!”
프레드릭은 짜증스럽게 몸을 돌려 먼저 걸어갔다.
나는 로사 여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서 옷이랑 필요한 물건 챙겨 오렴. 내일부터 출근 준비도 해야 하잖니.”
나는 그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프레드릭의 시점반쯤 열린 유리 미닫문 너머로 그들을 지켜보았다.식당 테라스의 밤바람은 무척이나 차가웠고, 느슨하게 묶인 헤레나의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녀는 난간 끝에 선 채, 아래로 반짝이는 뉴욕의 야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안토니오가 서 있었다.두 사람의 거리는 몹시 가까웠다. 전류가 흐르듯 충격이 내 머릿속을 강타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안토니오가 뭐라고 말을 건네고 있었다. 방 안에서는 들리지 않을 만큼 나지막한 목소리였지만, 그의 행동은 눈에 선히 들어왔다. 그는 정장 재킷을 벗어 얇은 드레스 차림의 헤레나 어깨 위에 걸쳐주었다. 그러면서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그의 손등이 헤레나의 드러난 목덜미 살결을 스쳤다.헤레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저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재킷을 받아들고는 안토니오를 향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미소였다. 더없이 부드러운 미소.내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쾅 하고 터져 내렸다.질투가 아니었다. 질투라는 감정 따위로 이름 붙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지독하고 참혹한 감정이었다. 그것은 미친 듯한 소유욕이었고, 내 이성을 갈라놓는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그 여자는 그딴 식으로 다른 남자에게 웃어주어선 안 된다. 그 여자는 내 것이다. 내가 비록 그녀를 망가뜨렸을지라도, 비록 나 스스로 절벽 아래로 내던졌을지라도, 그녀는 오직 나만의 소유여야 했다.이성이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내 두 다리가 먼저 움직였다.유리문을 거칠게 밀어젖혔다. 경첩이 날카로운 긁히는 소리를 내며 테라스의 적막을 찢었다.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섰다. 안토니오의 얼굴에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내가 뼈저리게 잘 알고 있는 그 차가운 표정이 자리 잡았다. 반면 헤레나는…… 그저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놀라는 기색도, 죄책감도 없었다. 오직 냉랭한 시선만이 내 혈관 속 피를 끓어오르게 만들었다."로맨틱한 시간을 방해한 것 같군."내가 뱉어낸 목소
마틸다의 시점엔조의 저택 40층 테라스에서 불어오는 밤바람은 살을 에는 칼날 같았다. 하지만 그 서늘함이 오히려 좋았다. 오늘 밤 유일하게 거짓 없는 진실처럼 느껴졌으니까.철제 난간에 기대어 맨해튼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땅 위에 떨어진 별들처럼 도시의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저 아래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숨 쉬고, 사랑하고, 미워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어딘가에 프레드릭 리암 스미스가 있다. 어쩌면 지금쯤 집무실에서 위스키를 마시고 있을지도 모른다. 책상 위 액자에 담긴 마틸다의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헤레나'라는 이름만 들리면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묻고 있을지도 모른다.나는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내 귀에조차 쓴웃음으로 들렸다.마틸다, 왜 웃어? 네가 이긴 거잖아. 그를 무너뜨렸어. 네가 원하던 게 바로 이거였잖아?그런데 왜 가슴이 이렇게 짓밟힌 것처럼 아픈 거지?차가운 철제 난간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갑자기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입고 있던 검은색 트레이닝 복 상의가 마치 나를 옥죄는 젖은 담요처럼 답답했다. 이 감정에는 익숙해져야 했다. 내성도 생겼어야 했다.하지만 아니었다.프레드릭의 눈을 마주할 때마다—언제나 나를 경멸하던 그 눈빛이, 지금은 훨씬 더 참담한 절망으로 나를 바라볼 때마다—내 안의 무언가가 바스러져 내렸다. 헤레나의 그 어떤 완벽한 가면으로도 메우지 못할 작은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젠장." 바람을 향해 뇌까렸다. "그를 그리워하지 마. 절대, 절대—""혼자 말하는 거야?"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며 중심을 잃을 뻔했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테라스 문턱에 안토니오가 서 있었다.그의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 두 잔이 들려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칼, 조금 구겨진 셔츠, 그리고 눈 밑에 내려앉은 다크서클이 그 역시 잠들지 못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그의 외모가 아니었다.그의 말투였다.냉소도, 날 선
프레드릭의 시선나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26년 동안 완벽하게 익혀온 기술이었다.루디에게는 '이터널 프로스트(Eternal Frost)' 캠페인의 "최종 무드 보드를 확인하기 위해" 이 스튜디오에 왔다고 말했다. 할머니에게는 "시각적 디자인의 퀄리티가 스미스-존즈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는지 직접 점검하는 중"이라고 둘러댔다. 맨해튼의 거리를 가로질러 도시 외곽의 낡은 창고를 향해 스포츠카를 몰면서도, 나는 스스로에게 이것이 순전히 비즈니스적인 문제라고 속삭였다.하지만 지금, 완전히 닫히지 않아 반쯤 열려 있는 문 뒤에 선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비겁한 상태인지.나는 무드 보드를 확인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오직 그녀를 보기 위해 온 것이었다.방 안에는 먼지와 블랙커피, 그리고 어딘가 달콤한 향기—아마도 헬레나의 피부에 남아있던 백단향 향수의 잔여물일 터였다—가 맴돌고 있었다. 메인 조명은 꺼져 있었고, 구석에 놓인 작업용 스탠드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불빛만이 방을 채우고 있었다.헬레나는 커다란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단정한 검은색 트레이닝 복 차림으로, 머리는 대충 틀어 올린 채 목덜미 위로 몇 가닥의 잔머리가 흘러내려 있었다. 그녀는 지쳐 보였다. 어깨가 살짝 처져 있었는데, 그 모습은 언제나 사람들 앞에서 유지하던 완벽한 단단함에 생긴 미세한 균열을 보여주고 있었다.그리고 그녀의 뒤에는, 안토니오가 서 있었다.그 남자는 기술적인 지시를 내리는 매니저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손에 클립보드조차 들려 있지 않았다. 조명 각도나 발 모양에 대해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안토니오는 그녀에게 너무나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불과 몇 인치도 되지 않아 보였다. 바늘자국과 다리미 화상 자국이 가득한 그의 거친 손—재단사의 손—이 느릿하게, 그리고 거의 눈에 띌 만큼 망설이면서 헬레나의 어깨를 향해 뻗어 나가고 있었다.숨이 멎었다. 심장이 엉뚱한 박자로 뛰기 시작했고, 무겁고 뜨거운 박동이 치밀어 올라
마틸다의 시선오케스트라의 연주 소리가 마치 귓가에서 윙윙거리는 벌 소리처럼 들렸다. 프레드릭은 무도회장에서 나를 끌어내어 발코니 문 근처의 반쯤 어두운 구석으로 데려갔다. 그의 손은 여전히 내 손목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아플 정도는 아니었지만, 불처럼 뜨거웠다. 마치 방금 불에서 꺼낸 쇠사슬처럼 뜨거웠다."내 말 들어." 그가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치 바다에 빠진 사람처럼 간절한 목소리였다. "내 말 좀 들어, 마틸다. 지금 어떤 이름을 쓰고 있든 상관없어. 내 말을 들어."나는 옆에 있는 대리석 벽을 응시했다. 그의 눈을 볼 수 없었다. 그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헬레나의 가면이 깨져버릴 테니까. 그 균열이 순식간에 벌어져, 그토록 그를 사랑했던 바보 같은 마틸다—무덤에서 걸어 나와 그를 품에 안고 싶어 하는 마틸다—가 다시 깨어날 테니까."우리 첫날밤 기억나?" 프레드릭이 발걸음을 좁히며 말을 이었다. 그는 마침내 내가 자신을 쳐다보도록 강제했다. 그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울어서가 아니라, 수면 부족과 속에서부터 자신을 갉아먹는 강박 때문에. "네가 나한테 닭백숙을 끓여줬었지. 발에 맞지 않는 구두를 신어서 발이 다 부어 있었는데도 주방에서 두 시간이나 서 있었어. 그런데 난... 그걸 네 눈앞에서 쓰레기통에 들이부었지. 내 개도 안 먹을 음식이라고 하면서."숨이 멎었다. 그 기억이 거대한 트럭처럼 나를 덮쳤다. 뺨을 화끈거리게 만들었던 그 지독한 수치심과, 당시 가슴속을 태우듯 아프던 그 통증이... 고스란히 되살아나 내 갈비뼈를 으스러뜨렸다."하지만 너는..." 프레드릭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계속 웃고 있었어.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지. '다음에는 더 맛있을 거예요, 프레드릭'이라고. 왜 그랬어? 왜 나한테 뺨을 때리지 않았어? 왜 그때 나를 미워하지 않았던 거야?!"가슴이 조여왔다. 이 구석의 산소 가 완전히 바닥났다. 다시 '사일런트 드롭(Silent Drop)' 계곡의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
프레드릭의 시선나는 그녀에게 춤을 배우라고 요구한 적이 없었다.나는 그저 엔조가 개입하거나 반응할 겨를도 주지 않은 채, 얼음처럼 차가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 무도회장 한가운데로 끌어당겼을 뿐이었다. 그 유럽인의 날카로운 시선이 내 등에 꽂히는 것을 느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음껏 노려보라고 해라. 뉴욕의 상류층 전체가 우리를 지켜보게 두어라.오늘 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그녀뿐이었다. 나와 그녀, 단둘이서.오케스트라가 느린 왈츠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블루 다뉴브. 우리 결혼식 하룻밤에 울려 퍼졌던 그 저주받을 곡이었다.내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거의 없애다시피 하자, 헬레나는 긴장했다. 진청색 드레스가 소리 없이 흔들렸다. 고급스러운 백단향과 싸구려 바닐라의 달콤함이 오묘하게 섞인 그녀의 향기가 내 감각을 사정없이 두드렸다."너무 가까이 다가오시네요, 스미스 씨." 그녀가 속삭였다. 목소리는 단조로웠지만, 문장 끝에는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손님들이 보고 있어요.""보게 두지." 바이올린의 선율 속에 거의 묻힐 만큼 낮게 대답했다. "슬픔에 잠긴 홀아비가 매혹적인 여인의 동행으로 위안을 삼는 모습을 구경하라고 해. 아니면 두려운 건가, 헬레나?""난 두려운 것 없어요.""좋아."나는 그녀를 돌려세우며 한 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얽어 쥐었다. "질문이 있으니까, 대답해야 할 거야."그녀는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내 왼쪽 어깨 너머를 향하고 있었고, 그 표정은 완벽하게 훈련된 허무함 그 자체였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당신은 너무 굳어 있어." 나는 리듬에 맞춰 그녀를 이끌며 농담조로 말했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레드카펫을 걸을 때는 마치 이 곳의 여주인인 것처럼 굴더니, 이 무도회장 위에서는... 마치 춤을 추는 남자의 발을 밟을까 봐 두려워하는 소녀 같군."그녀의 손가락이 내 손등을 더 강
마틸다의 시선내 허리를 감싸 쥔 프레드릭의 손은 마치 뜨거운 숯불 위에서 달궈진 철퇴처럼 느껴졌다.그 손의 열기는 드레스의 다크 블루 실크 직물을 뚫고 들어와 내 피부를 태웠고, 뼈 속 깊이刻(각인)될 자국을 남겼다. 홀 구석의 오케스트라는 왈츠를 연주하고 있었다. 느리고, 가슴을 비집고 들어오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익숙한 멜로디였다.젠장.나는 이 멜로디를 알고 있었다. 프레드릭이 우리 결혼식 날 밤, 내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오점이라고 귓가에 소곤거리기 직전, 할머니에게 우리가 "행복한 부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나를 무도회장 한가운데로 이끌며 연주하게 했던 바로 그 곡이었다."떨고 있군, 헬레نا." 고급 샌들우드와 위스키 향이 섞인 프레드릭의 숨결이 내 목덜미를 간질였다. "아니면 두려운 건가? 여기 있는 삼백 명의 하객들 앞에서 내가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자신의 자존심조차 컨트롤하지 못하는 남자는 두렵지 않아요, 스미스 님." 내 목소리는 무덤덤하고, 차갑고, 완벽했다. 헬레나의 가면은 견고하게 고정되어 있었고, 마틸다는 내 마음속 어두운 지하실에 갇혀 있었다. "이 손 놓으시죠. 엔조가 나를 찾기 시작했어요.""찾으라고 해." 프레드릭은 조롱하듯 중얼거리며 내 허리를 한층 더 세게 쥐어짰고, 나를 자신 쪽으로 1인치 더 밀착시켰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거의 사라졌다. "내가 신경이나 쓸 것 같나? 당신은 방금 전 무대 위에서 내 삶을 무너뜨렸어. 반지를 내던지고, 모레티의 이름을 입에 담고... 내가 바보로 보이나? 당신이 누구인지 내가 모를 줄 알고?"내 심장은 오케스트라의 연주 소리를 덮어버릴 만큼 거세게 방망이질쳤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얼음처럼 냉정함을 유지했다. 한때 그토록 사랑했던 그 어두운 갈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며, 그의 가슴만을 똑바로 노려보았다."환각을 보고 계시네요, 프레드릭. 금단 증상과 수면 부족 때문에 온통 유령만 보이시나 봐요.""프레드릭이라고 부르지 마!" 그가 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