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칙령은 재판 둘째 날로부터 닷새 뒤에 붙었다.
대성당 문, 왕궁 문, 환전 거리 입구. 그리고 하르트 은행 문 옆 판자 바로 위.
교단의 판결이 날 때까지, 이단 혐의를 받는 자의 재산은 왕실이 맡아 둔다. 하르트 은행 왕도 금고를 봉한다. 국왕 레지날드 2세.
루엔은 칙령을 두 번 읽었다. 틀린 데가 없었다. 판결문은 아직 붙지 않았다. 그러니 루엔은 아직 혐의자였다. 칙령은 그 틈에 정확히 들어가 있었다.
“맡아 둔다래.” 클라리사가 이를 악물었다. “빼앗는다는 말을 저렇게도 하네.”
“폐하께서 셈을 잘하셨습니다.”
“지금 칭찬이야?”
“셈은 칭찬합니다.”
루엔은 전생에서 읽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한 왕이 큰 기사단에 빚을 졌다. 기사단은 여러 나라에 금고를 두었다. 왕
셋째 시 종이 울렸다.하르트령 지점 지붕 위, 거울 신호대 앞에 선 신호지기가 북쪽 등성이를 보았다. 루엔도 보았다.날마다 이 시각이면 산맥 첫 탑에서 빛이 왔다. 짧게 세 번, 길게 한 번. 「동쪽 장부 준비됨.」 그다음 숫자가 한 줄씩 따라왔다. 전날 동쪽 지점들에서 들고 난 금의 합계였다. 하르트령 지점은 그 숫자를 제 장부와 맞춰 보고, 맞으면 「맞음」을 되돌려 보냈다.겨울 내내 빠진 날이 없었다. 눈보라 치는 날엔 한 시간 늦었을 뿐이다.오늘은 오지 않았다.루엔은 해시계 그림자를 보았다. 종이 울린 뒤로 그림자 끝이 금 하나를 넘어갔다. 한 시간의 스무 몫쯤.“구름입니까.”신호지기가 고개를 저었다. “하늘이 이렇게 맑은데요.”맑았다. 산맥 꼭대기의 눈이 날이 선 듯 또렷했다. 첫 탑이 서 있는 등성이도 보였다. 거기서 빛이 나지 않았다.루엔은 스물셋이 된 지 아흐레째였다. 겨울을 나러 온 고향에서 봄이 오면 바로 왕도로 돌아갈 참이었다. 짐은 반쯤 싸 두었다.“한 번 더 부르십시오.”신호지기가 거울을 기울였다. 하르트령의 빛이 등성이로 날아갔다. 짧게 셋, 길게 하나.답이 없었다.루엔은 속으로 셌다. 둘, 셋, 다섯, 일곱.열한에서 멈췄다. 지금 떨 까닭은 아직 없었다. 탑 하나가 말이 없다는 건 거울이 깨졌거나 신호지기가 아프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그런데 한 시간 뒤, 둘째 탑 쪽을 보는 망루에서도 소식이 왔다. 둘째 탑도 조용했다. 셋째도.탑 셋이 한꺼번에 입을 닫는 일은 없었다.*소식은 이틀 뒤 노새를 타고 왔다.노새 등에 소년 하나가 엎드려 있었다. 열세 살쯤. 얼굴이 바람에 터져 있었고, 손에는 거울 닦는
한 해 장부의 마지막 장에 칸이 다섯 있었다.클라리사가 그은 칸이었다. 은행 장부도 상단 장부도 아닌, 그녀가 따로 매는 작은 장부. 제목은 탑. 칸마다 탑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다.“한 낱말씩만 써.” 클라리사가 펜을 내밀었다. “길게 쓰면 안 읽어.”루엔은 적색탑 칸부터 채웠다.같이 일함.디트마르가 불 마법사들을 데리고 공방 가마 앞에 서는 날이 이제 한 달에 열흘이 넘었다. 원기를 녹인 뒤로는 더 잦았다. 적색탑 이름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적색탑 불이 어디에 쓰이는지는 공방 장부에 적혔다.청색탑 칸. 빚진 사이.“빚?” 클라리사가 눈썹을 올렸다.“뱅크런 때 금을 빌렸습니다. 몰수 때는 장부를 빌렸습니다. 서로 빚이 있습니다. 서로 갚습니다.”황색탑 칸. 판별 도구.오틸리에는 한 해 미루자던 후원 계약을 거두지 않았다. 대신 계약서 끝에 한 줄을 더 적어 보냈다. 판별 도구 삯은 후원금과 따로 셈할 것. 황색탑 유리 공방은 이번 겨울 견본판과 확대 유리를 삼백 벌 넘게 만들었다.검은탑 칸. 세는 탑.모르벤의 기록 대행은 영지 스물을 넘었다. 흉년, 불, 돌림병, 말에 차인 사람. 검은탑 저주사가 이제 표를 들고 영주들 앞에 섰다.마지막 칸. 백색탑.루엔은 펜을 든 채 오래 있었다.클라리사가 옆에서 기다렸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말했다. “적이라고 써.”“적이라고 쓰면 셈이 끝납니다.”“그럼 뭐라고.”루엔은 적었다. 셈하는 중.클라리사가 그 칸을 보았다. 판결문 둘째 줄. 세 해짜리 대표 자리. 재판정 벽 위에 섰다가 꺼진 푸른빛과 보랏
왕도 방어 결계는 성벽을 따라 서 있었다.성벽은 반듯하지 않았다. 몇백 년 동안 도시가 커질 때마다 한 토막씩 덧대 쌓았다. 모서리마다 튀어나온 망루, 강 쪽으로 움푹 들어간 자리, 동문 밖으로 삐죽 나간 새 성벽. 결계는 그 성벽 위로 곧게 솟아올라 높은 데서 평평한 지붕으로 덮였다. 위에서 보면 들쭉날쭉한 상자였다.그 상자를 궁정 마법사 여덟이 지켰다. 넷씩 번갈아 밤낮으로. 전쟁 때는 여덟으로 모자라 황색탑과 백색탑에서 사람을 빌렸다.왕 레지날드 2세가 화해 뒤 루엔에게 처음 맡긴 일이 그 결계였다.“여덟이 지키는데 늘 얇소.” 왕이 말했다. “더 두껍게 하려면 스물이 있어야 한다더군. 짐은 스물을 먹일 금이 없다.”“두껍게 하지 않고 작게 하겠습니다.”“작게? 도시를 줄이란 말이냐.”“도시는 그대로 두고, 결계의 겉넓이를 줄이겠습니다.”*루엔은 궁정 마법사들을 공방 마당으로 불렀다.여덟 가운데 넷이 왔다. 그중 하나가 겨울 축일 연회에서 생일 내기를 걸었던 황색탑 출신 마법사였다. 대표 선거 때 카시미르에게 손을 들었던 사람. 그는 마당에 놓인 물건을 보고 눈썹을 올렸다.비눗물 대야. 그리고 가는 쇠줄로 엮은 틀 몇 개. 네모 상자 틀, 들쭉날쭉한 별 모양 틀, 둥근 고리.“비누로 결계를 가르치겠다는 거요?”“비누가 먼저 셈을 합니다.”루엔은 빨대로 비눗방울을 하나 불었다. 방울이 마당 위로 떠올랐다. 둥글었다.“비눗방울은 늘 둥급니다. 네모로 불어도, 별 모양 틀로 불어도, 떠오르면 둥글어집니다.”“원래 그렇소.”&l
원기고 자물쇠는 새벽에 부서진 채로 발견되었다.조폐청 뒤뜰 돌집. 쇠문 두 겹 가운데 바깥 문은 멀쩡했다. 안쪽 문 자물쇠가 쇠망치로 떨어져 나가 있었다. 선반 위 표준 근 원통은 제자리에 있었다. 그 옆 표준 척 막대 자리가 비어 있었다.새 조폐청장이 루엔을 부르러 왔다. 셈판을 옆구리에 낀 채로. 얼굴이 하얬다.“근은 두고 척만 가져갔습니다.”루엔은 빈 선반을 오래 보았다. 막대가 놓였던 자리에 먼지가 없었다. 그 둘레에만 얇게 앉아 있었다.“가져간 사람은 척만 필요했던 겁니다.”새 조폐청장이 셈판 알을 하나 튕겼다. “문지기 둘이 어젯밤 술 한 동이를 선물로 받았답니다. 보낸 이 이름은 없고.”“술 한 동이 값이 얼마입니까.”“은화 셋.” 새 조폐청장이 루엔을 보았다. 무엇을 셈하는지 알아챈 얼굴이었다. “원기 값을 은화 셋으로 본 사람이군요.”*사흘 뒤 귀족 회의에서 막대가 나왔다.동쪽의 젊은 백작 하나가 들고 왔다. 란츠 백작의 조카였다. 이번 가을 표준 척 칙령에 끝까지 손을 들지 않았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 그는 흰 쇠 막대를 비단에 싸 들고 회의실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원기를 우리가 거둬 들였소.”회의실이 술렁였다. 왕이 턱을 괴었던 손을 내렸다.“거둬 들였다.” 왕이 되풀이했다.“루엔 하르트가 새긴 척은 틀렸소.” 젊은 백작이 막대를 탁자에 눕혔다. 막대 한쪽 끝의 가는 금 옆에 새 금이 하나 더 그어져 있었다. 원래 금은 반들반들하게 문질러 지워져 있었다. “우리 동쪽 옛 자 셋에 대 보니 손톱 반이 모자랐소. 세상 둘레를
공방 이층 긴 탁자 위에 막대 하나가 놓였다.그냥 참나무 막대였다. 눈금은 없었다. 루엔은 그 옆에 공방 쇠 자를 두고, 공방 사람들과 하겐의 여섯을 탁자 둘레에 세웠다. 열두 사람.“이 막대 길이를 재십시오. 한 사람이 한 번씩.”열두 사람이 차례로 쟀다. 쇠 자를 대고, 눈금을 읽고, 밀랍판에 적었다. 값이 다 달랐다. 크게는 아니었다. 손톱 두께 안쪽에서 오르락내리락.“이번엔 한 사람이 네 번씩 재서, 네 값을 더해 넷으로 나누십시오.”열두 사람이 다시 쟀다. 네 번씩. 나눈 값 열둘을 칠판에 적었다. 아까보다 가까이 모였다. 흩어진 폭이 반쯤.“열여섯 번씩.”누군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쟀다. 한낮이 넘었다. 값 열둘이 또 가까워졌다. 아까의 반. 처음의 넷에 하나.“마지막입니다. 백 번씩.”하겐이 떨리는 왼손을 들었다. “백 번이면 해가 지오.”“집니다.”해가 졌다. 공방에 등이 켜졌다. 열두 사람이 백 번씩 잰 값이 칠판에 올라갔다. 거의 한 줄로 섰다. 흩어진 폭이 처음의 열에 하나.루엔이 칠판 앞에 섰다.“네 번 재면 흔들림이 반. 열여섯 번이면 넷에 하나. 백 번이면 열에 하나. 재는 횟수가 네 배가 될 때마다 흔들림이 반으로 줄어듭니다.”공방 막내가 팔을 주무르며 물었다. “그럼 만 번 재면 백에 하나요?”“예.”“그럼 왜 만 번 안 해요?”“팔이 떨어집니다.” 루엔이 말했다. “그리고 흔들림은 줄어도, 지난여름 사슬처럼 한쪽으로 치우친 건 만 번을
두 조의 공책이 한 탁자에 모인 건 한여름이었다.북쪽 조 공책 열한 권. 테오의 글씨. 하르트령 북쪽 끝 기점에서 왕도 남문 기선까지. 남쪽 조 공책 아홉 권. 시몬 라크루아의 글씨. 왕도 남문에서 남쪽 곶까지.지난해 초여름에 떠나 여름 둘, 겨울 하나가 걸렸다. 루엔이 처음 잡은 두 해보다 조금 짧았다.테오는 북쪽에서 돌아온 날 공방 바닥에 누워 한나절을 잤다. 일어나서 빵 두 개를 먹고, 공책 열한 권을 탁자에 쌓았다. 그리고 한 권씩 루엔 앞으로 밀었다.“쪽 번호 빠진 거 없어. 산성 이후로 깃발도 안 바꿨어.”수염이 턱을 덮고 있었다. 테오는 공책 맨 위 권을 톡톡 쳤다.“북쪽 끝 기점은 하르트령 성벽 밖 바위에 박았어. 쇠 못 하나에 줄 새김. 너희 형이 와서 보더니 대충 거기쯤이면 되지 않냐더라. 그래서 대충이 뭔지 한 시간 설명했지.”“형은 뭐라고 했습니까.”“너랑 똑같은 소리를 하는 놈이 하나 더 생겼다고.”시몬은 사흘 뒤에 왔다. 말없이 고개를 한 번 숙이고, 공책 아홉 권을 탁자에 놓았다. 표지가 반듯했다. 모서리 하나 접힌 데가 없었다.*루엔은 셈을 둘로 나눴다.북쪽 토막. 삼각형으로 이은 거리, 그리고 두 끝에서 잰 북극성 높이의 차. 북극성이 한 칸 낮아질 때마다 땅 위로 몇 리를 걸었는지.남쪽 토막. 같은 셈.세상이 완전한 공이라면 두 값은 같아야 했다. 허리가 조금 불룩하다면 허리에 가까운 남쪽이 아주 조금 짧아야 했다. 비르케의 진자가 말해 준 만큼. 아주 조금.두 값이 나왔다.남쪽 값이 북쪽보다 이백오십에 하나쯤 짧았다.루엔은 셈을 다시 했다. 같았다. 테오에게 따로 하게 했다.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