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허락이 아닙니다. 한도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복도에서, 사제를 올려다보며.
사제는 쉰쯤 되어 보였다. 키가 작고 말랐다. 흰 사제복 소매 끝이 잿빛이었다.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루엔이 한 살 여름, 이마에 기름 한 방울을 찍어 준 사람이었다. 이름은 앨드릭. 노르벡 교회를 스무 해 넘게 맡아 왔다.
“한도라.” 앨드릭이 말했다. “열에 하나까지는 벌하지 않는다. 그렇지요?”
“예.”
“그럼 열에 하나 아래는 해도 되는 일이 됩니다. 도련님. 벌하지 않는 것과 허락하는 것이, 광장에 선 사람한테 어떻게 다릅니까.”
루엔은 대답하지 못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선을 그으면 선 아래는 안쪽이 된다. 셈으로 따져도 그랬다.
그때 가렛 방 문이 열렸다.
“들어오시오, 사제.”
*
가렛은 앉으라고 하지 않았다. 앨드릭도 앉지 않았다. 루엔은 문간에 남았다. 나가라는 말이 없었다.
“교단 법은 이자를 받지 말라는 것이오.” 가렛이 말했다. “그 법이 서른 해 동안 몰튼을 막았소?”
앨드릭이 입을 다물었다.
“몰튼은 교회에 빠진 적이 없었지. 맨 앞자리에 앉았소. 그리고 달마다 곱했소.” 가렛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나는 교단 법을 고치지 않소. 받지 말라는 설교는 계속하시오. 나는 넘는 자를 벌할 뿐이오.”
“그럼 열에 하나를 받는 자는 교회에선 죄인이고, 광장에선 죄인이 아니겠군요.”
“그렇소.”
앨드릭은 한참 가렛을 보았다.
“법이 둘이면, 영주님. 사람은 가벼운 쪽을 따릅니다.”
“무거운 쪽 하나만 있을 때는 아무도 따르지 않았소.”
이번엔 앨드릭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문간을 지나며 루엔을 내려다보았다.
“도련님은 셈을 잘하신다지요.” 앨드릭이 말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사람의 영혼은 셈판에 안 올라갑니다.”
루엔은 그 말을 수첩에 적지 않았다. 원래 그렇다는 말이 아니었다. 모르는 것이라는 말도 아니었다. 어디에 적어야 할지 몰랐다.
*
첫눈이 오기 전, 개울 빨래터에 살얼음이 끼기 시작했다.
아낙들이 돌 위에 옷을 놓고 방망이로 두드렸다. 손이 벌겠다. 물 때문만은 아니었다.
루엔은 둑에 쪼그리고 앉아 그 손을 보았다. 손등이 갈라져 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다 허옇게 일어난 살갗. 어떤 손은 갈라진 틈이 붉었다.
“비누 탓이에요.” 겔트 아내가 말했다. 루엔이 묻기도 전이었다. “집에서 쑨 비누는 따가워요. 수도원 비누는 안 따갑다던데, 그건 동화 여덟 닢이래요. 한 덩이에.”
비누는 집집마다 쑤었다. 돼지기름을 녹이고, 재를 우린 잿물을 붓고, 오래 저었다. 잿물이 셀수록 때가 잘 빠졌다. 그리고 손이 갈라졌다.
“잿물은 얼마나 넣으십니까.”
“한 바가지요.”
“기름은요.”
“눈대중이지요. 솥 크기 봐서.”
루엔은 집마다 비누를 한 조각씩 얻었다. 열한 집. 성으로 가져가 아버지 저울에 달고, 물에 녹여 손등에 대 보았다. 세 조각은 거의 따갑지 않았다. 다섯 조각은 따가웠다. 셋은 손등이 금방 벌게졌다.
따가운 비누를 쑨 집은 다 같은 말을 했다. 그해엔 기름이 모자랐다.
*
잿물 세기부터 재야 했다. 그런데 아낙들은 이미 재고 있었다.
“달걀을 띄워요.” 겔트 아내가 말했다. “달걀이 뜨는데, 물 위로 동화 한 닢만큼 보이면 딱 좋은 잿물이에요. 더 보이면 너무 세고, 가라앉으면 약하고.”
루엔은 달걀을 띄워 보았다. 잿물을 조금씩 물로 묽혀 가며 날마다 비누를 쑤어 보았다. 동화 한 닢만큼 보이는 잿물이 가장 고르게 굳었다.
“잘 재셨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이건 고칠 게 없습니다.”
겔트 아내가 웃었다. “우리 어머니한테 배운 거예요.”
고칠 것은 잿물이 아니라 바가지였다. 달걀로 잰 잿물을 눈대중으로 부었다. 기름이 적은 해에도 바가지는 같았다.
루엔은 쇠잔으로 셌다. 기름 몇 잔에 잿물 몇 잔. 부엌 뒤 화덕에서 베르타 몰래 열이레 동안 쑤었다. 베르타는 알았다. 모른 척했다. 부엌데기 소녀가 날마다 기름 단지를 조금씩 덜 채워 두었다.
기름 일곱 잔에 잿물 두 잔.
그 비누는 손등에 올려도 따갑지 않았다. 때도 빠졌다. 잿물을 조금 더 넣으면 따가웠다. 기름을 조금 더 넣으면 무르고 미끈거렸지만 따갑지는 않았다.
*
비누만으로는 다 되지 않았다. 찬물에 비누는 잘 풀리지 않았다. 얼음 낀 개울에서 오래 비비면 손이 먼저 얼었다.
오두막에서 루엔이 말했다.
“물을 손에 두르고 돌리면 비비지 않아도 됩니다.”
오스윈이 루엔을 보았다. “물 한 줄기 들기를 손에 감겠다는 건가.”
“얇게 감겠습니다. 손가락 한 마디 반 두께로. 살갗에서 늘 같은 거리에. 그리고 돌립니다.”
오스윈이 먼저 해 보았다. 스물아홉 마디. 물이 대야에서 일어나 오스윈 손을 감쌌다. 한 바퀴 돌다가 손목 쪽에서 튀었다. 번쩍. 물방울이 루엔 얼굴까지 날아왔다.
“손은 둥글지 않네.” 오스윈이 젖은 소매를 털었다. “손가락 사이는 더 그렇고.”
“그래서 원을 손가락마다 따로 셈했습니다. 다섯 개. 손바닥에 하나. 여섯 원을 한 줄로 잇습니다.”
루엔이 대야에 손을 넣었다. 가슴의 고리에서 마나가 흘러나왔다.
물이 손을 감쌌다. 튀지 않았다. 빛나지도 않았다. 얇은 물막이 손가락 하나하나를 감고 천천히 돌았다. 손톱 밑에 낀 숯 검댕이 풀려 나와 물막을 따라 돌다가 대야로 떨어졌다.
마르타의 서른을 한 번 셀 동안이었다. 물막이 풀려 대야로 돌아갔다. 손이 깨끗했다. 비비지 않았는데.
오스윈이 루엔 손을 잡아 뒤집어 보았다. 손톱 밑까지.
“이름은.”
“세정입니다. 씻는다는 뜻입니다.”
“탑에선 클린이라는 게 있지. 바람으로 먼지를 흩는 것.” 오스윈이 말했다. “흩기만 하네. 씻지는 않아.”
“물로 씻는 마법은 왜 없습니까. 청색탑은 물을 다루는 탑인데.”
오스윈이 잠깐 창밖을 보았다.
“만든 사람이 없었던 건 아닐세. 백색탑이 싫어했지. 교단과 한 몸이니까.” 그가 말했다. “싫어하는 걸 굳이 가르치는 탑은 없네.”
루엔은 그날 저녁 부엌에서 베르타 손에 해 보였다. 베르타는 물막이 돌 동안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물막이 풀리자 제 손을 오래 보았다. 그러고는 말없이 비누 단지를 가리켰다.
기름 일곱 잔에 잿물 두 잔. 부엌 비누도 그날부터 그렇게 쑤었다.
*
이레 뒤, 교회에서 앨드릭이 설교를 했다.
“물은 살갗의 구멍을 엽니다.”
앨드릭의 목소리는 교회 안에서 멀리 갔다. 부드러운데 뒷줄까지 닿았다.
“열린 구멍으로 악한 기운이 듭니다. 그래서 옛 성인들은 씻지 않으셨습니다. 몸의 때는 참회의 표시입니다. 요즘 성에서 물로 장난을 하는 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손에 물을 감아 돌린다지요.”
앞줄 가렛은 움직이지 않았다. 엘리나가 루엔 손을 잡았다. 코넬이 루엔을 흘끔 보았다.
“손이 깨끗해 보이는 것과, 영혼이 깨끗한 것은 다릅니다.”
설교가 끝나고 사람들이 교회를 나섰다. 빨래터 아낙 몇이 제 손을 소매 속으로 넣었다.
루엔은 문간에서 앨드릭을 보았다. 사제는 사람들 손을 하나씩 잡아 인사했다. 그 손톱 밑이 까맸다. 참회의 표시였다.
집으로 가는 길에 코넬이 말했다.
“너 사제님한테 찍혔다.”
“압니다.”
“무섭지 않아?”
“셈이 틀렸다는 말은 안 하셨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셈을 모른다는 말만 하셨습니다.”
*
설교가 있던 주에도 빨래터 아낙들은 새 비누를 쑤었다. 따갑지 않은 비누는 설교보다 셌다.
다만 아낙들은 쇠잔으로 재지 않았다. 글도 셈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대신 노래를 만들었다. 방망이 두드리는 박자에 맞춰서.
기름은 여덟, 잿물은 둘,
달걀은 동전만큼,
해 지기 전에 저어라—
루엔은 둑길에서 그 노래를 들었다. 걸음이 멈췄다.
여덟.
“일곱입니다.” 루엔이 빨래터로 내려갔다. “기름은 여덟이 아니라 일곱입니다.”
아낙들이 방망이를 멈췄다. 서로 보았다. 겔트 아내가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알아요, 도련님. 일곱이라고 들었어요. 근데 일곱은 가락에 안 붙어요.”
“붙이면 됩니다.”
“붙여 봤어요.” 다른 아낙이 말했다. “불러 보세요. 기름은 일곱, 잿물은 둘. 박자가 하나 모자라요. 가락이 깨져요.”
아낙들이 다 같이 끄덕였다. 가락이 깨지면 아무도 안 부른다고 했다. 안 부르면 까먹는다고.
루엔은 둑에 앉아 수첩을 폈다.
일곱에 둘이 가장 좋았다. 그런데 좋은 것은 한 점이 아니었다. 잿물 쪽으로 가면 따가웠다. 기름 쪽으로 가면 무를 뿐이었다. 열이레 동안 쑤어 본 것들이 있었다. 기름 여섯에 둘은 따가웠다. 기름 아홉에 둘은 손에 기름이 남았다. 여덟에 둘은.
여덟에 둘은 조금 물렀다. 따갑지 않았다. 때도 빠졌다. 일곱보다 반나절 더 말려야 굳었다.
그 안이었다.
루엔은 수첩을 덮고 일어났다.
“여덟으로 하십시오.”
아낙들이 눈을 크게 떴다.
“대신 반나절 더 말리셔야 합니다. 해 지기 전에 젓고, 이튿날 해 질 때까지 말리십시오.”
겔트 아내가 잠깐 입속으로 불러 보았다. 방망이가 돌 위에서 박자를 쳤다.
“해 지기 전에 저어라, 이튿날 해 지도록 말려라.” 겔트 아내가 웃었다. “붙네요.”
루엔은 성으로 돌아와 부엌 비누 단지 옆에 붙인 종이를 고쳤다. 일곱을 지우고 여덟이라고 썼다. 지운 자리는 두었다. 고친 줄 알게.
베르타가 그걸 보았다.
“도련님이 틀렸던 거요?”
“아닙니다. 노래가 맞는 범위 안에 있었습니다.”
베르타가 코웃음을 쳤다. “그걸 사람 말로 하면 도련님이 졌다는 거지.”
루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 밤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 원래 그렇다 쪽이 아니었다. 새로 한 장을 뜯어 맨 위에 적었다.
맞는 값은 한 점이 아니다. 범위다. — 빨래터.
*
겨울 끝 무렵, 오스윈이 물 높이 말뚝 앞에서 말했다.
“눈이 녹으면 잿빛열이 오지.”
루엔이 말뚝을 보았다. 한 줄 서른 금. 빠진 날이 없었다.
“해마다 옵니까.”
“내가 여기 온 뒤로 한 해도 안 빠졌네.” 오스윈이 말했다. “아래쪽 집부터.”
루엔은 그 말에서 손을 멈췄다.
아래쪽 집부터. 개울 아래쪽.
물이 흘러가는 쪽이었다.
지도는 너무 많은 걸 그리고 있었다.막료 천막 벽에 걸린 베스트리아 동부 지도였다. 황색탑 측량사들이 그린 것. 산은 산 모양으로, 숲은 나무 모양으로, 강은 굽이굽이 그대로. 마을마다 교회 첨탑이 그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지도였다.그런데 루엔이 알고 싶은 건 하나였다. 어디가 끊기면 안 되는가.산 모양도, 나무 모양도, 강 굽이도 그걸 가리고 있었다.루엔은 새 종이를 폈다. 그리고 점을 찍었다.본진. 창고 마을. 왕도. 여섯 영지의 곡식 창고. 역참 열두 곳. 여울 셋. 모두 점 하나씩.그다음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그었다. 수레가 다니는 길이면 선 하나. 다리가 있으면 선 위에 짧은 가로줄. 거리도 산 높이도 그리지 않았다. 이어져 있는지 아닌지만.마흔한 개의 점과 예순 개 남짓의 선이 남았다.테오가 어깨 너머로 보았다.“이게 지도야? 거미줄 같은데.”“지도에서 필요 없는 걸 다 뺀 겁니다.”“뭐가 필요 없는데.”“어디로 이어졌는지 빼고 전부 다.”*루엔은 선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렸다.선 하나를 가리고, 본진에서 출발해 점을 따라가 보았다. 모든 점에 닿으면, 그 선은 끊겨도 괜찮은 선이었다.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닿지 못하는 점이 생기면, 그 선은 끊기면 안 되는 선이었다.예순 번을 가렸다.대부분은 괜찮았다.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하나를 끊으면 옆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멀어지긴 했지만 닿았다.세 선만 달랐다.메를 강 중류의 돌다리. 창고 마을로 들어가는 지류 위 나무다리. 그리고 왕도 동쪽 문 밖, 늪 사이로 난 둑길 위 다리.셋 중 하나만 끊겨도 점들이 두 덩이로 갈라졌다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