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도서관 지하 서고에는 불을 들고 들어갈 수 없었다.
입구 돌문에 쇠판이 박혀 있었다. 글씨가 닳아 반쯤 지워졌지만 뜻은 알 수 있었다. 불을 들고 들어가는 자는 다시 나오지 못한다.
“겁주려고 쓴 말이 아닐세. 아니, 이제는 겁주려고 쓴 말이지.”
사서 오드리크가 속삭였다. 도서관에서는 누구나 속삭여야 했다. 오드리크는 도서관 밖에서도 속삭였다. 사십 년을 그렇게 말했더니 목이 그렇게 굳었다고 했다.
일흔 가까운 사람이었다. 등이 둥글게 굽었다. 흰 머리가 성겼고, 손가락이 길었다. 손끝마다 먹이 배어 지워지지 않았다.
“백이십 년 전에 등불 하나가 넘어졌네. 양피지 선반 셋이 탔지. 그 뒤로 서고엔 불이 없네. 촛불도, 등잔도, 라이트도.”
“라이트도요.”
“라이트는 뜨겁잖나. 번쩍이고. 양피지는 열에 약해. 오래 비추면 글씨가 바래네.”
루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이 세계 라이트는 빛과 함께 열을 흘렸다.
“그럼 책은 어떻게 찾으십니까.”
“한낮에.”
오드리크가 계단을 가리켰다.
지하로 내려가는 돌계단은 두 번 꺾였다. 첫 꺾임 위, 땅 위 계단참에 좁은 창이 하나 있었다. 한낮 해가 높이 뜨면 그 창으로 빛이 한 줄기 들어와 계단참 바닥에 네모를 그렸다. 빛은 거기까지였다. 첫 꺾임을 돌면 어두웠다. 둘째 꺾임을 돌면 캄캄했다.
“한낮이면 서고에서 책을 안고 올라와 계단참 빛에서 제목을 읽네. 찾던 책이면 가지고 가고, 아니면 도로 내려가지. 여름엔 한낮이 길어 하루에 스무 번은 오르내리네. 겨울엔….”
오드리크가 창을 올려다보았다. 초겨울이었다. 해가 낮았다. 계단참 네모가 벽 쪽으로 기울어 반쯤만 바닥에 닿았다.
“겨울엔 다섯 번이 고작일세.”
*
루엔이 서고를 찾은 까닭은 오스윈의 영창책이었다.
첫 장 영창 여덟 줄. 여백에 「틀렸을지도 모름」이 세 군데 있었다. 확인하려면 탑의 옛 영창 기록과 맞대 봐야 했다. 그 기록이 지하 서고 둘째 칸 선반에 있다고 했다. 여든 권 넘게.
한 권씩 안고 계단참까지 올라와 빛에 대 보면, 겨울 동안 다 못 볼 것이었다.
“빛을 내려 보내면 어떻겠습니까.”
오드리크가 루엔을 보았다.
“불은 안 된다고 했네.”
“불이 아니라 해를 내려 보내는 겁니다. 계단참에 들어오는 그 빛을요.”
“빛은 모퉁이를 돌지 않네.”
“돌게 하면 됩니다.”
*
사흘 동안 루엔은 계단에서 살았다.
먼저 계단을 쟀다. 계단참 창에서 첫 꺾임까지. 첫 꺾임에서 둘째 꺾임까지. 둘째 꺾임에서 서고 문까지. 계단 칸 수, 칸 높이, 벽 사이 너비. 곧은 자와 끈으로. 오드리크가 계단 위에서 속삭이며 끈 끝을 잡아 주었다.
그다음은 셋째 고리 마법이었다.
오스윈의 영창책에는 없었다. 루엔이 셋째 고리를 닫은 뒤 스스로 만든 것이었다. 공기를 아주 가늘게 조여 관을 만든다. 관 안쪽 공기는 바깥보다 촘촘하다. 빛이 촘촘한 공기 속을 가다가 관 벽에 비스듬히 닿으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벽을 따라 튕겨 들어간다. 연못 바닥에서 올려다본 물 위가 거울처럼 보이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코넬과 여름마다 헤엄치던 개울에서 루엔은 그걸 보았다.
빛을 가두는 관. 루엔은 그걸 광로라고 불렀다. 빛이 가는 길.
광로는 천천히 휠 수 있었다. 그러나 계단 꺾임처럼 모질게 꺾이면, 빛이 벽에 너무 곧게 닿아 새어 나갔다.
꺾임마다 거울이 필요했다.
*
거울은 식당에서 빌렸다.
놋쇠 쟁반 두 개. 식당 아주머니가 국자를 든 채 한참 루엔을 내려다보았다.
“이번엔 쟁반으로 무한을 하려고?”
“빛을 돌리려고 합니다.”
“돌려주는 날짜.”
“겨울이 끝나는 날입니다. 그 전에 광이 죽으면 제가 닦아서 드리겠습니다.”
아주머니가 쟁반을 내주었다. 테오가 그날 저녁 내내 모래와 재로 쟁반을 닦았다. 루엔이 부탁한 건 아니었다. 테오는 닦으면서 「내 얼굴이 이렇게 잘생겼었나」 하고 몇 번이나 들여다보았다.
*
어려운 건 쟁반을 기울이는 각이었다.
빛은 계단참 창에서 들어와 광로를 타고 첫 꺾임까지 간다. 거기서 쟁반에 맞고 꺾여 아래 계단 쪽으로 가야 한다. 쟁반을 어느 쪽으로 얼마나 기울여야 하나.
루엔은 계단 그림을 밀랍판에 그렸다. 들어오는 빛의 줄, 나가야 할 빛의 줄.
그때 오드리크가 서고에서 책 한 권을 안고 올라왔다. 계단참 빛에 대고 먼지를 불었다. 얇은 책이었다. 양피지가 누렇게 바랬다.
“이걸 찾나 싶어서.”
표지에 옛 글씨로 적혀 있었다. 거울의 책.
“천 년도 넘은 걸세. 남쪽 학자가 썼다지. 거울에 비친 빛이 어떻게 가는지.”
루엔은 책을 받아 첫 장을 폈다. 오드리크가 손가락으로 한 줄을 짚었다.
거울에 닿은 빛은, 닿을 때 기운 만큼 똑같이 기울어 떠난다.
들어간 각과 나온 각이 같다.
루엔은 그 줄을 오래 보았다. 알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 세계 누군가가 천 년 전에 이미 적어 두었다. 셈은 없고 말뿐이었지만, 말이 틀리지 않았다.
“이 책을 찾으셨습니까. 제가 무엇을 하는지 보시고.”
“사십 년 서고를 지키면 어느 책이 어느 선반에 있는지는 아네.” 오드리크가 속삭였다. “무엇에 쓰는지는 모르고. 자네는 쓰는 법을 알고, 나는 있는 자리를 알고. 그럼 됐지.”
*
들어간 각과 나온 각이 같다면, 쟁반은 두 빛줄기가 만드는 각을 정확히 반으로 가르는 자리에 서야 한다.
루엔은 컴퍼스로 각을 반으로 나눴다. 밀랍판 위 그림에서. 그걸 계단 실제 크기로 옮겼다. 쟁반을 받칠 나무틀을 계단 벽에 박았다. 끈과 추로 기울기를 맞췄다.
첫 번째 해 보기는 틀렸다.
한낮에 광로를 세우자 빛이 계단참에서 관으로 들어갔다. 첫 꺾임 쟁반에 맞았다. 꺾여 내려갔다. 둘째 꺾임 쟁반에 맞았다.
그리고 서고 문 옆 벽에 떨어졌다. 문에서 손바닥 하나 반 왼쪽.
오드리크가 어둠 속에서 속삭였다. “가깝군.”
“가까운 건 틀린 겁니다.”
루엔은 둘째 쟁반 틀을 쟀다. 나무틀을 벽에 박을 때 못 하나가 비스듬히 들어가 쟁반이 조금 돌아가 있었다. 손톱만큼. 손톱만큼 돌면 서고 문까지 가는 동안 손바닥 하나 반이 틀어졌다. 멀리 갈수록 작은 틀림이 커졌다.
루엔은 수첩에 적었다. 거울 한 번 틀림: 손톱. 서고 문에서: 손바닥 하나 반. 못은 곧게 박을 것.
이튿날 못을 다시 박았다.
*
한낮이었다.
계단참 창으로 겨울 해가 들어왔다. 광로가 섰다. 보이지 않는 가는 관이 계단 천장을 따라 내려갔다. 첫 쟁반. 둘째 쟁반.
서고 문이 열려 있었다.
빛이 들어갔다.
서고 한가운데 큰 책상에 동그란 빛이 떨어졌다. 한낮 햇빛 그대로였다. 번쩍이지 않았다. 윙 소리도 없었다. 뜨겁지도 않았다. 계단참 창만큼 밝지는 않았지만, 책상 위 먼지가 하나하나 보일 만큼 밝았다.
백이십 년 동안 서고에 들어온 첫 한낮이었다.
오드리크는 한참 문간에 서 있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들어가 책상 앞에 앉았다. 빛 속에 두 손을 내밀었다. 먹 밴 손끝이 빛에 드러났다.
“따뜻하지 않군.”
“겨울 해입니다.”
“양피지가 안 바래겠군.”
“해가 서고까지 오는 동안 열은 쟁반에서 조금씩 떨어집니다. 그래도 한 자리에 오래 두시면 바랩니다. 빛 자리를 날마다 옮기십시오.”
“이 관은 언제까지 서 있나.”
“해 질 때까지는 섭니다. 흘리는 게 없어서 오래 갑니다. 아침마다 수업 전에 제가 내려와 다시 세우겠습니다.”
“방학엔.”
루엔은 그것도 셈해 두었다.
“광로가 없으면 쟁반 둘만 남습니다. 빛이 관에 갇히지 않고 공기 속으로 퍼지면서 내려옵니다. 서고 책상까지 오는 건 지금의 삼분의 일쯤입니다. 제목은 읽으실 수 있고, 작은 글씨는 어렵습니다.”
“삼분의 일쯤.” 오드리크가 속삭였다. “자네도 쯤을 쓰는군.”
“계단 먼지가 날마다 달라서 끝자리를 못 정했습니다. 방학 동안 먼지를 쓸지 않으시면 더 줄어듭니다.”
오드리크가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속삭임이 아니었다. 쉰 웃음이 서고 천장에 부딪혀 돌아왔다. 사십 년 만에 서고에서 난 큰 소리였는지도 몰랐다. 웃고 나서 오드리크는 스스로 놀란 얼굴로 입을 막았다.
“계단은 내가 날마다 쓸겠네.”
오드리크는 그 말 뒤로 더 대답하지 않았다. 선반에서 가장 가까운 책 한 권을 뽑아 빛 속에 펼쳤다.
그리고 책을 팔 길이만큼 멀리 들었다.
루엔은 그걸 보았다.
오드리크는 책을 눈 가까이 가져갔다가, 다시 멀리 뗐다. 멀리 뗐을 때 입술이 움직였다. 제목을 읽는 입술이었다. 가까이 댔을 땐 움직이지 않았다.
빛이 모자란 게 아니었다. 빛은 충분했다. 그런데도 가까운 글씨를 못 읽었다.
“사서님.”
“음.”
“지금 그 책 첫 줄, 가까이서는 안 보이십니까.”
오드리크의 손이 멈췄다. 한참 뒤에 속삭였다.
“스무 해 전부터 그렇네. 늙으면 다 그래. 멀리 두면 읽혀. 팔이 짧아질 때까지는 괜찮네.”
그는 웃었다. 조금도 괜찮지 않은 얼굴로.
루엔은 수첩을 폈다. 빛이 모자라서가 아니었다. 눈 안의 무언가가 가까운 것에 맞추지 못하는 것이었다. 전생에 들은 말이 떠올랐다. 거기엔 그걸 고치는 물건이 있었다. 여기엔 없었다.
아직은.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
사서님: 가까운 글씨 흐림. 멀면 읽음. 빛 탓 아님.
그 아래에 작게, 볼록 유리 조각. 그리고 물음표 하나.
*
그 겨울 루엔은 탑의 옛 영창 기록 여든세 권을 서고 책상 빛 아래서 다 보았다. 오스윈의 첫 장, 「틀렸을지도 모름」 세 군데를 맞대 보았다.
하나는 오스윈이 틀렸다. 옛 기록을 옮겨 적다 한 마디를 빠뜨렸다.
하나는 옛 기록이 틀렸다. 오스윈이 고친 게 맞았다.
마지막 하나는 둘 다 맞았다. 기록이 두 가지로 전해졌고, 어느 쪽으로 읊어도 같은 원이 닫혔다.
루엔은 그 셋을 적은 종이를 접었다. 겨울이 끝나면 북쪽으로 가는 짐배 편에 부칠 것이었다. 백스무 장 가운데 첫 장.
접으면서 속으로 셈했다. 한 장에 겨울 하나. 선생님 말이 옳았다. 오래 살아야 했다. 둘 다.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
첫 불은 해가 진 직후에 왔다.강 건너 둑 위에서 붉은빛이 번쩍했다. 한 점. 그리고 둘, 셋. 빛이 먼저 오고, 한참 뒤에 소리가 왔다. 쿵. 둔덕 아래 밭에서 흙이 치솟았다. 불붙은 짚단이 사방으로 튀었다.“파이어볼이다!”앞줄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엎드렸다. 기사들이 말을 돌렸다. 둔덕 위 막료 자리에서 루엔은 엎드리지 않았다. 강 건너를 보고 있었다.번쩍.루엔은 셌다. 하나, 둘.쿵.“둘.” 루엔이 말했다. “구백 걸음 남짓.”옆에 엎드린 테오가 고개만 들었다. “뭐가?”“저 불을 쏜 사람까지.”*소리는 빛보다 느리다. 빛은 보는 즉시 오지만, 소리는 하나를 세는 동안 사백오십 걸음쯤을 온다. 루엔 걸음으로. 루엔은 이 셈을 요람에 누워 있을 때부터 했다. 번개가 치면 천둥까지 셌다.속으로는 다른 숫자가 함께 돌았다. 1초에 343미터. 이 세계에서는 쓸 데가 없는 숫자였다. 쓸 데가 있는 건 걸음이었다.적 마법사는 쏠 때마다 번쩍였다. 마나의 여덟 할이 빛과 소리와 열로 샜다. 이 세계에서 그걸 「마나의 위엄」이라 불렀다. 위엄은 멀리서도 보였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셀 수 있었다.다만 한 사람이 세면 거리만 나왔다. 어느 쪽인지는 나오지 않았다.“테오. 둔덕 왼쪽 끝 참나무로 가십시오. 번쩍이면 세어서 적으십시오. 코넬 형은 오른쪽 끝 방앗간 터로.”“나도 세?” 코넬이 방패 밑에서 말했다.“형은 번개 셀 줄 압니다. 어릴 때 제가 가르쳤습니다.”“대충 기억나.”“대충이면 충분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