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판타지 / 무색탑의 수학자 / 32화. 시작합니다

Share

32화. 시작합니다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6 18:54:48

봄 겨루기 날은 학교에서 가장 시끄러운 날이었다.

눈이 녹고 실습장 풀이 다시 파래지면, 온 학교가 서쪽 비탈에 모였다. 신입생도, 윗반도, 교관들도. 둥글게 모래를 깐 겨루기 판 둘레에 사람이 몇 겹으로 섰다. 단 위에는 교장이 앉았다.

규칙은 간단했다. 두 사람이 가슴에 손바닥만 한 밀랍 판을 단다. 먼저 상대의 밀랍 판을 깨는 쪽이 이긴다. 사람을 다치게 하는 마법은 안 된다. 심판이 멈추라면 멈춘다.

신입생은 대개 제비로 짝을 뽑았다.

디트마르 페르난은 제비를 뽑지 않았다. 겨루기 판 한가운데 서서 신입생 줄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루엔 하르트.”

웅성거림이 한 바퀴 돌았다. 겨울 동안 디트마르가 셋째 고리를 닫았다는 소문은 다들 들었다. 그릇 스물다섯에 고리 셋. 그 손가락 끝에 선 건 그릇 아홉짜리였다.

심판 뵈르너가 루엔을 보았다. 받겠느냐는 눈이었다.

루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

겨루기 판으로 나가기 직전, 테오가 루엔 소매를 잡았다.

“몇까지 셌어?”

루엔이 테오를 보았다. 입술이 멈췄다.

겨울 동안 테오는 알아냈다. 루엔이 밤에 벽을 보고 입술만 움직이는 날이 있다는 걸. 그게 소수라는 걸. 많이 셀수록 속이 시끄럽다는 걸. 루엔이 가르쳐 준 적은 없었다. 테오가 세어서 알아낸 것이었다.

“이백열하나.”

“그럼 꽤 떨리는구나.”

테오가 소매를 놓았다. 그러고는 루엔 가슴의 밀랍 판을 한 번 톡 쳤다.

“이백열하나면 어제 저녁 식당에서보다 많아. 식당에선 백을 안 넘었거든. 식당 아주머니가 국자 들고 지나갈 때.”

“국자는 예측이 됩니다.”

“디트마르는 안 돼?”

“디트마르 님은 아직 한 번도 제 앞에서 셋째 고리를 쓰신 적이 없습니다. 재 본 적이 없는 건 예측이 안 됩니다.”

테오가 웃었다. 그러고는 등을 떠밀었다.

“재 보고 와.”

*

모래판 가장자리를 지나는데 윗반 학생들이 모여 수군거리고 있었다. 은화와 동화가 손에서 손으로 오갔다.

“페르난 쪽에 열 걸고 아홉짜리 쪽에 하나.”

“그것도 후하게 쳐준 거야.”

그 무리 한쪽에 클라리사가 서 있었다. 손바닥만 한 장부를 펴고, 산가지 몇 개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하르트 쪽에 동화 두 닢.”

윗반 학생 하나가 웃었다. “보움 상단이 손해 보는 장사를 다 하네.”

“손해인지는 끝나 봐야 알지.” 클라리사가 동화 두 닢을 내밀었다. “열에 하나로 받으면, 이기면 스무 닢이야.”

그러고는 장부에 적었다. 루엔이 지나가며 그 줄을 보았다. 날짜, 건 돈, 받을 돈. 그리고 맨 끝에 작은 글씨 하나. 까닭.

까닭 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바람 화살표.

루엔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클라리사가 장부를 덮을 것 같았다.

*

둘이 모래판 양쪽 끝에 섰다. 스무 걸음.

“시작.”

디트마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짧고 센 영창. 넷째 마디에서 손을 뻗었다.

루엔 둘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소리가 사라졌다. 사람들 웅성거림도, 바람 소리도, 제 숨소리도. 귀가 솜으로 막힌 것 같았다. 입을 열어 보았다. 목이 떨리는 건 느껴지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사일런스. 둘째 고리 마법. 영창을 막는다. 영창을 못 하면 마법사는 마법사가 아니었다.

구경꾼들 입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소리는 없었지만 뜻은 알 수 있었다. 끝났다. 벌써 끝났다.

디트마르가 여유 있게 다음 영창을 시작했다.

루엔은 매직 미사일을 쏘았다.

입은 다물고 있었다. 가을 첫 실습 뒤로 늘 소리 내어 읊던 열한 마디는 이번엔 없었다. 원래 필요 없었다. 셈은 처음부터 머릿속에서 끝나 있었다. 소리는 교관이 들으라고 하던 꾸밈이었다.

번쩍임 없는 화살이 모래판을 가로질렀다.

디트마르가 몸을 비틀었다. 반사였다. 화살이 디트마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밀랍 판은 무사했다.

소리 없는 세상 속에서, 루엔은 구경꾼들이 한꺼번에 입을 벌리는 걸 보았다.

*

디트마르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영창을 바꿨다.

사일런스가 걷혔다. 디트마르가 스스로 거둔 것이었다. 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웅성거림, 고함, 누군가의 비명 같은 탄성.

“무영창이다!”

“말을 안 했는데 나갔어!”

디트마르가 소리쳤다. 루엔을 향해.

“최소한 뭐라고 말이라도 해라! 공평하지 않다!”

루엔은 잠깐 생각했다. 공평하지 않다는 말은 맞았다. 상대는 무엇이 올지 몰랐다. 겨루기는 셈을 겨루는 자리였지 숨기는 자리가 아니었다.

“시작합니다.”

그리고 쏘았다.

디트마르는 이미 다른 영창을 끝내고 있었다. 헤이스트. 몸이 빨라지는 마법. 디트마르가 옆으로 달렸다. 처음엔 보통 사람 걸음이었다. 한 걸음, 두 걸음 갈수록 빨라졌다. 헤이스트는 한 번에 빨라지지 않았다. 마나가 몸에 스며드는 만큼 점점 빨라졌다.

루엔의 화살은 디트마르가 갈 자리 앞을 향했다. 첫 걸음 빠르기로 셈한 자리였다.

디트마르가 그 자리를 지나갔다. 예상보다 먼저. 화살은 디트마르 등 뒤 모래에 박혔다.

두 해 전 아침이 떠올랐다. 말머리를 꺾은 산적 하나를 끝내 못 맞혔다. 곧게, 같은 빠르기로 오는 것만 맞힐 수 있던 때였다. 그때 셈은 거기까지였다.

“빗나갔다!”

디트마르가 웃었다. 달리면서 손을 들었다. 손바닥 위에 불덩이가 부풀었다. 사람 머리만 했다. 셋째 고리, 파이어볼. 뜨거운 바람이 모래판을 쓸었다. 앞줄 구경꾼들이 뒤로 물러났다.

사람을 다치게 하는 마법은 안 된다고 했다. 디트마르는 불덩이를 루엔 발치 모래에 떨어뜨릴 생각이었다. 터지면 가슴 밀랍 판쯤은 녹는다.

불덩이가 날아왔다.

루엔은 방패막을 세웠다. 첫 고리 마나 실드. 얇은 막이었다. 파이어볼을 곧게 받으면 한 번에 뚫릴 두께였다.

곧게 받지 않았다.

막을 비스듬히 세웠다. 불덩이가 날아오는 길에 비껴, 지붕처럼 기울여서. 같은 두께라도 비스듬히 닿으면 뚫고 들어가야 할 길이 길어진다. 그리고 닿은 것은 미끄러진다.

불덩이가 막에 닿았다. 부딪히지 않았다. 막 위를 미끄러졌다. 기울기를 따라 루엔 머리 위로 비껴 올라가 등 뒤 열 걸음 모래에 떨어졌다.

쾅.

모래가 솟구쳤다. 뜨거운 바람이 등을 떠밀었다. 루엔의 밀랍 판은 그대로였다.

*

디트마르는 멈추지 않았다. 빨라지고 있었다. 이제 모래판 가장자리를 따라 원을 그리며 달렸다. 발밑에서 모래가 튀었다. 눈으로 따라가기도 어려웠다.

루엔은 셌다. 맥박을 세듯 디트마르 발자국을 셌다. 첫 번째 바퀴 반에 걸린 시간. 둘째 바퀴 반. 발자국 사이가 늘어나는 모양.

빨라지는 게 고르게 빨라지고 있었다. 헤이스트가 스미는 빠르기가 일정했다.

일정하게 빨라지는 것은, 시간이 두 배 가면 간 거리는 네 배가 된다. 멈춘 데서 출발한 돌이 굴러 내려갈 때처럼. 지난가을부터 오이겐 교수와 밤마다 쪼갠 것이 그것이었다. 빠르기도 쪼갤 수 있다. 쪼갠 빠르기를 쌓으면 간 거리가 나온다.

첫 화살은 디트마르가 같은 빠르기로 간다고 셈했다. 그래서 빗나갔다.

이번엔 빨라지는 몫까지 넣었다. 화살이 닿는 동안 디트마르가 더 빨라질 만큼, 더 멀리 앞을.

모래판 가장자리, 디트마르가 아직 닿지 않은 빈 자리. 아무도 없는 모래 위 허공.

루엔은 거기를 겨누었다.

“시작합니다.”

한 번 더 말했다. 공평하게.

화살이 날아갔다. 빈 자리를 향해. 구경꾼 몇이 헛웃음을 쳤다. 아무도 없는 데를 쏜다고.

디트마르가 그 자리로 달려 들어왔다.

화살과 디트마르가 한 점에서 만났다.

딱.

밀랍 판이 깨지는 소리는 작았다. 모래판이 너무 조용해서 다 들렸다.

디트마르가 두 걸음 더 달리다 멈췄다. 헤이스트가 풀리며 휘청였다. 제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밀랍 판이 한가운데서 쪼개져 있었다.

“그만.”

뵈르너가 손을 들었다.

*

소리가 한 박자 늦게 터졌다.

환호도 야유도 아니었다. 수백 명이 한꺼번에 서로에게 묻는 소리였다. 봤냐. 말 안 하고 쐈지. 빈 데를 쐈는데 맞았어. 불덩이가 미끄러졌어.

단 위에서 교장은 일어서지 않았다. 흰 눈썹 아래 눈이 모래판 가장자리를 보고 있었다. 화살이 겨누던 빈 자리를.

디트마르가 걸어왔다. 숨이 거칠었다. 이마에 땀과 모래가 붙어 있었다. 루엔 앞에 섰다. 한참 말이 없었다.

“공평하지 않다고 했다.”

“예. 그래서 말했습니다.”

“시작합니다가 영창이냐.”

“아닙니다.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디트마르가 루엔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짧게 웃었다. 어이가 없는 웃음이었다.

“그 불덩이. 어떻게 미끄러뜨렸냐.”

“막을 기울였습니다. 지붕처럼.”

디트마르는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불덩이를 띄웠던 손이었다.

“다음엔 더 빨리 뛴다.”

“그럼 더 앞을 쏘겠습니다.”

“그걸 알면서 뛰는 게 재밌는 거다.”

디트마르가 돌아서서 걸어갔다. 부서진 밀랍 판을 가슴에서 떼어 버리지 않고 손에 쥐고 갔다.

모래판 밖에서 클라리사가 윗반 학생에게 손바닥을 내밀고 있었다. 윗반 학생이 투덜거리며 동화를 세어 올려놓았다. 클라리사는 한 닢씩 받으며 따라 셌다. 열아홉에서 멈췄다.

“하나 모자라.”

윗반 학생이 한 닢을 더 올려놓았다. 클라리사가 장부에 줄을 그었다. 그러고는 루엔 쪽을 한 번 보았다. 고맙다는 눈은 아니었다. 셈이 맞았다는 눈이었다.

*

이튿날부터 학교에 이상한 영창이 돌았다.

“시작합니다.”

실습장에서, 복도에서, 식당에서. 신입생들이 손을 내밀고 엄숙하게 말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말했다. 목소리를 낮춰서. 높여서. 끝을 끌어서.

“시자아악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누군가 뵈르너 교관에게 진지하게 물었다고 했다. 그 영창은 몇 마디냐고. 교관은 대답 대신 그 아이에게 실습장 풀밭을 한 바퀴 뛰게 했다.

식당에서 테오가 수프 숟가락을 들고 말했다.

“오늘 복도에서 시작합니다가 스물세 번 들렸어.”

“세셨습니까.”

“너한테 배웠잖아.”

루엔은 수첩을 폈다. 소문이 들어오는 대로 적었다. 무영창 소년. 빛을 먹는 아이. 빈 데를 쏘면 사람이 와서 맞는다.

마지막 줄엔 선을 그었다. 사람이 와서 맞은 게 아니었다. 사람이 올 자리를 셈한 것이었다.

그 아래 한 줄을 더 적었다. 무영창이 아니라, 영창이 필요 없었던 것.

수첩을 덮다가 멈췄다. 다시 폈다. 그 줄에도 선을 그었다. 그 말을 누가 믿어 줄지는 셈할 수가 없었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무색탑의 수학자   87화. 점과 선

    지도는 너무 많은 걸 그리고 있었다.막료 천막 벽에 걸린 베스트리아 동부 지도였다. 황색탑 측량사들이 그린 것. 산은 산 모양으로, 숲은 나무 모양으로, 강은 굽이굽이 그대로. 마을마다 교회 첨탑이 그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지도였다.그런데 루엔이 알고 싶은 건 하나였다. 어디가 끊기면 안 되는가.산 모양도, 나무 모양도, 강 굽이도 그걸 가리고 있었다.루엔은 새 종이를 폈다. 그리고 점을 찍었다.본진. 창고 마을. 왕도. 여섯 영지의 곡식 창고. 역참 열두 곳. 여울 셋. 모두 점 하나씩.그다음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그었다. 수레가 다니는 길이면 선 하나. 다리가 있으면 선 위에 짧은 가로줄. 거리도 산 높이도 그리지 않았다. 이어져 있는지 아닌지만.마흔한 개의 점과 예순 개 남짓의 선이 남았다.테오가 어깨 너머로 보았다.“이게 지도야? 거미줄 같은데.”“지도에서 필요 없는 걸 다 뺀 겁니다.”“뭐가 필요 없는데.”“어디로 이어졌는지 빼고 전부 다.”*루엔은 선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렸다.선 하나를 가리고, 본진에서 출발해 점을 따라가 보았다. 모든 점에 닿으면, 그 선은 끊겨도 괜찮은 선이었다.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닿지 못하는 점이 생기면, 그 선은 끊기면 안 되는 선이었다.예순 번을 가렸다.대부분은 괜찮았다.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하나를 끊으면 옆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멀어지긴 했지만 닿았다.세 선만 달랐다.메를 강 중류의 돌다리. 창고 마을로 들어가는 지류 위 나무다리. 그리고 왕도 동쪽 문 밖, 늪 사이로 난 둑길 위 다리.셋 중 하나만 끊겨도 점들이 두 덩이로 갈라졌다

  • 무색탑의 수학자   86화. 열 가운데 하나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 무색탑의 수학자   85화. 무는 금화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 무색탑의 수학자   84화. 여섯째 서클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 무색탑의 수학자   83화. 열일곱과 일흔하나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 무색탑의 수학자   82화. 사흘째 오후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