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돌아가는 길은 강이 아니었다.
눈 녹은 물이 강을 채웠다. 방앗간 기둥의 물이 날마다 금 하나씩 올라갔다. 보움 상단 선장은 큰물 동안 남쪽으로 배를 띄우지 않는다는 말을 보내왔다. 떠내려가는 나무가 배를 친다고.
가렛이 마차를 내주었다. 로센령 고개를 넘어 남쪽 큰길로. 열아흐레쯤 걸린다고 했다.
루엔은 그 말을 듣고 수첩을 폈다. 두 해 전 강배에서 적은 줄이 있었다. 틀린 게 강 탓인지 책 탓인지. 그건 걸어서 곧게 가 봐야 알 것이었다.
큰길은 강보다 곧았다. 곧지는 않았지만, 강보다는.
*
마부는 쿠노였다.
두 해 전 나루까지 루엔을 태웠던 그 마부였다. 로센령 고개 빗길에서 채찍을 들었다가 가렛의 「천천히」에 내려놓은 사람. 쉰 줄이었다. 등이 조금 굽고 팔이 길었다. 그 뒤로 채찍을 거의 쓰지 않는다고 했다. 말 이름을 불렀다. 앞 말은 밤톨, 뒷 말은 늦둥이.
떠나는 날 아침 루엔은 마차에 오르지 않았다. 옆에서 걸었다.
“도련님, 타시지요.”
“걸음을 세야 합니다.”
“걸음은 왜.”
“하루에 얼마나 가는지 알아야 합니다. 밤마다 별 높이를 잽니다. 별이 얼마나 낮아졌는지와 그날 간 거리를 맞대면 세상 둘레가 나옵니다.”
쿠노는 고삐를 쥔 채 루엔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세상 둘레를 도련님 걸음으로요.”
“예.”
“도련님 걸음보다 제 말 발굽이 더 고릅니다.”
루엔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대신 셈했다. 그리고 대답했다.
“재 보겠습니다.”
*
로센령 고개 아래에 돌기둥이 둘 서 있었다. 옛날 황색탑이 돌길을 낼 때 세운 이정표라고 쿠노가 말했다. 두 기둥 사이는 평평하고 곧았다.
루엔은 그 사이를 세 번 걸었다. 걸음을 셌다.
천이백열넷. 천백아흔여섯. 천이백서른.
가장 적은 것과 가장 많은 것 사이가 서른넷이었다. 두 번째는 오르막에서 보폭이 커졌다. 세 번째는 발밑 돌을 피하느라 잔걸음이 섞였다.
그다음엔 쿠노가 마차를 몰았다. 루엔은 마차 옆에서 밤톨의 오른쪽 앞발만 보았다. 그 발이 땅을 짚을 때마다 하나.
팔백일곱. 팔백아홉. 팔백여덟.
사이가 둘이었다.
루엔은 한참 수첩을 보았다. 그리고 마부석을 올려다보았다.
“제가 졌습니다.”
쿠노가 웃었다. 이가 몇 개 빠진 웃음이었다.
“이 녀석은 스무 해 동안 같은 걸음으로 걸었지요. 빨리 가라고 안 하면 늘 저 걸음입니다. 사람은 생각하면서 걷잖습니까. 말은 생각을 안 해요.”
루엔은 수첩 「제가 진 사람들」 쪽을 폈다. 늙은 재단사. 늙은 선원. 그 아래에 한 줄. 쿠노. 그리고 밤톨.
말 이름을 사람 쪽에 적어도 되는지 잠깐 생각했다. 지웠다가, 다시 적었다. 걸음을 이긴 건 밤톨이었다.
*
말 걸음은 셀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세는 건 다른 일이었다.
쿠노가 먼저 방법을 냈다. 허리춤에서 끈을 한 타래 꺼냈다.
“백 걸음마다 매듭 하나. 제가 세지요. 말 발굽 소리는 눈 감고도 셉니다.”
루엔은 그 끈을 보았다. 두 해 전 강배 뱃고물의 늙은 선원이 떠올랐다. 매듭 줄로 스무 해 먹고 살았다는 사람.
“매듭 백 개마다 저한테 끈을 넘겨주십시오. 제가 적겠습니다.”
그렇게 열아흐레를 갔다.
사흘째, 길이 로센령 강가 마을 하나를 지났다. 우물마다 널빤지가 못 박혀 있었다. 새 널빤지였다. 문설주마다 숯 글씨가 보였다. 하나, 둘, 셋. 옛 글자와 루엔 글자가 나란히.
어느 집 문 앞에서 사내아이 하나가 숯을 들고 서 있었다. 제 키보다 높은 데 글씨를 쓰려고 까치발을 하고 있었다. 문설주엔 옛 글자로 「여섯 다음 집」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아래 작은 루엔 글자. 칠.
루엔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대신 수첩에 적었다. 로센 강가 마을: 번호 있음. 칠번 있음. 누가 가르쳤는지 모름.
쿠노가 마부석에서 말했다.
“로센 영주가 성질은 고약해도 한 번 한다면 하는 양반입니다.”
*
엿새째 밤 여관에서 쿠노가 말했다.
“두 해 전에 도련님 태우고 저 고개 넘을 때 말입니다.”
“예.”
“나리가 천천히 하라셨잖습니까. 그때 저는 속으로 욕했습니다. 해 지고 닿으면 여관 주인이 방을 딴 데 줘 버리거든요.” 쿠노가 맥주 잔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그날 고개 아래서 수레 하나가 굴렀더랍니다. 저보다 반 시각 먼저 서둘러 내려간 수레가.”
루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뒤로 채찍을 안 씁니다. 도련님 셈은 모르겠고, 그건 압니다.”
루엔은 그날 밤 별을 재면서 쿠노의 말을 수첩에 적지 않았다. 셈할 수 없는 말이었다. 셈할 필요도 없었다.
*
아흐레째 밤 값이 이상했다.
쉰 칸 하고 반. 전날 밤보다 한 칸이 높았다. 남쪽으로 하루를 갔는데 별이 올라갔다.
루엔은 눈금판을 다시 보았다. 끈이 판 가장자리에 걸려 있었다. 여관 마당이 기울어 판을 받친 통이 비스듬했다. 다시 쟀다. 마흔아홉 칸 하고 조금. 맞았다.
틀린 값은 지우지 않았다. 줄을 긋고 옆에 적었다. 끈 걸림. 버림. 버린 것도 버렸다고 알 수 있어야 했다.
쿠노가 통 밑에 나무 쐐기를 받쳐 주었다. 그 뒤로 루엔은 판을 놓기 전에 물 한 사발을 통 위에 부어 보았다. 물이 어느 쪽으로도 흐르지 않을 때까지 쐐기를 밀었다.
쿠노는 말 걸음을 셌다. 루엔은 매듭을 적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했다. 매듭 열 개마다 나침반을 꺼내 길이 가는 쪽을 적었다.
길은 곧지 않았다. 강보다는 곧았지만, 산을 돌고 마을을 지나며 동쪽으로 서쪽으로 휘었다. 남쪽으로 가는 건 길의 일부였다.
그래서 루엔은 밤마다 여관 탁자에 긴 종이를 폈다. 매듭 열 개 몫마다 화살표 하나. 나침반이 가리킨 쪽으로, 매듭 수만큼의 길이로. 화살표를 끝과 끝으로 이어 붙였다. 실습장 풀밭에 분필로 바람과 화살을 이어 붙이던 것처럼.
이어 붙인 화살표 끝이 출발점에서 곧게 남쪽으로 얼마나 내려왔는지만 쟀다. 동서로 휜 건 버렸다. 세상 둘레에 필요한 건 남쪽으로 간 몫뿐이었다.
*
별은 밤마다 쟀다. 눈금판에 끈과 돌 추. 두 해 전 강배에서 쓰던 그 판이었다.
하르트 성 망루에서 떠나기 전날 밤 잰 값. 쉰두 칸에서 끈 굵기 반쯤 모자랐다.
로센 고개를 넘은 밤. 쉰한 칸이 조금 넘었다.
흐린 밤은 못 쟀다. 열아흐레 가운데 여섯 밤이 흐렸다. 비 오는 밤엔 쿠노가 마부석 아래 기름천을 걷어 주며 투덜거렸다. 하늘에 구멍이 나야 도련님이 주무신다고.
열나흘째 밤, 마흔일곱 칸 하고 반.
열여드레째 밤, 마흔여섯 칸 하고 조금.
그리고 아스테른 기숙사 지붕. 테오가 알려 준 길로 올라가 잰 밤. 마흔여섯 칸 하고 조금. 전날과 같았다. 전날 여관이 아스테른에서 반나절 길이었으니 끈 굵기 안에서 같은 게 맞았다.
*
첫날 밤 기숙사 책상에 루엔은 모든 걸 늘어놓았다.
매듭: 사천사백 개 남짓. 말 걸음으로 사십사만 걸음.
화살표를 이어 붙인 남쪽 몫: 매듭 삼천팔백팔십 개.
밤톨의 한 걸음은 로센 고개 이정표 사이에서 재 두었다. 루엔은 그걸 하르트 리로 옮겼다. 하르트 리 하나가 밤톨 걸음 육백스물다섯쯤. 남쪽으로 간 몫은 육백이십 리 남짓.
별이 낮아진 건 다섯 칸 하고 반이 조금 넘었다.
다섯 칸 반 남짓에 육백이십 리. 삼백예순 칸이면.
루엔은 셈을 두 번 했다. 길을 바꿔서 한 번 더 했다. 아홉 빼기 검산도 했다.
사만 리가 조금 안 됐다.
그리고 적을 것을 적었다.
별: 끈 굵기 때문에 한 번 잴 때 반 칸 안쪽으로 흔들린다. 다섯 칸 반에서 반 칸이 틀리면 한 할이 틀린다. 강배 때는 두 칸에서 반 칸이었으니 네 할이었다. 줄었다.
거리: 밤톨 걸음은 고르다. 그래도 오르막과 내리막에서 조금씩 달라진다. 나침반은 쇠 수레 옆에서 조금 흔들린다. 화살표로 이어 붙여도 한 할 안쪽의 틀림은 남는다.
리: 하르트 리다. 탑 책의 리와 같은 리인지부터 모른다.
그러니 사만 리가 조금 안 된다. 한 할쯤 위아래로.
루엔은 수첩 맨 뒷장을 폈다. 「모르는 것」 둘째 줄. 땅은 얼마나 큰가. 그 옆에 두 해 전 적은 작은 글씨. 강배에서 한 번. 거칠다.
그 아래 적었다. 걸어서 한 번. 사만 리 조금 안 됨. 한 할 위아래. 리가 무엇인지 정해야 함.
줄은 긋지 않았다. 한 할은 아직 컸다.
*
다만 하나는 분명해졌다.
오스윈이 말해 준 청색탑 옛 책의 둘레. 삼만 리가 조금 안 되는 수였다. 탑의 리가 하르트 리보다 크지 않은 한, 한 할을 다 빼도 그 수에 닿지 않았다.
강배 셈은 육만 리 가까이 나왔었다. 너무 컸고 너무 흔들렸다. 이번엔 흔들림이 넷에 하나로 줄었다. 그래도 탑보다 컸다.
세상은 탑들이 믿는 것보다 컸다.
테오가 지붕에서 내려오다 루엔 책상을 들여다보았다. 화살표가 이어진 긴 종이가 책상 밖으로 흘러내려 바닥에 둘둘 말려 있었다.
“그게 다 뭐야.”
“열아흐레 동안 남쪽으로 간 길입니다.”
“그걸로 뭐 알아냈는데.”
“세상이 탑에서 가르치는 것보다 큽니다. 탑 책이 셋이라고 하면 제 셈은 넷쯤입니다.”
테오가 한참 생각했다.
“… 그거 틀리면 누가 혼나?”
“아무도 안 혼납니다. 다시 재면 됩니다.”
“그럼 맞으면?”
루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직 셈할 수 없었다.
*
종이 여백에 루엔은 작게 한 줄을 더 적었다.
거리 검산: 쿠노(마부). 밤톨.
이튿날 아침 쿠노가 빈 마차를 몰고 북쪽으로 떠났다. 루엔은 교문 앞에서 배웅했다. 쿠노가 마부석에서 매듭 줄 한 타래를 던져 주었다. 사천사백 개 매듭이 달린 줄이었다.
“도련님 셈에 들어간 거니까.”
루엔은 그 줄을 두 손으로 받았다. 무거웠다. 몇 근인지는 달아 보지 않았다.
교문 안 돌마당에서 석공들이 끌과 망치를 부리고 있었다. 봄마다 대마법진을 새로 새기는 철이었다. 늙은 석공 하나가 마당 한가운데 무릎을 꿇고 옛 홈을 손가락으로 쓸고 있었다. 두 군데서 손가락이 멈췄다.
지도는 너무 많은 걸 그리고 있었다.막료 천막 벽에 걸린 베스트리아 동부 지도였다. 황색탑 측량사들이 그린 것. 산은 산 모양으로, 숲은 나무 모양으로, 강은 굽이굽이 그대로. 마을마다 교회 첨탑이 그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지도였다.그런데 루엔이 알고 싶은 건 하나였다. 어디가 끊기면 안 되는가.산 모양도, 나무 모양도, 강 굽이도 그걸 가리고 있었다.루엔은 새 종이를 폈다. 그리고 점을 찍었다.본진. 창고 마을. 왕도. 여섯 영지의 곡식 창고. 역참 열두 곳. 여울 셋. 모두 점 하나씩.그다음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그었다. 수레가 다니는 길이면 선 하나. 다리가 있으면 선 위에 짧은 가로줄. 거리도 산 높이도 그리지 않았다. 이어져 있는지 아닌지만.마흔한 개의 점과 예순 개 남짓의 선이 남았다.테오가 어깨 너머로 보았다.“이게 지도야? 거미줄 같은데.”“지도에서 필요 없는 걸 다 뺀 겁니다.”“뭐가 필요 없는데.”“어디로 이어졌는지 빼고 전부 다.”*루엔은 선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렸다.선 하나를 가리고, 본진에서 출발해 점을 따라가 보았다. 모든 점에 닿으면, 그 선은 끊겨도 괜찮은 선이었다.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닿지 못하는 점이 생기면, 그 선은 끊기면 안 되는 선이었다.예순 번을 가렸다.대부분은 괜찮았다.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하나를 끊으면 옆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멀어지긴 했지만 닿았다.세 선만 달랐다.메를 강 중류의 돌다리. 창고 마을로 들어가는 지류 위 나무다리. 그리고 왕도 동쪽 문 밖, 늪 사이로 난 둑길 위 다리.셋 중 하나만 끊겨도 점들이 두 덩이로 갈라졌다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