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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한 방울 속의 마을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6 18:57:55

아스테른의 눈은 늦게 녹았다.

녹은 물은 지붕에서 떨어져 골목 도랑으로 모였다. 도랑엔 겨우내 얼어붙어 있던 것들이 같이 녹아 흘렀다. 요강에서 쏟은 것, 돼지가 남긴 것, 푸줏간 뒷문에서 버린 것. 냄새가 봄보다 먼저 왔다.

그리고 잿빛열이 왔다.

식당에서 누가 말했다. 남쪽 성문 안 골목에서 아이 둘이 열이 올랐다고. 이튿날엔 다섯이라고 했다. 그다음 날엔 숫자를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냥 「또」라고 했다.

학교 의무실에도 둘이 누웠다. 둘 다 도시에 집이 있는 통학생이었다.

루엔은 그날 오후 빈 병 네 개를 들고 학교를 나섰다.

*

“물을 떠 간다고?” 테오가 따라 나오며 물었다. “그걸 왜.”

“보려고 합니다.”

“물을? 물은 그냥 물이잖아.”

“그냥인지 보려고 합니다.”

병마다 분필로 번호를 적었다. 하나는 기숙사 우물. 둘은 큰 시장 우물. 셋은 강가 빨래터 아래 강물. 넷은 비워 두었다.

“넷은?”

“교구 성수 우물 물을 뜨려고 했습니다. 남쪽 골목에서 가장 가깝습니다.”

성 에르멘 우물은 교구 성당 옆 작은 마당에 있었다. 돌로 된 둥근 우물 둘레에 성인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두레박 줄이 반들반들했다. 아침저녁으로 골목 사람들이 줄을 서서 물을 길어 가는 우물이었다.

우물지기 노인이 루엔의 병을 보더니 손을 내저었다.

“성수는 교구 사람만 긷는다. 학생은 안 돼.”

“조금이면 됩니다. 한 모금도 안 됩니다.”

“성수에 조금이 어디 있나.”

루엔은 셈해 볼 필요도 없이 그 말에 졌다. 넷째 병은 빈 채로 돌아왔다.

*

학교 뒤뜰, 해가 가장 잘 드는 돌 벤치였다.

루엔은 창유리 조각 하나를 벤치에 놓았다. 유리 공방 뒤에서 주워 온, 손바닥 반만 한 평평한 조각이었다. 그 위에 첫째 병의 물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그때 클라리사 보움이 왔다. 장부 묶음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여기 있을 줄 알았어. 네 장부 돌려주러—” 클라리사가 멈췄다. “물방울을 왜 그렇게 봐?”

“멀리 있는 걸 크게 보는 것의 반대를 합니다.”

넷째 고리의 원시는 먼 것을 당겨 보았다. 근시는 가까운 것을 키운다. 렌즈는 하나면 되었다. 대신 아주 작고, 아주 둥글어야 했다. 좁쌀만 한 공기 알. 휘는 길이가 손톱 두께만큼 짧아야 했다.

루엔은 영창을 하고 눈을 물방울 바로 위에 댔다. 코끝이 유리에 닿을 뻔했다.

처음엔 아무것도 안 보였다. 뿌옇게 빛만 번졌다.

손가락 한 마디를 들었다가, 반 마디를 내렸다. 공기 알을 아주 조금 더 둥글게 굳혔다.

물방울이 호수가 되었다.

맑았다. 그 안에 먼지 같은 것 몇 개가 느리게 떠돌았다. 움직이지 않는 먼지였다. 루엔은 한참 보았다. 먼지는 먼지였다.

“하나. 거의 없음.” 루엔이 말했다. 클라리사가 저도 모르게 장부 묶음에서 빈 종이를 꺼내 받아 적었다.

둘째 병. 시장 우물. 먼지가 조금 더 많았다. 그중 하나가 아주 천천히 흔들렸다. 루엔은 오래 보았다. 흔들린 건 물이 흔들려서였다.

“둘. 거의 없음.”

셋째 병. 강물.

루엔은 눈을 대자마자 숨을 멈췄다.

*

호수가 붐볐다.

작은 것들이 있었다. 먼지가 아니었다. 먼지는 저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막대처럼 길쭉한 것이 몸을 비틀며 앞으로 나갔다. 동그란 것이 빙글빙글 돌다가 방향을 바꿨다. 더 작은 점 같은 것들이 우글우글 모였다 흩어졌다. 한 방울 안에, 셀 수 없이.

아니었다. 셀 수는 있었다. 루엔은 보이는 칸 한 귀퉁이만 잡고 셌다. 거기만 서른 넘게.

“클라리사 님. 보십시오. 몸을 움직이지 말고 눈만 대십시오.”

클라리사가 장부를 내려놓고 허리를 숙였다. 루엔이 공기 알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클라리사가 눈을 댔다.

한 박자. 두 박자.

비명이 뒤뜰을 울렸다.

클라리사는 벤치에서 뒤로 세 걸음 물러났다.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눈이 동그랬다.

“살아 있어. 저거 살아 있어!”

테오가 달려왔다. “뭐야, 뭐가!”

“물 안에. 뭐가. 기어 다녀.”

테오가 코웃음을 치며 허리를 숙였다. 눈을 댔다.

더 큰 비명이 났다. 테오는 클라리사보다 한 걸음 더 물러났다. 그러고는 뒤늦게, 제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몇 번이고.

“나 저 물. 작년 여름에. 빨래터에서.”

“마셨습니까.”

“… 한 모금.”

“끓여서입니까.”

테오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게 대답이었다.

루엔은 유리 조각의 물방울을 보았다. 햇빛에 반짝이는 맑은 한 방울이었다. 맨눈으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끓이면 다 죽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열탕 온도에 열다섯 박자만 두어도 됩니다. 물이 맑아 보이는 것하고 깨끗한 것은 다릅니다.”

클라리사가 입을 막은 손을 천천히 내렸다. 루엔을 보았다.

“너 이거 알고 있었지.”

“짐작만 했습니다. 본 건 처음입니다.”

그 말은 반만 사실이었다. 전생에서는 본 적이 있었다. 이번 생에서는 처음이었다. 루엔은 둘을 따로 셈하지 않기로 했다.

“끓이면 다 죽는다는 건,” 클라리사가 말했다. 목소리가 아직 조금 떨렸지만 말은 또박또박했다. “본 거야, 짐작이야.”

루엔은 그 물음이 마음에 들었다.

“짐작입니다. 지금 보겠습니다.”

셋은 의무실로 갔다. 의무실엔 붕대를 삶는 솥이 늘 끓고 있었다. 루엔은 셋째 병의 물을 작은 쇠 국자에 덜어 솥 물에 띄웠다. 열탕 때처럼 속으로 박자를 셌다. 넉넉하게, 서른. 국자를 꺼내 식혔다.

뒤뜰로 돌아와 같은 유리 조각에 같은 물을 한 방울.

호수는 여전히 붐볐다. 막대 같은 것, 동그란 것, 점 같은 것. 다만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떠 있을 뿐이었다.

클라리사가 눈을 대고 한참 있다가 허리를 폈다.

“죽었네.”

“예.”

“그러면 끓인 물은 이렇게 된다, 는 것도 적어 둬.”

클라리사가 루엔의 수첩을 가리켰다. 루엔은 적었다. 「셋. 끓임 서른 박자 뒤 — 움직이는 것 없음.」 적고 나서 보니 클라리사가 자기 종이에도 똑같이 적고 있었다. 상단 딸의 글씨는 루엔 것보다 빨랐다.

“보움 상단 물통도 보고 싶어.” 클라리사가 말했다. “배로 실어 나르는 물. 선원들이 여름마다 배탈이 나거든. 원래 그렇다고들 해.”

루엔은 수첩을 뒤로 넘기려다 참았다. 그 말은 나중에 적어도 늦지 않았다.

*

그날 해 질 녘, 루엔은 유리 조각과 셋째 병을 들고 교구 성당에 갔다.

오렐 바스는 성당 옆 작은 방에서 장부를 보고 있었다. 스물여덟쯤 된 마르고 창백한 사제였다. 흰 사제복 소매 끝이 늘 젖었다 마른 얼룩이었다. 손을 씻을 때마다 걷었다가 내리는 소매였다. 재작년 초여름, 고리대 서류를 끝자리까지 다시 셈해 왔던 사람이었다.

“잿빛열 때문입니까.” 오렐이 먼저 물었다.

“예. 보여 드릴 것이 있습니다.”

해는 거의 졌다. 루엔은 창가의 마지막 빛에 유리 조각을 놓고, 공기 알을 세웠다. 오렐에게 자리를 비켰다.

오렐은 오래 보았다.

비명은 없었다. 오렐은 허리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창밖의 빛이 조금씩 줄었다. 오렐은 빛이 다 사라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거기 있었다.

그리고 허리를 폈다.

한참 말이 없었다. 루엔은 기다렸다. 서른을 두 번 세었다. 세 번.

“이건 어디 물입니까.”

“강가 빨래터 아래입니다.”

“성수 우물 물은.”

“우물지기께서 안 주셨습니다.”

“이것들이 잿빛열입니까.”

루엔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모릅니다. 물속에 무언가 산다는 것까지만 봤습니다. 이것이 병인지 알려면, 앓는 집들이 어느 물을 마셨는지 세어 봐야 합니다.”

오렐이 루엔을 보았다. 모른다고 말하는 아이를 처음 보는 얼굴은 아니었다. 재작년 초여름에도 이 아이는 모르는 칸을 모른다고 적어 왔다.

오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방 한쪽 벽에 난 작은 기도 자리로 갔다. 저녁 기도 시간이었다. 무릎 받침 앞에 섰다.

그런데 무릎을 꿇지 않았다.

오렐은 돌아서서 구석의 물 대야로 갔다. 소매를 한 번 더 걷었다. 두 손을 물에 담갔다. 손바닥, 손등, 손가락 사이, 손톱 밑. 천천히. 루엔은 속으로 셌다. 스무 박자 가까이.

손을 닦았다. 그제야 기도 자리로 가 무릎을 꿇었다.

기도는 짧았다. 기도가 끝나고 일어서며 오렐이 말했다. 루엔 쪽을 보지 않고, 벽을 보고.

“경전에 이런 말이 있는지 찾아보겠습니다.”

“어떤 말입니까.”

“씻고 나서 기도하라는 말.”

오렐은 불을 켜지 않은 채 한동안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젖은 손끝이 아직 조금 반짝였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루엔은 수첩 맨 뒷장을 폈다. 「모르는 것」 다섯째 줄 아래, 여섯째 줄.

「물 한 방울 속에 사는 것들 — 이것이 잿빛열인가.」

본 것은 적었다. 병인지는 아직 적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물음표로 끝냈다.

*

클라리사가 돌려주러 왔던 장부는 루엔의 생활비 장부였다. 루엔이 한 학기 동안 적은 것이었다. 빵, 분필, 종이, 초.

기숙사로 돌아오자 클라리사가 방 앞에 서 있었다. 장부를 펴 들고.

“낮에 말하려고 했는데 물방울 때문에 잊었어. 여기.”

손가락이 한 줄을 짚었다. 겨울 셋째 달, 초 두 자루. 루엔은 동화 일곱이라고 적어 두었다. 그 아래 합계에는 아홉으로 들어가 있었다.

루엔은 영수증 묶음을 꺼냈다. 그달 초 가게 영수증. 동화 일곱.

합계가 둘 많았다. 옮겨 적다가 틀린 것이었다. 넉 달 동안 몰랐다.

루엔은 한참 그 줄을 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었다.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클라리사가 뜻밖이라는 얼굴을 했다. 조금 더 뻐길 준비를 하고 온 얼굴이었다.

루엔은 합계를 고쳤다. 그리고 그 줄 옆 여백에 작게 적었다.

「검산: 클라리사 보움.」

클라리사가 그 글씨를 보았다. 한참.

“… 그거 지우지 마.”

“안 지웁니다. 장부에 남는 겁니다.”

클라리사는 대꾸 없이 돌아갔다. 복도 끝에서 한 번 돌아보았다.

사흘 뒤 테오가 말했다. 클라리사 방에 밤늦도록 불이 켜져 있더라고. 기숙사 여학생 사감이 찾아가 보니, 루엔의 지난 학기 장부를 처음부터 다시 셈하고 있더라고.

“하나 더 찾았대?”

“아직이라고 합니다.”

“그럼 왜 안 자.”

루엔은 잠깐 생각했다.

“없다는 걸 확인하는 데는 있다는 걸 찾는 것보다 오래 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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