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오렐이 건넨 종이는 세 장이었다.
교구 사제들이 이번 봄 병자 기도를 하러 간 집의 목록이었다. 사제가 다녀간 집에는 앓는 사람이 있었다. 목록은 날짜순으로 빼곡했다.
루엔은 첫 줄을 읽었다.
「양초장이 골목, 우물 쪽에서 넷째인가 다섯째 집. 문에 말굽.」
둘째 줄.
「빵집 맞은편 파란 문. 아니면 그 옆.」
셋째 줄.
「과부 헤드비히 집(작년에 이사했을지도).」
루엔은 셋째 장 끝까지 읽고 종이를 내려놓았다.
“이걸로는 지도에 못 찍습니다.”
오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사제들이 적은 대로입니다. 골목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적었지요. 이 도시엔 집 번호가 없으니까요.”
*
아스테른에는 집 번호가 없었다.
사람들은 집을 이웃으로 불렀다. 푸줏간 옆집, 우물에서 셋째 집, 지붕에 풀 난 집. 그걸로 충분했다. 골목 사람들끼리는.
골목 밖 사람에게는 충분하지 않았다. 사제가 헛걸음을 했고, 편지가 엉뚱한 집에 갔고, 불이 났을 때 경비대가 옆 골목으로 뛰었다.
북쪽 영지 노르벡에서 루엔은 집마다 번호를 붙인 적이 있었다. 일흔한 채. 개울 위쪽부터. 새 마을까지 넓히는 데 두 해가 걸렸다.
아스테른은 노르벡이 아니었다. 남쪽 성문 안쪽만 해도 골목이 마흔이 넘었다.
“번호를 붙이겠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임시로. 분필로.”
오렐이 눈썹을 올렸다. “집마다요?”
“문마다입니다. 한 집에 문이 둘인 데가 있습니다.”
“몇 개나 됩니까.”
“세어 봐야 압니다.”
*
지도는 이미 있었다.
넷째 고리 심사 뒤로 루엔은 종탑에 자주 올랐다. 원시로 도시를 내려다보며 골목을 한 줄씩 옮겨 그렸다. 지붕이 끊기는 자리, 도랑이 꺾이는 자리, 우물의 둥근 돌.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이었다. 테오는 그걸 「종탑 낙서」라고 불렀다.
그 낙서를 탁자에 펼쳤다.
셋이서 나눴다. 테오가 분필을 들고 문틀 아래 귀퉁이에 작은 숫자를 적는다. 루엔이 문을 세고 번호를 부른다. 클라리사가 장부에 적는다. 몇 번 골목, 몇 번 문, 사제 목록의 몇째 줄과 같은 집인지.
첫날은 해 질 무렵에 나갔다. 사람들이 집에 돌아와 있는 때였다. 누가 앓는지 물으려면 사람이 있어야 했다.
“골목 어귀부터 셉니다. 해 지는 쪽 벽이 먼저입니다. 끝까지 가면 건너편 벽을 거꾸로 올라옵니다.”
“왜 그렇게 해.” 테오가 물었다.
“내일 누가 이어 세도 같은 번호가 나오게 하려고 합니다.”
*
골목 사람들은 처음엔 쫓아냈다.
“남의 문에 뭘 쓰는 거야!”
양초장이 골목 넷째 집에서 아낙 하나가 빗자루를 들고 나왔다. 테오가 분필을 든 채 굳었다.
클라리사가 한 걸음 나섰다.
“교구에서 병자 기도 드리러 오는 사제님들이 헛걸음을 하셔서요. 이 번호만 있으면 곧장 오십니다.”
아낙이 빗자루를 내렸다. 문틀 아래 작은 숫자를 보았다. 아홉.
“… 우리 집이 아홉이야?”
“이 골목에서는요.”
“말굽 박은 집이 우리야. 사제님이 다섯째 집이라고 찾았다던데.”
“아홉째였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다섯째는 말굽이 떨어진 자리만 있는 집입니다.”
아낙은 한참 제 문을 보다가, 안에 대고 소리쳤다. “여보, 우리가 아홉이래!” 안에서 기침 소리와 함께 대답이 왔다. 무슨 말인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 집에는 앓는 아이가 하나 있었다. 클라리사가 장부에 적었다. 양초장이 골목, 아홉, 앓음 하나.
루엔은 지도 위 양초장이 골목의 아홉째 칸에 점을 하나 찍었다.
*
사흘 밤이 걸렸다.
셋째 날 밤, 기숙사 방 탁자 위에서 클라리사가 장부를 덮었다.
“문 천이백열넷. 그중 앓는 사람이 있는 문 예순셋.”
“사제 목록은 쉰아홉 줄이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넷이 더 나왔습니다. 사제님이 모르는 집입니다.”
클라리사가 장부에서 그 넷을 찾아 짚었다. 넷 다 골목 맨 끝, 도랑 쪽 벽에 붙은 집이었다. 문이 판자 한 장인 집도 있었다.
“병자 기도엔 헌금을 드려야 하잖아.” 클라리사가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은화 반 닢. 이 집들은 그걸 못 내니까 사제님을 안 부른 거야.”
루엔은 그 넷을 지도에서 다시 보았다. 원래 목록대로였다면 빠졌을 점이었다. 넷 가운데 셋이 우물 가까이 있었다.
“사제님이 아신다고 해서 목록에 오르는 게 아니었군요.” 루엔이 말했다. “문을 세야 오르는 거였습니다.”
오렐에게 이 넷을 따로 적어 드려야겠다고, 루엔은 수첩 귀퉁이에 적었다. 헌금 없이 가 줄 사제가 교구에 하나는 있었다.
테오는 분필 가루가 하얗게 묻은 손으로 제 얼굴을 문질렀다. 얼굴까지 하얘졌다.
루엔은 지도를 촛불 가까이 당겼다.
점이 예순셋이었다.
흩어져 있지 않았다.
지도 한가운데에서 조금 동쪽, 성당 옆 작은 마당. 둥근 돌로 그려 둔 자리. 점들은 거기를 둘러싸고 있었다. 가까울수록 빽빽하고, 멀어질수록 드물었다. 마치 누가 그 자리에 물을 한 방울 떨어뜨려 번지게 한 것처럼.
“성 에르멘.” 클라리사가 작게 말했다.
테오가 몸을 기울였다. “저 성수 우물?”
루엔은 컴퍼스를 들었다. 우물 자리에 바늘을 꽂고, 이백 걸음 거리로 원을 그렸다. 지도의 축척은 종탑에서 성문까지 구백열두 걸음으로 맞춰 두었다.
원 안의 점을 셌다. 마흔여섯.
원 밖에 열일곱.
“원 안에 문이 몇 개입니까.”
클라리사가 장부를 다시 펴 골목마다 셈했다. “삼백… 삼백열하나.”
“원 밖은 구백셋입니다.”
루엔은 수첩에 두 줄을 적었다.
「우물 이백 걸음 안: 문 삼백열하나에 앓는 문 마흔여섯. 여덟 문에 하나 꼴 조금 넘음.」
「그 밖: 문 구백셋에 앓는 문 열일곱. 쉰 문에 하나 꼴 조금 넘음.」
“앓는 집만 셌으면,” 루엔이 말했다. “집이 많은 곳에 점이 많은 것뿐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문을 전부 셌습니다.”
테오가 하얀 얼굴로 루엔을 보았다.
“그래서 사흘 걸린 거냐. 안 앓는 집까지 세느라.”
“예.”
“그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예.”
테오는 한숨을 쉬고 침대에 쓰러졌다. 분필 가루가 이불에 뿌옇게 묻었다.
*
루엔은 원 안을 다시 보았다.
빈 곳이 둘 있었다.
하나는 우물 바로 동쪽, 스무 걸음도 안 되는 곳. 큰 건물 하나에 문이 셋. 점이 없었다.
“양조장.” 클라리사가 장부를 짚었다. “홀거네. 셋 다 앓는 사람 없음.”
또 하나는 원 북쪽 가장자리에 걸친 담장 안. 문이 둘. 점이 없었다.
“회색 수사들 수도원. 앓는 사람 없음.”
루엔은 두 빈자리를 오래 보았다.
우물에서 가장 가까운 집이 앓지 않았다. 원 안인데 앓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적는다. 루엔은 지도 여백에 두 곳을 따로 적었다. 이유는 아직 몰랐다. 모르는 것도 적는다.
*
넷째 날 낮, 루엔은 양조장에 갔다.
양조장 마당에는 김이 자욱했다. 커다란 솥에서 보리 삶는 냄새가 났다. 일꾼 여남은 명이 통을 굴리고 있었다. 다들 팔뚝이 굵었다. 얼굴이 불그레했다.
주인 홀거는 팔뚝이 통만 한 사내였다. 목소리가 마당 끝까지 울렸다.
“학생이 무슨 일로? 맥주는 아직 일러, 학생.”
“일꾼분들 가운데 이번 봄에 앓은 분이 있습니까.”
홀거가 가슴을 폈다.
“없지! 한 놈도 없어. 저 앞 골목은 난리가 났는데 우리 집은 멀쩡해.”
“까닭을 아십니까.”
“알다마다.” 홀거가 일꾼 하나의 등을 철썩 쳤다. “우리 일꾼은 물을 입에 안 대거든. 아침에도 맥주, 점심에도 맥주, 목마르면 맥주. 물은 약한 놈이나 마시는 거야. 그래서 튼튼하지!”
일꾼들이 웃었다. 누군가 「마님은 물 드시잖소」 하고 외쳤다. 홀거가 「그러니 마님이 약하지」 하고 받았다. 더 큰 웃음.
“솥에서 보리를 삶으십니까.” 루엔이 물었다.
“삶지. 끓여야 맛이 나.”
“물은 어디서 길으십니까.”
홀거가 턱으로 마당 밖을 가리켰다. 담장 너머, 스무 걸음 앞에 둥근 돌 우물이 보였다.
“저기 성수 우물이지. 교구하고는 오래 거래했어. 성수로 빚은 맥주라고 하면 값을 더 받아.”
루엔은 그 말을 머릿속에서 두 번 되풀이했다.
같은 우물 물이었다. 끓여서 마시는 사람들은 앓지 않았다.
그리고 우물 둘레, 끓이지 않고 그냥 마시는 사람들은 앓았다.
*
수도원은 문지기 수사가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다만 담장 너머로 물었다.
“이번 봄에 앓은 형제분이 있습니까.”
“없소. 주님의 은혜요.”
“물은 어디서 길으십니까.”
“담장 안에 우리 우물이 있소. 우리 우물은 우리만 길소.”
루엔은 고맙다고 인사하고 돌아섰다. 은혜라는 말은 적지 않았다. 담장 안 우물은 적었다. 그리고 담장 바로 밖, 같은 골목에 붙은 문 다섯 가운데 넷에 점이 찍혀 있다는 것도 나란히 적었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넷과 영이었다.
*
그날 밤 루엔은 지도 여백에 홀거의 말을 적었다.
한 글자도 바꾸지 않고.
「우리 일꾼은 물을 입에 안 대서 튼튼하지. — 양조장 주인 홀거. 봄.」
그 옆에 작게 한 줄을 더했다. 「솥에 끓임. 물은 성수 우물.」
클라리사가 어깨너머로 보았다.
“그걸 왜 그대로 적어. 자랑이잖아.”
“자랑이 맞는 말입니다. 까닭만 틀렸습니다.”
“까닭이 틀리면 틀린 거 아냐?”
루엔은 붓을 내려놓았다.
“그분은 물을 안 마셔서 튼튼하다고 하셨습니다. 실은 끓인 것만 마셔서입니다. 앓지 않았다는 건 맞습니다. 그건 제가 사흘 동안 센 것과 같습니다. 맞는 건 맞는 대로 적어야, 틀린 까닭을 나중에 고칠 수 있습니다.”
클라리사는 한참 여백의 글씨를 보았다. 그러다 제 장부를 펴, 같은 말을 같은 글자로 옮겨 적었다.
테오는 이불 속에서 중얼거렸다.
“그 아저씨, 자기 말이 지도에 올라간 거 알면 액자에 걸겠다.”
“그러면 성수 우물 얘기도 같이 걸립니다.”
테오가 이불을 걷었다. 루엔을 보았다. 지도를 보았다. 둥근 돌 자리와, 그 둘레에 번진 예순셋의 점들 가운데 마흔여섯을.
“… 이거 교구에 가져가면 난리 나겠다.”
루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셈이 끝난 일에는 대답이 필요 없었다. 남은 건 가져가는 일이었다.
지도는 너무 많은 걸 그리고 있었다.막료 천막 벽에 걸린 베스트리아 동부 지도였다. 황색탑 측량사들이 그린 것. 산은 산 모양으로, 숲은 나무 모양으로, 강은 굽이굽이 그대로. 마을마다 교회 첨탑이 그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지도였다.그런데 루엔이 알고 싶은 건 하나였다. 어디가 끊기면 안 되는가.산 모양도, 나무 모양도, 강 굽이도 그걸 가리고 있었다.루엔은 새 종이를 폈다. 그리고 점을 찍었다.본진. 창고 마을. 왕도. 여섯 영지의 곡식 창고. 역참 열두 곳. 여울 셋. 모두 점 하나씩.그다음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그었다. 수레가 다니는 길이면 선 하나. 다리가 있으면 선 위에 짧은 가로줄. 거리도 산 높이도 그리지 않았다. 이어져 있는지 아닌지만.마흔한 개의 점과 예순 개 남짓의 선이 남았다.테오가 어깨 너머로 보았다.“이게 지도야? 거미줄 같은데.”“지도에서 필요 없는 걸 다 뺀 겁니다.”“뭐가 필요 없는데.”“어디로 이어졌는지 빼고 전부 다.”*루엔은 선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렸다.선 하나를 가리고, 본진에서 출발해 점을 따라가 보았다. 모든 점에 닿으면, 그 선은 끊겨도 괜찮은 선이었다.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닿지 못하는 점이 생기면, 그 선은 끊기면 안 되는 선이었다.예순 번을 가렸다.대부분은 괜찮았다.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하나를 끊으면 옆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멀어지긴 했지만 닿았다.세 선만 달랐다.메를 강 중류의 돌다리. 창고 마을로 들어가는 지류 위 나무다리. 그리고 왕도 동쪽 문 밖, 늪 사이로 난 둑길 위 다리.셋 중 하나만 끊겨도 점들이 두 덩이로 갈라졌다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