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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손잡이를 떼다

作者: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6 18:58:14

교구장 사제는 지도를 끝까지 보았다.

그건 루엔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펼치자마자 밀어낼 줄 알았다. 교구장은 예순이 넘은 사람이었다. 눈가 주름이 깊었고 손가락 마디가 굵었다. 그 손가락으로 점을 하나씩 짚어 가며 보았다. 원 안의 마흔여섯, 원 밖의 열일곱. 여백의 글씨까지.

오렐은 루엔 옆에 서 있었다. 교구장 방에 들어온 뒤로 한 번도 소매를 걷지 않았다.

한참 뒤 교구장이 고개를 들었다.

“잘 셌구나.”

“고맙습니다.”

“그런데 틀렸다.”

*

교구장은 지도 위, 성 에르멘 우물의 둥근 돌 자리에 손바닥을 얹었다.

“이 우물은 사백 년 전에 성 에르멘께서 축복하셨다. 사백 년 동안 이 골목은 이 물을 마셨다. 사백 번의 봄이 지났다. 잿빛열이 도는 봄도, 돌지 않는 봄도 있었다. 물은 같았다.”

“예.”

“물이 병을 옮긴다면 사백 년 내내 옮겼어야 한다.”

루엔은 그 말을 셈해 보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리고 너는 이걸 보지 않았다.” 교구장이 원 안을 손가락으로 둥글게 그었다. “이 우물 둘레는 도시에서 가장 가난한 골목이다. 한 방에 여덟이 잔다. 도랑이 문 앞으로 흐른다. 가난한 곳에 병이 많은 건 새삼스럽지 않다. 점이 우물 둘레에 모인 건 우물 때문이 아니라 가난 때문일 수 있다.”

오렐이 숨을 삼켰다.

루엔은 반박하지 않았다. 먼저 인정했다. 좋은 물음이었다.

“가난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두 곳을 따로 적어 왔습니다.”

루엔은 지도 여백을 짚었다.

“양조장 일꾼들은 이 골목에서 가장 가까이 삽니다. 한 방에 여섯씩 잡니다. 가난합니다. 앓은 사람이 없습니다. 이분들은 성수 우물 물을 솥에 끓여 맥주로 마십니다.”

손가락이 북쪽 담장으로 옮겨 갔다.

“회색 수사들은 담장 안 자기 우물을 씁니다. 앓은 분이 없습니다. 담장 바로 밖, 같은 골목 문 다섯 가운데 넷은 앓았습니다. 담장 하나 차이입니다. 가난은 담장을 넘습니다. 물은 안 넘습니다.”

교구장은 오래 말이 없었다. 방 안이 조용했다. 창밖에서 성당 종이 한 번 울렸다.

“성수가,” 교구장이 마침내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고 흔들리지 않았다. “병을 옮길 리 없다.”

그건 셈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루엔도 알았다. 교구장도 알았다.

“우물은 막지 않는다. 교구의 뜻이다.”

앞의 물음은 달랐다. 그건 셈에 대한 물음이었다. 사백 년 같은 물인데 왜 어떤 봄에만 도는가. 루엔은 그 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날 밤 수첩 맨 뒷장에 일곱째 줄이 생겼다. 「같은 우물, 사백 년. 잿빛열은 왜 어떤 봄에만 도나. — 교구장 사제님 물음.」

*

교구장은 지도를 말아 루엔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책상 서랍에서 봉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마침 이것도 네 앞으로 와 있었다.”

붉은 밀랍에 흰 탑 무늬가 찍혀 있었다. 루엔은 그 무늬를 알았다. 지난겨울 교장이 보여 준 편지에 같은 것이 찍혀 있었다.

교구장이 직접 봉을 떼고 읽었다.

「백색탑주 카시미르 알바 성하의 서한에 따라, 왕립 마법학교 학생 루엔 하르트를 교구 심사에 올린다. 심사할 것은, 영창 없이 행하는 마법이 신앙에 어긋나는지 여부.」

교구장은 종이를 내려놓았다.

“오늘로 교구 심사 장부에 네 이름이 올랐다. 첫 질의는 교구가 날을 정해 부른다. 부르면 오너라.”

“예.”

“그리고,” 교구장이 덧붙였다. “오늘 네가 가져온 지도는 그 장부에 적지 않겠다. 이건 별개의 일이다.”

루엔은 그 말을 오래 기억했다. 교구장은 두 일을 섞지 않았다. 섞으면 더 쉬웠을 텐데.

*

교구장 방을 나오자 오렐이 복도에서 멈췄다.

“죄송합니다.”

“사제님이 죄송하실 일이 아닙니다.”

“교구장님은 나쁜 분이 아닙니다. 사백 년을 짊어지신 분입니다. 오늘 우물을 막으시면, 사백 년 동안 성수를 마시고 죽은 사람들이 전부 성수 때문에 죽은 게 됩니다.”

루엔은 그 셈을 해 보지 않았다. 해 보지 않아도 무거운 셈이었다.

오렐은 복도 창밖을 보았다. 성당 옆 작은 마당, 둥근 돌 우물. 해 질 녘인데도 줄이 서 있었다. 물동이를 든 아낙들, 아이들.

오렐의 입술이 움직였다. 기도인지 셈인지 루엔은 알 수 없었다.

“하르트 학생. 교구 달력을 보신 적 있습니까.”

“없습니다.”

“저도 요즘 처음으로 끝까지 봤습니다. 경전에서 씻는 말을 찾다가요.” 오렐이 돌아보았다. 눈이 조금 빛났다. “봄 축일 앞에 「정결 기간」이라는 게 있습니다. 성물을 닦고, 성수 우물을 쉬게 하는 이레. 그동안 우물은 긷지 않습니다. 쉬게 한 우물 물은 축일에 다시 축복을 받습니다.”

“지금도 합니까.”

“여든 해 전에 끊겼습니다. 이레 동안 물을 먼 데서 길어야 하니 골목 사람들이 싫어했지요. 기록에는 ‘잠시 미룸’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여든 해 동안 잠시.”

루엔은 오렐을 보았다. 오렐은 웃지 않았다.

“우물을 막는 게 아닙니다. 쉬게 하는 겁니다. 성수가 병을 옮긴다고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경전대로 하는 겁니다.”

“이레로는 모자랍니다.”

오렐이 멈칫했다.

“이미 앓는 사람의 몸에 든 것은 이레 안에 다 나오지 않습니다. 새로 마시는 걸 막아야 줄어듭니다. 줄어드는 게 보이려면 이레가 지나야 합니다. 적어도 세 이레.”

오렐은 잠깐 눈을 감았다.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엔 루엔도 알았다. 셈이었다. 날짜를 세고 있었다.

“봄 축일이 스무날 뒤입니다.” 오렐이 눈을 떴다. “정결 기간은 축일 앞에서 시작하라고만 적혀 있습니다. 얼마나 앞에서인지는 안 적혀 있습니다.”

*

교구장은 이번엔 지도를 보지 않았다. 교구 달력을 보았다. 오렐이 펼친 그 쪽을. 여든 해 전의 「잠시 미룸」을.

한참 뒤 교구장이 말했다.

“경전에 있는 일이다.”

그 한 마디로 됐다.

이튿날 아침, 성당 문 앞에 「정결 기간」 알림이 붙었다. 봄 축일까지. 성 에르멘 우물은 쉰다. 물은 큰 시장 우물에서 긷는다.

골목 사람들이 투덜거렸다. 시장 우물까지는 멀었다. 물동이를 이고 오백 걸음. 그래도 경전이었다. 교구의 뜻이었다. 투덜거리면서 따랐다.

우물을 쉬게 하는 방법은 오렐이 정했다. 쇠사슬로 덮개를 묶는 대신, 두레박 줄을 감는 도르래에서 쇠 손잡이를 뽑았다. 손잡이가 없으면 두레박을 올릴 수 없었다. 몰래 긷고 싶은 사람도 긷지 못했다. 사슬을 끊는 사람은 있어도, 손잡이를 새로 벼려 오는 사람은 없었다.

오렐이 손잡이를 두 손에 들고 교구로 걸어갔다. 골목 사람들이 길을 비켜 주었다. 무슨 성물 행렬처럼.

*

그날 오후 오렐은 도랑 쪽 네 집에 갔다. 사제 목록에 없던 집들이었다. 루엔이 적어 준 번호를 들고.

헌금 그릇은 들고 가지 않았다.

셋째 집 문은 판자 한 장이었다. 안에 아이가 누워 있었다. 다섯 살쯤. 살갗이 잿빛이었다. 어머니가 아이 입에 물을 흘려 넣고 있었다. 물동이는 비어 가고 있었다. 성수 우물에서 어제 길어 온 물이었다.

루엔이 품에서 세 칸짜리 계량 숟가락을 꺼냈다.

“물은 끓여서 식힌 걸로 주십시오. 큰 시장 우물 물이라도 끓이십시오. 한 되에 이 칸으로 설탕 여섯, 이 칸으로 소금 반.”

어머니가 숟가락을 보았다. 루엔을 보았다. 사제복을 입은 오렐을 보았다.

“설탕은… 없어요.”

오렐이 소매를 걷었다. 허리춤 주머니에서 작은 꾸러미를 꺼냈다. 교구 부엌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루엔은 오렐이 그걸 언제 챙겼는지 보지 못했다.

“여기 있습니다.” 오렐이 말했다. “셈은 이 학생이 합니다. 저는 기도만 하겠습니다.”

기도는 짧았다. 기도하기 전에, 오렐은 문간 물통에서 손을 씻었다.

*

루엔은 날마다 교구에 들렀다. 새로 앓는 집을 세었다. 분필 번호가 있으니 빨랐다. 문틀 아래 숫자만 보면 되었다.

표를 만들었다. 날짜마다 한 줄. 그날 새로 앓는 사람이 나온 문의 수.

손잡이를 떼기 전 닷새. 다섯, 여섯, 넷, 다섯, 여섯.

뗀 뒤 첫 이레. 다섯, 다섯, 넷, 여섯, 넷, 셋, 넷.

클라리사가 표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안 줄잖아.”

“이미 마신 사람들입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여드레째. 둘.

아흐레째. 둘.

열흘째. 하나.

열하루째. 하나. 열이틀째, 영.

루엔은 그 영을 오래 보았다. 그리고 옆 칸, 원 밖 골목들의 숫자를 나란히 적었다. 원 밖은 떼기 전에도 날마다 하나 아니면 영이었다. 뗀 뒤에도 그대로였다.

“원 안만 줄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날씨 탓이면 원 밖도 같이 줄어야 합니다.”

클라리사가 표를 제 장부에 옮겨 적었다. 적다가 멈추고 물었다.

“이거 교구장님께 가져갈 거야?”

“아닙니다.”

“왜?”

“이미 경전대로 하셨습니다. 경전대로 해서 줄었습니다. 그걸로 됩니다.”

클라리사는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옳다는 걸 알면서 가져가지 않는 사람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표는 끝까지 옮겨 적었다.

*

열나흘째 저녁, 루엔은 표를 오렐에게 가져갔다. 교구장에게가 아니라.

오렐의 방은 좁았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기도 자리 하나. 기도 자리 옆에 물 대야가 새로 놓여 있었다.

그리고 벽에 쇠 손잡이가 걸려 있었다.

두 손으로 들어야 하는 굵은 쇠였다. 손때가 까맣게 배어 있었다. 사백 년 동안 골목 사람들이 돌린 자리였다. 못 두 개에 가로로 걸려 있었고, 그 아래 종이가 한 장 붙어 있었다.

오렐의 글씨였다.

「정결 기간 끝날 때까지.」

루엔은 표를 내밀었다. 오렐은 끝까지 읽었다. 영이 적힌 칸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축일이 엿새 남았습니다.” 오렐이 말했다. “축일이 지나면 손잡이를 돌려드려야 합니다.”

“압니다.”

“그러면 또—”

“압니다.”

오렐이 벽의 손잡이를 올려다보았다. 종이에 적힌 자기 글씨를 보았다.

「정결 기간 끝날 때까지.」

얼마나 앞에서 시작하라는지 경전에 안 적혀 있었던 것처럼, 언제 끝나는지도 자기 손으로 적은 글씨엔 안 적혀 있었다.

오렐은 그걸 알아챈 얼굴이었다. 루엔도 알아챘다. 둘 다 말하지 않았다.

오렐은 촛불을 켜기 전에 대야에서 손을 씻었다. 스무 박자. 루엔은 세지 않아도 알았다.

그날 밤 루엔은 표 맨 아래에 줄 하나를 더 그었다. 칸은 비워 두었다. 칸 머리에만 적었다. 「축일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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