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열다섯 번째 생일은 마차 안에서 지났다.
봄 방학, 북쪽으로 가는 길이었다. 비가 사흘째 왔다. 마부 쿠노는 가렛의 말을 그대로 지켰다. 비 오면 천천히. 길이 진창이라 어차피 빨리 갈 수도 없었다.
하르트 성에 닿은 날 저녁, 식탁에 파이가 올라왔다. 생일 파이였다. 코넬이 칼을 들었다. 스무 살이 된 형은 이제 칼끝을 오래 재지 않았다. 한 번에 잘랐다. 반듯했다.
“네가 골라.”
루엔은 두 조각을 보았다. 셈할 필요가 없었다.
“같습니다.”
“알아.” 코넬이 먼저 제 쪽을 집었다. “대충 잘랐거든.”
엘리나가 웃었다. 가렛은 창밖의 비를 보고 있었다.
“강이 얼마나 찼느냐.” 가렛이 물었다. 루엔에게가 아니라, 문간에 선 사람에게.
방앗간 주인 토빈이었다.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모자를 벗어 쥔 손이 떨렸다. 추워서가 아니었다.
“기둥 눈금으로 아홉 뼘입니다, 나리. 영점 위로. 해 질 때 쟀습니다. 아침엔 일곱이었습니다.”
식탁이 조용해졌다.
루엔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
방앗간 기둥의 눈금은 세 해 전 여름에 루엔이 새겼다. 토빈에게 날마다 물 높이를 적게 했다. 한 해 동안 적은 값을 고르게 나눠, 강의 보통 높이를 「영점」으로 삼았다. 그 영점에서부터 둑 높이를 정했다.
아버지의 기사들은 그때 웃었다. 한 뼘 높이려고 돈을 두 배 쓰냐고.
둑은 지난가을에 다 쌓았다. 영점 위로 열한 뼘. 옛날 둑보다 두 뼘 반 높았다. 기사들 말대로 돈이 두 배 가까이 들었다.
“아홉이면 둑까지 두 뼘 남았습니다.” 토빈이 말했다.
“하루에 두 뼘씩 오르면 내일이면 넘지 않느냐.” 가렛이 말했다.
“하루에 두 뼘씩 오르지 않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모두 루엔을 보았다.
“물은 들어오는 만큼 오르고 나가는 만큼 내립니다. 위에서 들어오는 물은 비에 달렸습니다. 아래로 빠지는 물은 지금 높이에 달렸습니다. 높을수록 빨리 빠집니다. 그래서 오르는 빠르기는 점점 줄어듭니다. 줄어들다가 들어오는 것과 나가는 것이 같아지는 데서 멈춥니다.”
“어디서 멈추느냐.”
루엔은 대답하지 못했다.
“위에서 비가 얼마나 왔는지 알아야 합니다.”
*
그 밤에 문이 한 번 더 열렸다.
오스윈이었다. 색 바랜 푸른 옷이 젖어 검게 보였다. 흰 머리가 이마에 붙어 있었다. 숲에서 여기까지 빗속을 걸어 내려온 것이었다. 일흔이 넘은 다리로.
“개울 넘칠 해에는 알리기로 했지.” 오스윈이 가렛에게 말했다. 스무 해 전 약속이었다. “올해일세.”
오스윈은 품에서 기름 먹인 천으로 싼 종이 묶음을 꺼냈다. 오두막 말뚝의 기록이었다. 하루 한 금. 스무 해 동안 빠진 날이 없는 기록.
“숲 개울은 이 강보다 이틀 먼저 찬다. 위쪽 골짜기 물이 먼저 내 개울로 오고, 그다음에 강으로 오지.” 오스윈이 한 장을 폈다. “오늘 아침 내 말뚝이 스무 해 가운데 가장 높았네. 어제보다 손가락 세 마디. 그저께보다 일곱 마디.”
루엔은 그 숫자들을 받아 적었다. 손이 빨라졌다.
오스윈의 말뚝은 이틀 먼저 안다. 그 이틀 동안 말뚝이 오른 모양이 강으로 온다. 조금 늦게, 조금 퍼져서, 조금 크게.
루엔은 식탁을 치우고 종이를 폈다. 오스윈이 맞은편에 앉았다. 스승과 제자가 한 식탁에서 셈을 한 건 여러 해 만이었다.
오스윈이 먼저 말했다.
“바닷가에서 둑 일을 할 때 이런 셈을 눈대중으로 했지. 물이 이틀 뒤 어디까지 올지. 반은 맞았네.”
“반은 부정확합니다.”
“알아.” 오스윈의 물빛 눈이 웃었다. “그래서 자네가 여기 있지.”
*
셈은 새벽까지 갔다.
위에서 들어오는 물은 오스윈의 말뚝이 알려 주었다. 나가는 물은 강폭과 기둥 눈금으로 셈했다. 오르는 빠르기가 지금 높이에 달려 있으니, 한 시간씩 끊어서 한 칸씩. 천 방패에서 칸마다 열을 넘기던 그 셈이었다. 이번엔 칸마다 물이었다.
토빈이 한 시간마다 방앗간에 가서 눈금을 읽고 돌아왔다. 루엔은 셈한 값과 읽은 값을 나란히 적었다. 처음 세 번은 반 뼘씩 어긋났다. 강폭을 다시 넣었다. 네 번째부터 손가락 한 마디 안으로 맞았다.
새벽, 창밖이 잿빛으로 밝을 무렵 루엔이 펜을 놓았다.
“둑에서는 열 뼘에서 멈춥니다. 모레 해 뜰 무렵. 둑 꼭대기는 열하나입니다.”
가렛이 숨을 내쉬었다. 기사장이 어깨를 폈다.
“그런데 강 건너 새 마을은 다릅니다.”
새 마을. 두 해 전 잿빛열이 돌았던 곳. 이웃 영지에서 옮겨 온 농민들이 강 건너 낮은 땅에 지은 마을. 둑이 없었다.
“새 마을 문턱은 영점 위 여덟 뼘 반입니다. 물은 오늘 해 지고 두 시간쯤 뒤에 거기 닿습니다. 밤에 닿습니다.”
식탁이 다시 조용해졌다.
“해 지기 전에 다 나와야 합니다. 서른네 집. 백쉰여섯 명. 수레가 필요합니다.”
*
알릴 길이 문제였다.
새 마을은 강 건너였다. 다리는 이미 물에 잠겨 걸어서는 건널 수 없었다. 나룻배는 이 물살에 못 떴다. 강 하류 방앗간 쪽 망루에서 새 마을이 보였다. 성 북쪽 망루에서 방앗간 망루가 보였다. 세 해 전 루엔이 세운 거울 신호 길이었다.
거울 신호는 해가 있어야 했다.
비가 왔다.
루엔은 북쪽 망루 꼭대기에서 거울을 든 채 하늘을 보았다. 구름이 낮았다. 두꺼웠다. 해가 어디쯤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코넬이 계단을 올라왔다.
“말 타고 방앗간까지 가서 소리 지르면 안 돼?”
“강 너비가 이백 걸음 넘습니다. 물소리 때문에 안 들립니다.”
“그럼 기다려?”
“기다립니다.”
코넬은 망루 난간에 기대 비를 맞았다. 가지 않았다.
모래시계를 한 번 뒤집었다. 두 번.
세 번째 모래가 반쯤 떨어졌을 때, 서쪽 구름이 얇아졌다. 잿빛이 흰빛이 되었다. 그리고 한순간, 구멍이 났다.
해였다.
루엔은 거울을 들었다. 방앗간 망루로. 짧게, 길게, 짧게. 세 해 전 형과 정한 셈이었다. 「새 마을. 해 지기 전. 전부 나와라.」
방앗간 망루에서 빛이 돌아왔다. 받았다는 빛.
그리고 방앗간 망루에서 새 마을 쪽으로 빛이 갔다. 새 마을 교회 종탑에 거울을 든 사람이 하나 있었다. 두 해 전 잿빛열 때 루엔이 거울을 맡긴 사람이었다.
구름이 다시 닫혔다. 해가 나 있던 건 모래시계 반 번도 안 되었다.
코넬이 난간에서 몸을 떼었다.
“… 대충 됐냐.”
“다 됐습니다.”
*
새 마을 사람들은 강 위쪽 얕은 여울로 건너왔다. 수레 여섯 대. 가렛이 기사들과 말을 끌고 여울 이쪽에서 받았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여울 둑길이 미끄러웠다.
가렛이 맨 앞 수레의 고삐를 잡았다. 수레엔 노인과 아이들이 탔다. 가렛은 말을 채찍질하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기사들이 뒤에서 「나리, 해 떨어집니다」 하고 외쳤다.
“비 오면 천천히.” 가렛이 말했다. 돌아보지 않고.
수레는 천천히 왔다. 한 대도 미끄러지지 않았다.
성 마당에서 펠릭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산수 교실 아이들 열두 명과 함께. 아이들 손에 종이가 한 장씩 들려 있었다. 새 마을 집 번호 명부였다. 루엔이 두 해 전 넓혀 둔 그 명부.
“일번 집!” 아이 하나가 외쳤다. “다섯 명!”
수레에서 내린 가족이 손을 들었다. 아이가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됐어요!” 명부에 표시했다.
“이번 집! 세 명!”
펠릭스는 뒤에서 아이들이 읽는 걸 듣기만 했다. 한 번도 끼어들지 않았다. 아이들 가운데 몇은 몇 해 전까지 제 이름도 못 쓰던 아이들이었다.
“칠번 집!” 여자아이가 외쳤다. 그리고 문패 이름을 덧붙였다. “여섯 다음 집! 네 명!”
넷이 내렸다. 넷.
해 질 무렵, 마지막 아이가 명부를 들고 펠릭스에게 달려왔다.
“서른네 집, 백쉰여섯 명. 다 왔어요. 하나도 안 빠졌어요.”
펠릭스가 아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루엔을 보았다. 루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셈할 게 없었다. 아이가 이미 셈했다.
*
물은 그 밤 새 마을 문턱을 넘었다. 해 지고 두 시간이 조금 안 되어서였다. 루엔의 셈보다 모래시계 반 번 빨랐다. 루엔은 그것도 적었다.
이튿날 아침, 남쪽 이웃 로센령에서 사람이 말을 달려왔다. 로센 둑이 넘었다고. 옛날 가장 큰 물 자국보다 한 뼘 높게 쌓은 둑이었다. 그 물 자국이 어디서부터 잰 한 뼘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모레 해 뜰 무렵, 하르트 둑 위에 사람들이 서 있었다.
물이 올라왔다. 누런 물이 둑 안쪽 돌을 한 켜씩 삼켰다. 여덟 뼘. 아홉 뼘. 기사들이 숨을 죽였다. 아홉 뼘 반.
열 뼘.
물이 멈췄다.
오르지도, 내리지도 않았다. 둑 꼭대기에서 한 뼘 아래. 물결이 돌 틈을 핥았다가 물러났다. 다시 핥았다. 넘지 않았다.
기사장이 제일 먼저 웃었다. 세 해 전 「한 뼘 높이려고 돈을 두 배」라고 했던 그 기사장이었다.
오스윈은 둑 위에서 웃지 않았다. 물이 멈춘 자리를 오래 보았다. 바닷가 어딘가의 둑을 보는 눈이었다. 루엔은 묻지 않았다.
숲으로 돌아가기 전에 오스윈이 접은 종이 한 장을 루엔 손에 쥐여 주었다. 겨울 편지의 답이었다. 영창책 셋째 장에 대해 두 줄. 그리고 맨 아래 한 줄.
「이졸드에게 전할 말은 없네. 아직 물을 잰다고만 해 두게.」
*
물이 빠지기 시작한 저녁, 토빈이 루엔을 방앗간 기둥 앞으로 불렀다.
토빈은 한참 기둥의 눈금을 보다가 말했다.
“도련님. 고백할 게 있습니다.”
“예.”
“첫해에요. 기록 맡은 첫해. 봄에 세 달을 빼먹었습니다. 딸내미 혼사 치르고, 무릎도 도지고. 나중에 몰아서 적었습니다. 대충. 앞뒤 날짜 보고 그럴듯하게.”
루엔은 알고 있었다. 첫해 여름 방학에 기록을 보다가 봄 석 달의 숫자가 너무 고르다는 걸 알아챘다. 강은 그렇게 고르게 오르내리지 않았다. 그래서 한 해를 다시 재자고 했다. 토빈은 그때 이유를 묻지 않았다. 투덜거리며 한 해를 더 적었다.
“압니다.” 루엔이 말했다.
토빈이 고개를 들었다.
“그 석 달은 봄 큰물 때였습니다. 빼먹은 자리를 대충 채우신 숫자로 셈했다면, 가장 높은 물이 실제보다 한 뼘 반 낮게 나왔습니다. 둑도 그만큼 낮게 쌓았을 겁니다.”
토빈은 기둥을 보았다. 한 뼘 아래에서 멈춘 물이 남긴 젖은 자국을.
“그럼… 그 다시 잰 한 해가.” 토빈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 한 뼘이었냐.”
“예.”
토빈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허리춤에서 작은 칼을 꺼냈다. 기둥의 눈금 옆, 어제 물이 멈춘 자리 바로 옆에 무언가를 새기기 시작했다. 느렸다. 글자를 새기는 데 익숙한 손이 아니었다.
토빈. 그리고 해.
“이건 제 이름입니다. 다시 잰 한 해 몫이요.”
루엔은 그 글자를 보았다. 삐뚤었다. 한 획이 넘쳤다. 고치라고 하지 않았다.
지도는 너무 많은 걸 그리고 있었다.막료 천막 벽에 걸린 베스트리아 동부 지도였다. 황색탑 측량사들이 그린 것. 산은 산 모양으로, 숲은 나무 모양으로, 강은 굽이굽이 그대로. 마을마다 교회 첨탑이 그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지도였다.그런데 루엔이 알고 싶은 건 하나였다. 어디가 끊기면 안 되는가.산 모양도, 나무 모양도, 강 굽이도 그걸 가리고 있었다.루엔은 새 종이를 폈다. 그리고 점을 찍었다.본진. 창고 마을. 왕도. 여섯 영지의 곡식 창고. 역참 열두 곳. 여울 셋. 모두 점 하나씩.그다음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그었다. 수레가 다니는 길이면 선 하나. 다리가 있으면 선 위에 짧은 가로줄. 거리도 산 높이도 그리지 않았다. 이어져 있는지 아닌지만.마흔한 개의 점과 예순 개 남짓의 선이 남았다.테오가 어깨 너머로 보았다.“이게 지도야? 거미줄 같은데.”“지도에서 필요 없는 걸 다 뺀 겁니다.”“뭐가 필요 없는데.”“어디로 이어졌는지 빼고 전부 다.”*루엔은 선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렸다.선 하나를 가리고, 본진에서 출발해 점을 따라가 보았다. 모든 점에 닿으면, 그 선은 끊겨도 괜찮은 선이었다.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닿지 못하는 점이 생기면, 그 선은 끊기면 안 되는 선이었다.예순 번을 가렸다.대부분은 괜찮았다.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하나를 끊으면 옆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멀어지긴 했지만 닿았다.세 선만 달랐다.메를 강 중류의 돌다리. 창고 마을로 들어가는 지류 위 나무다리. 그리고 왕도 동쪽 문 밖, 늪 사이로 난 둑길 위 다리.셋 중 하나만 끊겨도 점들이 두 덩이로 갈라졌다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