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
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
“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
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
“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
“몇이오.”
“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
*
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
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
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
셌다.
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
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
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
“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
“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
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 굳었다. 금을 긋는 손이 조금씩 늦어졌다. 테오가 말없이 밀랍판을 넘겨받았다. 루엔은 세고, 테오는 그었다. 루엔이 「하나」라고 말할 때마다 테오 손이 한 번 움직였다. 한 시간이 차면 루엔이 「묶음」이라 했고, 테오가 금 다섯 개마다 비껴 긋던 것을 멈추고 줄을 바꿨다.
적 파이어볼 하나가 선 앞 스무 걸음에 떨어졌다. 흙이 둔덕까지 튀었다. 테오의 손이 한 번 떨렸다. 금이 비뚤게 그어졌다.
“지금 건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루엔이 물었다.
“하나. 손이 떨려서 길게 그어진 거야.”
“그럼 옆에 점을 찍어 두십시오. 나중에 헷갈리지 않게.”
테오가 점을 찍었다. 그러고는 웃었다. 떨리는 웃음이었다.
“너랑 여섯 해 살았더니, 불덩이가 날아오는데 점 찍을 생각을 하네.”
*
그 밤, 막료 천막에서 루엔은 밀랍판을 폈다.
레오폴트가 등불을 가까이 댔다. 기사단장들도 모여들었다. 붉은 수염도 있었다.
“적은 마흔한 명. 첫날 삼백열두 발. 한 사람이 일곱 발 반.” 루엔이 말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이 부은 마나 가운데 불이 되는 건 두 할뿐입니다. 여덟 할은 번쩍임과 소리로 샙니다. 그러니 한 발에 드는 마나가 우리 셈보다 다섯 배 큽니다.”
“그래서.”
“그래서 빨리 바닥납니다. 그릇이 가득일 때 한 사람이 쏠 수 있는 게 여덟 발쯤입니다. 오늘 일곱 발 반을 쐈습니다. 거의 다 쓴 겁니다.”
붉은 수염이 코웃음을 쳤다. “자고 나면 또 차지 않소.”
“찹니다. 그런데 하룻밤에 다 차지 않습니다.”
루엔은 셀빈과 오스윈에게 들은 것을 떠올렸다. 그릇은 쉬면 찬다. 하룻밤 푹 자면 삼분의 일쯤. 탑에서 스무 해 가르친 사람도, 떠돌며 마법을 판 사람도 같은 말을 했다. 그 말은 루엔이 따로 셀 수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따로 같은 숫자를 댔다.
“밤낮을 나눠 교대로 쏘면 다릅니다. 반은 쏘고 반은 쉬면 오래 갑니다. 그런데 오늘 저 사람들은 교대를 안 했습니다. 번쩍임이 시간마다 고르게 나왔습니다. 마흔한 자리가 전부 쉬지 않고 쐈습니다.”
레오폴트가 턱을 괴었다.
“그럼 내일은.”
“내일 아침엔 어젯밤에 찬 만큼 쏩니다. 이백 발 안팎. 낮이 기울면 줄어듭니다. 사흘째엔 아침에 백 발 남짓, 그리고—”
루엔은 밀랍판 끝에 선을 그었다.
“사흘째 낮 여덟째 시간쯤, 바닥납니다.”
천막 안이 조용해졌다.
“쯤이라고 했나.” 레오폴트가 물었다.
“예. 쯤입니다. 한 시간 앞뒤로 틀릴 수 있습니다. 내일 밤에 한 번 더 셈해서 좁히겠습니다.”
붉은 수염이 뭐라 하려다 멈췄다. 그는 루엔이 「쯤」이라는 말을 싫어한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스스로 「쯤」이라 하는 건, 정말 거기까지밖에 모른다는 뜻이었다.
*
둘째 날 번쩍임은 백아흔여덟 번이었다.
아침엔 서른, 서른하나. 한낮이 지나자 스물, 열여섯. 해 질 녘엔 한 시간에 아홉.
그 밤 루엔은 다시 셈했다. 선이 조금 앞당겨졌다.
“사흘째 낮 일곱째 시간과 여덟째 시간 사이.”
레오폴트가 일어섰다.
“기병은 일곱째 시간에 말에 오른다. 번쩍임이 멎으면 루엔이 신호한다. 신호가 없으면 아무도 강을 건너지 않는다.”
*
둘째 날 한낮, 여울을 두고 싸움이 거셌다.
북쪽 여울 물 긷는 자리가 적 화살에 닿았다. 물 수레가 반만 돌아왔다. 병참관이 얼굴이 하얘져 천막에 왔다.
“물이 모자라오. 오늘 밤 병사 하나에 얼마나 나눠야 할지 모르겠소. 국자가 다 제각각이라.”
루엔은 허리에서 쇠잔을 풀었다.
아버지가 여섯 살 가을 밤에 두드려 준 작은 잔이었다. 겉엔 고르지 않은 망치 자국, 안은 매끈했다. 베르타의 한 줌 그릇 딱 반. 루엔은 그 잔으로 국자 열두 개를 하나씩 쟀다. 국자마다 잔 몇 개가 드는지 숯으로 손잡이에 적었다. 셋, 셋 반, 넷, 둘 반.
“병사 하나에 오늘 밤은 잔 열둘. 국자 손잡이 숫자대로 나누십시오. 셋짜리 국자면 네 번, 넷짜리면 세 번.”
병참관이 국자를 받아 들고 숫자를 보았다. 숯 글씨로 적힌 둥근 셋, 꺾인 넷. 루엔 글자였다. 병참관은 그 글자를 읽을 줄 알았다. 하르트 서기들이 오기 전에 먼저 배워 둔 사람이었다.
천막 입구에서 코넬이 들어오다 멈췄다. 루엔 손에 든 쇠잔을 보았다.
“그 잔 아직 있냐.”
“매일 씁니다.”
코넬이 잠깐 말이 없었다. 여울에서 싸우다 온 얼굴이었다. 뺨에 흙이 묻어 있었다.
“아버지가 그거 두드릴 때 엄지 다친 거 알지.”
“압니다.”
“한 달 동안 칼을 왼손으로 드셨어.” 코넬이 잔을 손가락으로 톡 쳤다. 텅, 하고 작은 소리가 났다. “전쟁 끝나면 말씀드려. 이걸로 물 나눴다고.”
“적어 두겠습니다.”
“적지 말고 말해.”
코넬은 물 한 국자를 받아 마시고 다시 여울 쪽으로 나갔다.
*
사흘째 아침, 번쩍임은 한 시간에 열다섯이었다.
넷째 시간에 열하나. 다섯째 시간에 일곱. 여섯째 시간에 넷.
일곱째 시간이 되자 기병이 말에 올랐다. 하르트 기사 열둘도 그 안에 있었다. 둔덕 아래 참나무 숲 뒤에서 말들이 발을 굴렀다.
일곱째 시간에 번쩍임 둘.
루엔은 강 건너 둑을 보았다. 붉은 망토들이 둑 위에 서 있었다. 몇은 손을 들었다. 영창 소리가 바람에 실려 희미하게 건너왔다. 긴 영창이었다. 스물세 마디, 서른 마디.
빛이 나지 않았다.
영창이 끝났는데 불이 없었다. 붉은 망토 하나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하나가 다시 영창을 시작했다. 중간에 멈췄다.
“지금입니다.”
루엔이 깃발을 올렸다.
기병이 숲 뒤에서 쏟아져 나왔다. 여울을 건넜다. 물보라가 햇빛에 부서졌다. 적 보병이 둑 위로 모였다. 창을 세웠다. 불이 올 줄 알고 방패를 등 뒤로 돌려 둔 채였다. 불은 오지 않았다. 그들 뒤에 선 붉은 망토들은 손만 들고 있었다.
한 발이 있었다.
둑 끝 느릅나무 아래에서 붉은빛이 번쩍했다. 루엔이 셌다. 하나. 파이어볼 하나가 기병 대열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말 두 마리가 쓰러졌다. 그 옆에서 말을 몰던 사람의 까만 머리가 보였다.
루엔은 숨을 멈췄다.
연기가 걷혔다. 코넬이 쓰러진 말에서 뛰어내려 옆 기사의 말 뒤에 올라타고 있었다. 투구가 없었다. 뺨이 그을렸다. 그러나 두 팔로 칼을 들고 있었다.
루엔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밀랍판에 적었다. 「일곱째 시간 끝. 느릅나무. 한 발. 교대 안 한 사람 가운데 하나는 아껴 두었음.」
모두가 같은 셈으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마흔한 사람 가운데 하나는, 마지막 한 발을 남겨 둘 줄 알았다. 루엔은 그 사람의 자리를 지도에 따로 찍었다.
싸움은 한 시간이 안 걸렸다.
해가 기울 무렵 마르케스군은 둑을 버리고 링겐 고개 쪽으로 물러났다. 붉은 천막 스무 채가 그대로 남았다. 버려진 천막 안에 마나석 부스러기 한 줌과 빈 물통이 굴러다녔다.
그 밤 레오폴트가 막료 천막에 들렀다. 갑옷을 반쯤 벗은 채였다.
“쯤이 맞았군.”
“반 시간 틀렸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일곱째와 여덟째 사이라고 했는데, 일곱째 시간 한가운데서 멎었습니다. 둘째 날 밤에 적이 덜 잔 것 같습니다. 겁이 나서.”
“겁도 셈에 넣나.”
“다음엔 넣겠습니다.”
레오폴트는 반쯤 없는 귀를 긁고 나갔다.
*
이튿날, 루엔은 붉은 수염과 함께 적이 버린 진지를 걸었다.
강가에 구덩이가 없었다. 천막 뒤, 물 긷던 자리 바로 아래 모래톱에 오물이 널려 있었다. 파리가 들끓었다. 버려진 천막 몇 곳에서는 앓는 사람이 누웠던 거적이 나왔다. 거적마다 설사 자국이 있었다.
잡힌 포로들 가운데 셋에 하나가 설사를 했다. 사흘째 오후 둑 위에서 창을 든 병사 가운데 반은 서 있기도 힘들었다고 했다.
붉은 수염은 오물 널린 모래톱을 한참 보았다. 그리고 아군 진지 쪽을 돌아보았다. 남쪽 둔덕 뒤, 흙과 재로 덮인 구덩이 줄.
“한 달이 안 됐는데.”
“스무엿새입니다.”
붉은 수염은 투구를 벗어 옆구리에 꼈다. 루엔 쪽을 보지 않고 말했다.
“우리 쪽은 몇이오. 앓는 자.”
“어제 저녁 기준 스물아홉입니다. 이만 가운데.”
붉은 수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모래톱으로 내려가, 자기 기사들에게 적 진지 오물을 태우라고 외쳤다. 강 위쪽이 아니라 아래쪽에서. 바람을 등지고.
지도는 너무 많은 걸 그리고 있었다.막료 천막 벽에 걸린 베스트리아 동부 지도였다. 황색탑 측량사들이 그린 것. 산은 산 모양으로, 숲은 나무 모양으로, 강은 굽이굽이 그대로. 마을마다 교회 첨탑이 그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지도였다.그런데 루엔이 알고 싶은 건 하나였다. 어디가 끊기면 안 되는가.산 모양도, 나무 모양도, 강 굽이도 그걸 가리고 있었다.루엔은 새 종이를 폈다. 그리고 점을 찍었다.본진. 창고 마을. 왕도. 여섯 영지의 곡식 창고. 역참 열두 곳. 여울 셋. 모두 점 하나씩.그다음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그었다. 수레가 다니는 길이면 선 하나. 다리가 있으면 선 위에 짧은 가로줄. 거리도 산 높이도 그리지 않았다. 이어져 있는지 아닌지만.마흔한 개의 점과 예순 개 남짓의 선이 남았다.테오가 어깨 너머로 보았다.“이게 지도야? 거미줄 같은데.”“지도에서 필요 없는 걸 다 뺀 겁니다.”“뭐가 필요 없는데.”“어디로 이어졌는지 빼고 전부 다.”*루엔은 선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렸다.선 하나를 가리고, 본진에서 출발해 점을 따라가 보았다. 모든 점에 닿으면, 그 선은 끊겨도 괜찮은 선이었다.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닿지 못하는 점이 생기면, 그 선은 끊기면 안 되는 선이었다.예순 번을 가렸다.대부분은 괜찮았다.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하나를 끊으면 옆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멀어지긴 했지만 닿았다.세 선만 달랐다.메를 강 중류의 돌다리. 창고 마을로 들어가는 지류 위 나무다리. 그리고 왕도 동쪽 문 밖, 늪 사이로 난 둑길 위 다리.셋 중 하나만 끊겨도 점들이 두 덩이로 갈라졌다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