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
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
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
「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
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
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
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
넷이어야 했다.
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
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
“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
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
“끝자리가 안 맞습니다.”
“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
“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
“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군 명령을 막겠다는 거냐.”
요스트는 절룩이는 다리로 71번 창고 문 앞으로 걸어가 섰다. 문에 붉은 끈이 둘러져 있었다. 그는 끈을 손으로 짚었다.
“나리. 저는 글을 늦게 배웠습니다. 마흔 넘어서요. 그때 도련님이 번호 옆에 꼬리를 달라고 하셔서 욕을 많이 했습니다. 다섯 해 동안 꼬리가 맞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한 번도 없던 게 오늘 생겼으면, 오늘은 뭔가 있는 겁니다.”
“만약 아무것도 없으면.”
“그럼 제가 반나절 늦게 한 죄로 매를 맞겠습니다.”
기사는 한참 요스트를 내려다보았다. 창고지기가 기사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건 드문 일이었다. 기사는 결국 말 머리를 돌렸다. 수레는 창고 마당에 세워 둔 채였다.
“반나절이다. 반나절 뒤에도 안 열면 내가 부순다.”
*
루엔은 한낮에 그 종이를 받았다.
종이를 펴는 순간 번호를 보았다. 끝자리를 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레오폴트 천막으로 갔다.
장군의 명령 원본은 서기 궤짝에 있었다. 루엔이 꺼내 펼쳤다.
「17번 창고.」 그 옆에 「17-9」.
한 번 둘을 곱하면 둘, 일곱을 더하면 아홉. 열하나보다 작으니 그대로 아홉.
“중간 역참에서 옮겨 적은 사람이 앞뒤를 바꿨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열일곱을 일흔하나로. 끝자리 아홉은 그대로 옮겼습니다. 번호만 뒤집고.”
레오폴트가 두 종이를 나란히 놓고 보았다.
“71번에는 뭐가 있나.”
루엔은 창고 장부를 넘겼다. 71번 칸에는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로센령에서 온 호밀 이백열 자루. 보라색 뿔 돋은 알 섞임. 잠가 둘 것. 태울 것.」
천막 안이 조용해졌다.
보라색 뿔이 돋은 호밀. 그걸로 빵을 구워 먹으면 손발이 불에 덴 듯 타들어 가는 병이 났다. 이 세계 사람들은 그걸 「타는 병」이라 불렀다. 신의 벌이라고도 했다. 알이 섞인 줄 모르고 먹은 마을이 통째로 앓은 기록이 여러 번 있었다. 로센령에서 보낸 호밀 가운데 한 수레가 그랬다. 창고에 들일 때 요스트가 알을 한 줌씩 펴 보고 찾아냈다. 불태우려고 날짜를 받아 둔 참이었다.
“이백 자루면.” 레오폴트가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본진 빵 굽는 곳에서 하루에 쓰는 게 이백 자루입니다. 병사 이만이 하루 먹는 빵입니다.”
장군은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반쯤 없는 귀를 긁지 않고, 손바닥으로 탁자를 한 번 짚었다.
“옮겨 적은 놈은.”
“글을 읽을 줄 아는 병사였습니다. 밤새 말을 달려 와서 졸면서 옮겼을 겁니다. 벌 줄 일이면 제가 먼저 받아야 합니다. 옮겨 적는 자리에서 한 번 더 셈해 보라는 규칙을 안 넣었습니다.”
“그 규칙을 넣으면.”
“오늘 같은 건 중간 역참에서 걸립니다. 창고까지 안 갑니다.”
레오폴트는 그 자리에서 새 명령서를 썼다. 「17번. 17-9.」 루엔이 끝자리를 한 번 더 셈했다. 전령이 말을 달렸다.
반나절이 되기 조금 전에 창고 마을에 닿았다고, 저녁에 돌아온 전령이 전했다. 보급 기사는 도끼를 들고 71번 문 앞에 서 있었다고 했다. 요스트는 그 앞에서 여전히 끈을 짚고 있었다고.
*
그날 오후 루엔은 역참마다 보낼 짧은 규칙을 적었다.
「번호를 옮겨 적은 사람은, 적은 뒤 끝자리를 스스로 셈해 본다. 안 맞으면 보내지 않는다.」
규칙 밑에 셈하는 법을 그림으로 그렸다. 첫 자리 곱하기 둘, 더하기 다음 자리, 열하나로 나눈 나머지. 셈판이 없어도 손가락으로 할 수 있었다.
테오가 옆에서 그림을 보며 물었다.
“그냥 두 자리를 더하면 안 돼? 일에 칠, 여덟. 그게 더 쉽잖아.”
“칠에 일을 더해도 여덟입니다.”
테오가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열일곱이든 일흔하나든 더하면 같았다. 뒤집힌 걸 못 잡았다.
“그래서 앞자리에 둘을 곱하는구나. 자리마다 무게가 다르게.”
“예. 자리가 바뀌면 무게가 바뀝니다. 무게가 바뀌면 나머지가 바뀝니다.”
“이거 언제 만든 거야.”
“열두 살 여름, 학교 첫 방학에 영지 창고에 붙였습니다.”
그때 다들 불평했다. 번호가 길어졌다고. 적기 귀찮다고. 요스트도 그랬다. 창고 문마다 번호 옆에 작은 글자를 하나 더 새기며 「도련님 번호는 꼬리가 달렸다」고 투덜거렸다. 다섯 해 동안 그 꼬리가 한 번도 쓸모 있었던 적이 없었다.
오늘까지는.
*
그 저녁, 본진 서기 천막은 등불이 꺼지지 않았다.
첫 싸움에서 이긴 뒤 레오폴트는 겨울을 날 셈을 청했다. 여섯 영지에서 온 곡식, 말먹이, 화살, 소금, 천막 천. 영지마다 보낸 장부를 합쳐 「이 겨울에 몇 날을 버티나」를 내라는 것이었다.
장부 여섯 권이 탁자 위에 놓였다.
다섯 권은 옛 셈이었다. 「보리 스물세 말 하고 반의 반, 되 셋 하고 되의 삼분의 일」. 영지마다 말과 되의 크기가 달랐다. 로센령의 말은 하르트령의 말보다 컸다. 동쪽 영지는 반의반 대신 여섯 조각으로 나눠 적었다. 서기들이 셈판을 놓고 영지마다 말을 맞추는 표부터 만들어야 했다.
한 권은 달랐다.
하르트령 장부. 모든 무게와 부피가 하르트 되와 하르트 근으로, 숫자 사이에 점을 찍은 수로 적혀 있었다. 「보리 이백삼십사 점 칠 되.」 반의 반도, 삼분의 일도 없었다.
하르트령에서 온 서기 다섯이 그 장부 앞에 앉았다. 가장 나이 든 사람이 스물여섯, 가장 어린 사람이 열아홉이었다. 모두 노르벡 산수 교실 출신이었다.
그들은 다섯 영지의 옛 셈을 먼저 하르트 되로 바꿨다. 영지마다 말 하나가 하르트 되로 몇 되인지는 해마다 견주는 날 재어 둔 표가 있었다. 바꾼 다음엔 점 찍은 수끼리 더하면 되었다. 자리만 맞추면 셈판이 필요 없었다.
다른 영지 서기들은 처음엔 곁눈질을 했다. 하르트 서기들이 셈판도 없이 종이에 숫자를 줄지어 적는 게 이상해 보였다. 그러다 한 사람이 제 셈판을 들고 와 옆에 앉았다. 둘째 사람이 왔다. 셋째 사람은 셈판을 두고 왔다.
한밤이 조금 지나서, 하르트 서기 가운데 가장 나이 든 사람이 붓을 내려놓았다.
“끝났습니다.”
병참관이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장부를 들여다보았다. 여섯 영지를 합친 겨울 셈. 곡식은 백일흔 날, 말먹이는 아흔 날, 소금은 백열 날. 화살은 날로 셀 수 없어 다발로 적혀 있었다.
“로센령 서기들은 사흘 걸린다고 했는데.”
“로센령 말 크기로 셈했으면 사흘 걸립니다.” 서기가 말했다. “우리는 하르트 되로 바꾸는 데 시간을 다 썼습니다. 바꾼 다음은 더하기뿐이었습니다.”
병참관은 장부 끝 숫자 옆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거기에도 꼬리가 달려 있었다. 합계마다 끝자리 검사 숫자.
“이것도 셈했소?”
“셈했습니다. 다 맞습니다.”
병참관이 헛웃음을 쳤다. 그리고 루엔을 돌아보았다.
“그때 번호에 꼬리 달라던 게, 점 하나 찍으라던 게, 이거였소?”
“예.”
“영지에서 다들 욕했겠소.”
“많이 했습니다.”
*
하르트 서기들은 편지 한 통을 가지고 왔다.
접은 종이에 익숙한 글씨가 있었다. 긴 손가락으로 쓴, 여덟을 적을 때마다 위쪽 동그라미가 자꾸 커지는 글씨. 펠릭스 온이었다.
「루엔 도련님께.」
「서기 다섯을 보냅니다. 산수 교실 첫 기수 셋, 둘째 기수 둘. 떠나기 전날 밤 영지 창고 장부 전부의 끝자리를 다시 셈했습니다. 다섯이 따로 셈해서 맞대었습니다. 끝자리까지 맞췄음.」
「삼 할쯤 자랑스러움.」
「펠릭스.」
루엔은 편지를 두 번 읽었다. 그리고 등불 아래서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선생님께.」
「서기 다섯이 오늘 밤 여섯 영지 겨울 셈을 한밤에 끝냈습니다. 다른 영지는 사흘을 셈했습니다. 창고 번호 꼬리 덕에 병사 이만이 하루치 빵을 무사히 먹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삼 할은 부정확합니다.」
루엔은 거기서 펜을 멈췄다.
한참 그 줄을 보았다. 펠릭스가 삼 할이라고 쓴 건, 셈이 틀려서가 아니었다. 루엔이 네 살 겨울 모래에 동그라미를 그리던 날부터 열세 해. 그 열세 해를 한 줄에 담으려다 숫자가 모자랐던 거였다.
루엔은 그 줄을 칼끝으로 긁어 지웠다. 종이가 조금 얇아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다시 적었다.
「저도 그쯤입니다.」
루엔은 그 「쯤」을 한참 보았다. 고치지 않았다. 편지를 접어 서기 손에 들려 보냈다.
테오가 등불 너머에서 그걸 다 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이튿날 아침, 서기 천막 앞에서 하르트 서기들에게 몰래 물었다.
“너희 도련님, 원래 편지에 쯤이라고 쓰시냐?”
“처음 봤습니다.” 가장 어린 서기가 말했다. “영지에 소문나겠네요.”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
첫 불은 해가 진 직후에 왔다.강 건너 둑 위에서 붉은빛이 번쩍했다. 한 점. 그리고 둘, 셋. 빛이 먼저 오고, 한참 뒤에 소리가 왔다. 쿵. 둔덕 아래 밭에서 흙이 치솟았다. 불붙은 짚단이 사방으로 튀었다.“파이어볼이다!”앞줄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엎드렸다. 기사들이 말을 돌렸다. 둔덕 위 막료 자리에서 루엔은 엎드리지 않았다. 강 건너를 보고 있었다.번쩍.루엔은 셌다. 하나, 둘.쿵.“둘.” 루엔이 말했다. “구백 걸음 남짓.”옆에 엎드린 테오가 고개만 들었다. “뭐가?”“저 불을 쏜 사람까지.”*소리는 빛보다 느리다. 빛은 보는 즉시 오지만, 소리는 하나를 세는 동안 사백오십 걸음쯤을 온다. 루엔 걸음으로. 루엔은 이 셈을 요람에 누워 있을 때부터 했다. 번개가 치면 천둥까지 셌다.속으로는 다른 숫자가 함께 돌았다. 1초에 343미터. 이 세계에서는 쓸 데가 없는 숫자였다. 쓸 데가 있는 건 걸음이었다.적 마법사는 쏠 때마다 번쩍였다. 마나의 여덟 할이 빛과 소리와 열로 샜다. 이 세계에서 그걸 「마나의 위엄」이라 불렀다. 위엄은 멀리서도 보였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셀 수 있었다.다만 한 사람이 세면 거리만 나왔다. 어느 쪽인지는 나오지 않았다.“테오. 둔덕 왼쪽 끝 참나무로 가십시오. 번쩍이면 세어서 적으십시오. 코넬 형은 오른쪽 끝 방앗간 터로.”“나도 세?” 코넬이 방패 밑에서 말했다.“형은 번개 셀 줄 압니다. 어릴 때 제가 가르쳤습니다.”“대충 기억나.”“대충이면 충분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