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
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
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
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
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
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
“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
“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
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
*
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
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번에 섞어, 적 안개를 앞 참호 앞에서 멈춰 세우고 식혀 비로 떨어뜨리는 술식. 불 셋에 물 하나, 이런 식으로 어림하는 건 누구나 했다. 적색탑도 그렇게 했다. 어림하니 번쩍였고, 번쩍이니 샜다.
셋을 섞는 술식은 여섯째 고리가 있어야 했다.
루엔은 다섯째였다.
“참호를 비우면 안 되나.” 기사단장 하나가 말했다. “새벽마다 뒤로 물렸다가 해 뜨면 돌아오면.”
“안개 뒤에 적 보병이 붙어 옵니다.” 레오폴트가 먼저 답했다. “어제 새벽 김 걷힐 때 성채 쪽 창끝이 보였다. 비우면 들어앉는다. 저쪽도 그걸 바란다.”
지켜야 했다. 지키면 데었다. 루엔은 그 사이에서 날짜를 셌다.
열여덟 살이 되는 날은 닷새 뒤였다. 눈 녹기 전, 이른 봄의 첫머리.
그 닷새 동안 루엔은 다섯째 고리로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불만 따로, 물만 따로, 바람만 따로. 한 가지씩은 다섯째 고리로도 걸 수 있었다. 한 가지씩 걸어 그 값을 재 두면, 여섯째 고리를 쌓는 날 셋을 한꺼번에 섞을 수 있었다.
*
생일 아침, 루엔은 참호 뒤 빈 천막에 혼자 앉았다.
테오가 천막 밖을 지켰다. 코넬이 자기도 지키겠다고 왔다가 테오 옆에 쪼그려 앉아 눈을 뭉쳤다.
루엔은 눈을 감았다. 가슴 둘레의 고리 다섯이 느껴졌다. 여섯 살 겨울 첫 고리를 쌓은 뒤로, 고리는 그릇 둘레를 따라 하나씩 겹쳐 올라갔다. 그릇은 커지지 않았다. 열한 살 때도, 열네 살 때도, 열여섯 살 때도 같은 반의 가장 작은 그릇이었다. 고리를 쌓을 때마다 루엔은 그 작은 그릇을 가장 적게 흘리며 돌리는 길을 셈했다.
여섯째 고리는 다섯째 고리 바깥이 아니라 안쪽을 가로질렀다. 탑에서는 그걸 「꺾인 고리」라 불렀다. 앞의 다섯이 평평하게 겹친다면, 여섯째는 비스듬히 기울어 앞의 고리들을 묶었다. 기울기를 못 맞추면 고리가 닫히는 자리에서 튀었다. 여섯째 고리 승급에서 번쩍이지 않은 사람은 탑 기록에 없었다.
루엔은 기울기를 셈해 두었다. 가을 내내, 참호 안에서, 밀랍판 구석에.
숨을 들이쉬었다. 마나를 돌렸다. 다섯 고리를 스치며 비스듬히. 한 바퀴.
끝이 처음을 만났다.
튀지 않았다.
천막 안에 빛은 없었다. 소리도 없었다. 루엔은 눈을 떴다. 천막 기둥에 걸어 둔 등불 심지가 그대로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일지 않았다.
천막 밖에서 코넬 목소리가 들렸다.
“끝났냐?”
“끝났습니다.”
“아무 소리도 안 났는데.”
“소리가 안 나야 끝난 겁니다.”
코넬이 천막 문을 들추고 들어왔다. 루엔을 위아래로 보았다. 눈 뭉치를 든 채였다.
“열여덟 살 생일 축하한다. 대충.”
“고맙습니다. 정확히.”
*
그날부터 루엔은 탁자 위에 돌을 늘어놓았다.
붉은 돌과 검은 돌. 참호 뒤 개울에서 주운 조약돌이었다. 붉은 건 흙물이 든 것, 검은 건 숯에 굴린 것. 탁자에 가로 세 줄, 세로 네 칸을 그었다.
첫 줄은 불. 불 한 몫을 섞으면 안개가 얼마나 더워지나, 얼마나 마르나, 얼마나 밀리나. 둘째 줄은 물, 셋째 줄은 바람. 마지막 칸은 바라는 것. 적 안개를 참호 앞에서 딱 멈출 만큼 밀고, 김이 비가 되어 떨어질 만큼 식히고, 물기는 더하지 않는 것.
더워지면 붉은 돌, 식으면 검은 돌. 물기가 늘면 붉은 돌, 마르면 검은 돌.
한 몫씩 섞어 본 값은 이레 동안 재었다. 루엔 그릇으로 작은 술식을 하나씩 따로 걸고, 적 안개가 오기 전 새벽 참호 앞에서 온기와 물기와 밀리는 거리를 쟀다. 눈금 유리관으로 따뜻함을, 양털 한 줌이 빨아들인 물 무게로 물기를, 깃털 매단 막대로 밀림을.
표가 찼다.
세 줄이 서로 얽혀 있었다. 불을 더하면 밀림도 조금 늘고 물기는 줄었다. 바람을 더하면 식는데 물기도 흩어졌다. 탑 마법사들이 한 속성씩 맞추다 늘 실패하는 까닭이 거기 있었다. 불을 맞추면 바람이 틀어지고, 바람을 맞추면 물이 틀어졌다.
루엔은 한꺼번에 풀기로 했다.
첫 줄을 몇 배 해서 둘째 줄에서 뺐다. 불 칸이 비도록. 붉은 돌에서 붉은 돌을 빼고, 모자라면 검은 돌을 놓았다. 검은 돌에서 검은 돌을 빼면 붉은 돌 쪽으로 돌아왔다. 셋째 줄도 그렇게 해서 불 칸을 비웠다. 그다음 셋째 줄에서 둘째 줄을 빼 물 칸을 비웠다.
마지막 줄에 바람 칸 하나와 바라는 칸 하나만 남았다. 바람 몫이 나왔다. 그걸 둘째 줄에 넣으니 물 몫, 첫 줄에 넣으니 불 몫.
불 둘에 물 반, 바람 다섯 하고 조금.
*
이튿날 새벽, 루엔은 앞 참호 끝에 섰다.
안개가 왔다. 하얗게, 낮게, 따뜻하게. 참호 앞 서른 걸음.
루엔은 세 몫을 한꺼번에 걸었다.
바람이 일었다. 참호 쪽에서 안개 쪽으로. 안개 앞머리가 멈칫했다. 밀려오던 김이 제자리에서 부풀었다. 그러다—
다시 밀려왔다.
느려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김이 식지 않았다. 바람이 오히려 따뜻했다. 안개가 참호 앞 열 걸음까지 와서야 겨우 흩어졌다. 앞줄 병사 셋이 뺨을 데었다.
루엔은 참호로 뛰어 돌아왔다. 탁자 위 돌을 처음부터 다시 셌다.
셋째 줄 불 칸. 바람을 더하면 식는다. 식으면 검은 돌. 거기에 붉은 돌 둘이 놓여 있었다.
이레 동안 잰 값을 표에 옮기다, 한 칸을 거꾸로 놓았다.
그 한 칸이 뺄셈마다 끌려 다니며 불 몫을 부풀렸다. 불이 많으니 바람이 따뜻했다. 따뜻한 바람은 안개를 식히지 못했다.
“틀렸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천막에 들어온 레오폴트에게. “한 칸을 거꾸로 놓았습니다. 식는 걸 더워진다고 적었습니다. 오늘 아침 술식은 바란 것의 여섯 할쯤만 했습니다. 병사 셋이 데었습니다.”
레오폴트가 탁자 위 돌을 내려다보았다.
“고칠 수 있나.”
“오늘 밤 안에.”
*
그 밤, 테오가 천막에 등불을 들고 왔다.
루엔은 돌을 전부 쓸어 내고 처음부터 다시 놓는 중이었다. 테오가 한참 옆에서 보았다. 붉은 돌, 검은 돌. 줄끼리 빼고, 모자라면 검은 돌을 놓고.
테오가 불쑥 말했다.
“이거, 열한 살 때 너 기숙사에서 한 거랑 똑같네.”
“어떤 겁니까.”
“빚 표시 놀이. 기억 안 나? 내가 너한테 과자 두 개 빌리고 한 개 갚았더니, 네가 내 책상에 검은 돌 하나 놓았잖아. 빚이라고. 내가 과자 하나 더 사 오니까 붉은 돌을 놓고 둘이 서로 없어진다고.”
루엔은 손을 멈췄다.
“맞습니다.”
“그때 그 돌 셈이 이거였어?”
“그때는 칸이 적었습니다.” 루엔이 검은 돌 하나를 셋째 줄에 놓았다. “테오 칸 하나.”
테오가 웃었다. 그리고 등불을 탁자 가운데로 옮겨 주었다.
“그럼 이번엔 내가 옆에서 돌 세 줄게. 네가 놓으면 내가 한 번 더 세.”
“좋습니다.”
둘이 돌을 놓고 셌다. 루엔이 놓으면 테오가 소리 내어 읽었다. 불 줄, 식으면 검은 돌. 물 줄, 마르면 검은 돌. 테오 목소리가 두 번 멈췄다. 두 번 다 루엔이 잘못 놓은 게 아니라, 테오가 읽다 헷갈린 거였다. 루엔은 두 번 다 끝까지 들어 주었다.
불 하나에 물 반, 바람 여섯.
*
사흘째 새벽, 안개가 왔다.
루엔은 불 하나, 물 반, 바람 여섯을 한꺼번에 걸었다.
바람이 일었다. 차가웠다. 안개 앞머리가 참호 앞 서른 걸음에서 멈췄다. 이번엔 부풀지 않았다. 하얀 김이 제자리에서 가라앉았다. 김 속에서 물이 맺혔다. 알갱이가 되었다.
비가 내렸다.
참호 앞 서른 걸음, 딱 거기서부터. 안개가 비가 되어 눈밭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떨어진 자리마다 눈에 작은 구멍이 파였다. 참호 안에는 한 방울도 오지 않았다.
앞줄 병사들이 방패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누군가 손을 뻗어 떨어지는 빗방울을 받아 보았다.
“미지근해.”
“뜨겁지 않아?”
“안 뜨거워. 그냥 비야.”
번쩍임은 없었다. 적 성채 쪽에서는 김이 오다 사라진 것만 보였을 것이었다.
루엔은 그릇을 느꼈다. 바닥까지 반쯤 남았다. 여섯째 고리로 셋을 한꺼번에 걸어도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셈이 맞으니 샌 게 없었다.
테오가 옆에서 물었다.
“몇 할이야, 이번엔.”
“맞았습니다.”
“몇 할이냐고.”
“다 맞았습니다. 열 할입니다.”
테오는 그 말을 들으려고 물었던 거였다. 그는 비 내리는 쪽을 보며 한참 웃었다. 참호 끝에서 레오폴트가 반쯤 없는 귀를 긁고 있었다.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
첫 불은 해가 진 직후에 왔다.강 건너 둑 위에서 붉은빛이 번쩍했다. 한 점. 그리고 둘, 셋. 빛이 먼저 오고, 한참 뒤에 소리가 왔다. 쿵. 둔덕 아래 밭에서 흙이 치솟았다. 불붙은 짚단이 사방으로 튀었다.“파이어볼이다!”앞줄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엎드렸다. 기사들이 말을 돌렸다. 둔덕 위 막료 자리에서 루엔은 엎드리지 않았다. 강 건너를 보고 있었다.번쩍.루엔은 셌다. 하나, 둘.쿵.“둘.” 루엔이 말했다. “구백 걸음 남짓.”옆에 엎드린 테오가 고개만 들었다. “뭐가?”“저 불을 쏜 사람까지.”*소리는 빛보다 느리다. 빛은 보는 즉시 오지만, 소리는 하나를 세는 동안 사백오십 걸음쯤을 온다. 루엔 걸음으로. 루엔은 이 셈을 요람에 누워 있을 때부터 했다. 번개가 치면 천둥까지 셌다.속으로는 다른 숫자가 함께 돌았다. 1초에 343미터. 이 세계에서는 쓸 데가 없는 숫자였다. 쓸 데가 있는 건 걸음이었다.적 마법사는 쏠 때마다 번쩍였다. 마나의 여덟 할이 빛과 소리와 열로 샜다. 이 세계에서 그걸 「마나의 위엄」이라 불렀다. 위엄은 멀리서도 보였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셀 수 있었다.다만 한 사람이 세면 거리만 나왔다. 어느 쪽인지는 나오지 않았다.“테오. 둔덕 왼쪽 끝 참나무로 가십시오. 번쩍이면 세어서 적으십시오. 코넬 형은 오른쪽 끝 방앗간 터로.”“나도 세?” 코넬이 방패 밑에서 말했다.“형은 번개 셀 줄 압니다. 어릴 때 제가 가르쳤습니다.”“대충 기억나.”“대충이면 충분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