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
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
“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
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
“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
왕이 루엔을 보았다.
“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
*
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
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
“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
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
“이천이라 했소.”
“들었습니다.”
“삼백이십이라니. 그건 어디서 나온 숫자요.”
“하르트 상단 자본이 삼천이백입니다. 그 열에 하나입니다.”
“왜 열에 하나요.”
“한 곳에 빌려주는 건 자본의 열에 하나를 넘지 않습니다. 그게 하르트 상단 규칙입니다.”
“누가 정한 규칙이오.”
“제가 오늘 정했습니다.”
재무실 안이 조용해졌다. 왕의 시종이 숨을 참았다. 크로이츠의 희고 가는 손가락이 천천히 셈판 가장자리를 눌렀다.
“오늘 정한 규칙을 폐하께 들이미는 거요.”
“예. 오늘이 처음으로 누가 큰돈을 빌려 달라고 한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 정했습니다. 앞으로 누가 와도 같습니다.”
“폐하께서도 같다는 말이오.”
“폐하께서도 같습니다.”
*
크로이츠가 셈판을 옆으로 밀었다. 목소리가 낮고 또렷했다. 화를 내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셈을 따지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하르트 공, 왕실은 가장 믿을 만한 빌리는 이요. 왕실은 망하지 않소. 세금이 있소. 땅이 있소. 군대가 있소. 상인에게 빌려주는 게 위험하지, 왕실에 빌려주는 게 왜 위험하오.”
좋은 물음이었다. 루엔은 그렇게 생각했다. 크로이츠는 바보가 아니었다.
“왕실은 망하지 않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그래서 위험합니다.”
크로이츠의 눈썹이 올라갔다.
“상인이 빚을 안 갚으면 법정에 갑니다. 창고를 압니다. 왕실이 빚을 안 갚으면, 갈 법정이 없습니다. 법정도 왕실 것입니다.”
왕이 조금 웃었다. 크로이츠는 웃지 않았다.
“폐하께서 빚을 안 갚으실 거라는 말이오.”
“아닙니다. 폐하께서 갚으실지 안 갚으실지 제가 셀 수 없다는 말입니다. 셀 수 없는 것에 자본을 다 걸 수 없습니다.”
루엔은 전생에서 읽은 옛 은행들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름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왕과 공작에게 한도를 넘겨 빌려주다 무너진 집들. 그들이 망한 까닭은 이자를 못 받아서가 아니라,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이 걸어서였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이 늘 왕이었다.
“옛 기록에서 읽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큰 돈집이 망한 까닭은 대개 하나였습니다.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이 빌려줬습니다. 그 한 사람은 대개 왕이나 공작이었습니다. 그 돈집들도 처음엔 왕실이 가장 믿을 만하다고 했습니다.”
크로이츠는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셈판 알 하나를 손끝으로 굴렸다.
“열에 하나라는 숫자는.”
“그 기록들에서 망하지 않은 집들이 대개 그쯤을 지켰습니다. 저는 그 숫자를 더 셀 재료가 없습니다. 모자라면 고치겠습니다. 다만 올려서 고치지는 않겠습니다.”
*
왕이 입을 열었다.
“삼백이십으로는 모자란다.”
“압니다.” 루엔이 말했다. “나머지를 채우는 길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라.”
“왕도 상인 조합이 넷, 큰 상단이 여섯입니다. 그들도 열에 하나씩 빌려드리면 됩니다. 한 곳에 몰지 않고 나눠서. 그러면 한 곳이 무너져도 다른 곳이 섭니다. 하르트 상단이 그 장부를 모아 드리겠습니다. 누가 얼마를 빌려드렸는지, 언제 갚으시는지. 삯은 받지 않겠습니다.”
크로이츠가 고개를 들었다. 처음으로 그 눈에 셈 말고 다른 것이 스쳤다. 흥미였다.
“담보는.”
“동쪽 관문 관세를 받겠습니다. 가을까지 관문에서 걷는 관세를, 빌린 만큼 하르트 창구로 먼저 보내 주십시오. 그리고 하나 더 청합니다.”
“또 있소.”
“하르트 상단이 곧 금을 맡아 두는 곳을 엽니다. 금을 맡긴 사람에게 보관증을 줍니다. 그 보관증을 세금으로 받아 주십시오. 지금 당장이 아니라, 그날이 오면.”
“종이를 세금으로.” 크로이츠의 목소리가 굳었다.
“금과 바꿔 주는 종이입니다. 하르트 창구에 가져오면 그 자리에서 금을 내드립니다.”
“그 종이를 받으면 누가 이득이오.”
“세금을 내는 사람입니다. 금을 들고 왕도까지 오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재무실입니다. 금을 세는 대신 종이를 셉니다.”
크로이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왕이 먼저 말했다.
“받겠다. 그날이 오면.”
“폐하.”
“발터. 네가 원하는 건 봄 싸움 돈이다. 이 사람은 돈을 모아 주겠다고 했고, 삯을 안 받겠다고 했다.” 왕이 일어섰다. “그 대가로 종이 한 장 약속하는 거다. 싸고 좋은 셈이다.”
왕이 나갔다. 크로이츠는 한참 앉아 있었다. 그러다 셈판을 다시 끌어당겼다.
“열에 하나.” 그가 중얼거렸다. 루엔 쪽을 보지 않았다. “나는 삼십 년 이 방에서 왕실 빚을 셌소. 왕실에 선을 긋는 상인은 처음 보오.”
“선은 누구에게나 긋습니다.”
“그게 더 기분이 나쁘오.”
크로이츠는 알 하나를 세게 튕겼다. 딱. 그 소리가 재무실 천장까지 울렸다.
*
공방 뒷문으로 들어서자 클라리사가 장부에서 고개를 들었다.
“얼마 빌려 드렸어?”
“삼백이십.”
클라리사의 펜이 멈췄다. “왕이 얼마를 달랬는데.”
“이천.”
“너 왕한테 이천 달라는데 삼백이십 준다고 했어? 재무대신 앞에서?”
“열에 하나라고 했습니다.”
클라리사는 한참 루엔을 보더니 장부 맨 앞 장을 넘겼다. 빈 여백에 굵게 적었다. 「한 곳에 빌려주는 건 자본의 열에 하나까지. 왕실도.」 그러고는 펜을 내려놓고 이마를 짚었다.
“잘했어. 근데 우리 아버지가 들으면 기절하실 거야. 좋아서.”
“좋아서 기절하십니까.”
“왕한테 선 긋는 상인한테는 다들 돈을 맡기고 싶어 하거든. 떼일 일이 없으니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창구 쪽이 시끄러워졌다.
젊은 남자 셋이 창구 앞에서 다투고 있었다. 얼굴이 닮았다. 형제였다. 가운데 형의 손에 새 금화 한 닢이 들려 있었다.
“아버지가 남기신 거요.” 맏이가 창구 직원에게 말했다. “이걸 셋이 똑같이 나누고 싶소. 동화로 바꿔 주시오.”
직원이 금화를 동화 백 닢으로 바꿔 주었다. 형제는 창구 옆 탁자에 동화를 쏟았다. 서른셋씩 셋. 한 무더기에 서른셋, 또 서른셋, 또 서른셋.
동화 한 닢이 남았다.
셋이 그 한 닢을 보았다.
탁자 옆에 서 있던 늙은 상인 하나가 혀를 찼다. 하르트 창구로 금을 달러 온 사람이었다.
“옛 셈이었으면 나뉘었지. 은화 하나에 동화 열둘로 셌으면, 금화 하나가 이백마흔이었소. 셋으로 딱 떨어지오. 새 돈은 이게 흠이오.”
맏이가 루엔을 알아보았다. 창구 뒤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군지 왕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하르트 공. 이 한 닢은 누구 거요.”
루엔은 탁자 앞으로 갔다. 동화 한 닢을 보았다.
늙은 상인의 말은 맞았다. 지난여름 아달베르트 보움이 구리판 앞에서 한 말과 같았다. 열둘은 셋으로 나뉘었다. 열은 안 나뉘었다. 그때 루엔은 「그건 아직 셈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했다.
아직도 셈하지 못했다.
루엔은 한 닢을 보았다. 셋으로 쪼갤 수 없었다. 쪼개면 동화가 아니라 구리 조각이었다. 한 사람이 가지면 나머지 둘이 서른셋, 한 사람은 서른넷. 공평하지 않았다. 셋 다 안 가지면 한 닢이 어디 가는가.
루엔의 얼굴이 굳었다. 눈썹 사이가 좁아졌다. 입술이 조금 움직였다. 둘, 셋, 다섯, 일곱. 하나와 저 자신 말고는 무엇으로도 나뉘지 않는 수를 세기 시작한 입이었다.
형제들이 그 얼굴을 보았다.
둘째가 먼저 말했다.
“아니, 저기, 하르트 공. 괜찮소. 그렇게까지 괴로워하실 건.”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지금 얼굴이 우리 아버지 돌아가신 날보다 안 좋소.”
막내가 동화 한 닢을 집었다. 창구 옆 벽에 걸린 나무 통을 가리켰다. 골목 사람들이 한 닢씩 모아 앓는 집을 돕는 공제 통이었다. 이 골목에 하르트 상단이 들어오면서 클라리사가 걸어 둔 것이었다.
“이거, 저기 넣읍시다. 아버지도 골목 사람들한테 신세 많이 지셨소.”
맏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도 끄덕였다.
막내가 통 구멍에 동화를 밀어 넣었다. 딸그랑. 셋이 동시에 루엔을 보았다. 이제 됐냐는 얼굴이었다.
루엔은 한참 공제 통을 보았다.
“됐습니다.”
“정말로?”
“셋이 서른셋씩, 골목이 하나. 합이 백입니다. 끝자리가 맞습니다.”
형제들이 웃었다. 맏이가 루엔의 어깨를 두드렸다. 위로하는 손이었다. 루엔은 위로받을 까닭을 셈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깨에 얹힌 손은 따뜻했다.
형제들이 나간 뒤 늙은 상인이 말했다.
“열이 흠이라는 말은 거두지 않겠소.”
“거두지 마십시오. 흠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흠을 메우는 건 셈이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적어 두겠습니다.”
그날 밤 루엔은 수첩에 적었다. 「셋으로 나눌 때 남는 한 닢 — 골목 공제 통. 셈한 사람: 형제 셋.」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
첫 불은 해가 진 직후에 왔다.강 건너 둑 위에서 붉은빛이 번쩍했다. 한 점. 그리고 둘, 셋. 빛이 먼저 오고, 한참 뒤에 소리가 왔다. 쿵. 둔덕 아래 밭에서 흙이 치솟았다. 불붙은 짚단이 사방으로 튀었다.“파이어볼이다!”앞줄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엎드렸다. 기사들이 말을 돌렸다. 둔덕 위 막료 자리에서 루엔은 엎드리지 않았다. 강 건너를 보고 있었다.번쩍.루엔은 셌다. 하나, 둘.쿵.“둘.” 루엔이 말했다. “구백 걸음 남짓.”옆에 엎드린 테오가 고개만 들었다. “뭐가?”“저 불을 쏜 사람까지.”*소리는 빛보다 느리다. 빛은 보는 즉시 오지만, 소리는 하나를 세는 동안 사백오십 걸음쯤을 온다. 루엔 걸음으로. 루엔은 이 셈을 요람에 누워 있을 때부터 했다. 번개가 치면 천둥까지 셌다.속으로는 다른 숫자가 함께 돌았다. 1초에 343미터. 이 세계에서는 쓸 데가 없는 숫자였다. 쓸 데가 있는 건 걸음이었다.적 마법사는 쏠 때마다 번쩍였다. 마나의 여덟 할이 빛과 소리와 열로 샜다. 이 세계에서 그걸 「마나의 위엄」이라 불렀다. 위엄은 멀리서도 보였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셀 수 있었다.다만 한 사람이 세면 거리만 나왔다. 어느 쪽인지는 나오지 않았다.“테오. 둔덕 왼쪽 끝 참나무로 가십시오. 번쩍이면 세어서 적으십시오. 코넬 형은 오른쪽 끝 방앗간 터로.”“나도 세?” 코넬이 방패 밑에서 말했다.“형은 번개 셀 줄 압니다. 어릴 때 제가 가르쳤습니다.”“대충 기억나.”“대충이면 충분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