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지도는 너무 많은 걸 그리고 있었다.
막료 천막 벽에 걸린 베스트리아 동부 지도였다. 황색탑 측량사들이 그린 것. 산은 산 모양으로, 숲은 나무 모양으로, 강은 굽이굽이 그대로. 마을마다 교회 첨탑이 그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지도였다.
그런데 루엔이 알고 싶은 건 하나였다. 어디가 끊기면 안 되는가.
산 모양도, 나무 모양도, 강 굽이도 그걸 가리고 있었다.
루엔은 새 종이를 폈다. 그리고 점을 찍었다.
본진. 창고 마을. 왕도. 여섯 영지의 곡식 창고. 역참 열두 곳. 여울 셋. 모두 점 하나씩.
그다음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그었다. 수레가 다니는 길이면 선 하나. 다리가 있으면 선 위에 짧은 가로줄. 거리도 산 높이도 그리지 않았다. 이어져 있는지 아닌지만.
마흔한 개의 점과 예순 개 남짓의 선이 남았다.
테오가 어깨 너머로 보았다.
“이게 지도야? 거미줄 같은데.”
“지도에서 필요 없는 걸 다 뺀 겁니다.”
“뭐가 필요 없는데.”
“어디로 이어졌는지 빼고 전부 다.”
*
루엔은 선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렸다.
선 하나를 가리고, 본진에서 출발해 점을 따라가 보았다. 모든 점에 닿으면, 그 선은 끊겨도 괜찮은 선이었다.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닿지 못하는 점이 생기면, 그 선은 끊기면 안 되는 선이었다.
예순 번을 가렸다.
대부분은 괜찮았다.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하나를 끊으면 옆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멀어지긴 했지만 닿았다.
세 선만 달랐다.
메를 강 중류의 돌다리. 창고 마을로 들어가는 지류 위 나무다리. 그리고 왕도 동쪽 문 밖, 늪 사이로 난 둑길 위 다리.
셋 중 하나만 끊겨도 점들이 두 덩이로 갈라졌다. 돌다리가 끊기면 본진과 창고 마을이 갈렸다. 나무다리가 끊기면 창고 마을이 섬이 되었다. 둑길 다리가 끊기면 왕도와 동부 전체가 갈렸다.
루엔은 세 선에 붉은 동그라미를 쳤다.
“셋.”
레오폴트가 천막에 들어와 종이를 보았다. 한참 보다가, 말없이 벽에 걸린 아름다운 지도와 번갈아 보았다.
“돌다리는 알고 있었다. 그 다리 때문에 가을에 강 서쪽에 진을 쳤지.” 장군이 말했다. “나무다리도 짐작했다. 그런데 둑길 다리는.”
“왕도 사람은 그 다리를 다리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둑길의 일부로 봅니다. 그런데 그 다리 아래는 늪 물이 빠지는 도랑입니다. 다리가 무너지면 둑길이 끊기고, 늪을 돌아가는 길은 사흘입니다.”
“적이 그걸 알까.”
“적에게도 셈할 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레오폴트는 그날 바로 세 다리에 병사를 백씩 붙였다. 둑길 다리에는 돌을 쌓아 한쪽 기둥을 두 겹으로 했다.
*
그런데 루엔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세 다리를 지키면, 동쪽에서 오는 길은 전부 막힌다. 링겐 고개도, 북쪽 눈길도, 남쪽 늪도. 적이 이 점과 선을 본다면, 어디가 남는가.
루엔은 종이 가장자리를 보았다. 베스트리아의 점들은 서쪽 끝에서 멈췄다. 거기에 점 하나가 더 있었다. 비르케 항. 서쪽 바다에 면한 항구. 거기서 뻗은 선은 육지 쪽으로만 있었다.
바다 쪽에는 선이 없었다. 루엔이 안 그렸을 뿐이었다.
바다에도 길이 있었다. 배가 다니는 길. 마르케스는 바다가 없는 나라였다. 그러나 살렌은 바다의 나라였다. 겨울에 비르케 항 살렌 상인이 보낸 편지가 떠올랐다. 「하르트 금화로만 받겠다.」 상인들은 셈이 빨랐다. 마르케스가 금화를 내밀면 살렌의 배도 셈을 할 것이었다.
그리고 바다로 온다면, 배만 오지 않을 것이었다.
청색탑. 물의 탑. 탑 안에는 강경파가 있었다. 이졸드 같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적색탑 장로가 삯을 받았다면, 청색탑의 누군가도 받을 수 있었다. 청색탑이 가진 가장 큰 물 마법은 해일이었다. 바다를 들어 항구에 떨어뜨리는 마법.
루엔은 비르케 항에서 바다 쪽으로 점선을 하나 그었다.
그 선 끝에 물음표를 적었다.
그날 밤 루엔은 편지 한 통을 썼다. 청색탑 검사관 이졸드에게.
「여쭙습니다. 청색탑 안에 마르케스의 삯을 받을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있다면 바다 쪽 어느 항구를 먼저 보겠습니까. 답하기 어려우시면 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답이 없는 것도 셈에 넣겠습니다.」
편지는 거울 신호가 닿지 않는 길로 갔다. 상단 수레와 배를 갈아타며 열이틀. 답은 스무날 만에 왔다. 짧았다.
「있다. 이름은 적지 않겠다. 탑 안의 일은 탑 안에서 먼저 막아 보겠다. 막지 못하면 비르케다. 서쪽 바다에서 해일을 떨어뜨릴 만한 큰 항구는 거기 하나뿐이다.」
「— 이졸드.」
「덧붙임. 네 스승은 이런 편지를 받아 본 적이 없다. 보냈을 뿐이지.」
루엔은 덧붙임을 오래 보았다. 오스윈이 누구에게 무슨 편지를 보냈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루엔은 그 줄을 수첩 「모르는 것」 칸 옆에 옮겨 적었다. 그리고 비르케 항 점선 끝의 물음표를 지우고, 그 자리에 작게 적었다. 「청색탑 강경파. 해일.」
*
비르케 항 영주 에드거 칸델은 첫마디부터 목소리가 컸다.
“돌덩이를 바다에 버리라고?”
루엔은 텔레포트로 비르케에 왔다. 하루 두 번 가운데 한 번을 썼다. 영주 성 탁자에 그림 한 장을 폈다. 발이 넷 달린 돌덩이. 발 셋은 바닥을 딛고, 하나는 하늘을 향했다. 어른 키만 한 크기.
“버리는 게 아닙니다. 항구 앞에 쌓습니다. 수천 개.”
“수천 개.” 에드거가 그림을 집어 들었다. 마흔 중반, 바닷바람에 그을린 얼굴, 팔뚝에 밧줄 자국. 성에 앉은 영주라기보다 뱃사람 같았다. “이게 뭐하는 거요.”
“파도를 부숩니다. 큰 파도가 오면 이 발들 사이로 물이 쪼개져 들어가 힘을 잃습니다. 네모 돌을 쌓으면 파도가 돌을 통째로 밀지만, 이건 발끼리 서로 걸려 안 밀립니다. 그리고 그 앞 바다 속에 얕은 둑을 하나 더. 큰 파도는 얕은 데서 먼저 부서집니다.”
“큰 파도가 언제 오는데.”
“모릅니다.”
에드거가 그림을 탁자에 던졌다.
“모르는데 수천 개를 쌓으라고. 돌은 누가 캐고, 누가 옮기고, 누가 삯을 내오. 우리 항구 어부들은 봄 청어 철에 배를 띄워야 하오. 항구 입구에 돌무더기를 쌓으면 배가 어디로 드나드오.”
좋은 물음들이었다. 루엔은 하나씩 답했다.
“돌은 석회를 구워 반죽해 틀에 부어 굳힙니다. 옛 성벽 쌓던 방법입니다. 캐지 않아도 됩니다. 삯은 하르트 상단이 절반, 왕실이 절반. 폐하께는 제가 청하겠습니다. 배 드나드는 입구는 비워 둡니다. 입구 폭은 청어 배 네 척이 나란히 지나갈 만큼.”
“석회 반죽 돌덩이.” 에드거가 코웃음을 쳤다. “그게 바다에서 굳소?”
“굳습니다. 화산재를 섞으면 물속에서 더 단단해집니다. 남쪽 바다 옛 부두가 그렇게 섰습니다.”
“그건 어디서 들었소.”
“옛 기록입니다.”
에드거는 창밖을 보았다. 항구가 내려다보였다. 봄 바다가 잔잔했다. 청어 배들이 줄지어 떠 있었다.
“하르트 공. 나는 이 바다에서 마흔다섯 해를 살았소. 비르케엔 해일이 온 적이 없소. 남쪽 바닷가 어느 어촌에 마흔 해 전쯤 큰 물이 들었다는 얘기는 어릴 때 들었지. 그것도 하늘이 한 일인지 사람이 한 일인지 말이 엇갈렸소.” 에드거가 돌아섰다. “전쟁은 동쪽에서 하고 있소. 동쪽 적이 바다로 온다는 건 당신 셈이오. 셈은 틀릴 수 있소. 돌덩이는 한 번 쌓으면 못 치우오. 이건 돈 낭비요.”
“제 셈만은 아닙니다. 청색탑 검사관이 답을 보냈습니다. 서쪽 바다에서 해일을 떨어뜨릴 만한 큰 항구는 비르케 하나라고.”
“청색탑 사람 말을 믿으라고? 해일을 칠 수 있다는 그 탑 사람 말을?”
“그래서 믿습니다. 칠 줄 아는 사람이 어디를 칠지 가장 잘 압니다.”
에드거가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말을 찾는 얼굴이었다. 찾지 못했다.
“그래도 틀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틀리면 돈 낭비입니다. 제가 틀렸다고 쓴 종이를 항구 돌기둥에 붙여 드리겠습니다.”
에드거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맞으면.”
“맞으면 항구가 섭니다.”
한참 조용했다. 에드거는 탁자 위 그림을 다시 집어 들었다. 발 넷 달린 돌덩이. 뒤집어 보고, 옆으로 보았다.
“반만 쌓으시오.” 마침내 그가 말했다. “올여름엔 반만. 얕은 둑은 가을에. 그 사이에 당신 셈이 틀렸다는 게 드러나면 거기서 멈추오.”
“좋습니다.”
“좋다고?” 에드거가 되물었다. “반이라는데.”
“반이면 절반은 틀려도 괜찮다는 뜻입니다. 셈이 틀릴 몫을 영주님이 먼저 떼어 두신 겁니다. 좋은 셈입니다.”
에드거는 뭐라 하려다 말았다. 그리고 문간에 서 있던 집사에게 소리쳤다. 「석회 굽는 놈들 불러와. 욕은 하르트 공한테 하라고 해.」
*
전선으로 돌아가는 날, 루엔은 전령들에게 지도를 나눠 주었다.
새로 그린 점과 선 그림이 아니라, 거기에 산과 강을 조금 되살려 넣은 전령용 지도였다. 큰 지도 한 장을 반으로 접었다. 또 반으로. 또 반으로.
접을 때마다 종이 모양이 처음과 같았다. 긴 변과 짧은 변의 비율이 그대로였다. 크기만 반씩 줄었다. 큰 지도를 반으로 줄여 옮겨 그리면, 축척이 딱 반. 한 번 더 줄이면 딱 그 반.
전령들은 저마다 제 길에 맞는 크기를 받았다. 멀리 가는 전령은 큰 것, 역참 사이만 오가는 전령은 손바닥만 한 것. 어느 것을 펴도 모양이 같았다. 한 지도에서 다른 지도로 옮겨 볼 때 셈이 필요 없었다.
가장 늙은 전령이 제 몫을 받아 들었다. 예순이 넘은 사람이었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그는 지도를 한 번 펴 보고, 접어 보고, 다시 폈다.
“그 비싼 종이가 이거였구먼.”
“비쌌습니까.”
“비쌌지요. 도련님 학교 다니실 적에 방학 와서, 영지 종이 공방 틀을 다 새로 짜라고 하셨잖소. 긴 변을, 짧은 변으로 그린 네모의 대각선만큼 길게 하라고. 종이 값이 한 해 동안 한 할 넘게 올랐소. 마을에서 다들 욕했소.”
“압니다.”
“나도 했소.” 늙은 전령이 지도를 품에 넣었다. “이제 안 하겠소.”
지도는 너무 많은 걸 그리고 있었다.막료 천막 벽에 걸린 베스트리아 동부 지도였다. 황색탑 측량사들이 그린 것. 산은 산 모양으로, 숲은 나무 모양으로, 강은 굽이굽이 그대로. 마을마다 교회 첨탑이 그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지도였다.그런데 루엔이 알고 싶은 건 하나였다. 어디가 끊기면 안 되는가.산 모양도, 나무 모양도, 강 굽이도 그걸 가리고 있었다.루엔은 새 종이를 폈다. 그리고 점을 찍었다.본진. 창고 마을. 왕도. 여섯 영지의 곡식 창고. 역참 열두 곳. 여울 셋. 모두 점 하나씩.그다음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그었다. 수레가 다니는 길이면 선 하나. 다리가 있으면 선 위에 짧은 가로줄. 거리도 산 높이도 그리지 않았다. 이어져 있는지 아닌지만.마흔한 개의 점과 예순 개 남짓의 선이 남았다.테오가 어깨 너머로 보았다.“이게 지도야? 거미줄 같은데.”“지도에서 필요 없는 걸 다 뺀 겁니다.”“뭐가 필요 없는데.”“어디로 이어졌는지 빼고 전부 다.”*루엔은 선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렸다.선 하나를 가리고, 본진에서 출발해 점을 따라가 보았다. 모든 점에 닿으면, 그 선은 끊겨도 괜찮은 선이었다.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닿지 못하는 점이 생기면, 그 선은 끊기면 안 되는 선이었다.예순 번을 가렸다.대부분은 괜찮았다.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하나를 끊으면 옆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멀어지긴 했지만 닿았다.세 선만 달랐다.메를 강 중류의 돌다리. 창고 마을로 들어가는 지류 위 나무다리. 그리고 왕도 동쪽 문 밖, 늪 사이로 난 둑길 위 다리.셋 중 하나만 끊겨도 점들이 두 덩이로 갈라졌다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