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날 밤, 루엔은 아버지 방 문을 두드렸다.
가렛은 촛불 아래서 장부를 보고 있었다. 들어오라는 말도 없이 턱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숲에 사는 사람 말이구나.”
루엔은 앉지 않았다. 아버지가 먼저 말할 줄은 몰랐다.
“아십니까.”
“안다. 열 해 전에 왔다. 청색탑 마법사였다.” 가렛은 펜을 내려놓았다. “숲에 살게 해 달라고 했다. 세금은 없는 대신, 개울이 넘칠 해를 미리 알려 주기로 했지. 그리고 나는 아무도 보내지 않기로 약속했다.”
“왜 아무도 보내지 말라고 했습니까.”
“묻지 않았다.”
펠릭스 때와 같았다. 아버지는 사람의 까닭을 캐묻지 않았다. 대신 그 사람이 한 일을 보았다.
“약속을 깨시라는 게 아닙니다.”
루엔이 말했다.
“물어봐 주십시오. 제가 가도 되는지.”
가렛은 한참 아들을 보았다. 촛불이 두 번 흔들렸다.
“내가 직접 가서 묻겠다. 너도 같이 간다. 문을 열지 말지는 그 사람이 정한다.”
*
사흘 뒤, 가렛은 작은 수레에 루엔을 태우고 숲으로 들어갔다.
숲길은 좁았다. 나무뿌리가 길 위로 불거져 있었다. 개울 소리를 따라 위로, 위로 올라갔다.
반쯤 갔을 때 하늘이 어두워졌다.
빗방울이 떨어졌다. 나뭇잎을 두드리는 소리가 금세 굵어졌다. 흙길이 검게 젖었다.
루엔의 손이 수레 난간을 쥐었다.
다섯 살의 몸은 한 살 때보다 튼튼했다.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등이 굳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빗소리. 젖은 길. 바퀴.
루엔은 입을 열었다. 이 세계에 와서 한 번도 하지 않은 말이었다. 무언가를 해 달라는 말.
“아버지.”
“음.”
“비 오면, 천천히 가 주십시오.”
가렛은 돌아보지 않았다.
“안다.”
수레는 이미 느려져 있었다. 사람이 걷는 것보다 느리게. 루엔이 말하기 전부터였다. 첫 빗방울이 떨어졌을 때부터.
루엔은 아버지의 등을 보았다.
한 살 여름, 교회에서 돌아오던 빗길. 그날 이 사람은 까닭도 모르고 말을 걷게 했다. 그리고 그 뒤로 네 해 동안, 비가 오는 날이면 한 번도 빠짐없이 그랬을 것이다. 루엔이 몰랐을 뿐.
“… 언제부터 그러셨습니까.”
“네가 울던 날부터.”
가렛은 고삐를 짧게 잡았다.
“까닭은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네가 천천히 가 달라고 하니, 앞으로도 그렇게 간다.”
빗소리가 계속 났다. 하지만 이상하게, 루엔의 등은 풀려 있었다.
*
오두막은 개울이 꺾이는 자리에 있었다.
낮은 돌담, 작은 텃밭. 개울물을 돌로 쌓은 좁은 물길로 끌어와 텃밭을 적시고 있었다. 물길은 곧았다. 경사가 고르게 져 있었다.
개울가에 말뚝 하나가 박혀 있었다. 말뚝에는 칼로 새긴 금이 빼곡했다. 금마다 옆에 작은 표시가 있었다.
루엔은 비를 맞으며 그 말뚝을 보았다.
물 높이였다. 날마다 개울물이 어디까지 찼는지를 새겨 둔 것이다. 몇 해 치가.
금은 너무 많아서 비 오는 문간에서는 다 셀 수 없었다. 루엔은 맨 아래 한 줄만 셌다. 한 줄에 금이 서른. 옆에 그 달의 표시가 붙어 있었다. 한 달에 한 줄, 하루에 한 금.
하루도 빠진 날이 없었다.
아버지가 말한 「개울이 넘칠 해를 미리 알려 준다」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 루엔은 그 말뚝을 보고 알았다. 이 사람은 맞히는 게 아니었다. 적어 둔 걸 보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적는 사람이다.
오두막 문이 열렸다.
노인이 서 있었다. 예순은 넘어 보였다. 키가 크고 등이 조금 굽었다. 흰 머리를 뒤로 묶었고, 수염은 짧게 깎았다. 색 바랜 푸른 옷에 갈색 천을 여기저기 덧대 입었다. 눈이 옅은 물빛이었다.
“영주.” 노인이 말했다. “약속하지 않았나.”
“그래서 내가 직접 왔소, 마로 공.”
오스윈 마로. 가렛이 오는 길에 이름을 일러 주었다.
오스윈의 눈이 수레 위의 아이에게 갔다.
“아이는 가르치지 않네.”
“가르쳐 달라는 게 아니오. 이 아이가 묻는 게 있소. 한 번만 들어 보시오. 싫으면 돌아가겠소.”
오스윈은 비 맞는 아이를 보았다. 한숨을 쉬었다. 문을 조금 더 열었다.
“비는 피하게. 들어는 보지.”
*
오두막 안은 좁았다. 벽마다 선반이었고, 선반마다 종이 묶음이었다. 탁자 위에 컴퍼스와 곧은 자가 놓여 있었다.
루엔은 셀빈의 파이어 볼트 이야기를 했다. 같은 스물세 마디, 다른 불. 그리고 곡식 말리기. 마흔여섯 마디, 덜 번쩍임.
“길게 말하면 덜 번쩍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스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눈을 가늘게 떴다.
“셀빈 그 녀석이군. 적색탑 떠돌이.”
가렛이 헛기침을 했다. 루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한테 들었다고 하지 말라고 했다. 말하지 않았다. 오스윈이 맞힌 것뿐이었다.
오스윈이 창가의 물그릇에 손을 뻗었다.
입술이 움직였다. 낮고 느린 영창이었다. 셀빈보다 훨씬 느렸다. 소리의 높낮이가 물결처럼 오르내렸다.
루엔은 셌다.
물그릇에서 물 한 줄기가 실처럼 솟아올랐다. 손가락 길이만큼. 떨리지 않았다. 번쩍임은 아주 옅었고, 윙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물줄기가 가라앉았다.
“몇 마디였나.”
“스물아홉 마디입니다. 그런데 열여섯째 마디 뒤에서 반 박자 쉬셨습니다.”
오스윈의 손이 물그릇 위에서 멈췄다.
“… 그 쉼을 들었나.”
“예. 셀빈 마법사님은 쉬지 않았습니다.”
오스윈은 한참 루엔을 보았다. 물빛 눈이 조금 흔들렸다.
“그 반 박자는 탑에서 스무 해를 배워야 붙이는 걸세. 붙이는 까닭을 아는 자는 더 적고.”
그는 가렛을 돌아보았다.
“사흘에 한 번. 오전에만. 그리고 비 오는 날엔 보내지 말게. 길이 미끄러워.”
가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윈은 그 말을 가렛이 아니라 루엔을 보며 했다.
*
첫날 오스윈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다. 앉아서 숨 쉬는 법만 시켰다.
“서클은 심장 둘레에 쌓는 고리일세. 마나를 담는 그릇이지. 그런데 그릇은 여섯 해는 차야 모양이 잡혀. 그 전엔 쌓아도 무너지네.”
“그럼 지금은 무엇을 합니까.”
“느끼는 걸세. 숨을 들이쉴 때 들어오는 것, 내쉴 때 나가는 것. 세지 말고.”
루엔은 숨을 들이쉬었다. 셌다.
“세지 말라고 했네.”
“세지 않으면 들이쉰 숨이 몇 번째인지 모릅니다.”
“몰라도 되네.”
“모르면 불편합니다.”
오스윈이 이마를 짚었다. 그러고는 처음으로, 아주 조금 웃었다.
*
두 번째부터는 펠릭스가 노새를 끌고 따라왔다.
오스윈은 문간에서 펠릭스를 위아래로 훑었다. 눈이 펠릭스의 오른손에서 멈췄다. 가운뎃손가락 옆의 잉크 얼룩.
“수도원 사람이군.”
펠릭스의 등이 조금 굳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 자리에 잉크가 배려면 하루 여섯 시간은 베껴 써야 하네. 그렇게 쓰는 데는 수도원밖에 없지.”
“… 나온 지 한 해가 넘었습니다.”
“그렇겠지. 여기 있으니.”
펠릭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스윈도 더 묻지 않았다. 둘은 잠깐 서로를 보았다. 무언가를 알아본 얼굴이었다. 루엔은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 다만 두 사람 다 묻지 말아 달라는 쪽이었다.
오스윈이 먼저 몸을 돌렸다.
“나도 묻지 않겠네. 들어오게. 노새는 텃밭에 들이지 말고.”
그날 뒤로 펠릭스는 오두막 구석에 앉아 수업을 받아 적었다. 오스윈은 가끔 펠릭스의 밀랍판을 넘겨다보았다. 루엔의 동그라미 글자가 빼곡한 판이었다. 오스윈은 그 글자에 대해 한 번도 묻지 않았다. 대신 어느 날부터 자기 종이 귀퉁이에 동그라미를 하나씩 그리기 시작했다.
*
루엔은 곧 새로운 것을 세기 시작했다.
오스윈은 수업을 시작할 때마다 짧은 영창을 읊었다. 물그릇의 물을 한 번 들어 올리는, 늘 같은 영창. 몸을 푸는 버릇이라고 했다.
루엔은 그 영창이 자기 맥박 몇 번 동안 이어지는지 셌다. 손목에 손가락을 대고.
처음엔 틀렸다. 숲길을 올라온 직후라 맥박이 빨랐다. 그래서 오두막에 들어가면 먼저 앉아서, 서른까지 세는 동안 기다렸다. 마르타의 서른이었다. 그다음에 셌다.
스물둘. 스물여섯. 스무 번. 스물넷.
날마다 달랐다.
한 달 치 표를 들고 가자 오스윈이 그걸 들여다보았다.
“기분 좋은 날엔 빨라지네. 늙은이도 그렇네.”
루엔은 표를 다시 보았다. 옆 칸에 적어 둔 것이 있었다. 그날 오스윈이 텃밭 이야기를 했는지, 개울물이 줄었다고 투덜댔는지.
맞았다. 맥박 스물이던 날은 오스윈이 콩 싹이 올라왔다고 두 번 말한 날이었다. 스물여섯이던 날은 밤새 멧돼지가 텃밭을 뒤집은 날이었다.
그 뒤로 루엔은 문을 들어서며 영창을 듣고 말하게 되었다.
“오늘은 기분이 좋지 않으십니다. 스물다섯입니다.”
“… 멧돼지가 또 왔네.”
한 달이 더 지나자, 오스윈의 영창이 날마다 똑같이 느려졌다. 스물여덟. 스물여덟. 스물여덟.
루엔이 표를 보다 고개를 들었다.
“일부러 천천히 읊으십니다.”
“늙은이 기분까지 적히는 건 사양하겠네.”
그러면서 오스윈은 창밖을 보았다.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었다. 그날의 스물여덟은 루엔의 표에서 「좋음」으로 적혔다.
*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사흘에 한 번이 겨울에는 이레에 한 번이 되었다. 눈이 깊었다.
어느 날 루엔이 물었다. 선반의 종이 묶음을 보다가였다. 묶음마다 푸른 끈이 묶여 있었고, 어떤 묶음은 끈이 잘려 있었다.
“선생님은 왜 탑을 나오셨습니까.”
오스윈의 손이 멈췄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일어나서 문을 열고 나갔다. 눈 덮인 개울가, 그 말뚝 앞에 섰다. 얼어붙은 개울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한참 뒤에 돌아와서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앉았다.
“숨. 다시.”
루엔은 다시 묻지 않았다.
수첩에도 적지 않았다. 이건 「원래 그렇다」가 아니었다. 아직 모르는 것이었다.
*
봄이 왔다. 루엔은 여섯 살이 되었다.
그날 오스윈은 오두막 바닥의 흙을 고르게 펴고, 끈 달린 말뚝으로 커다란 원을 그렸다. 컴퍼스로는 모자라는 크기였다.
“이제 그릇이 차 가네. 여름이 지나면 재 보지. 그 전에 원부터 알아 두게. 서클도 원이고, 마법진도 원일세.”
오스윈은 원 가장자리를 발끝으로 따라 걸었다.
“원의 둘레는 지름의 세 배. 탑에서는 그렇게 가르치네.”
루엔이 고개를 들었다.
“세 배가 아닙니다.”
오스윈의 발이 멈췄다.
오두막 안이 조용했다. 개울 소리만 들렸다.
“… 알고 있네.”
오스윈은 원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넘지. 탑에서도 다 알아. 그 조금을 아무도 못 잡았을 뿐일세.”
루엔은 원을 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조금은 얼마만큼입니까.”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
첫 불은 해가 진 직후에 왔다.강 건너 둑 위에서 붉은빛이 번쩍했다. 한 점. 그리고 둘, 셋. 빛이 먼저 오고, 한참 뒤에 소리가 왔다. 쿵. 둔덕 아래 밭에서 흙이 치솟았다. 불붙은 짚단이 사방으로 튀었다.“파이어볼이다!”앞줄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엎드렸다. 기사들이 말을 돌렸다. 둔덕 위 막료 자리에서 루엔은 엎드리지 않았다. 강 건너를 보고 있었다.번쩍.루엔은 셌다. 하나, 둘.쿵.“둘.” 루엔이 말했다. “구백 걸음 남짓.”옆에 엎드린 테오가 고개만 들었다. “뭐가?”“저 불을 쏜 사람까지.”*소리는 빛보다 느리다. 빛은 보는 즉시 오지만, 소리는 하나를 세는 동안 사백오십 걸음쯤을 온다. 루엔 걸음으로. 루엔은 이 셈을 요람에 누워 있을 때부터 했다. 번개가 치면 천둥까지 셌다.속으로는 다른 숫자가 함께 돌았다. 1초에 343미터. 이 세계에서는 쓸 데가 없는 숫자였다. 쓸 데가 있는 건 걸음이었다.적 마법사는 쏠 때마다 번쩍였다. 마나의 여덟 할이 빛과 소리와 열로 샜다. 이 세계에서 그걸 「마나의 위엄」이라 불렀다. 위엄은 멀리서도 보였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셀 수 있었다.다만 한 사람이 세면 거리만 나왔다. 어느 쪽인지는 나오지 않았다.“테오. 둔덕 왼쪽 끝 참나무로 가십시오. 번쩍이면 세어서 적으십시오. 코넬 형은 오른쪽 끝 방앗간 터로.”“나도 세?” 코넬이 방패 밑에서 말했다.“형은 번개 셀 줄 압니다. 어릴 때 제가 가르쳤습니다.”“대충 기억나.”“대충이면 충분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