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판타지 / 무색탑의 수학자 / 8화. 두 배의 두 배

Share

8화. 두 배의 두 배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6 18:51:15

여름 초입, 코넬이 저녁 식탁에서 일어섰다.

열 살이었다. 요즘 부쩍 키가 컸다. 목검도 새로 받았다. 기사들과 아침마다 모래 마당에서 발 딛기를 한다고 했다.

“아빠. 제 용돈 말인데요.”

가렛이 빵을 떼다 멈췄다. 코넬의 용돈은 한 주에 동화 한 닢이었다.

“저 이제 검술 연습을 두 배로 할 거예요. 그러니까 용돈도 두 배로 해 주세요.”

“두 닢.”

“아니요. 매주 두 배로요. 이번 주 한 닢이면 다음 주 두 닢, 그다음 주 네 닢, 그다음 주 여덟 닢. 연습도 매주 두 배로 늘릴게요.”

엘리나가 웃었다. 가렛은 수염을 쓸었다. 아들이 무언가를 셈해서 들고 온 게 기특한 얼굴이었다.

“그 정도야.”

루엔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버지. 스무 주 뒤를 셈해 보셨습니까.”

가렛이 루엔을 보았다. 이 아이가 이렇게 물으면 대개 좋은 일이 아니었다.

“대충 몇십 닢이겠지.”

“대충은 셈이 아닙니다.”

“……”

“내일 아침에 보여 드리겠습니다.”

코넬이 동생을 노려보았다. 루엔은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

이튿날 아침, 성 마당 한쪽에 조약돌 무더기가 줄지어 섰다.

루엔과 펠릭스가 새벽부터 개울가에서 주워 온 돌이었다. 펠릭스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었다. 이제 이런 일에 놀라지 않았다.

첫째 무더기는 돌 하나. 둘째는 둘. 셋째는 넷. 넷째는 여덟.

여기까지는 무더기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코넬이 팔짱을 끼고 콧방귀를 뀌었다.

“봐. 별거 없잖아.”

다섯째는 열여섯. 여섯째는 서른둘. 일곱째는 예순넷.

일곱째부터 돌을 세는 데 시간이 걸렸다. 루엔은 열 개씩 줄을 지어 놓았다. 셀 때 틀리지 않게.

여덟째, 백스물여덟. 아홉째, 이백쉰여섯.

마당을 지나던 기사들이 발을 멈췄다. 마구간 소년들이 모여들었다.

열째, 오백열둘.

돌이 모자랐다. 펠릭스가 하인 둘을 데리고 개울가를 두 번 더 다녀왔다. 해가 꽤 올라와 있었다.

마구간 소년 하나가 장난으로 아홉째 무더기에 돌을 하나 얹었다. 루엔은 말없이 그 돌을 집어 내려놓았다. 소년이 또 얹었다. 루엔이 또 내려놓았다. 세 번째에 소년이 포기했다. 구경하던 기사 하나가 소년의 뒤통수를 가볍게 쳤다. “도련님 셈에 손대지 마라. 돌 하나가 한 닢이다.”

열째 무더기는 루엔 무릎까지 왔다.

코넬이 팔짱을 풀었다.

“… 열째 주가 저거야?”

“열째 주 용돈만 저겁니다. 동화 오백열두 닢.”

루엔은 열한째 자리에 서서 개울 쪽을 보았다.

“열한째는 천스물넷입니다. 돌이 더 없습니다. 개울을 다 긁어도 스무째까지는 못 쌓습니다.”

그래서 여기부터는 적었다.

*

루엔은 밀랍판을 펴서 표를 그렸다. 줄마다 윗줄의 두 배를 적었다. 곱해 보는 표였다. 자기 글자로 적으니 한 줄에 한 번의 셈이면 됐다.

열한째, 천스물넷. 열두째, 이천마흔여덟.

펠릭스가 옆에서 제 밀랍판에 한 줄씩 따로 셈해 확인했다. 틀린 줄은 없었다.

… 열아홉째.

스무째.

루엔이 판을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스무째 주 용돈은 동화 오십이만 사천이백여든여덟 닢입니다. 그 주 하나만.”

마당이 조용해졌다.

“스무 주를 다 더하면 백사만 팔천오백일흔다섯 닢입니다.”

가렛은 표를 받아 들었다. 루엔의 글자를 다 읽지는 못했다. 하지만 줄이 몇 줄인지, 끝 줄이 얼마나 긴지는 보였다.

몰튼이 뒤에서 목을 뺐다.

“몰튼.” 가렛이 불렀다. “우리 창고에 든 곡식을 전부 동화로 치면 얼마쯤 되오.”

몰튼은 장부를 떠올리는 얼굴이 되었다. 셈판 없이도 이런 건 빨랐다.

“가을 전이라 적습니다, 나리. 전부 팔아도 동화 이만 닢 남짓입니다.”

“남짓.”

루엔이 속으로 한 번 더 따졌다. 이만 닢 남짓으로 백사만.

“창고를 쉰 번 넘게 비워야 합니다. 스무 주 뒤에요.”

가렛이 코넬을 보았다.

코넬은 열째 무더기를 보고 있었다. 무릎까지 오는 돌무더기. 그게 고작 열째 주였다.

“… 나 그렇게 많이 달라고 한 거 아닌데.”

“두 배씩 달라고 하셨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두 배는 작게 시작해서 크게 끝납니다.”

가렛이 밀랍판을 루엔에게 돌려주었다.

“한 닢. 그대로.”

코넬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고는 목검을 쥐고 마구간 쪽으로 걸어갔다. 발소리가 컸다.

*

그날부터 코넬은 루엔과 말을 하지 않았다.

식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르타, 쟤한테 소금 좀 달라고 해.”

마르타가 한숨을 쉬었다. “도련님, 소금이 도련님 바로 앞에 있잖아요.”

“쟤 쪽에 더 가까워.”

루엔은 소금 그릇을 형 쪽으로 밀었다. 손가락 한 마디만큼. 그러면 형 쪽이 더 가까웠다.

코넬은 그걸 집으면서도 루엔을 보지 않았다.

루엔은 날을 셌다. 수첩 뒷장에. 형이 말을 안 한 날.

하루, 이틀, 열흘. 스무날.

서른하루째 되는 날 아침, 모래 마당에서 루엔이 코넬의 연습을 보고 있었다. 코넬이 목검을 휘두르다 말고 돌아보았다.

“야.”

서른하루 만의 첫마디였다.

“너 때문에 나 연습 두 배로 한다고 기사들한테 말해 버렸잖아. 이제 안 하면 거짓말쟁이야.”

“예.”

“… 그러니까 거기서 세지 마. 신경 쓰여.”

루엔은 수첩을 덮었다. 서른하루.

형은 그 뒤로도 연습을 두 배로 했다. 용돈은 한 닢 그대로였다.

*

한여름, 루엔은 드디어 노르벡으로 내려갔다.

갓난아기 때 마르타 품에 안겨 성벽 위에서 굴뚝을 세며 미뤄 둔 일이었다. 집이 몇 채인지. 펠릭스가 노새를 끌고 따라왔다.

루엔은 집마다 문 앞에 서서 셌다. 굴뚝 있는 집, 굴뚝 없는 집. 굴뚝이 없는 집은 지붕 가운데 구멍으로 연기를 뺐다. 성벽 위에서는 안 보이던 집들이었다.

그리고 굴뚝이 있어도 집이 아닌 곳이 있었다. 대장간, 방앗간, 교회.

굴뚝 예순여덟에서 셋을 빼고, 굴뚝 없는 집 여섯을 더했다.

일흔한 채.

루엔은 수첩에 적었다. 성벽 위에서 속으로 어림했던 「예순여덟 채쯤」은 세 채가 모자랐다. 쯤을 지운 건 잘한 일이었다.

세는 동안 마을 사람들이 따라다녔다. 영주님 둘째 아들이 집집마다 문 앞에 서서 입술을 달싹이는 건 구경거리였다.

한 집 앞에서 늙은 아낙이 빨래를 널다 말고 물었다.

“도련님, 뭘 세세요.”

“집입니다.”

“우리 집도 세셨어요?”

“예. 마흔한 번째입니다.”

아낙은 그 말을 곱씹더니, 빨랫줄 너머 옆집에 대고 소리쳤다.

“여봐! 우리 집이 마흔한 번째래!”

옆집 문이 열렸다. “그럼 우리는?”

“마흔두 번째입니다.”

“흥. 우리가 먼저네.” 늙은 아낙이 턱을 들었다.

루엔은 먼저라는 뜻이 아니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개울 위쪽부터 셌을 뿐이었다. 하지만 두 집은 이미 그걸로 한참 다투고 있었다.

방앗간 아래 길목에선 핌을 만났다. 핌은 굽은 등으로 장작을 지고 있었다.

“아이고, 몇 걸음 도련님.”

성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 벌써 마을까지 내려와 있었다.

“올해도 보리를 파십니까.”

“안 팔 거요.” 핌이 장작을 고쳐 멨다. “되가 다르니께. 차라리 겨우내 우리 집 되로 먹는 게 낫지요.”

핌은 웃으며 지나갔다. 루엔은 수첩 첫 장의 첫 줄을 떠올렸다. 하나. 되는 고을마다 다르다.

겔트네 집은 개울 끝, 방앗간 아래에 있었다. 세금 날 보리 마흔일곱 되를 냈던 농부. 루엔이 담 모퉁이에 서서 굴뚝을 보는데 안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 또 붙는대.”

겔트의 목소리였다. 지쳐 있었다.

“봄에 씨보리 빌린 거. 이번 달에도 붙는대. 열에 하나씩.”

여자 목소리가 대답했다. 겔트의 아내인 것 같았다.

“빌릴 때는 작은 되로 주더니, 갚을 때는 큰 되로 달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가을에 다 갚을 수 있어요?”

한참 대답이 없었다.

“… 원래 그래. 빌리는 놈이 약한 거지.”

루엔은 담 모퉁이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열에 하나씩. 달마다. 붙은 것에 또 붙는다면.

오늘 아침에 쌓았던 돌무더기가 떠올랐다. 두 배는 아니다. 열에 하나다. 훨씬 느리다. 하지만 느리게 시작해서 크게 끝나는 건 같다.

셈을 시작하려는데 펠릭스가 어깨를 잡았다.

펠릭스도 들었다. 얼굴이 굳어 있었다.

“도련님.” 펠릭스가 낮게 말했다. “남의 집 담 밑입니다.”

루엔은 셈을 멈췄다. 펠릭스의 말이 맞았다. 들은 걸로 셈하기 전에, 먼저 제대로 물어야 했다. 그리고 지금 문을 두드려 물을 수는 없었다.

둘은 조용히 그 집을 지나쳤다.

그날 밤, 수첩에 한 줄이 늘었다.

넷. 빌리는 사람이 약하다. — 겔트. 다섯 살 여름.

누가 빌려주는지는 적지 못했다. 아직 몰랐다.

*

사흘 뒤, 마을이 다시 들썩였다.

순회 마법사가 왔다. 이번엔 늦지 않았다. 딱 이태 만이었다.

셀빈은 그대로였다. 햇볕에 그은 얼굴, 짧은 머리, 붉은 천을 덧댄 망토. 말에서 내리자마자 가렛과 삯을 흥정했다. 이번에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흥정이 끝나자 가렛이 루엔을 앞으로 내세웠다.

“이 아이 그릇 말이오.”

셀빈은 루엔을 보고 웃었다. “아, 몇 걸음 도련님. 기억합니다. 나리, 아직 다섯이지요? 여섯은 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요.”

“다음엔 또 이태 뒤잖소.”

“그럼 일곱에 보면 되지요. 늦게 잰다고 그릇이 줄지는 않습니다.”

루엔이 한 걸음 나섰다.

“마법사님. 여쭐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렴.”

“이태 전에 파이어 볼트를 두 번 쏘셨습니다. 두 번 다 스물세 마디였습니다. 소리 높낮이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불이 더 작았습니다. 더 떨렸고, 더 번쩍였습니다.”

셀빈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 그걸 셌냐.”

“예. 불 크기는 무엇이 정합니까. 말이 아니면.”

셀빈은 한참 루엔을 내려다보았다. 가렛을 한 번 보았다. 가렛은 말없이 서 있었다.

“마나다.” 셀빈이 천천히 말했다. “얼마나 부었느냐. 그날 두 번째엔 내 그릇 바닥이 보였다. 같은 말을 해도 부을 게 모자라면 불이 작아지지. 모자란 걸 말로 억지로 짜내면 더 떨리고.”

“그릇은 무엇입니까.”

셀빈이 웃었다. 이번엔 조금 쓴 웃음이었다.

“그걸 제대로 말해 줄 수 있으면 내가 이 나이에 북부 창고나 돌고 있겠냐.”

그는 몸을 돌려 북쪽을 보았다. 성 뒤로 검푸른 숲이 언덕을 덮고 있었다.

“저 숲 안쪽, 개울 윗물 쪽에 오두막이 하나 있다. 청색탑에 있던 사람이 산다. 나보다 훨씬 많이 아는 사람이지.”

가렛의 어깨가 조금 굳었다. 루엔은 그걸 보았다.

셀빈은 목소리를 낮췄다.

“다만, 나한테 들었다고 하지 마라. 그 사람은 사람을 싫어해. 특히 마법사를.”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무색탑의 수학자   86화. 열 가운데 하나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 무색탑의 수학자   85화. 무는 금화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 무색탑의 수학자   84화. 여섯째 서클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 무색탑의 수학자   83화. 열일곱과 일흔하나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 무색탑의 수학자   82화. 사흘째 오후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

  • 무색탑의 수학자   81화. 세 번 센 불빛

    첫 불은 해가 진 직후에 왔다.강 건너 둑 위에서 붉은빛이 번쩍했다. 한 점. 그리고 둘, 셋. 빛이 먼저 오고, 한참 뒤에 소리가 왔다. 쿵. 둔덕 아래 밭에서 흙이 치솟았다. 불붙은 짚단이 사방으로 튀었다.“파이어볼이다!”앞줄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엎드렸다. 기사들이 말을 돌렸다. 둔덕 위 막료 자리에서 루엔은 엎드리지 않았다. 강 건너를 보고 있었다.번쩍.루엔은 셌다. 하나, 둘.쿵.“둘.” 루엔이 말했다. “구백 걸음 남짓.”옆에 엎드린 테오가 고개만 들었다. “뭐가?”“저 불을 쏜 사람까지.”*소리는 빛보다 느리다. 빛은 보는 즉시 오지만, 소리는 하나를 세는 동안 사백오십 걸음쯤을 온다. 루엔 걸음으로. 루엔은 이 셈을 요람에 누워 있을 때부터 했다. 번개가 치면 천둥까지 셌다.속으로는 다른 숫자가 함께 돌았다. 1초에 343미터. 이 세계에서는 쓸 데가 없는 숫자였다. 쓸 데가 있는 건 걸음이었다.적 마법사는 쏠 때마다 번쩍였다. 마나의 여덟 할이 빛과 소리와 열로 샜다. 이 세계에서 그걸 「마나의 위엄」이라 불렀다. 위엄은 멀리서도 보였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셀 수 있었다.다만 한 사람이 세면 거리만 나왔다. 어느 쪽인지는 나오지 않았다.“테오. 둔덕 왼쪽 끝 참나무로 가십시오. 번쩍이면 세어서 적으십시오. 코넬 형은 오른쪽 끝 방앗간 터로.”“나도 세?” 코넬이 방패 밑에서 말했다.“형은 번개 셀 줄 압니다. 어릴 때 제가 가르쳤습니다.”“대충 기억나.”“대충이면 충분합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