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안이 본채에 도착했을 때, 허함산을 포함해 허 부인, 허명진, 허유진 모두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 허명진과 허유진은 허함산 바로 옆자리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허정안에겐 문 쪽 구석진 자리를 주었다.그녀는 이러한 부모의 냉대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말보단 태도로 그녀에게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라는 압박을 보내왔었다. 과거의 허정안이었다면 이 상황에 또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을까 고민하며 자책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부모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상황이었다. 한편, 허명진은 이전보다 많이 얌전해지긴 했다. 하지만 허정안을 바라보는 눈에 적대감이 가득한 건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만히 선 채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오늘 밤샘할 생각 없습니다. 몸이 피곤하니 부모님께 인사만 드리고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그녀는 형식적으로 가볍게 인사를 한 뒤, 다시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줄곧 그녀를 굳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허함산이 그녀를 붙잡았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지조차 못 하고 있는 듯한 허정안에게 크게 화가 났다.“멈춰라!”허함산이 단호하게 외쳤다.“허정안, 넌 도대체 예의를 어디가 팔아먹었느냐? 부모 앞에서 이게 무슨 태도야!”허정안이 담담한 얼굴로 되물었다.“제 태도, 어디가 문제였죠?”검고 날카로운 눈빛이 자신에게 향하자 허함산은 순간적으로 당황해 살짝 멈칫했다. 자신이 원하던 반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허정안은 더 이상 그의 말 한마디에 흔들리지 않았다.하지만 허함산은 다시 아버지로서의 위엄을 내세우며 말했다.“다 들었다. 네가 명욱이를 어영군에 들게 했다면서? 누구의 인맥을 썼든 상관없다. 네 동생도 어영군에 들게 해라. 네가 이 집의 장녀인 이상 그래야 할 의무가 있어.”허 부인도 덧붙였다.“명욱이를 도와준 건 그렇다고 쳐도, 명진이는 네 동생이잖니. 친동생이 잘되면 너도 좋지 않겠어?”옆에 앉아 있던 허유진도 허명진을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어서 언
허정안은 곧바로 종이를 받아 펼쳐보았다. 그 안에 들어 있던 것은 왕 유모의 필체로 적힌 간략한 상황 설명이었다. 그녀는 허 부인에게 쫓겨난 뒤 어쩔 수 없이 고향인 담주로 돌아갔는데 다시 양씨의 도움으로 은전을 마련해 도성으로 돌아왔다는 얘기였다. “지금 내가 보낸 사람과 함께 도성으로 돌아오는 길일 것이다. 왕 유모가 다시 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말지는 네가 알아서 하거라.”양씨는 이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네가 베푼 은혜는 이것으로 다 갚았으니 앞으로 서로 다시 얽히는 일 없도록 하자.”그녀는 단호히 돌아서려 했다. “백모님!”하지만 허정안이 다시 그녀를 불러 세웠다.“명욱이가 어영군이 되었다고 해도 앞길을 튼튼히 다지려면 혼자서는 어려울 것입니다.”양씨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냐?”허정안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백모님과 손잡고 싶습니다. 저에겐 신책장군의 동생이라는 명목이 있습니다. 이것을 빌미로 앞으로 더 많은 인맥을 쌓을 것이고 명욱이에게 힘이 되어줄 것입니다. 제 어머니는 양녀만 편애하고 아버지는 자신의 영예에만 관심이 있어요. 저는 동생과도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 저에겐 믿을 수 있는 조력자가 필요합니다. 명욱이를 돕는 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제가 백모님, 백부님과 함께 하겠습니다. 저희 집에서 진 빚, 제가 대신 갚을게요.”짧은 침묵이 흘렀다.“허정안, 네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너무 방대하다. 우리는 별로 도움이 안 될 것이다.”양씨의 태도는 여전히 냉담했다.“이번에 명욱이의 출세를 지연시켰으니 다음은 주연이의 혼사에도 손을 대려 하겠지요. 백모님께선 현명하시니 제가 무슨 말 하는지 잘 아실 겁니다.”양씨는 잠시 얼어붙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곧 무언가 떠오른 듯 서둘러 자리를 떴다. 지금 당장 확인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뒷모습을 보며 허정안은 다시 천천히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허씨 가문 여식이라면 모두 혼인을 하기 전, 따로 선생을 모셔
국공부, 본채 안.허함현의 아내, 양씨가 갑작스레 찾아온 것이다. 그녀의 머리에는 검은 옥비녀가 꽂혀있었고 깃에 모란꽃이 길게 수놓아져 있는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하인들이 내온 차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채 아주 고집스러운 얼굴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님.”허 부인이 하인들과 함께 본채로 들어오며 말했다.“안 그래도 사람을 보내려던 참인데, 잘 오셨어요. 오늘 섣달그믐이니 셋째네도 함께 불러다 같이 시끌벅적하게 보내는 거 어떠세요?”하지만 양씨는 아주 냉랭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럴 것 없다. 섣달그믐 같은 날에 괜히 아랫사람들 앞에서 소란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형님, 그렇게 말씀하실 건 없잖아요. 어쨌든 다 한집 식구인데.”허 부인이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요즘 저희 부군께서 폐하의 총애를 듬뿍 받고 있는 건 아시죠? 듣자 하니 명욱이가 무과에 급제한 지도 일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이부에서 아무런 조치가 없다지요? 오늘 명욱이도 데려와 한 번 저희 부군께 사정을 얘기해 보세요. 부군께서 입김을 넣어준다면 분명 명욱이에게도 좋은 자리가 차려질 거예요.”그러자 양씨가 냉소를 띠며 말했다.“네 도움 따위 필요 없다. 며칠 전에 이미 이부에서 명욱이를 어영군에 배치한다고 공문이 내려왔다.”“뭐라고요?”허 부인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곧 추태를 깨닫고 얼른 웃음 띤 얼굴로 말을 돌렸다.“어영군이라니... 순방사에 근무해야 하는 거 아니었어요?”그러자 양씨가 귀찮다는 듯 간단히 대답했다.“이부에서 내려온 공문인데 내가 어찌 알겠느냐?”바로 이때, 소영이 문 앞에 나타났다.“백모님, 아가씨께서 방에서 편하게 차 한잔하자고 모시고 오랍니다.”그러자 양씨는 허 부인을 쳐다보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소영을 따라갔다. 그들이 떠난 뒤 허 부인이 손수건을 꽉 쥔 채 탁자를 내리쳤다.“틀림없어! 허정안이 뒤에서 수를 쓴 거야!”“부인, 왜 큰 아가씨께선 남에게만 이토록 너
“어머니께서 많이 신경 쓰셨네요. 하지만 제가 제대로 이들을 잘 다룰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너는 그냥 마음껏 부리면 돼. 만약 이 아이들이 네 마음에 안 들게 행동한다면 바로 내게 알려주면 된다.”허 부인이 그렇게 말하자 하인들이 서로 앞다투어 충성을 맹세하기 시작했다. 허정안은 거절하지 않고 일단 이들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대화는 마무리되었고 허 부인은 표화원을 나왔다. 하지만 마음의 응어리는 풀리지 않았는지 하늘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두 사람은 다시 안채로 돌아왔고 허유진이 벌겋게 부은 눈을 비비며 허 부인에게 말했다.“어머니, 언니가 저 하인들을 경계 안 할 수 있을까요?”“알고 있다. 하지만 얼마 갈 것 같으냐? 어차피 혼사가 정해지고 시집갈 준비를 하게 되면 차라리 우리 쪽에서 손 내밀어 주길 바라게 될걸?”그러자 허유진이 말을 돌리며 말했다. “어머니,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어요. 언니가 순순히 우리를 따를 수밖에 없는 방법이요.”모녀는 낮은 목소리로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은 깊어갔고 점점 고요함이 찾아왔다. 하사받은 재물과 은전 덕분에 허 부인도 더 이상 핑계 대지 못하고 화로 두 개를 더 보내주었고 허정안의 방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따뜻해졌다. 그녀는 이 따뜻함을 만끽하며 창가에서 글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누군가가 조심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허 부인이 남겨놓고 간 하인 중 한 명인 계 아주머니였다. “잘 때는 차 안 마신다. 가져가거라.”허정안이 계 아주머니가 들고 온 차를 보며 단호히 말했다.계 아주머니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거절당하자 어색하게 웃으며 조용히 방에서 나갔다. 오늘 허 부인이 남겨두고 간 하인은 총 다섯 명이었다. 계 아주머니와, 어린 하녀 넷, 연운, 청운, 단운, 설운, 모두 뒷글자가 운으로 끝나는 이름을 가진 아이들이었다. 허정안은 그들을 소영에게 붙여 창고 물품을 정리하게 했다. 소영의 필두로
하지만 허 부인은 혼자가 아닌 눈가가 벌겋게 부은 허유진와 하인들까지 대동해 함께 찾아왔다.“정안아, 이번 고금 일은 정말 미안하구나. 내가 진작 하인들의 실수를 눈치챘어야 했는데... 뒤바뀌었을 줄이야, 정말 생각지 못했다.”허 부인이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태도로 부드럽게 말했다.허정안은 탁자 앞에 앉아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어머니, 굳이 설명 안 하셔도 됩니다. 분명 하녀장이 제대로 못 챙긴 탓이겠지요.”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언급된 하녀장은 몸을 부르르 떨며 창백하게 질렸다. 이어서 허정안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자신에게 향한 것을 알아차린 하녀장은 겁이 질린 얼굴로 그 자리에서 바로 무릎을 꿇었다. “큰... 큰아가씨, 살려주십시오. 제가 늙어 눈이 어두워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그러고는 스스로 몇 차례 뺨을 후려쳤다. 그녀는 자신이 이 정도로 하면 당연히 허정안이 용서해 주며 그만해도 된다고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느긋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어디까지 하나 두고 보자는 듯이 말이다.하녀장은 어쩔 수 없이 스스로 파놓은 무덤에 기어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허 부인 또한 계속하라는 듯 매서운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억울했지만 어디에 하소연할 데도 없어 이를 악물고 계속 뺨을 때렸다. 찰싹, 찰싹, 방안엔 살갗이 부딪히는 매서운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어느새 하녀장은 얼굴이 퉁퉁 붓고 입술이 터져 핏물이 배어 나왔다. 허 부인은 차마 그 모습을 계속 쳐다보지 못하고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하녀장은 그녀를 아주 어릴 적부터 돌봐온 인물이었다. 그런데 허정안 앞에서 이런 수모를 당하고 있는데도 자신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백대쯤 넘어갔을 때 허정안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되었다, 하녀장. 그래도 어머니를 그동안 오래 보살펴온 정을 봐서 나도 이쯤 용서하도록 하겠다. 일어나거라.”그러자 하녀장이 비틀거리며 입가에 묻은 피를 닦고
허정안은 그렇게 말하며 화제를 돌렸다. “사실 이런 말 꺼내는 게 조금 부적절할 수도 있겠지만 집안 어르신이 워낙 걱정하고 계셔 부득이하게 대신 여쭙겠습니다.”장 부인도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말씀하세요.”“저에게 사촌 동생이 한 명 있는데 작년 무과에 급제해 방안으로 뽑혔습니다. 그런데 지금껏 이부에서 아무런 인사 발령이 없어서 계속 집에서 대기만 하고 있다네요. 백부님께서 워낙 조심스러운 성정이라 이부에 직접 여쭤보는 것을 꺼려 하셔서... 혹시 부인께서 여유 되실 때 상서 대인께 한 번 여쭤봐 주실 수 있을까요?”허정안은 매우 공손하게 말했지만 뜻은 분명했다. 장 부인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조정 일에는 제가 아는 바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인연이 닿았으니 기회가 될 때 제가 한 번 여쭤보도록 하겠습니다.”“감사합니다.”허정안은 몇 마디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소영과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허정안이 떠나자 장 부인은 곧바로 표정을 바꾸었다.“당장 집으로 돌아간다. 상서 어르신을 보거든 당장 날 뵈러 오시라 전하거라.”그 말투엔 다급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마차 안, 소영은 자신의 뺨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아가씨, 저희 지금 꿈꾸고 있는 거 아니죠? 폐하께서 이미 많은 상을 하사하셨는데 황후 마마께서도 상자 두 개를 더 얹어주시다니요!”“폐하의 하사품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고 황후마마의 하사품은 언젠가 그 값어치를 치를 때가 올 것이다.”허정안이 담담히 말했다.조금 전 연회장에서 허정안이 알아차린 것이 있었다. 장 공주와 황후는 겉보기엔 사이좋아 보였으나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후궁에 두 명의 주인이 있다는 건 원래부터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장 공주는 황제의 친누이로 고난과 역경을 함께 이겨낸 끈끈한 혈육 관계였다. 황후는 명문가 집안 출신으로 자식도 봤으며 황제의 총애를 듬뿍 받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권력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팽팽하게 나누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