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아침 햇살이 커튼 틈으로 들어올 때까지 여름은 눈을 뜨지 못했다.밤새 몇 번이나 잠들려다 다시 덕배에게 붙잡혔는지 이제는 기억도 흐릿했다.결국 먼저 지친 건 여름이었다.침대 위에는 이불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고, 두 사람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한 이불 아래 붙어 있었다.덕배는 진작 잠에서 깨어 있었다.팔 안에는 여름이 깊이 잠들어 있었다.한쪽 팔을 덕배의 허리에 걸친 채 가슴팍에 얼굴을 붙이고, 입술까지 살짝 벌린 모습이었다.평소라면 먼저 일어나 아침부터 배고프다거나 오늘 뭐 할 거냐며 쉴 새 없이 물었을 시간이었다.오늘은 미동도 없었다.덕배가 내려다봤다.“……뻗었네.”대답이 있을 리 없었다.여름은 새근새근 숨만 쉬었다.흐트러진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반쯤 덮고 있었다.덕배가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치워줬다.여름이 미간을 아주 조금 찌푸렸다.“으응…….”덕배의 손이 멈췄다.깨나 싶었지만 아니었다.오히려 얼굴을 그의 가슴에 더 깊숙이 묻었다.덕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피곤하긴 한가 보네.”어젯밤 자기가 원인이면서 남 일처럼 중얼거렸다.그때 협탁 위 휴대전화가 진동했다.우웅―.덕배가 화면을 확인했다.한정민.받지 않으려다가 진동이 계속되자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목소리를 낮췄다.“왜.”- 뭐 해?“자.”- 자긴 뭘 자. 지금 몇 신데.덕배가 시간을 확인했다.생각보다 늦었다.- 우리 다 내려왔어. 너희는 왜 안 나와?덕배는 품 안의 여름을 한번 내려다봤다.여전히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오늘은 우리 안 나가.”전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해졌다.- 왜?“여름이 자.”- 깨워.“안 깨워.”정민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여행 와서 하루를 방에서 보낼 거야?“어.”- 서여름이 그걸 가만히—“좀 전에 잠들었어.”정민의 말이 뚝 끊겼다.잠시 뒤.- ……좀 전에?덕배가 눈을 가늘게 떴다.“끊어.”- 야, 잠깐만. 설마 너희—뚝.덕배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휴대전화도 무음으로
덕배의 입술이 다시 내려앉았다.조금 전보다 깊고 뜨거운 키스였다.여름은 덕배의 목을 끌어안았다. 장난스럽게 그를 구경하던 얼굴은 이미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오빠…….”낮게 부르는 목소리에 덕배가 잠깐 입술을 떼었다.“왜.”여름은 대답 대신 다시 입을 맞췄다.그걸로 충분했다.덕배가 여름을 안아 침대 안쪽으로 옮겼다.오늘 하루 종일 차고 있던 빨간 실 팔찌가 두 사람의 손목에서 나란히 흔들렸다.서로를 지켜주는 사이.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말이 좋다며 몇 번이나 팔찌를 들여다보던 여름이었다.지금은 덕배만 보고 있었다.덕배 역시 마찬가지였다.방 안에는 어느새 둘밖에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거친 숨이 섞였고, 여름의 손가락이 덕배의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었다.“아까 사진 찍게 해주지.”덕배가 헛웃음을 흘렸다.“지금 그 얘기가 나와?”“배덕배 시그니처인데…….”“그만해.”다시 입술이 막혔다.여름이 웃다가 그대로 덕배를 끌어안았다.침대가 움직일 때마다 이불이 흐트러졌다.처음에는 조심스럽던 호흡도 조금씩 짙어졌다.“하아…… 오빠.”덕배가 여름의 얼굴을 살폈다.“괜찮아?”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응.”덕배의 손을 잡아 자기 쪽으로 끌었다.“나 봐.”덕배가 피식 웃었다.“보고 있잖아.”“계속 봐.”“어.”짧은 대답이었다.그 뒤로 여름은 정말 덕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숨이 흐트러질 때도.눈가가 조금 젖을 때도.덕배의 어깨를 끌어안고 가까이 붙을 때도.계속 그를 바라봤다.“오빠…….”“어.”“배덕배.”덕배의 움직임이 순간 멈칫했다.여름은 평소에도 화가 나면 그의 이름을 불렀다.장난칠 때도.싸울 때도.그런데 지금 부르는 이름은 전혀 달랐다.“배덕배…….”숨에 섞인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덕배의 턱이 굳었다.“왜 자꾸 이름 불러.”여름은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덕배를 바라봤다.좋아서.지금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이 배덕배라서.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얼굴이었다
호텔방으로 돌아오자 여름이 먼저 욕실로 들어갔다.하루 종일 밖을 돌아다닌 탓에 씻고 나오니 그제야 몸이 노곤해졌다.여름은 편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엎드렸다.손목에는 저녁에 아이에게 받은 빨간 실 팔찌가 그대로였다.휴대전화를 켜자 오늘 찍은 사진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공항에서 덕배가 캐리어를 끌어주던 사진.수영장에서 사라와 지나랑 찍은 사진.저녁을 먹으며 찍은 음식 사진.여름은 하나씩 넘겨보다가 혼자 웃었다.“잘 나왔다.”그때 욕실에서 물소리가 멈췄다.여름은 별생각 없이 계속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잠시 뒤 문이 열렸다.여름이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그대로 멈췄다.샤워를 마친 덕배가 수건 하나만 허리에 두른 채 나오고 있었다.젖은 머리카락.구릿빛 피부.두꺼운 어깨와 가슴을 지나 몸 곳곳에 남은 흉터.그 위로 이어진 짙은 이레즈미까지.덕배는 다른 수건으로 머리를 거칠게 털었다.여름의 휴대전화가 천천히 내려갔다.덕배가 바로 알아챘다.“왜.”대답이 없었다.여름은 턱을 괸 채 대놓고 덕배를 구경했다.“뭘 봐.”“기다려봐.”“뭘.”여름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씨익 웃어야지.”덕배의 미간이 좁아졌다.“뭐?”“배덕배 시그니처.”덕배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바로 그 순간이었다.여름이 손가락으로 덕배를 가리켰다.“그거!”“뭐가.”“방금 그거.”덕배는 머리를 다시 털었다.여름은 침대 위에 앉아 완전히 감상 모드였다.“진짜 멋있어.”“맨날 보는 몸이잖아.”“맨날 봐도 멋있는 건 멋있는 거지.”“아까는 내 몸 보고 입 튀어나와 있었잖아.”여름의 표정이 굳었다.“그건 내 얘기고.”“양말.”“배덕배.”덕배가 피식 웃었다.“왜.”“그 얘기 잊어.”“어떻게 잊어.”“잊으라면 잊어.”덕배는 대꾸하지 않고 캐리어를 열었다.여름의 시선이 계속 따라왔다.덕배가 티셔츠를 꺼내자 여름이 말했다.“잠깐.”“왜.”“아직 입지 마.”덕배가 천천히 돌아봤다.“왜.”여름은 너무도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이었다.여섯 사람은 굳이 차를 타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밤이 됐는데도 공기는 따뜻했고,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낮의 열기가 조금 남아 있었다.여름은 덕배의 손을 잡고 걷다가 길가에 앉아 있던 아이를 발견했다.작은 바구니 안에는 빨간 실로 엮은 팔찌들이 들어 있었다.아이는 지나가던 여섯 사람을 한참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리고 먼저 덕배와 여름 앞으로 왔다.뭔가를 빠르게 말하며 빨간 팔찌 두 개를 내밀었다.“우리 주는 거야?”여름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두 팔찌는 같은 모양이었다.다음은 정민과 지나.이번에는 조금 다른 매듭이었다.마지막으로 강수와 사라에게도 또 다른 모양의 팔찌 두 개를 건넸다.세 커플마다 모양은 달랐지만, 한 쌍씩은 똑같았다.여름의 얼굴이 환해졌다.“우와.”아이에게 받은 팔찌를 이리저리 살펴보다 덕배를 올려다봤다.“오빠, 애한테 팁 줘~.”“어.”“이거 직접 만들었나 봐. 얼마나 고생했겠어.”덕배가 지갑을 꺼내는 사이 여름은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눈높이가 맞춰졌다.“고마워.”아이는 여름에게 또 무언가 말했다.여름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그래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워~.”아이가 여름에게 한 걸음 가까이 왔다.여름은 자연스럽게 두 팔을 벌렸다.작은 몸이 품으로 들어오자 꼭 안아주고 등을 토닥였다.“예쁘다.”아이는 여름의 품에서 뭐라고 조잘거리더니 웃었다.여름도 따라 환하게 웃었다.덕배는 돈을 건네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작은 아이에게 눈높이를 맞춰 쪼그려 앉고.품에 안아 등을 토닥이고.아이가 하는 말은 하나도 못 알아들으면서 같이 웃는 여름.문득 며칠 전 시골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여섯 낳아 키우려면 힘들어.그때 아버지에게 장난처럼 물었다.손주 여섯, 괜찮아?덕배의 시선이 여름에게 오래 머물렀다.지금까지는 막연했다.결혼도.아이도.여름이 원할 때 하면 된
해가 완전히 기울 무렵 여섯 사람은 호텔을 나왔다.첫날 저녁만큼은 호텔 안에서 해결하지 말자는 사라의 의견이었다.괌에 왔으면 밖으로 나가 현지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말에 가장 먼저 찬성한 건 당연히 여름이었다.“언니, 맛있는 데 알아?”“응. 전에 와봤어.”사라는 휴대전화로 위치를 확인하며 앞장섰다.여름의 눈이 커졌다.“괌도 와봤어?”“응.”“몇 번?”“두 번.”“대박.”여름은 바로 사라 옆에 붙었다.“뭐가 제일 맛있어?”“가서 골라.”“나는 새우.”“아직 메뉴도 안 봤잖아.”“괌이면 새우 맛있을 것 같아.”뒤따르던 덕배가 말했다.“너 새우 많이 안 먹잖아.”여름이 돌아봤다.“여행 왔으니까 먹을 거야.”“그래.”“오빠가 까줘.”덕배의 얼굴이 구겨졌다.“벌써부터?”사라가 피식 웃었다.“덕배야, 그냥 까줘. 어차피 네가 하게 될 것 같은데.”“너까지 왜 그래.”“맞잖아.”여름이 사라의 팔을 잡으며 활짝 웃었다.“역시 언니.”덕배는 두 사람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예전에 사라를 장난스럽게 ‘이쁜이’라고 불렀다가 여름에게 한소리를 들은 뒤로는 그런 호칭은 입에도 올리지 않았다.그냥 사라.그게 제일 편했다.조금 뒤 도착한 식당은 바깥 테라스까지 이어진 곳이었다.바다 냄새와 음식 굽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여름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주변부터 구경했다.“여기 진짜 좋다.”사라가 자연스럽게 직원과 영어로 이야기를 나눴다.예약을 확인하고 메뉴에 관해 몇 가지를 묻는 것도 막힘이 없었다.여름은 옆에서 입을 벌리고 구경했다.직원이 돌아가자 바로 물었다.“언니.”“응?”“방금 뭐라고 했어?”“오늘 해산물 뭐가 좋은지 물어봤어.”“뭐가 좋대?”“새우.”여름의 얼굴이 환해졌다.“나 새우!”지나가 웃었다.“아까부터 새우 노래를 부르더니 잘됐네.”“지나 언니도 먹자.”“나도 좋아.”사라가 메뉴를 펼쳤다.“언니, 이건 어때?”지나가 사라가 가리킨 메뉴를 봤다.“괜찮겠다.”“그럼 이거
여름은 사라와 지나 사이에서 웃으며 수영장으로 향했다.조금 전까지 덕배의 양말 두 짝 때문에 얼굴이 빨개져 있던 건 벌써 잊은 모양이었다.“언니, 물 진짜 좋겠다.”지나가 먼저 발끝으로 물을 확인했다.“따뜻해.”“진짜?”여름은 기다릴 것도 없이 계단 쪽으로 들어갔다.문제는 물 높이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거였다.한 걸음.두 걸음.“어?”발이 다음 단을 디디는 순간 몸이 그대로 쑥 내려갔다.“앗!”머리까지 잠길 듯 사라졌다.덕배가 바로 움직였다.“서여름!”물속으로 손을 뻗어 여름의 허리를 잡았다.쑥.작은 몸이 그대로 물 밖으로 끌려 올라왔다.여름은 젖은 머리카락을 얼굴에 붙인 채 눈을 깜빡였다.덕배가 인상을 썼다.“야.”여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까르륵!”“웃어?”“깜짝 놀랐어!”“물 높이도 안 보고 들어가냐?”“수영장이니까 그냥 들어갔지.”“너 키 생각 안 해?”여름의 웃음이 뚝 멈췄다.“그게 내 키랑 무슨 상관이야.”“상관있지.”“배덕배.”“왜.”“내려줘.”덕배가 여름을 물 위에 내려놓으려 하자 여름이 갑자기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잠깐.”“왜.”“여기 발 닿아?”덕배가 바닥에 발을 딛고 선 채 여름을 내려다봤다.자기 몸에는 허리 위로 올라오는 정도였다.여름에게는 달랐다.“안 닿을 것 같은데.”여름의 팔에 힘이 더 들어갔다.“그럼 안 내려가.”덕배가 어이없는 듯 웃었다.“수영하러 와서?”“오빠가 들고 있어.”“내가 튜브냐?”“응.”덕배의 얼굴이 구겨졌다.그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던 정민이 고개를 저었다.그러다 옆의 지나를 봤다.“지나야.”“응?”정민이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네가 제일 정상적인 게 맞아.”지나가 눈을 깜빡였다.“갑자기?”“고맙다.”“뭐가 고마워.”정민은 대답 대신 앞을 봤다.한쪽에는 강수와 사라가 있었다.사라는 물속에 들어가면서도 강수가 말리는 건 적당히 흘려듣고 있었고, 강수는 그런 사라를 익숙하게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