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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달빛
문이 열리자 하니의 시선은 곧장 안쪽으로 향했다.

승오가 앉아 있었고, 그 옆엔 강하게 들러붙은 권아가 있었다.

권아는 아직도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듯, 승오 쪽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승오는 눈치를 살피며 몸을 조금 빼려 했지만, 권아는 오히려 더 가까이 붙으며 버텼다.

누가 봐도 뻔한, 노골적인 도발이었다.

하니는 조용히 권아를 살폈다.

얇고 고운 이목구비, 하얀 피부, 딱 봐도 단아한 이미지의 여자.

‘저 얼굴로 하는 짓이, 약혼자 있는 남자 옆에 붙어있는 거라니.’

‘예쁘게 태어나서 할 게 없었나? 왜 꼭 남의 인생에 기생해야 하는 걸까?’

그때, 연하가 잽싸게 일어나며 말했다.

“하니 씨, 우리 지금 승오랑 결혼식 준비 얘기하고 있었어. 잘됐네, 같이 앉아서 얘기하자.”

연하는 하니의 팔을 가볍게 잡아끌었지만, 하니의 시선은 줄곧 권아에게 박혀 있었다.

하니가 입을 열었다.

“이분은 누구시죠?”

승오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뭔가 들킨 사람처럼.

그가 입을 떼기도 전, 권아가 먼저 행동했다.

테이블 밑, 권아의 손이 조용히 승오의 허벅지를 훑었다.

그 손놀림은 익숙했고, 주저함이 없었다.

하니는 그 광경을 똑똑히 보았다.

승오의 얼굴에는 감추려는 기색 사이로 짧은 쾌락의 빛이 스쳤다.

‘결국, 강승오는 이런 자극적인 짓이 좋아서 이 관계를 계속 끌고 가는 거겠지.’

권아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이분이 그 유명한 예비 사모님이시죠?”

이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백권아라고 합니다. 이번에 새로 대표 비서로 왔어요.”

하니는 시선을 흘리며 물었다.

“비서가... 결혼식 준비 회의에도 같이 와야 하는 건가요?”

말끝이 살짝 올라갔다.

눈썹도 함께.

연하가 헛기침을 두 번 하고는 물잔을 들어 마시며 어색함을 가렸다.

“권아 씨는 이제 막 회사 들어왔잖아. 승오 옆에서 업무도 익힐 겸... 또 권아 씨 지인 중에 웨딩 쪽 전문가도 많대. 아이디어 참고삼으려던 거지.”

그 말끝에 권아가 잔을 들고 일어났다.

이어서 하니 앞으로 다가와, 잔을 내밀었다.

“사모님, 제가 먼저 한 잔 드릴게요.”

하니는 조용히 권아가 입고 있는 원피스를 바라봤다.

어딘가 낯이 익은 디자인.

‘저 원피스... 내 옷장에 있던 거랑 너무 비슷한데...’

하니의 옷 중 하나는 맞춤 제작된 단 하나뿐인 디자인이었다.

‘백권아가 입은 건... 아마도 짝퉁이겠지.’

하니는 잔을 천천히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권아가 일부러 손을 놓았다.

잔 안의 술이 그대로 권아의 원피스를 적셨다.

차가운 액체가 흘러내리자 권아는 입술을 떨며 눈가를 붉혔다.

하니는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봤다.

미안함도 없고, 놀라움도 없었다.

승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권아를 뒤로 감쌌다.

그리고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괜찮아? 다친 데는 없지?”

권아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억울하다는 듯 하니를 바라봤다.

“사모님, 왜 저한테 술을 뿌리신 거예요?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모르겠어요.”

“저 그냥 평범한 직원이에요. 대표님 곁에서 일 배우는 것뿐인데... 사모님께 이렇게까지 미움받을 줄은 몰랐어요.”

눈물이 뺨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솔직히 그런 모습은 누가 봐도 쉽게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만했다.

‘이래서 강승오가 넘어간 건가?’

‘하긴, 저런 식으로 울면서 매달리면 어지간한 남자는 다 무너지겠지.’

승오는 하니 옆에 있다는 걸 인식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권아의 눈물을 닦으려 했다.

하지만, 손이 멈췄고 대신 하니를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하니야, 권아 씨한테 사과해. 비서라고 막 대하면 안 되는 거잖아. 아무리 감정 상했어도... 술을 뿌리는 건 너무했어.”

하니는 조용히 눈썹을 올렸다. 입꼬리엔 조소가 걸렸다.

“내가 사과 안 하면?”

순간 공기가 서늘해졌다.

연하가 중재하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니 씨, 그냥 옷값 물어주면 되는 거잖아. 옷 한 벌인데, 뭐.”

하지만 권아는 여전히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사모님은 사과 안 하셔도 되는 분이에요? 이 옷, 고급 맞춤이에요. 저 같은 평범한 사람에겐 엄청 비싸지만, 정말 열심히 돈 모아서 산 옷이라고요.”

“사모님이 절 무시하는 건 괜찮아요. 근데 제 자존심까지 무시하진 말아 주세요.”

하니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자존심? 남의 약혼자 옆에 붙어 있는 네가 자존심이랍시고 지키는 게 뭐 있지?’

‘너 그 자존심, 엉덩이에 깔고 앉은 지 오래잖아.’

하니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권아의 옷을 다시 한번 훑어봤다.

“백 비서가 입은 그 옷, 내가 갖고 있는 맞춤 원피스 짝퉁이야. 몇만 원짜리겠지. 비싸지도 않아.”

그리고 조용히 가방을 열어 오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꺼냈다.

그러고는 권아 앞 테이블에 턱하고 내려놨다.

“이걸로 됐지? 가짜는 가짜고, 보상은 보상이지.”

승오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입술이 단단히 일그러졌다.

“하니야, 너 원래 이런 애 아니었잖아. 왜 요즘 자꾸 별로인 모습만 보여?”

“내가 좋아했던 그 따뜻하고 착한 이하니는 어디 갔어?”

하니의 심장이 잠시 쿡 하고 쑤셨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하게 올라오는 건... 역겨움이었다.

‘백권아도 더럽지만, 진짜 더러운 건 너야, 강승오.’

‘네가 바람만 피우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내가 믿고 사랑했던 시간, 결국 개나 줘버리는구나.’

하니의 눈동자에 미묘하게 스치는 증오가 지나갔다.

그걸 눈치챈 승오는 잠깐 멍하니 하니를 바라봤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권아 씨 임신했어. 지금은 몸도 예민하니까, 그냥 사과해 줘. 그게 예의야.”

‘임신?’

그 말에 하니의 시선이 권아의 배로 옮겨졌다. 숨이 저절로 막혔다.

‘백권아가 임신했다고?’

‘강승오의... 아이?’

‘결혼도 하기 전에 딴 여자랑 아이부터 만들었네?’

‘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이런 모욕까지 당해야 하는 거야?’

‘진짜... 왕이 따로 없네, 강승오.’

하니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얼굴에 번지는 웃음은 그 어떤 미소보다 싸늘했다.

“자기야, 왜 이렇게 예민해졌어? 백 비서 배 속에 있는 애, 설마 자기 애야? 그래서 그렇게 감싸는 거야?”

“내가 자기 미래의 와이프인데, 자기는 지금 와이프보다 비서를 더 챙기네?”

순간, 승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입술 끝이 떨렸다.

하니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그리고, 나 백 비서 컵 건드린 적 없어. 혹시 모르니까 CCTV 확인해 볼까? 괜히 내가 술 부었다고 몰아가지 마.”

“하니 씨, 그건 아니지.”

연하가 눈살을 찌푸리며 나섰다.

권아는 입술을 꼭 깨물더니, 애써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에요, 사모님. 제발 그런 식으로 몰아가지 말아 주세요...”

그러면서 양손으로 아랫배를 감싸 안고 승오를 올려다봤다. 눈동자엔 불안과 위로받고 싶은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승오는 그 모습을 보자, 순간 마음이 무너진 듯 한숨을 쉬었다.

“됐어. CCTV까지 볼 것 없어. 내가 대신 사과할게. 권아 씨, 얼른 가서 옷 갈아입어.”

권아는 속이 쓰린 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승오가 보내는 묵묵한 시선을 읽자 울컥하는 마음을 꾹 눌렀다.

“그럼... 사모님, 같이 옷 좀 갈아입으러 가주실 수 있을까요?”

권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눈빛은 하니를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

하니는 그 시선을 받아내며 조용히 말했다.

“좋아. 같이 가지.”

그 말에 연하가 급히 끼어들었다.

“어... 나도 같이 갈까?”

하니는 코웃음을 치듯 웃으며 말했다.

“연하 언니가 왜요? 제가 백 비서 배 속 아이라도 해칠까 봐요? 그 애가 승오 애가 아니면 뭐가 그렇게 긴장돼요?”

연하의 얼굴이 순시간에 굳어졌다.

...

하니와 권아는 조용히 드레스룸으로 들어섰다.

권아는 안쪽 옷걸이에서 분홍빛과 아이보리 컬러가 섞인 롱드레스를 꺼냈다.

“사모님, 이거 제 남편이 사준 옷인데, 어때요? 예쁘죠?”

하니는 순간 멈칫했다.

그 드레스... 하니의 옷방에도 똑같은 게 있었다.

심지어 같은 해, 같은 브랜드, 같은 디자인.

그건 승오가 연애 초기에 하니에게 처음으로 선물했던 드레스였다.

그땐, 핑크와 아이보리가 잘 어울린다며, 그 옷을 입을 하니에게서 눈도 못 떼던 승오가... 지금은 똑같은 걸 다른 여자한테 또 사줬다.

하니는 마음 한구석이 헛헛했지만, 겉으로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 승오 씨가 사준 것도 아닌데, 백 비서가 그걸 왜 나한테 자랑하지?”

권아는 살짝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웃으며 말했다.

“그냥... 남편이랑 사이가 너무 좋아서요. 아기도 생겼고 기쁜 소식은 사모님이랑도 나누고 싶었어요.”

하니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권아는 그 말과 동시에 드레스를 갈아입기 시작했다.

드레스를 매만지는 손길이 꽤 능숙했다.

하니가 조용히 물었다.

“백 비서 남편은, 백 비서를 많이 사랑하나 봐?”

권아는 거울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요. 우리 남편은요, 자기가 가진 모든 걸 저랑 아이한테 줄 거라 했어요. 사랑도, 시간도, 재산도 전부요.”

“아무리 바빠도 선물은 빠짐없이 챙겨줘요. 이런 드레스요? 수십 벌은 있죠.”

하니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그렇게 사랑해 주는 남편이면, 백 비서는 왜 가짜 옷 입고 출근해? 진짜는 집에 두고... 밖에선 짝퉁만 입히는 거 아니야?”

순간, 권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입술이 덜덜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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