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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달빛
하니는 물을 마시다 말고, 삼키는 동작을 잠시 멈췄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승오를 바라봤다.

“취소한 거 아니야. 그냥, 원래 장소가 좀 마음에 안들어서 그랬어. 장소는 다시 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승오는 넥타이를 살짝 느슨하게 풀며 웃으며 다가왔다.

“뭐가 마음에 안들었어? 거긴 ‘비너스 진심의 정원’이잖아. 진심으로 사랑하는 커플들이 거기서 서약하면 오래도록 함께할 수 있대. 그런 의미 있는 장소가 또 어디 있어? 축복이 넘치잖아.”

하니의 눈빛에 잠깐 조롱 같은 기운이 스쳤다.

‘그래,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오래 간다지.’

‘그럼 넌... 지금도 진심이긴 한 걸까?’

하지만 그 말은 입 밖에 꺼내지 않고, 대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다른 곳으로 하자. 결혼식은 내가 알아서 준비하면 된다고, 자기가 말했잖아.”

승오는 멈칫하더니 이내 환하게 웃었다.

“알겠어. 우리 여보가 정하는 거면 뭐든 좋아. 한 달 뒤에 나한테 멋진 서프라이즈 결혼식 보여줘야 해.”

하니는 아무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조용하고 단정하게 앉아 있는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고요하고, 아름답고, 아무것도 들키지 않는 얼굴.

승오는 그 모습에 눈길을 떼지 못했다. 다정한 척 하니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며 속삭였다.

“여보... 우리 요즘 너무 바빴잖아. 그동안 너무 안 했더라...”

하니의 어깨가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아무 내색 없이 몸을 살짝 피하곤 일어섰다.

“좀 피곤해서... 다음에...”

승오가 반응할 틈도 없이, 하니는 2층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핸드폰을 들었다.

전화가 연결되자 이름을 또렷이 말했다.

“안녕하세요, 이하니입니다. 제 그림, 『봄』은 판매 안 하기로 했어요. 내려주세요.”

전화를 끊고, 하니는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경매 사이트에 접속해, 잠시 전까지 가장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던 자기 작품 『봄』이 목록에서 사라진 걸 확인했다.

이어 하니는 비밀번호가 걸린 한 폴더를 열었다.

그 안엔 그림 이미지 수백 장이 정리돼 있었다.

그중 『봄』을 다시 클릭했다.

초봄의 바람 속, 백매화가 흩날리고, 그 꽃잎 속에 살짝 스쳐 가는 듯한 까치의 형상이 숨어 있었다.

세밀하지만 과하지 않고 생기와 감정이 살아 있는 그림이었다.

이 그림은 현재 경매가 8억 원까지 올라간 상태였다.

왼쪽 하단에 작게 쓰인 두 알파벳.

HS.

하니(Hani)와 승오(Seung-oh)의 이름 이니셜.

하니가 수년간 화가로 활동할 때 써온 활동명.

불과 보름 전, 하니는 결혼을 이유로 3년간 활동 중단을 선언했었다.

임신 준비, 출산, 그리고 가정에만 집중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그걸 기념하며 특별히 완성한 작품이 바로 『봄』이었다.

새로운 출발을 축복하는 의미로, 판매에 올린 첫 번째 작품.

하지만 이제 그럴 이유는 없었다.

하니는 깊게 숨을 내쉬고, HS 계정으로 마지막 글을 남겼다.

[안녕하세요, HS입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오늘부로 영구 은퇴를 선언합니다.]

[『봄』은 제가 결혼과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완성한 작품이었지만, 이제 그 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심이란 건... 오래가지 않더군요.]

[자신을 더 사랑하세요.]

[앞으로 이 세상에 HS는 없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업로드 버튼을 누르자, 수년의 활동이 그 자리에서 끝이 났다.

하니는 바로 새로운 계정을 만들었다.

ID는 영어로 ‘Hope’.

희망.

삶의 새출발, 그리고 자신의 진짜 이름으로 살아갈 날들을 위한 준비.

앞으로의 인생에서 이하니는 더 이상 강승오와 엮이지 않을 것이다.

하니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때, 거실에서 갑자기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승오의 핸드폰이었다.

계속 울리는데도, 받을 기색이 없었다.

한참을 울리자, 하니는 이상한 기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로 나가보니, 승오는 어디 간 건지 없었고, 핸드폰은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하니는 천천히 핸드폰을 들었다.

화면에 떠 있는 두 글자.

‘비서'였다.

‘백권아...’

하니의 손이 저절로 굳게 쥐어졌다.

그 순간, 벨소리가 멎더니 곧바로 메시지 알림이 떴다.

[오빠, 진짜 달빛 안 올 거야? 연하 언니도 기다리고 있어.]

달빛.

승오가 자주 가던 강남의 바.

그리고 강연하.

승오의 사촌 누나.

어릴 때부터 누구보다 승오와 친했던 사람.

하니의 호흡이 잠시 멎었다.

‘연하 언니까지... 알고 있었던 거야?’

‘백권아의 존재를, 강승오가 날 배신하고 있다는 걸...’

‘다 알면서, 내 앞에선 아무 말도 안 했던 거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하니는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주저 없이 차 키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확인해야 해. 이대로는 안 돼.’

하니는 그대로 달빛으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한 후, 직원에게 VIP 룸 위치를 물어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 끝에 다다르기도 전에 문 안쪽에서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알았어. 승오야, 술은 그만. 우리 둘이 한 잔씩만 더 해주면 되잖아.”

강연하였다.

하니는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챘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하니는 문틈 사이로 안을 들여다봤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풍성한 웨이브 머리의 연하.

그녀는 승오와 권아의 맞은편에 앉아, 두 사람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잘 어울리는 부부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사람처럼.

불과 며칠 전, 식사 자리에서 하니랑 승오를 그렇게 축복하던 사람인데...

그날, 연하는 하니와 승오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나 이런 커플 처음 봐. 진짜 운명 같아. 너희 둘 결혼 안 하면, 난 사랑 같은 거 안 믿을 거야.”

‘그 말... 진심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지... 속으로 비웃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이제 그 축복을 백권아한테 넘겨준 거야?’

하니는 문밖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동시에 가슴속이 시퍼렇게 식어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따뜻했던 감정이 차디찬 절망으로 바뀌는 데는 단 몇 초면 충분했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사람인가 봐...’

‘아무도, 단 한 사람도 내 편은 없었어.’

그 순간, 하니의 마음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무너졌다.

권아는 볼을 붉히며 배를 조심스레 감싸 안았다. 그러고는 입꼬리를 수줍게 내리며 말했다.

“언니, 술은 오빠랑 같이 드세요. 저는... 이제 못 마셔요.”

그 말에 안쪽의 연하와 바깥쪽의 하니가 동시에 굳어졌다.

연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설마... 권아 씨, 우리 승오 아이 가진 거야?”

권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였다.

“네... 오빠가 이 아이는 우리 사랑의 증거라고 말했어요. 자기랑 나, 셋이 잘 살자고 했고... 오빠 소유의 부동산 중에서 제가 마음에 드는 곳 골라서 편하게 지내라고도 했어요.”

연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블루스카이’ 어때? 강 건너라 공기도 좋고, 조용하고, 경치도 끝내주잖아.

태교하기 딱이지.”

하니는 문밖에서 한 발짝 휘청였다.

‘블루스카이’는 하니와 승오가 다음 달 결혼식을 마친 뒤 신혼집으로 들어가기로 한 고급 주택단지였다.

어두운 조명 아래, 승오의 옆모습이 차갑게 윤곽을 드러냈다.

그는 짧게 숨을 멈췄다가 이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미소 지었다.

“그래. 며칠 안에 정리해서... 권아야, 네가 블루스카이, 그 집에 들어가 있을 수 있게 할게.”

연하는 장난스레 눈짓하며 다리를 꼬고 몸을 돌렸다.

“야, 근데... 하니도 블루스카이 들어가잖아? 이제 어쩌려고?”

승오는 그제야 표정을 조금 굳히며, 낮고 단호한 톤으로 말했다.

“누나, 하니한테는 절대 말하지 마. 결혼 전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넘어가야 해. 하니한텐 더 좋은 집 골라줄 테니까, 결혼식까지만 조용히 지나가자.”

그 옆에서 권아의 웃음이 순간적으로 딱 굳었다. 억지로 웃음을 지었지만, 입꼬리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문밖에 서 있던 하니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든 게 우스웠다.

‘결혼은 나랑 하고, 애인한텐 따로 집 사 주고... 아이까지 낳아서 키울 생각이었네?’

‘그럼 나는 뭐야?’

‘강승오 눈에...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쉽게 속이고, 숨겨두고, 짓밟아도 되는 존재가 된 거야?’

복도 반대편에서 한 알바생이 하니 쪽으로 걸어왔다.

하니는 눈빛을 바짝 세우며 몸을 살짝 틀어 알바생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또렷하고 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요. 혹시 강승오 씨, 여기 바에 계신가요?”

그 말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던 안쪽에서도 선명하게 들렸다.

VIP룸 안, 잔잔하던 공기가 단숨에 얼어붙었다.

연하, 권아, 승오... 모두가 동시에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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