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허아연이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주현우 씨, 오예은 씨가 당신을 살렸다고 해서 우리 결혼 생활 중에 당신이 한 일들이 지워지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나를 대했던 당신의 태도는 오씨 가문이나 오예은 씨가 당신을 살렸다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요."주현우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허아연이 차분하게 이어 말했다."나에 대한 당신의 오해 때문에 3년 동안 나를 냉대하고 힘든 시간을 감당하게 하는 건 말이 안 돼요." "그리고 주현우 씨, 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이 얼만데 당신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오해했다는 게 솔직히 마음에 많이 걸렸어요."경주 그룹에 들어간 건 부부니까 같은 곳을 바라보며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주현우도 허아연의 노력을 알아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법이었다. 열심히 노력한 행동이 상대방 눈에는 전혀 다른 의도로 보이기도 했다.말하는 사람은 뜻이 없어도 듣는 귀에는 다르게 들린다는 게 이런 거겠지. 자신의 진심이 남들 눈에 속셈과 꿍꿍이로 보일 줄 진작 알았으면 애초에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경주 그룹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가끔 아무 의미 없는 희생도 있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진리였다.허아연이 3년간의 결혼 생활 이야기를 꺼내자 주현우가 웃으며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건 절대 못 넘어가겠어?" "아레아 베이에서 지내기 정 싫으면 다른 집으로 가자. 아니면 이 집에서 살고 싶으면 내가 이쪽으로 와서 있을게." 주현우의 말에 고개를 돌리고 한참 동안 바라보던 허아연은 시선을 거두고 담담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봤다.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고급 승용차에 기대어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고 드라마 촬영이라도 하는 줄 알고 눈길을 떼지 못했다. 손에 생수병을 쥔 채 차에 몸을 기댄 허아연은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가 그제야 주현우를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주현우 씨, 3년 동안 사실 나 정말 힘들게 지냈어요." 말을 마친 허아연은 다시 침묵했다. 한참이 지나서
허아연도 오예은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오예은은 마음씨가 착한 사람이었다.아직도 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었다. 허아연 엄마가 돌아가고 이듬해, 주민경과 함께 행사에 참석했을 때 임윤아 일행이 엄마 없다며 놀렸던 일이 있었다. 그때 난감해하는 허아연을 도와준 사람이 오예은이었다. 심지어 임윤아 일행을 단단히 혼내고 한참 동안 허아연을 위로하며 다독여주었다.그 뒤로도 마주칠 때마다 오예은은 허아연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었고 유용한 과외서적도 여러 권 선물했었다.오지은과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다만 어릴 때부터 몸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들은 적 있었다. 고개를 돌린 허아연을 보던 주현우가 살며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오예은이 나를 살려줬어."그 말에 허아연은 꼼짝도 하지 않고 주현우를 바라봤다.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허아연의 옷자락도 흔들렸다.아무 말 없이 쓸쓸한 눈빛으로 옛일을 추억하는 주현우를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주현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능 끝나고 다 같이 놀러 갔을 때 나랑 오예은이 산 아래에 뭐 사러 가다가 산 중턱에서 차가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뒤집어졌어. 조수석 문이 튀어 나가면서 오예은은 밖으로 튕겨 나갔지.""나는 차 밑에 깔려서 나가질 못하고 있었는데 오예은이 두 시간 넘게 산 아래로 달려가서 사람들을 불러온 거야. 오예은 몸 상태가 어떤지 너도 알잖아,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 "사람들이 차를 들어 올려서 나를 구조하자마자 차에 불이 붙었어.""그 일은 완전히 비밀에 부쳐져서 민경이도 몰라.""그러다 오예은이 세상을 떠났고 그 신세를 진 것 때문에 그동안 오씨 가문을 챙겨준 거야. 따로 좀 챙겨준 것때문에 오지은이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은데 내가 똑똑히 일러둘게. 오지은은 우리 사이에 걸림돌이 될 수 없어." 오예은의 병에 대해서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오예은과 사귀었던 과거도 그냥 덮어버렸다. 허아연과의 결혼 생활을 이어가고 싶은 지금 꺼낼 이야기가 아니었다
허아연은 잠시 멈추었던 발걸음을 다시 옮겨 주현우 쪽으로 다가가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돌아왔어요?"허아연이 걸어오는 걸 본 주현우는 차에 기댔던 등을 떼고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느긋하게 말했다."내가 연락하지 않고 찾아오지 않으면 허아연 넌 죽어도 먼저 연락하지 않을 거야?"허아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주현우가 다가와 어깨에 걸친 가방을 받아 들며 말했다."점심에 메시지 보냈잖아, 일 끝나면 전화하라고. 왜 전화 안 했어?"막 입추인 오늘은 며칠 전보다 날씨가 훨씬 선선해졌고 밖에서 들리던 벌레 소리도 오늘 밤은 한결 줄어들었다.흰 가로등 불빛이 두 사람을 비추었다. "휴대폰 배터리가 없었어요."허아연의 해명에 주현우는 팔을 당겨 품 안에 끌어안고 턱을 어깨에 얹은 채 약간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이렇게 오랫동안 전화 한 통 없었는데 내가 밖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지도 않았어? 누가 괴롭히지는 않나 걱정도 안 됐어?"갑작스러운 포옹에 주현우의 어깨에 턱을 살포시 콕 찍은 순간 병원 소독약 냄새가 허아연의 코를 찔렀다.허아연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두 손으로 주현우의 가슴을 살며시 밀어내며 품에서 빠져나와 담담하게 말했다."당신 성격에 다른 사람 괴롭히지 않으면 다행이죠."주현우는 품에서 빠져나가는 허아연을 바라보다가 오른손으로 얼굴을 조금 힘주어 감싸며 말했다."며칠 못 봤는데 안게도 못 해?"허아연이 말하기도 전에 주현우가 얼굴을 감싼 채 고개를 숙여 바라보며 먼저 말을 이었다."오지은이 올린 피드 봤어? 신경 쓰였어?"주현우가 그 얘기를 꺼내자 허아연은 그제야 주현우를 바라보며 손을 떼어내고 차분하게 말했다."주현우 씨, 이러는 거 좋지 않은 행동이에요.""나랑 이혼 절차 다 끝내고 난 다음에 다른 관계 시작하는 게 맞아요. 그게 상식에도 맞고 도리에도 맞는 거예요."한없이 진지한 허아연을 보던 주현우는 피식 웃음이 났다. 어릴 때와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웃음기를 거둔 주현우가 말했다."내가 진짜 다
"지은이가 무슨 잘못을 했거나 허아연 그 계집애 기분 나쁘게 했다면 우리 세 식구가 같이 가서 사과할게. 현우야, 네가 하라는 대로 어떻게든 사과할게.""그런데 현우야, 오늘은 예은이랑 지은이 생일이야. 예은이도 우리 이런 모습 보려고 하지 않을 거야." 이은빈이 오예은을 언급하며 오늘이 생일이라고 하자 주현우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오지은에게서 시선을 거둔 주현우는 이은빈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아주머니, 볼 일 있어서 먼저 회사로 돌아갈게요."주현우의 말에 이은빈이 황급히 말했다."밥 먹을 시간도 됐는데 밥 먹고 가.""괜찮아요. 천천히 드세요."말을 마친 주현우는 병실에 더 머물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떠나는 주현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오지은의 눈빛이 쓸쓸해졌다. 그때, 이은빈이 문을 닫으며 말했다."지은아, 너 원래 그런 애가 아니잖아. 멍청하게 허아연을 건드릴 애가 아닌데 왜 그랬어? 앞으로는 좀 조심해. 허아연과 좀 거리를 두고 현우 기분 나쁘게 하지 마."오지은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은빈이 이어서 말했다."프로젝트에 관해서는 네 아빠가 현우 찾아가서 얘기하면 어느 정도는 체면 봐줄 거야."오지은은 이은빈의 말을 들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병실 문만 뚫어지게 바라봤다.'주현우는 내 거야, 분명 내 거야.' 이토록 오래 기다렸는데 절대 다른 사람한테 넘겨줄 수 없었다.병원을 나온 주현우는 먼저 묘원에 들렀다가 다시 차를 몰아 회사로 돌아갔다.시내로 돌아오는 길에 휴대폰을 확인하니 전서진과 심유환이 보낸 메시지 몇 통과 주민경의 부재중 전화 두 통이 있었다.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인수하러 출장 간 곳에서 일이 생겨서부터 돌아오기까지 허아연은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그 생각이 든 주현우는 저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제기랄, 정말 고집스럽다니까."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 휴대폰을 들어 바로 허아연의 번호를 눌렀다.그런데 신호만 가고 받지를 않았다.연달아 몇 번을 더
허아연도 바쁜 일정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주현우가 그날 한 소란도 어느새 거의 잊혀졌다.그 뒤로도 며칠간 주현우는 연락이 없었다. 돌아왔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어느 날 오전, 유건희, 한민규와 함께 정부 회의에 참석해 회의실에서 다른 관계자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심심했던 허아연은 sns 피드를 넘겨 보았다.오랫동안 잠잠하던 오지은이 올린 게시물을 발견했다.병원을 배경으로 왼손을 들어 약지에 낀 반지를 찍은 사진이었다. 주현우의 것과 같은 반지였다.역광으로 찍은 사진은 몽환적이고 아름다웠다.[잊지 않을 거라는 거 알아.]사진 속 오른쪽 귀퉁이에 훤칠한 실루엣이 걸려 있었다. 다 담기지는 않았지만 허아연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주현우였다.너무 오래 알고 지낸 탓에 단숨에 알아볼 수 있었다. 사진을 열어보지도 않고 일부러 더 오래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허아연은 담담하게 한번 보고는 자연스럽게 오지은의 게시물을 넘겼다.주민경이 올린 엉뚱한 게시물이 나오자 허아연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좋아요'를 눌렀다.잠시 뒤 회의 참석자들이 들어오자 허아연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이내 노트를 펼치고 펜을 들어 회의 내용을 꼼꼼하게 받아 적었다.점심에는 유건희, 한민규와 함께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권승준을 마주쳤다.권승준이 직접 사비를 들여 주방에 음식 몇 가지를 추가했다.허아연과 몇 번 같이 밥을 먹으면서 소고기 볶음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던 권승준은 주방장에게 소고기 볶음과 소고기 수육을 부탁했다.배식 아주머니가 반찬을 가져오자 권승준이 웃으며 허아연에게 말했다."허 선생님, 주방장님 솜씨가 좋은데 특히 소고기 요리가 맛있거든요. 한번 먹어봐요."말하며 새것인 젓가락으로 소고기 볶음을 집어 허아연 앞에 놓아주었다.허아연이 다급하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감사해요, 비서실장님."권승준이 웃으며 유건희와 한민규에게도 말했다."유 대표님, 한 주임님은 저희 식당 단골이니 따로 소개 안 할게요."한민규가 시원스
저녁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허아연은 어느 정도 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주현우가 이번에 출장 간 건 인수 협상 때문이었는데 상대방이 막판에 가격을 올리더니 현지 정부까지 끌어들이며 압박을 가한 것이다. 주현우가 크게 화를 내며 양측 모두 팽팽하게 맞선 상황이 되어버렸다.주현우가 그만 떠나려 하자 상대방이 만류했고 현지 정부도 중재에 나서며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쓰고 있었다. 주현우 성격에 순순히 물러설 리 없었다.혼자 해외에 있는 주현우가 걱정됐는지 주석진도 직접 찾아갔다. 주민경이 쏟아내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허아연은 끝까지 대화에 끼지 않고 옆에서 조용히 반찬만 집어주었다.아홉 시가 넘어 모임이 끝나고 전서진이 허아연을 바래다주었다.파란색 벤틀리 안에서 전서진이 두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허아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아연아, 다리는 다 나아가?"허아연이 웃으며 답했다."많이 좋아졌어요. 다음 모임엔 내가 운전할 수 있을 것 같아요."전서진이 다시 물었다."요즘 현우랑은 어때? 요 며칠 연락 왔었어?"허아연이 담담하게 대답했다."며칠 전엔 전화가 왔었는데 요즘은 연락이 없어요.""협상 중이라 그럴 거야.""사실 현실 속 기업 간 싸움은 그렇게 거창하지도 않아. 얼마 전에는 장성 회사의 대주주 두 명이 회의실에서 주먹다짐을 했다잖아."허아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주주총회가 꽤 박진감 넘겼겠네요."허아연이 웃는 걸 본 전서진이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현우랑 이혼할 생각이야? 기회를 한 번도 주지 않고?" 전서진이 주현우 얘기를 꺼내자 허아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허아연이 앞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기회를 주지 않는 게 아니라 너무 많이 준 거예요."허아연이 다시 말을 돌렸다. "참, 서진 씨. 저번에 스타라이트 프로젝트에 투자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유 대표님이랑 얘기 나눠봤어요?"허아연이 말을 돌리자 전서진도 더 이상 주현우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결혼 생활은 남이 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