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물론 우리 오빠 편드는 건 아니고 사실이 그렇다는 거지. 오빠가 널 좋아한다고 해서 너도 좋아할 필요는 없잖아. 꼭 다시 만날 필요도 없고."주민경을 내려다보며 그 말을 듣고 있자니 허아연은 문득 엄마가 된 기분이었다. 주민경이 정말 다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 뒤 허아연도 샤워를 마치고 두 사람은 침대에 누워 이야기를 나눴다.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적어도 허아연과 주민경 사이만큼은 그랬다.……주말이 지나고 화요일이 되자 경주 그룹과 스타라이트 테크, 동승 그룹의 협력은 마침내 세부 조율까지 끝나 계약서도 완성됐다.두 지역이 함께하는 대규모 기술 협력이다 보니 취재진이 구름처럼 몰렸고 국내외 언론은 물론 각계 주요 인사들까지 자리했다.단상에 오른 권승준은 교진시 정부를 대표해 동승 그룹의 교진시 진출을 환영하고 세 회사의 협력 성사를 축하했다.이어 각계 주요 인사와 협력사 관계자들의 발언이 끝나자 주현우와 안서준, 유건희가 사람들 앞에서 협약서에 사인했다.조명이 단상을 환하게 비추는 가운데 맨 앞줄에 앉은 허아연은 오늘의 협력을 축하하며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오성 그룹 오지은도 입장권을 구해 참석했지만 자리가 한참 뒤였다.멀리서 허아연을 바라보던 오지은은 동승 그룹의 고급 기술자이자 안씨 가문의 둘째 딸이라는 신분까지 얻어 승승장구하는 모습에 속이 뒤틀렸다. 가진 것 하나 없고 부모조차 없던 허아연이 어떻게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온 걸까?스포트라이트 아래 눈부시게 빛나는 주현우를 다시 본 순간, 오지은은 문득 두 사람 사이가 너무 멀게 느껴졌다.조금이라도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행사에는 여러 첨단 기술 기업뿐 아니라 교진시의 원로 전문가들도 참석했다.권유성도 자리하고 있었다. 10시가 넘어 세 회사의 서명이 끝나자 허아연과 지일우가 기술 대표로 무대에 올라 기술 부문 발표를 했다.관객석의 주현우는 무대 위에서 당당하고 여유롭게 프로젝트 기술을 설명
그래서 안서준이 묻기 전에 허아연이 먼저 설명한 것이었다.설명을 들은 안서준이 담담하게 말했다."아연아, 주현우 일만큼은 이성적으로 판단했으면 좋겠어. 업무상 협력 외에는 주씨 가문이든 주현우든 조금도 엮이지 않았으면 해."허아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안서준이 못을 박았다."2년 전 같은 모습, 나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주민경 씨는 예외야. 민경 씨와 가깝게 지내는 건 상관없어."몇 번 만나보니 주민경은 꿍꿍이라곤 없는 사람이었다. 허아연을 해치기는커녕 온 힘을 다해 지켜줄 사람이어서 두 사람이 가까이 지내는 건 반대하지 않았다.안서준은 확실히 좀 독단적인 사람이었다. 예전부터 늘 그랬지만 유독 허아연은 더 많이 챙겼다. 그만큼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었다. 안서준의 당부에 허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같은 구덩이에 두 번 엎어지진 않을 거예요."허아연의 눈빛에 담긴 단호함을 본 안서준은 바지 주머니에서 오른손을 꺼내 허아연의 머리를 가볍게 톡 쳤다.요즘 안서준은 사소한 행동 하나까지 조심하며 허아연이 괜한 생각을 하거나 곤란해하지 않도록 애썼다. 안서준의 그윽한 눈빛에 허아연이 웃으며 말했다."걱정 마요. 나 자신을 안쓰럽게 만들지 않아요." 허아연의 다짐에 안서준은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그래."안서준이 이어서 말했다."그럼 민경 씨와 같이 일찍 쉬어. 난 호텔로 갈게.""네, 배웅해줄게요.""혼자 내려가면 돼. 괜히 너만 또 혼자 올라와야 하잖아."안서준은 허아연에게 현관까지만 배웅하게 하고는 문을 닫고 들어가라고 했다.안서준이 배웅을 마다하자 허아연도 굳이 고집부리지 않고 문을 닫고 들어갔다.엘리베이터 앞에서 현관문 닫히는 소리를 들은 안서준은 고개를 돌려 아파트 문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허아연을 강성시로 못 데려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서준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허아연이 과거를 잊고 안서준을 받아들여 줄 수 있다면.얼마나 좋을까.어떤 상처도 받지 않게 지
안서준이 집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자 주민경이 설명을 보탰다."아연이는 집 좁은 거 신경 안 써요. 어릴 때부터 워낙 소박해서 허영심 부리는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교진시를 떠나기 전에도 이 집에서 한동안 살았고요.""그때도 자주 놀러 왔었는데 아연이는 여기서 지내는 거 분명 좋아할 거예요."안서준이 입을 열기도 전에 주민경이 말을 이었다."지난 2년 동안 이 아파트와 허씨 본가 다 제가 계속 관리해 왔어요. 이 아파트 먼저 아연이 명의로 돌려놓을 거고 허씨 본가는 아연이가 서두를 거 없다고 했어요.""허씨 본가 명의를 넘기면 정체가 드러나서 동승 그룹이나 안씨 가문에 영향 줄까 봐 걱정하더라고요.""아연이가 워낙 은혜를 잊지 않는 성격이라 이제 무슨 일이든 안씨 가문부터 생각해요."안서준은 쉴 새 없이 설명을 늘어놓는 주민경을 담담하게 바라보기만 했다.사실 안서준은 집이 좁다는 말밖에 한 게 없었다. 다만 주민경이 허아연을 진심으로 아끼는 친구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좀 철없어 보여도 허아연을 가족처럼 여기고 있었다.안서준이 아무 말 없이 살피듯 쳐다보기만 하자 주민경은 괜히 긴장이 됐다.자라 온 환경이 환경인 만큼 어릴 때부터 별별 사람을 다 만나고 웬만한 일은 다 겪었지만 이렇게 긴장하게 만드는 사람은 안서준이 처음이었다.만만치 않은 남자였다. 둘째 오빠인 주현우보다도 더 만만치 않았다.안서준이 느긋하게 집 안을 둘러보는 내내 주민경의 시선은 그 뒤를 따라다녔다.안서준이 손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자 주민경이 불쑥 물었다."안 대표님, 우리 둘째 오빠 많이 싫어하시죠?"주민경의 물음에 안서준이 피식 웃더니 주민경을 바라봤다."제가 주민경 씨 둘째 오빠를 좋아해야 하나요?""아니요. 그냥 두 분이 마주칠 때마다 은근히 재밌어서요.""주민경 씨 둘째 오빠와 한판 붙으면 구경할 생각이에요?"주민경은 말문이 막혔다.안서준은 말이 거침이 없었고 상대 체면도 전혀 봐주지 않았다.두 사람이 서로 바라보며 팽팽히 맞서고 있을 때 허아
주현우와 안서준이 들어오자 허아연은 예의를 차려 두 사람에게 차를 따라주었다.허아연이 건넨 찻잔을 받아 든 주현우의 눈빛이 복잡해졌다.오전에 왔을 때는 차 한 잔 내주지 않았다.지금은 안서준 덕분에 얻어 마시는 셈이었다.허아연에게는 안서준이 더 중요했다.사실 지금 허아연에게는 누구든 주현우보다 중요했다.심유환이 주방에서 요리하는 동안 전서진과 하준서는 거실에서 안서준, 주현우와 이야기를 나눴다.함께 대화하는 듯했지만 실제로는 두 사람이 주먹다짐이라도 할까 봐 지켜보는 것이었다.전에 이미 주먹다짐을 벌인 적이 있었다.저녁을 먹고 전서진 일행이 돌아가자 허아연은 아래층까지 배웅했다.안서준이 남아 있어 떠나고 싶지 않았던 주현우지만 주민경이 오늘 밤 허아연 집에서 자고 가겠다는 말에 그제야 일행을 따라나섰다. 아래층.건물 입구까지 배웅 나온 허아연이 말했다."서진 씨, 준서 씨, 유환 씨, 오늘 와줘서 고마워요. 시간 날 때 또 봐요."옆에서 습관처럼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있던 주현우는 다른 사람들에게만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허아연을 말없이 바라보았다.마치 전서진 일행을 따라 덤으로 온 사람 같았다.세 사람이 새삼스럽게 뭐가 고맙냐고 답한 뒤에야 허아연은 주현우를 돌아보았다. "주 대표님도 오늘 와줘서 고마워요."허아연이 자신에게도 인사하자 주현우는 순식간에 기분이 풀렸다."꼭 그렇게 예의를 차려야 해? 꼭 주 대표님이라고 불러야겠어?"느슨하게 팔짱을 낀 허아연은 주현우를 올려다보며 태연히 말했다."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부르잖아요. 서진 씨나 유환 씨는 아무 말도 안 하는데 왜 당신만 불만이 많아요?"날카로운 말투는 아니었지만 태도만큼은 분명했다.주현우는 한 방 먹고 말문이 턱 막혔고 전서진과 하준서는 옆에서 몰래 웃음을 참았다.주 대표님이 호의를 당연하게 여기고 더 바라려 든다고 생각했다.허아연이 오늘 이만큼 체면을 세워준 것도 감지덕지인데 아직도 만족을 못 하고 있었다.한바탕 웃던 하준서가 말했다."현우
현관 앞.주현우를 본 순간 안서준의 표정도 굳었다.하지만 전서진과 심유환 일행이 와 있다는 걸 떠올리자 주현우가 있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허아연이 부르지 않았어도 전서진 일행이 어떻게든 불렀을 것이다.집 안을 흘끗 들여다본 안서준은 다시 주현우에게 시선을 돌려 위아래로 훑어보고 나서야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인사했다."공교롭네요. 주 대표님도 여기 계셨네요."적대적인 눈빛에도 주현우는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안 대표님, 귀한 손님이 다 오셨네요. 들어오시죠."안서준이 바라보다 천천히 안으로 들어서자 주현우가 주도권을 잡듯 말했다."저녁에는 별다른 음식을 준비하지 못했으니 있는 거 간단히 드시죠."남자 주인처럼 행세하는 주현우를 돌아보는 안서준의 눈빛은 한없이 날카롭고 매서웠다.한참 주현우를 뚫어져라 보던 안서준이 차분하게 말했다."아연이 집이 곧 제 집이나 마찬가지니 대충 먹어도 상관없어요. 다만 주 대표님은 본인 처지를 제대로 아셔야겠네요. 아연이는 주 대표님을 반기지 않는 것 같으니까요."안서준이 어떤 사람인가?전서진이나 심유환, 하준서와는 차원이 달랐다.주현우에게 손찌검을 하거나 허아연의 집에서 당장 꺼지라고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예의를 차린 셈이었다.그렇게 하지 않은 건 주현우의 체면을 봐줘서가 아니라 허아연이 중간에서 난처해질까 봐서였다.거침없이 말을 쏟아내는 안서준을 보며 소파에 앉아 있던 주민경이 고개를 들어 현관에 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역시 안씨 가문의 장남이자 허아연의 든든한 버팀목다웠다. 화끈하고 직설적인 말은 속이 뻥 뚫릴 만큼 거침없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고 안서준의 대수롭지 않은 말에 주현우는 이미 기분이 상했다.주현우가 웃으며 말했다."안 대표님, 제가 아연이와 함께할 때 안 대표님은 어디 계셨는지도 모르겠네요."주현우가 허아연과의 과거 얘기를 하자 안서준이 코웃음을 쳤다."오래 알았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결국 아연이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허아연의 심드렁한 태도를 지켜보던 주현우는 화도 나고 어이도 없었다.문제는 그런데도 자꾸 마음이 쓰이고 허아연에게 감정이 휘둘린다는 거였다.허아연은 주현우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일에만 몰두했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주현우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고개를 돌리며 제 처지가 어이없어 헛웃음을 흘렸다.그러다 곰곰이 다시 생각해 보니 허아연은 돌아왔고 이렇게 얼굴을 보며 티격태격 말다툼까지 할 수 있었다.그것만으로도 주현우는 더없이 만족스러웠다.허아연이 곁에 있고 무사히 살아 있기만 하면 그보다 좋은 건 없었다.주현우는 아무렇지 않은 척 허아연에게 다가가 주머니에서 오른손을 꺼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돌아와서 다행이야. 무사하면 그걸로 됐어."갑자기 누그러진 주현우의 태도에 허아연은 키보드를 두드리던 두 손을 잠시 멈춘 뒤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이번에 돌아온 뒤 주현우는 예전만큼 날카롭지 않았고 무슨 일이든 허아연에게 져주고 있었다.사실 허아연도 주현우와 말다툼을 하거나 일부러 약을 올릴 생각은 없었다. 다만 주현우가 원하는 걸 줄 수 없었고 이제는 주고 싶지도 않았다.두 사람은 바라는 게 애초에 달랐다.허아연이 더는 말하지 않자 주현우가 손을 거두며 말했다."그럼 일해. 난 거실에 있을게."허아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답했다."그래요."주현우가 감정 얘기를 꺼내거나 묘한 분위기를 만들지만 않는다면 허아연도 날을 세우며 일부러 힘들게 할 생각은 없었다.……거실로 돌아와 테이블 앞에 앉자 전서진이 말했다."현우야, 아연이 어렵게 돌아왔는데 네가 좀 져줘. 자꾸 싸우지 말고 아연이가 싫어하는 소리도 좀 하지 마."전서진의 충고에 주현우가 어이없다는 듯 눈을 흘겼다."내가 이제 무슨 수로 아연이와 싸워? 안 져줄 수가 있겠어, 듣기 싫은 소리를 할 수가 있겠어?"사과하고 보고 싶었다는 말 외에는 다른 얘기는 입도 뻥긋하지 못했고 겁나서 맞설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잔뜩 억울한 주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