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꼼짝 않고 주민경을 한참 쳐다보던 안서준은 인사도 없이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묻지 않고 곧장 책상 앞으로 걸어가 수화기를 들더니 112에 전화를 걸었다."여기 리츠 호텔인데요……"안서준이 냅다 신고하려는 걸 본 주민경은 빠르게 다가가 전화기를 낚아채 끊어버리고는 두 손으로 팔을 꽉 잡으며 고개를 들고 바라보았다. "안 대표님,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저 볼일이 있어서 찾아온 거예요, 우리 좋게 좋게 지내요."안서준이 주민경을 내려다보며 살짝 힘을 주어 팔을 빼내려 했다.그런데 주민경도 힘이 만만치 않은지라 좀처럼 뺄 수가 없었다. 미간을 찡그린 안서준이 힘을 들였지만 주민경도 그만큼 더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주민경은 힘이 정말 만만치 않았다.만만치 않은 힘에 결국 팔 빼는 걸 포기한 안서준은 주민경을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물었다."주민경 씨, 이렇게 낯선 남자 방에 함부로 쳐들어와서 무슨 사고라도 날까 겁나지도 않아요?" 주민경이 여자인 데다 허아연의 가장 친한 친구였기에 안서준도 굳이 따지지 않았다.안서준의 물음에 주민경이 고개를 들고 웃으며 말했다."안 대표님은 딱 봐도 반듯한 사람이잖아요. 대표님 인성이라면 완전 믿거든요."안서준이 말을 하기도 전에 바로 아부하듯 덧붙였다."안 대표님, 아직 아침 안 드셨죠. 저희 교진시에서 유명한 아침 식사 챙겨왔으니 드셔보세요."주민경은 아부하듯 챙겨온 아침을 안서준의 책상 위에 차려놓았다. 안서준은 수건으로 계속 머리를 닦으며 차가운 태도로 말했다."주민경 씨, 빙빙 돌리지 말고 할 말 있으면 그냥 해요." 주민경은 서두르는 기색 없이 다가가 안서준을 밀듯이 의자에 앉히며 말했다."안 대표님, 서두르지 말고 먼저 제가 챙겨온 아침 식사 어떤지 좀 드셔보세요."말하며 아부하듯 젓가락으로 떡 한 조각을 집어 안서준의 입가에 가져가더니 말했다."안 대표님, 한번 드셔봐요."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이렇게까지 비위를 맞추는 주민경에게 안서준도 여전히 차가운 눈빛과 태도로 못 이기는
주현우가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가 위층으로 올라가려던 순간 로비가 술렁이기 시작했다."대표님 언제 염색하신 거예요?""어머, 대표님 드디어 정신 차리셨나 봐요, 드디어 염색하셨네. 저러니까 훨씬 잘생겨 보이고 덜 답답해 보여요.""목표가 생기셨나 봐요, 연애하시려는 거 아닐까요?""맞아요, 남자가 꾸미기 시작하면 마음에 둔 사람이 생겼다는 뜻이잖아요.""대표님 다시는 결혼 안 하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약속 지키지 않으실 건가 보네요.""안시연 씨예요, 분명 안시연 씨 때문일 거예요. 허 대표님과 똑같이 생겼다던데 대표님이 가만히 계실 리가 없죠."머리가 하얗게 센 뒤로 주현우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친구들이 좀 다듬으라고 몇 번씩 잔소리해도 아예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어차피 허아연도 없는데 신경 쓸 기분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젯밤, 권승준이 허아연 앞에서 잘 보이려는 모습을 보고는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그래서 오늘 아침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머리를 예전처럼 자연스러운 검은색으로 염색한 것이다. 염색하고 나니 기분도 덩달아 좋아진 듯했다.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위층 직원들도 놀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심지어 주석진도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허아연이 세상을 떠난 뒤로 주현우는 아예 넋이 나간 사람 같았는데 특히 머리가 하얗게 센 뒤로는 더 우울해 보였다.보아하니 다시 의욕이 생긴 모양이었다.주석진 곁을 지나가는 주현우는 눈빛도 평소와는 달랐다.잠시 후 주현우가 사무실에 돌아오자 오원빈이 업무 보고를 하러 들어왔다.주현우가 머리를 검게 염색한 걸 본 오원빈도 꽤 놀란 눈치였다.업무 보고를 하는 내내 시선이 자꾸 주현우의 머리로 향했다.고개를 숙이고 오원빈이 건넨 서류를 확인하던 주현우는 자꾸 자기 머리로 향하는 시선에 천천히 고개를 들고 심드렁하게 물었다."내 머리가 그렇게 재밌어?"회사에 들어설 때부터 다들 자기 머리만 쳐다보는 통에 주현우는 사실 좀 어이가 없었다.전에도 원래 이런 색깔이었잖아?주현우의
주현우의 판단으로 권승준과 허아연은 아직 가볍게 만나는 단계일 뿐 다른 관계로 발전한 건 아닌 듯했다. 호텔 앞에 서서 얼마나 오래 생각에 잠겨 있었을까, 주현우는 그제야 차를 몰고 호텔을 떠났다.다만 돌아가는 내내, 에너지 넘치던 권승준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자신의 흰머리가 새삼 신경 쓰였다.……그 시각, 호텔 스위트룸.허아연이 방에 돌아와 씻고 나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안서준이 노크하고 들어왔다.안서준이 방에 들어오자 허아연이 물었다."오늘 태광 쪽과 얘기 잘됐어요?"허아연이 말한 태광 그룹은 실물 기업으로 최근 몇 년간 경영 상황이 크게 악화되며 사장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사옥을 매각하려 했다. 부지를 사서 새 건물을 짓기엔 너무 오래 걸렸기에 안서준은 태광 회사 사옥을 인수하려고 며칠째 접촉 중이었다.허아연의 물음에 안서준이 답했다."가격은 아직 협상 중이야."말을 마친 안서준이 다시 허아연에게 물었다."오늘밤에 또 권승준 만났어?"머리에 흰 수건을 두른 허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같이 강변 산책하고 왔어요."허아연이 순순히 인정하자 안서준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속으로는 계속 허아연이 앞으로 함께 할 사람이 주현우만 아니면 누구든 상관없다고 되뇌었지만 막상 권승준과 가깝게 지내는 걸 보니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다.2년 넘게 보살펴서 겨우 중증 우울증에서 한 걸음씩 벗어난 허아연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싶지 않았다.허아연을 내려다보던 안서준이 손을 뻗어 얼굴을 살며시 어루만졌다.허아연이 안서준의 손을 밀어내고 웃으며 말했다."서준 씨가 며칠 전에 해준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아직 이렇게 젊은데 어떤 일에도 희망을 잃을 필요가 없어요.""주현우는 그냥 주현우일 뿐 전부를 대표하는 건 아니잖아요."허아연이 마음을 다잡은 걸 본 안서준은 웃으며 손을 다시 주머니에 찔러넣고 느긋하게 말했다."참 잘됐네, 내가 마음 열게 해줬더니 다른 사람 만나볼 생각을 다 하고."안서준의 말에 허아연이 귀 옆으로 흘
게다가 오늘 권승준의 옷차림은 평소처럼 딱딱하지 않은 편안한 캐주얼룩이라 허아연과 나란히 서도 제법 잘 어울렸다.차가 계속 앞으로 달리는 동안 두 사람의 대화 주제는 전부 허아연의 업무에 관한 가벼운 얘기였다. 얘기를 나누던 허아연이 무심코 2년 전 일까지 꺼내자 권승준이 더욱 환하게 웃었다. 권승준 앞에서 더 이상 경계하지 않는다는 증거였다.허아연은 권승준을 믿고 있었다.20분쯤 뒤, 차가 강변 주차장에 멈췄고 두 사람은 나란히 강가를 걸었다.업무 얘기를 진지하게 듣던 권승준은 허아연이 무슨 말을 해도 재밌게 느껴졌다. 특히 허아연이 말하는 모습이며 거리감을 두지 않는 편한 모습이 특히 좋았다. "안 선생님,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동승 그룹이 교진시에 지사를 세우려 한다고 들었어요."권승준의 물음에 허아연이 말했다."내륙 쪽이 최근 몇 년 사이 발전이 빠르잖아요. 교진시에 지사를 세우면 저희도 배울 게 많을 것 같아요. 그래서 서준 오빠가 벌써 부지를 물색 중이에요.""잘한 결정이에요. 교진시가 실망시키지 않을 겁니다."허아연이 웃으며 말했다."그럴 거라 믿어요."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두 사람의 손등이 살짝 스쳤지만 허아연은 일부러 피하거나 손을 뒤로 감추지도 않았다.……그 시각, 술집.기분이 다운된 주현우가 전서진과 친구들이 이야기 나누는 걸 듣고 있을 때,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 화면이 갑자기 밝아지며 진동했다.오원빈에게서 온 전화였다.주현우는 바로 휴대폰을 들고 조용한 곳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전화를 받자 오원빈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렸다."대표님, 안시연 씨가 또 권 비서실장님과 따로 만났습니다. 두 사람 지금 강가 산책 중이에요." 오원빈의 보고에 원래도 어둡던 주현우의 안색이 더 볼품없어졌다. 몸을 옆으로 튼 주현우는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담뱃불을 붙였다.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휴대폰을 귀에서 떼어낸 주현우는 결국 싸늘하게 전화를 끊었다.계속 스스로 안시연은 그냥 안시연일 뿐, 허아
전서진이 허아연 얘기를 꺼내자 주현우는 그제야 다시 바라보며 물었다."너도 안시연이 아연이 같아?"옆 소파에 앉은 전서진이 말했다."닮아도 너무 닮아서 의심 안 할 수가 없잖아. 하지만 본인이 인정을 안 하니까 우리도 어쩔 수 없는 거지." 허아연 본인이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에 주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허아연이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주현우 때문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전서진이 기분이 다운된 주현우를 보며 웃었다. "됐어,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아연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그냥 안시연이라고 생각해, 너무 부담 갖지 말고.""그리고 벌써 2년도 넘었잖아, 너도 이제 내려놓을 때가 됐어. 아연이도 지금 이런 네 모습 보고 싶지는 않을 거야."전서진의 위로에도 주현우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마음의 매듭을 풀어줄 사람이 따로 있는 이상 전서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생각이 많아 보이는 주현우 곁을 지키던 전서진은 심유환과 하준서까지 불러냈다.하지만 사람이 많아지고 오랜 친구들이 다 모일수록 주현우는 허아연 생각이 더 났고 기분과 감정 모두 더 복잡해졌다.……같은 시각, 호텔.허아연이 막 연구소에서 돌아오는데 옆에 서 있던 랜드로버가 클랙슨을 울렸다.고개를 돌려보니 권승준이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권승준을 발견한 허아연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비서실장님."허아연의 환한 미소에 권승준도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안 선생님, 이제 일 다 보신 거예요? 저녁은 드셨어요? 괜찮으시면 같이 야식 먹고 산책 좀 할까요?"권승준이 이번에 허아연을 찾아온 건 단도직입적으로 자기 마음을 어느 정도 드러낸 것이었다. 고개를 들어 권승준을 바라보던 허아연은 얘기를 나눌 때면 배우는 것도 많고 방금까지 한참 기다렸을 거라는 생각에 흔쾌히 답했다. "저녁은 방금 먹었으니 산책이나 할까요?" 안서준 말이 맞았다. 아직 이렇게 젊은데 어떠한 일에도 희망을 잃을 필요는 없었다.미래에 희망을 품고 스스로에게도 기회를
"앉으세요, 아저씨." 차분하게 오중근을 바라보는 주현우는 카리스마로 제압했다.나이는 오중근이 훨씬 많았지만 말이다. 주현우의 말에 오중근이 사무용 책상 맞은편에 앉았다.자리에 앉은 오중근은 빙빙 돌리지 않고 곧장 본론을 꺼냈다."현우야, 지난번에 네가 오성 그룹과 협력을 중단해서 요즘 회사가 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어.""프로젝트 한두 개만이라도 좀 다시 진행하게 해주면 안 될까? 그래야 다른 회사들도 우리한테 돌을 던지지 않을 거 아니야."주현우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오중근이 또 말했다."그동안 네가 오성 그룹 충분히 많이 도와줬다는 거 알아. 하지만 이대로 가면 오성 그룹은 얼마 버티지 못할 거야.""지난 정을 봐서라도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좋겠다."역시 경험이 많아 노련한 오중근은 오예은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주현우가 그동안 도와준 것에만 고마움을 전했다. 차분한 얼굴로 오중근을 바라보는 주현우는 자신이 완전한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어떠한 관계에서도 완전한 주도권을 쥔 쪽은 주현우였고 그 기회를 누구에게 줄지, 누구를 봐줄지만 결정하면 되는 문제였다. 무표정으로 오중근을 한참 바라보던 주현우가 말했다."아저씨, 제가 오성 그룹을 제외한 건 당연히……"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중근이 다급하게 끼어들었다."현우, 지은이가 철이 없어서 너 화나게 한 거 알아. 지은이가 하지 말았어야 할 짓을 한 거야. 내가 약속할게, 이런 일 절대 두 번 다시는 없을 거야.""나도 많은 걸 바라진 않아, 그냥 보여주기 식으로 프로젝트 한두 개만 다시 살리는 거야. 오성 그룹이 벼랑 끝까지 몰리는 건 정말 원치 않아." "그리고 지은이가 앞으로 절대 너 귀찮게 하거나 안시연 씨 귀찮게 하는 일 없도록 내가 약속할게." 지금 너무 많은 요구를 하면 오히려 욕심부리는 걸로 보여 주현우를 더 화나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알기에 오중근은 일단 오성 그룹이 살아남을 수 있기만을 바랐다.이번 고비만 넘기면 다른 건 일도 아니었다.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