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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作者: 임서아
오지은이 웃는 얼굴로 일어서며 맞이했다.

"방금 아연이 만나서 같이 밥 먹자고 불렀어. 현우야, 괜찮지?"

주현우는 무표정하게 허아연을 힐끗 쳐다보았다.

"네가 기분 좋으면 괜찮아."

주현우는 오지은 옆에 앉았다.

오지은이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방금 아연이랑 얘기 나누고 있었는데 아연이가 너희 두 사람 이혼할 예정이라더라. 그래서 두 사람 이혼하면 아연이에게 좋은 남자 하나 소개해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몇 년을 그냥 낭비하게 할 수는 없잖아."

분명 허아연과 부부 사이인데 주현우는 자연스럽게 오지은 옆에 앉아 있었다.

무덤덤한 눈길로 허아연을 볼 때마다 주현우는 장애물을 넘기듯 무시했다.

허아연은 굳이 따질 마음도, 따질 자격도 없었다.

그저 어색할 뿐이었다.

방금 오지은이 회사에 왔을 때 이미 주현우와 약속이 있다는 걸 짐작했어야 했다.

종업원이 주현우에게 메뉴판을 건넸다. 주현우가 주문하자 오지은이 옆에서 귀띔했다.

"현우야, 내가 좋아하는 것만 시키지 말고 아연이가 좋아하는 것도 시켜."

주현우는 메뉴판을 들고 허아연을 힐끗 쳐다보았다.

불필요한 존재로 느끼는 듯했다.

허아연 자신도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몰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주현우가 메뉴판을 건네는 순간 허아연이 방금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휴대폰이 울렸다.

허아연이 급하게 전화를 받자 김민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중원 그룹 장도원 대표님이 오셨어요. 제2 프로젝트에 현우 대표님 사인이 필요해서 아직 착공이 어렵다고 합니다."

"알았어요. 금방 돌아갈게요."

김민희의 전화를 받고 난 허아연이 오지은에게 말했다.

"지은 언니,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들어갈게요. 두 분 천천히 드세요."

허아연은 두 사람이 답을 기다릴 새도 없이 가방과 휴대폰을 챙겨 바로 자리를 떴다.

식당 밖으로 나온 허아연은 한결 홀가분해졌다. 하늘도 평소보다 훨씬 더 높아진 기분이었다.

……

식당 안, 오지은은 고개를 돌린 채 주현우에게 물었다.

"정말 이혼할 거야?"

주현우는 코웃음을 쳤다.

"허아연 말을 그대로 믿어?"

주현우보다 권력과 세력을 더 중요시하는 허아연이었다.

이혼하고 싶지 않은 건 둘째 치고 정말 이혼한다 해도 치밀하게 계산기를 두드릴 여자였다.

재산 분할만으로 한참을 싸울 것이다.

"아연이도 꽤 진지해 보이던데? 아니면 혹시 네가 이혼하기 싫은 거야?"

주현우는 웃음을 터뜨렸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

그리고 이내 화제를 돌렸다.

"몸은 좀 어때?"

"아주 좋아. 언니가 나를 돌봐주고 아껴주나 봐."

……

허아연 사무실.

협력사 대표와 이야기를 마친 허아연은 배웅하기 위해 일어나 웃으며 말했다.

"장도원 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바로 주현우 대표님한테 사인을 받아서 절대 착공 일정이 지연되지 않게 할게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허아연 대표님."

"별말씀을요. 다 업무를 위한 거죠."

"주현우 대표님께서 이렇게 내조의 여왕을 만난 걸 보니 정말 부럽습니다."

허아연이 웃으며 배웅했다.

협력사를 보낸 뒤, 김민희가 점심 식사를 가져오며 물었다.

"대표님, 오늘 검사 결과는 어떠셨어요?"

허아연은 도시락 뚜껑을 열고 웃으며 말했다.

"다 정상이에요. 문제없어요."

"대표님, 그래도 조심하세요. 지금은 그래도 젊어서 버티는 거지만 결국 다 건강 소모하는 거예요."

"알았어요. 조심할게요."

오래 바쁠 일도, 오래 자신을 소모할 일도 없을 것이다.

조심한다고 말한 것도 잠시일 뿐, 허아연은 밥을 먹자마자 또다시 일에 몰두했다.

저녁에는 또 야근을 이어갔다.

야근이 좋아서가 아니라 어차피 돌아가도 독수공방일 텐데 차라리 바쁜 게 나았다.

한편, 그 시각 주현우도 오늘 밤 접대 자리가 있었다.

한창 식사 자리에서 얘기 중이던 주현우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유서희의 전화였다.

주현우는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현우야, 지금 몇 시야? 왜 아직도 안 돌아와? 제발 며칠만 일찍 집에 오면 안 돼? 좋은 남편 좀 해봐, 응?"

주현우는 반쯤 남은 담배를 쓰레기통에 비벼 끄고 나른하게 물었다.

"엄마, 아레아 베이 가셨어요?"

"그래. 한동안 여기서 지낼 생각이야. 그러니 빨리 돌아와. 아연이도 지금 야근 중이니까 데리고 같이 와."

반쯤 남은 담배를 쓰레기통에 버린 뒤, 주현우는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요."

전화를 끊고 주현우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리고 휴대폰에서 연락처를 찾기 시작했다.

한참을 찾았지만 허아연의 전화번호가 없었다.

저장하지 않은 것이다.

전화번호가 기억나지도 않았다.

어차피 레스토랑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회사를 지나야 했기에 주현우는 굳이 전화하지 않고 바로 차를 몰고 회사로 향했다.

허아연은 여전히 사무실에서 야근 중이었다.

9시가 넘은 시간은 허아연에게 야간 업무 시작에 불과했다.

허아연은 오늘 다른 업무는 하지 않고 인수인계 자료를 정리 중이었다.

곧 이혼할 테니 더 이상 회사에서 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동안 허아연의 손을 거친 업무가 적지 않았기에 미리 정리해야 했다.

이때쯤이면 회사 직원들은 대부분 이미 퇴근한 뒤였다. 몇몇 사무실만 불이 켜져 있었다.

건물 전체가 조용한 편이었다.

허아연은 조용한 사무실이 익숙했다.

키보드를 두드리며 모니터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허아연이 부드럽게 말했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자 고개를 든 허아연은 주현우를 발견하고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 한참이 지나서야 인사했다.

"현우 씨도 아직 퇴근 안 했어요?"

말을 마친 허아연은 급히 일어나 책상 위에 올려둔 서류를 들고 책상 밖으로 나오며 주현우에게 말했다.

"중원 그룹과 협력하는 프로젝트가 곧 착공인데 아직 계약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았어요. 오후에 두 번이나 현우 씨 사무실에 갔는데 자리에 없더라고요. 지금 사인해 줄 수 있어요?"

주현우는 허아연을 한참 바라보다가 그제야 계약서를 받아 훑어보았다.

언제부턴가 허아연은 주현우에게 오직 일 얘기만 할 뿐 다른 대화는 없었다.

계약서에는 문제가 없었다. 주현우는 허아연 책상 위에 있던 사인펜을 집어 계약서의 서명란에 멋들어진 사인을 했다.

주현우가 사인한 계약서를 받아 확인한 뒤, 허아연은 또 업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지금 내가 맡은 프로젝트는 이거 하나예요. 나중에 오원빈 씨한테 인수인계할게요. 다른 업무 자료들도 정리가 되면 현우 씨랑 이사회에 사직서 제출할 거예요."

"참, 비밀 유지 계약서 초안도 작성했어요. 퇴사하면 앞으로 관련 업계에 종사하지 않을 거고 경주 그룹에 관한 어떠한 정보도 비밀로 할 거예요. 그리고 더 준비해야 할 게 있는지 생각해 봐요. 있으면 요즘 같이 준비할게요."

허아연은 금융 전공도, 관리학 전공도 아니었다. 자동화 전공의 산업용 로봇학을 전공했고 스마트 통제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했다.

교진대에 입학하던 해, 허아연은 16살에 거의 만점의 수석 성적으로 합격했고 교수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던 제자였다.

중학생 때부터 스스로 로봇을 모델링했던 허아연은 수많은 대회에 참가해 상도 많이 탔고 심지어 특허까지 있었다.

대학교 4학년 때는 교진대와 다른 두 개의 대학으로부터 대학원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게다가 해외 여러 명문대도 데려가고 싶다며 러브콜을 보냈었다. 하지만 허아연은 주현우를 위해 모든 걸 포기했다.

허아연은 이혼하면 다시 원래 전공으로 돌아가 다시 공부하고 싶었다.

그래도 로봇이나 과학기술을 연구하는 게 더 좋았다.

허아연은 바쁘고 매일 가면을 쓰고 웃는 얼굴로 상대해야 하는 부대표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현우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허아연은 더 이상 주현우의 아내가 아니라 그저 일개 직원 같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허아연을 보던 주현우는 왠지 문득 알 수 없는 착각이 들었다.

허아연은 더 이상 예전의 허아연이 아니었다.

더 이상 열정적이지도, 밝지도 않고 더 이상 주현우에게 잘 보이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주현우는 허아연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엄마가 아레아 베이에 가셨대. 일단 돌아가서 얘기하자."

뭔가 할 말이 남았던 허아연이지만 주현우의 말에 '네'라고 답하고 함께 들고 있던 서류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정리 좀 하고 바로 돌아갈게요."

컴퓨터를 끄고 서류를 서랍에 넣은 뒤에도 주현우가 먼저 가지 않았다는 걸 발견한 허아연은 약간 놀란 듯했다.

주현우가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잠시 주현우를 바라보던 허아연은 주현우가 돌아서서 떠나자 그제야 휴대폰과 가방을 챙겨 따라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주현우는 습관적으로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있었다.

허아연은 옆에 서서 엘리베이터 문만 빤히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실루엣이 흐릿한 엘리베이터 문에 비쳤다.

남보다 더 어색한 사이 같았다.

1층에 도착하자 검은색 마이바흐가 회사 정문 앞에 멈춰 서 있었다.

마이바흐 앞으로 걸어간 두 사람.

허아연은 자연스레 뒷좌석 문을 열고 주현우는 운전석 문을 열었다.

뒷좌석에 타는 이유는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주현우 할머니가 허아연을 데리고 본가에 와서 밥 먹으라고 하던 날, 허아연이 차에 타려고 조수석 문을 열려는데 주현우가 문을 잠가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날 가는 내내 허아연은 난처함에 어쩔 줄 몰랐다.

그날 이후로 다시는 주현우의 차에 타지 않았다.

오늘 밤은……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차가 출발하자 허아연은 한 손에 휴대폰을 들고 말없이 뉴스만 보았다.

주현우를 쳐다보지도, 주현우와 말도 하지 않았다.

차 안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전에는 그래도 열정적으로 주현우에게 일상생활을 공유했었다.

무슨 일이든 제일 먼저 주현우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주현우가 일부러 전화받지 않고, 메시지에 답장하지 않고, 심지어 무시한다는 걸 알고 난 뒤로 침묵하는 법을 배웠다.

주현우도 허아연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집에 도착했다.

마당에 차를 세우고 집에 들어서자 유서희가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그제야 분위기가 한결 좋아졌다.

"아연아, 왔어? 너 먹으라고 국 끓여놨으니까 얼른 와서 따뜻할 때 먹어."

"네, 어머니."

유서희는 허아연만 따듯하게 맞이할 뿐 주현우는 아예 없는 사람 취급했다.

주현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다이닝룸에 들어가 의자를 당겨 자리에 앉았다.

도우미들이 음식을 차렸다.

유서희는 허아연 옆에 앉았다.

"아연아, 나 여가서 며칠 지낼 생각인데 괜찮지?"

허아연은 젓가락을 든 채 급히 고개를 돌려 유서희를 보며 말했다.

"당연히 괜찮죠, 어머니. 지내고 싶으신 만큼 편하게 있으세요."

허아연이 흔쾌히 동의하자 유서희는 바로 환하게 웃었다.

잔뜩 어두워진 표정의 주현우를 본 유서희가 말했다.

"현우야, 나 그렇게 볼 거 없어. 네가 원하지 않아도 소용없거든."

유서희가 또다시 당부했다.

"앞으로 퇴근하면 바로 집에 돌아와서 저녁 먹어. 하루가 멀다 하게 집 비우지 말고."

며칠 지낼 거라고 했지만 사실 유서희는 주현우 감시하러 온 것이었다.

유서희는 이미 허아연이 임신할 때까지 아레아 베이에 머물 작정이었다.

오지은 하나 해결하지 못할 거라고 믿지 않았다.

주현우가 무심하게 고개를 들며 말했다.

"돈 안 벌어도 돼요? 엄마 돈 안 쓸 거예요?"

"누가 한밤중에 밖에서 돈을 벌어? 핑계 대지 말고 얌전히 집에 돌아와."

주현우는 기세등등하게 몰아붙이는 유서희와 말싸움할 생각이 없었다.

저 문만 나서면 누가 감히 간섭할 수 있을까?

허아연은 고개를 들어 주현우를 바라보았다.

이혼하지 않으면 주현우가 점점 더 힘들지도 몰랐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아래층에서 유서희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유서희가 두 사람에게 돌아가서 쉬라고 하며 직접 방문 앞까지 데려다주고 나서야 돌아갔다.

방문이 닫히자 주현우는 정장 재킷을 벗어 소파 위에 툭 던지고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하얀 피부 위로 푸른 핏줄이 손등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때, 갑자기 주현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주현우는 바로 받지 않고 라이터를 들어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서야 휴대폰을 들고 통유리 앞으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

주현우는 뿌연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엄마가 와서 오늘은 안 갈게."

"응, 너도 빨리 들어가서 쉬어."

"그래, 알았어."

"응."

주현우의 말투는 아주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허아연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투였다.

주현우는 뒤에 허아연이 있는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테이블 앞으로 걸어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담배를 눌러 껐다.

방안에는 담배 연기가 가득했다.

허아연은 방에 있는 게 어색했지만 또 나가면 유서희에게 들킬까 걱정되었다.

유서희는 유미 이모처럼 속이기 쉽지 않았다.

주현우는 옆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할 일을 했다.

이도 저도 못하고 있던 허아연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주현우에게 말을 걸었다.

"뉴스에서 봤는데 이제는 이혼할 때 호적 등본이 필요 없대요. 우리 먼저 가서 서류 접수하고 부모님한테는 나중에 말씀드려요."

정책은 며칠 전에 금방 발표되었다.

뉴스를 본 순간, 허아연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건 허아연과 주현우만 동의하면 더 이상 집안 어른들의 허락이 필요 없이 이혼 절차를 밟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 말에 주현우는 고개를 들어 허아연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허아연을 바라보던 주현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급하게 이혼하려는 걸 보니 혹시 밖에 남자라도 생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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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을 못 이겨 쏟아내던 허아연이 다시 감정을 추스르며 말했다."전에 교진시를 떠난 건 당신과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아서였어요. 이제 겨우 당신한테서 벗어나서 깨끗하게 정리했는데 내가 다시 되돌아갈 것 같아요?""돌아갈 수 없어요, 우리 사이는 진작에 돌아갈 수 없게 됐어요.""나도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당신과 함께했던 그 시간들은 다시 떠올리기도 싫어요."말을 마친 허아연은 주현우의 손을 뿌리치며 차갑게 말했다."알아서 잘 처신해요, 내 삶에 더 이상 영향 주지 말고요."매정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현우가 알아듣지 못하고 손을 놓지 않을 것 같았다.하지만 허아연은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돌아서서 떠나는 허아연의 뒷모습을 보던 주현우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그리고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몸을 돌려 앞쪽 화단을 바라봤다.순간 마음이 착잡해지고 가슴이 답답해져서 한참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주현우를 피하려고 죽은 척까지 했던 허아연이었다.그 생각이 든 주현우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두 사람이 대체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된 걸까? 어쩌다 이렇게 사이가 틀어진 걸까?……호텔 안.방으로 돌아온 허아연은 가방을 침대에 내려놓고 침대 끝에 걸터앉아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옷을 챙겨 욕실로 갔다.샤워기 아래 서서 눈을 감고 고개를 젖힌 채 따뜻한 물이 얼굴을 타고 흐르도록 내버려두었다.오늘 밤 한 말을 주현우가 새겨듣고 더 이상 자신의 삶을 방해하지 않기를 바랐다.정말로 더 이상 어떠한 관계로도 얽히고 싶지 않았다.3년의 결혼 생활 동안 평생 겪을 억울함은 다 겪은 것 같았다.그런 일들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같은 시각, 호텔 아래층.차를 몰고 호텔을 떠난 주현우는 곧바로 전서진에게 전화를 걸어 술 마시러 나오라고 불렀다.바에 도착한 전서진은 주현우가 이미 주문한 술을 보고 대뜸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현우야, 너 미쳤어? 몸도 안 나았는데 술을

  • 버린 건 나였지만, 무너진 건 너였다   제438화

    "그러니까 주 대표님도 너무 고집부리지 마세요. 앞으로 살아갈 날이 훨씬 많은데 앞을 보고 나아가야죠.""다른 건 저도 더 드릴 말씀 없고 주 대표님과 따로 나눌 얘기도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좀 더 이성적으로 행동해 주셨으면 해요."방금 한 말은 에둘러 표현한 거였다면 지금 말은 상당히 직설적이었다.운전석에 앉은 주현우는 허아연의 말에 순식간에 눈빛이 어두워졌다.허아연은 여전히 주현우를 용서할 생각도, 솔직하게 다 털어놓을 생각도 없었다.말을 마친 허아연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덧붙였다."시간이 늦었네요, 이만 들어가서 쉬어야겠어요."말을 마친 허아연은 주현우가 여전히 움직이지 않자 직접 몸을 기울여 차량 잠금 버튼을 눌렀다.그리고 바로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허아연이 차에서 내리는 걸 보고서야 주현우도 정신을 차리고 다급하게 운전석 문을 열고 뒤따라 내렸다.허아연 앞까지 달려간 주현우가 손을 뻗어 손목을 잡으며 불렀다."아연아."허아연이 화들짝 돌아서는 순간, 주현우가 다시 품에 끌어안으며 사과했다."아연아,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주현우의 포옹과 사과에 눈을 깜빡이던 허아연은 가슴 한 켠이 이유 없이 답답해졌다.두 손을 주현우의 허리 양옆에 어정쩡하게 걸친 허아연은 무슨 말을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마른침을 삼키며 한참을 생각하던 허아연이 결국 힘없이 입을 열었다."맞아요, 저 허아연이에요.""내가 허아연이라고 이렇게 확신하는 걸 보면 DNA 검사를 해 본 거겠죠."허아연이 담담하게 모든 걸 인정하자 순간 주현우는 더 세게 꽉 끌어안더니 눈시울까지 붉어졌다.곧바로 밀어내지 않고 주현우의 감정이 조금 진정되기를 기다리던 허아연은 두 손으로 가슴을 밀어내고 천천히 품에서 빠져나왔다.그리고 고개를 들어 주현우를 올려다보며 아주 차분하게 말했다."주현우 씨, 이미 다 지나간 일이에요. 우리도…… 이미 끝난 사이예요."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밝히고 주현우가 정신 차리고 이성적으로 받아

  • 버린 건 나였지만, 무너진 건 너였다   제437화

    차 유리창에 비친 주현우의 시선을 허아연도 알아채고 있었다.하지만 여전히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차가 호텔 주차장에 멈추고 나서야 주현우는 몸을 돌려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봤다.결혼 전에도 주현우는 이렇게 그윽한 눈빛으로 허아연을 바라보곤 했다.허아연의 일기장을 발견한 뒤로는 다시는 이런 눈빛을 보인 적이 없었고 기분 좋은 표정조차 지은 적이 없었다.지금 이 순간 허아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주현우는 허아연을 끌어안고 입 맞추고 싶었고 그동안 못다 한 걸 다 보상해주고 싶었다.주현우가 아무리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봐도 허아연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냉정하기만 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며칠 전 받은 DNA 검사 결과가 떠오른 주현우는 본능적으로 손을 올려 허아연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결과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감히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확인한 뒤로는 허아연을 볼 때마다 자꾸 저도 모르게 만지고 싶고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허아연이 없던 지난 2년 동안 주현우는 사실 많이 지쳐 있었다.너무 많이 그리웠다.허아연은 얼굴에 닿은 주현우의 손을 바로 떼어내며 말했다."주 대표님, 이러시면 곤란해요.""별일 없으시면 문 좀 열어주시겠어요?"허아연의 자연스럽게 선을 긋는 태도에 주현우는 표정이 어두워지며 천천히 손을 거뒀다.잠시 허아연을 바라보던 주현우가 입을 열었다."아연아, 꼭 이럴 거야? 끝까지 인정 안 할 거야?"권승준에게는 이미 정체를 밝힌 허아연이었다.주현우가 여전히 정체에 집착하자 허아연은 미간을 찡그리며 숨을 내쉬었다.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허아연이 이내 담담하게 말했다."주 대표님, 만약 마음의 짐을 덜고 싶으신 거라면 안심하셔도 돼요. 죄책감 가지실 필요 없어요."말을 하던 허아연이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말했다."저 권 비서실장님 댁에 식사하러 가기로 했어요. 그러니까 주 대표님이 이렇게 계속 저를 찾아와서 선 넘는 행동하시는 거 저랑 권 비서실장님 모두한테 실례예요."주현우에게 직접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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