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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임서아
오지은이 웃는 얼굴로 일어서며 맞이했다.

"방금 아연이 만나서 같이 밥 먹자고 불렀어. 현우야, 괜찮지?"

주현우는 무표정하게 허아연을 힐끗 쳐다보았다.

"네가 기분 좋으면 괜찮아."

주현우는 오지은 옆에 앉았다.

오지은이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방금 아연이랑 얘기 나누고 있었는데 아연이가 너희 두 사람 이혼할 예정이라더라. 그래서 두 사람 이혼하면 아연이에게 좋은 남자 하나 소개해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몇 년을 그냥 낭비하게 할 수는 없잖아."

분명 허아연과 부부 사이인데 주현우는 자연스럽게 오지은 옆에 앉아 있었다.

무덤덤한 눈길로 허아연을 볼 때마다 주현우는 장애물을 넘기듯 무시했다.

허아연은 굳이 따질 마음도, 따질 자격도 없었다.

그저 어색할 뿐이었다.

방금 오지은이 회사에 왔을 때 이미 주현우와 약속이 있다는 걸 짐작했어야 했다.

종업원이 주현우에게 메뉴판을 건넸다. 주현우가 주문하자 오지은이 옆에서 귀띔했다.

"현우야, 내가 좋아하는 것만 시키지 말고 아연이가 좋아하는 것도 시켜."

주현우는 메뉴판을 들고 허아연을 힐끗 쳐다보았다.

불필요한 존재로 느끼는 듯했다.

허아연 자신도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몰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주현우가 메뉴판을 건네는 순간 허아연이 방금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휴대폰이 울렸다.

허아연이 급하게 전화를 받자 김민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중원 그룹 장도원 대표님이 오셨어요. 제2 프로젝트에 현우 대표님 사인이 필요해서 아직 착공이 어렵다고 합니다."

"알았어요. 금방 돌아갈게요."

김민희의 전화를 받고 난 허아연이 오지은에게 말했다.

"지은 언니,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들어갈게요. 두 분 천천히 드세요."

허아연은 두 사람이 답을 기다릴 새도 없이 가방과 휴대폰을 챙겨 바로 자리를 떴다.

식당 밖으로 나온 허아연은 한결 홀가분해졌다. 하늘도 평소보다 훨씬 더 높아진 기분이었다.

……

식당 안, 오지은은 고개를 돌린 채 주현우에게 물었다.

"정말 이혼할 거야?"

주현우는 코웃음을 쳤다.

"허아연 말을 그대로 믿어?"

주현우보다 권력과 세력을 더 중요시하는 허아연이었다.

이혼하고 싶지 않은 건 둘째 치고 정말 이혼한다 해도 치밀하게 계산기를 두드릴 여자였다.

재산 분할만으로 한참을 싸울 것이다.

"아연이도 꽤 진지해 보이던데? 아니면 혹시 네가 이혼하기 싫은 거야?"

주현우는 웃음을 터뜨렸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

그리고 이내 화제를 돌렸다.

"몸은 좀 어때?"

"아주 좋아. 언니가 나를 돌봐주고 아껴주나 봐."

……

허아연 사무실.

협력사 대표와 이야기를 마친 허아연은 배웅하기 위해 일어나 웃으며 말했다.

"장도원 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바로 주현우 대표님한테 사인을 받아서 절대 착공 일정이 지연되지 않게 할게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허아연 대표님."

"별말씀을요. 다 업무를 위한 거죠."

"주현우 대표님께서 이렇게 내조의 여왕을 만난 걸 보니 정말 부럽습니다."

허아연이 웃으며 배웅했다.

협력사를 보낸 뒤, 김민희가 점심 식사를 가져오며 물었다.

"대표님, 오늘 검사 결과는 어떠셨어요?"

허아연은 도시락 뚜껑을 열고 웃으며 말했다.

"다 정상이에요. 문제없어요."

"대표님, 그래도 조심하세요. 지금은 그래도 젊어서 버티는 거지만 결국 다 건강 소모하는 거예요."

"알았어요. 조심할게요."

오래 바쁠 일도, 오래 자신을 소모할 일도 없을 것이다.

조심한다고 말한 것도 잠시일 뿐, 허아연은 밥을 먹자마자 또다시 일에 몰두했다.

저녁에는 또 야근을 이어갔다.

야근이 좋아서가 아니라 어차피 돌아가도 독수공방일 텐데 차라리 바쁜 게 나았다.

한편, 그 시각 주현우도 오늘 밤 접대 자리가 있었다.

한창 식사 자리에서 얘기 중이던 주현우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유서희의 전화였다.

주현우는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현우야, 지금 몇 시야? 왜 아직도 안 돌아와? 제발 며칠만 일찍 집에 오면 안 돼? 좋은 남편 좀 해봐, 응?"

주현우는 반쯤 남은 담배를 쓰레기통에 비벼 끄고 나른하게 물었다.

"엄마, 아레아 베이 가셨어요?"

"그래. 한동안 여기서 지낼 생각이야. 그러니 빨리 돌아와. 아연이도 지금 야근 중이니까 데리고 같이 와."

반쯤 남은 담배를 쓰레기통에 버린 뒤, 주현우는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요."

전화를 끊고 주현우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리고 휴대폰에서 연락처를 찾기 시작했다.

한참을 찾았지만 허아연의 전화번호가 없었다.

저장하지 않은 것이다.

전화번호가 기억나지도 않았다.

어차피 레스토랑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회사를 지나야 했기에 주현우는 굳이 전화하지 않고 바로 차를 몰고 회사로 향했다.

허아연은 여전히 사무실에서 야근 중이었다.

9시가 넘은 시간은 허아연에게 야간 업무 시작에 불과했다.

허아연은 오늘 다른 업무는 하지 않고 인수인계 자료를 정리 중이었다.

곧 이혼할 테니 더 이상 회사에서 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동안 허아연의 손을 거친 업무가 적지 않았기에 미리 정리해야 했다.

이때쯤이면 회사 직원들은 대부분 이미 퇴근한 뒤였다. 몇몇 사무실만 불이 켜져 있었다.

건물 전체가 조용한 편이었다.

허아연은 조용한 사무실이 익숙했다.

키보드를 두드리며 모니터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허아연이 부드럽게 말했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자 고개를 든 허아연은 주현우를 발견하고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 한참이 지나서야 인사했다.

"현우 씨도 아직 퇴근 안 했어요?"

말을 마친 허아연은 급히 일어나 책상 위에 올려둔 서류를 들고 책상 밖으로 나오며 주현우에게 말했다.

"중원 그룹과 협력하는 프로젝트가 곧 착공인데 아직 계약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았어요. 오후에 두 번이나 현우 씨 사무실에 갔는데 자리에 없더라고요. 지금 사인해 줄 수 있어요?"

주현우는 허아연을 한참 바라보다가 그제야 계약서를 받아 훑어보았다.

언제부턴가 허아연은 주현우에게 오직 일 얘기만 할 뿐 다른 대화는 없었다.

계약서에는 문제가 없었다. 주현우는 허아연 책상 위에 있던 사인펜을 집어 계약서의 서명란에 멋들어진 사인을 했다.

주현우가 사인한 계약서를 받아 확인한 뒤, 허아연은 또 업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지금 내가 맡은 프로젝트는 이거 하나예요. 나중에 오원빈 씨한테 인수인계할게요. 다른 업무 자료들도 정리가 되면 현우 씨랑 이사회에 사직서 제출할 거예요."

"참, 비밀 유지 계약서 초안도 작성했어요. 퇴사하면 앞으로 관련 업계에 종사하지 않을 거고 경주 그룹에 관한 어떠한 정보도 비밀로 할 거예요. 그리고 더 준비해야 할 게 있는지 생각해 봐요. 있으면 요즘 같이 준비할게요."

허아연은 금융 전공도, 관리학 전공도 아니었다. 자동화 전공의 산업용 로봇학을 전공했고 스마트 통제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했다.

교진대에 입학하던 해, 허아연은 16살에 거의 만점의 수석 성적으로 합격했고 교수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던 제자였다.

중학생 때부터 스스로 로봇을 모델링했던 허아연은 수많은 대회에 참가해 상도 많이 탔고 심지어 특허까지 있었다.

대학교 4학년 때는 교진대와 다른 두 개의 대학으로부터 대학원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게다가 해외 여러 명문대도 데려가고 싶다며 러브콜을 보냈었다. 하지만 허아연은 주현우를 위해 모든 걸 포기했다.

허아연은 이혼하면 다시 원래 전공으로 돌아가 다시 공부하고 싶었다.

그래도 로봇이나 과학기술을 연구하는 게 더 좋았다.

허아연은 바쁘고 매일 가면을 쓰고 웃는 얼굴로 상대해야 하는 부대표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현우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허아연은 더 이상 주현우의 아내가 아니라 그저 일개 직원 같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허아연을 보던 주현우는 왠지 문득 알 수 없는 착각이 들었다.

허아연은 더 이상 예전의 허아연이 아니었다.

더 이상 열정적이지도, 밝지도 않고 더 이상 주현우에게 잘 보이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주현우는 허아연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엄마가 아레아 베이에 가셨대. 일단 돌아가서 얘기하자."

뭔가 할 말이 남았던 허아연이지만 주현우의 말에 '네'라고 답하고 함께 들고 있던 서류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정리 좀 하고 바로 돌아갈게요."

컴퓨터를 끄고 서류를 서랍에 넣은 뒤에도 주현우가 먼저 가지 않았다는 걸 발견한 허아연은 약간 놀란 듯했다.

주현우가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잠시 주현우를 바라보던 허아연은 주현우가 돌아서서 떠나자 그제야 휴대폰과 가방을 챙겨 따라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주현우는 습관적으로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있었다.

허아연은 옆에 서서 엘리베이터 문만 빤히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실루엣이 흐릿한 엘리베이터 문에 비쳤다.

남보다 더 어색한 사이 같았다.

1층에 도착하자 검은색 마이바흐가 회사 정문 앞에 멈춰 서 있었다.

마이바흐 앞으로 걸어간 두 사람.

허아연은 자연스레 뒷좌석 문을 열고 주현우는 운전석 문을 열었다.

뒷좌석에 타는 이유는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주현우 할머니가 허아연을 데리고 본가에 와서 밥 먹으라고 하던 날, 허아연이 차에 타려고 조수석 문을 열려는데 주현우가 문을 잠가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날 가는 내내 허아연은 난처함에 어쩔 줄 몰랐다.

그날 이후로 다시는 주현우의 차에 타지 않았다.

오늘 밤은……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차가 출발하자 허아연은 한 손에 휴대폰을 들고 말없이 뉴스만 보았다.

주현우를 쳐다보지도, 주현우와 말도 하지 않았다.

차 안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전에는 그래도 열정적으로 주현우에게 일상생활을 공유했었다.

무슨 일이든 제일 먼저 주현우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주현우가 일부러 전화받지 않고, 메시지에 답장하지 않고, 심지어 무시한다는 걸 알고 난 뒤로 침묵하는 법을 배웠다.

주현우도 허아연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집에 도착했다.

마당에 차를 세우고 집에 들어서자 유서희가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그제야 분위기가 한결 좋아졌다.

"아연아, 왔어? 너 먹으라고 국 끓여놨으니까 얼른 와서 따뜻할 때 먹어."

"네, 어머니."

유서희는 허아연만 따듯하게 맞이할 뿐 주현우는 아예 없는 사람 취급했다.

주현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다이닝룸에 들어가 의자를 당겨 자리에 앉았다.

도우미들이 음식을 차렸다.

유서희는 허아연 옆에 앉았다.

"아연아, 나 여가서 며칠 지낼 생각인데 괜찮지?"

허아연은 젓가락을 든 채 급히 고개를 돌려 유서희를 보며 말했다.

"당연히 괜찮죠, 어머니. 지내고 싶으신 만큼 편하게 있으세요."

허아연이 흔쾌히 동의하자 유서희는 바로 환하게 웃었다.

잔뜩 어두워진 표정의 주현우를 본 유서희가 말했다.

"현우야, 나 그렇게 볼 거 없어. 네가 원하지 않아도 소용없거든."

유서희가 또다시 당부했다.

"앞으로 퇴근하면 바로 집에 돌아와서 저녁 먹어. 하루가 멀다 하게 집 비우지 말고."

며칠 지낼 거라고 했지만 사실 유서희는 주현우 감시하러 온 것이었다.

유서희는 이미 허아연이 임신할 때까지 아레아 베이에 머물 작정이었다.

오지은 하나 해결하지 못할 거라고 믿지 않았다.

주현우가 무심하게 고개를 들며 말했다.

"돈 안 벌어도 돼요? 엄마 돈 안 쓸 거예요?"

"누가 한밤중에 밖에서 돈을 벌어? 핑계 대지 말고 얌전히 집에 돌아와."

주현우는 기세등등하게 몰아붙이는 유서희와 말싸움할 생각이 없었다.

저 문만 나서면 누가 감히 간섭할 수 있을까?

허아연은 고개를 들어 주현우를 바라보았다.

이혼하지 않으면 주현우가 점점 더 힘들지도 몰랐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아래층에서 유서희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유서희가 두 사람에게 돌아가서 쉬라고 하며 직접 방문 앞까지 데려다주고 나서야 돌아갔다.

방문이 닫히자 주현우는 정장 재킷을 벗어 소파 위에 툭 던지고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하얀 피부 위로 푸른 핏줄이 손등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때, 갑자기 주현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주현우는 바로 받지 않고 라이터를 들어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서야 휴대폰을 들고 통유리 앞으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

주현우는 뿌연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엄마가 와서 오늘은 안 갈게."

"응, 너도 빨리 들어가서 쉬어."

"그래, 알았어."

"응."

주현우의 말투는 아주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허아연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투였다.

주현우는 뒤에 허아연이 있는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테이블 앞으로 걸어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담배를 눌러 껐다.

방안에는 담배 연기가 가득했다.

허아연은 방에 있는 게 어색했지만 또 나가면 유서희에게 들킬까 걱정되었다.

유서희는 유미 이모처럼 속이기 쉽지 않았다.

주현우는 옆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할 일을 했다.

이도 저도 못하고 있던 허아연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주현우에게 말을 걸었다.

"뉴스에서 봤는데 이제는 이혼할 때 호적 등본이 필요 없대요. 우리 먼저 가서 서류 접수하고 부모님한테는 나중에 말씀드려요."

정책은 며칠 전에 금방 발표되었다.

뉴스를 본 순간, 허아연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건 허아연과 주현우만 동의하면 더 이상 집안 어른들의 허락이 필요 없이 이혼 절차를 밟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 말에 주현우는 고개를 들어 허아연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허아연을 바라보던 주현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급하게 이혼하려는 걸 보니 혹시 밖에 남자라도 생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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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출발했고 권승준이 업무 얘기를 묻자 허아연은 하나하나 차분히 답했다.두 사람은 이번에 다른 레스토랑을 찾았다. 직원이 요리를 다 서빙하고 문을 닫자 권승준은 여전히 예전처럼 다정하게 허아연에게 국을 떠주고 음식을 챙겨주었다.허아연이 다정하게 말했다."고마워요."두 사람이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반쯤 했을 때 허아연이 문득 고개를 들어 권승준을 보며 말했다."승준 씨, 토요일에 본가에서 식사하기로 한 거 조금 미뤄도 될까요?"허아연이 갑자기 약속을 미루자 권승준이 고개를 들고 바라보았다.서로 시선이 마주쳤을 때 허아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권승준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할아버지가 찾아갔고 그래서 허아연이 한발 물러서기 시작한 듯했다.허아연을 보는 권승준의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물론 그 화는 허아연이 아니라 권유성을 향한 것이었다.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부모님이나 할아버지가 그의 일에 나서거나 간섭한 적이 없었다.그런데 이번만큼은 권유성이 직접 허아연을 찾아간 것이다.권승준은 차분하게 허아연을 바라보며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미루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아직 내가 준비가 덜 된 거니까 잘 정리할게요."허아연이 별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권승준은 먼저 태도를 밝히며 잘못을 자신에게 돌리고, 잘 정리하겠다고 약속까지 했다.권승준이 입장을 밝히자 허아연도 더는 그 얘기를 이어가지 않고 음식을 집어주며 말했다."승준 씨도 많이 드세요."지금 허아연은 다정하게 대하면서도 분명 어딘가 거리를 두고 있었다.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식사를 마치고 함께 강가를 산책한 뒤 허아연을 호텔에 데려다준 권승준은 곧장 차를 몰고 권유성의 집으로 향했다.차를 대문 앞에 세우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마침 서재에서 나오던 권유성과 마주쳤다. "할아버지, 아연 씨 찾아가셨죠."권승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권유성도 부인하지 않았다. "만나서 내 걱정을 얘기했지."권유성의 말을 들은 권승준

  • 버린 건 나였지만, 무너진 건 너였다   제462화

    흘러가는 대로 두자는 주현우의 말에 허아연은 힐끗 보고는 웃기만 할 뿐 더는 말이 없었다.그 뒤로 두 사람은 난간에 기대어 앉아 두런두런 대화를 이어갔고 주현우도 더는 감정에 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11시가 넘자 허아연이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주현우를 보며 말했다."이제 그만 얘기하고 들어가야겠어요."그 말에 주현우도 급히 몸을 일으키며 부드럽게 말했다."데려다줄게.""괜찮아요, 운전해서 왔어요." 말을 마친 두 사람은 함께 도로 쪽으로 걸어갔다. 모두 차를 길가 주차 구역에 세워둔 상태였다.오늘 밤 권유성이 찾아와 바람과는 약간 어긋난 말을 했지만 허아연은 대체로 차분하게 대응했고 오히려 내려놓은 것들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주현우를 마주해도 예전만큼 날이 서지 않았다.검은색 마이바흐 안에서 주현우는 두 손을 핸들에 올린 채 허아연의 흰색 차가 먼저 떠나는 걸 지켜본 뒤에야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핸들을 잡은 주현우는 조금 전 허아연의 쓸쓸한 표정을 떠올리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허아연과 권승준의 관계가 계속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딱히 기쁘지는 않았다.허아연의 불행을 도저히 고소해할 수가 없었다.……같은 시각, 허아연의 차 안.핸들을 잡은 허아연의 손은 무척 희고 가늘었다.창문을 내리자 시원한 산들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 들어왔다. 차 안에 음악을 틀고 잠시 권유성도, 권승준도, 주현우도 다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호텔에 도착한 허아연은 차를 세우고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런데 스위트룸 문 앞에 막 도착했을 때 옆방에서 안서준이 나왔다.허아연이 돌아온 걸 본 안서준이 인사를 건넸다."왔어?"허아연이 웃으며 답했다."네."그때, 안서준이 대뜸 물었다."오늘 밤 권 어르신이 너 찾아갔었어?"안서준의 물음에 허아연이 웃으며 말했다."이제 난 사생활도 없나 보네요. 내가 돌아오기도 전에 벌써 다들 알고 있잖아요."허아연이 대수롭지 않게 넘기자 안서준이 말했다."들어와서 얘기해.""네." 허아연

  • 버린 건 나였지만, 무너진 건 너였다   제461화

    "당신이 나 때문에 억지로 결혼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매번 다 맞춰주고 내 마음을 억누르면서 시간이 지나면 당신도 내 진심을 알아주고 내가 당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아줄 거라고 믿었어요.""그런데 돌아온 건 점점 더 깊어지는 오해뿐이었죠.""경주 그룹에 들어간 것도 부부니까 힘을 보태려던 거였는데 당신 눈엔 다른 속셈이 있는 것처럼 보일 줄은 몰랐어요."지난 일들을 이야기하는 허아연은 마치 전생의 일을 말하는 것처럼 목소리도 표정도 담담했다. 다 내려놓은 것이다.주현우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할 수 있을 만큼 완전히 마음을 정리했다는 증거였다.옆에 기대어 이야기를 듣다가 허아연을 돌아보는 주현우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허아연을 오해한 것도, 잘못한 것도 주현우였다.마른침을 삼킨 주현우가 입을 열었다."아연아,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주현우의 사과에 허아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살짝 웃고는 말했다."다 지난 일이에요. 이제 다 지나갔어요. 나도 다 견뎌냈고요."혼자 아프고 혼자 병원에 가고 혼자 빈집을 지키고 혼자 힘들어하고 혼자 주현우의 스캔들 뒷수습까지 하고 교진시를 떠날 때도 혼자였다……다 지나갔다고, 다 견뎌냈다는 허아연의 말에 주현우는 하고 싶은 말이 수없이 떠올랐지만 무슨 얘기부터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허아연에게 너무 미안했다. 주현우는 허아연에게 재산을 나눠주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충분히 보여줬다고 생각했었다.그런데 정작 허아연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심지어 원래 갖고 있던 것마저 다 내려놓고 주현우에게 돌려주었다.오래 알고 지냈으니 당연히 허아연에 대해서 잘 알았어야 했는데 주현우는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았다.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주현우를 보던 허아연이 숨을 길게 내쉬고는 후련한 듯 웃으며 말했다."됐어요, 당신도 내 목숨 한 번 구해줬으니까 그걸로 빚은 갚은 셈 쳐요."허아연이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하지만 주현우 씨, 서로 알고 지낸 세월도 있으니 업무상의 협력은 가능하지만 그 이상은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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