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2화

Author: 임서아
허아연을 한참 바라보던 주현우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결혼하고 싶을 땐 결혼하고, 이혼하고 싶으면 이혼하려고? 허아연, 너도 참 제멋대로다.”

허아연은 서류를 내민 자세 그대로 말을 이었다.

"오랫동안 생각해 봤는데 우리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때는 현우 씨와 지은 언니의 관계도 몰랐어요……”

허아연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주현우가 말을 끊었다.

"허아연, 오지은이 돌아온 건 맞아. 그렇다고 오버하지 마. 나한테 밀당 같은 건 안 먹혀.”

주씨 가문의 권력을 탐내더니 할아버지를 설득해 결혼까지 밀어붙이게 한 여자.

다른 사람은 몰라도 허아연은 절대 주현우와 이혼할 생각이 없을 것이다.

밀당을 해?

허아연은 주현우의 편견에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허아연에 대한 주현우의 인식은 도저히 바꿀 수 없었다.

주현우가 오지은을 좋아했다는 것도,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는 것도 허아연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허아연은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이혼 서류를 꽉 움켜쥐었다.

그래도 여전히 품위를 지키며 차분하게 말했다.

"현우 씨, 오버하거나 밀당하는 게 아니에요. 사인하고 구청에 가보면 알 수 있잖아요?”

허아연은 자기 생각을 증명하고 싶었다.

허아연을 잠시 쳐다보던 주현우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래, 이혼해 줄게. 그런데 너희 할아버지도 동의했어? 호적 등본은 받았어? 우리 할아버지도 동의했고?”

"정말 이혼하고 싶으면 어른들 먼저 설득하고 나한테 얘기해. 내 시간 낭비하지 마.”

주현우의 담담한 추궁에 허아연은 말문이 막혔다.

‘그래, 주현우와의 이혼이 그렇게 간단할 리가 없지.’

결혼은 둘만의 문제가 아니라 두 집안의 문제였다.

허아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의자에서 일어난 주현우는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다.

"그럴 생각이 없으면 그냥 부대표 자리 잘 지키고 주씨 가문 둘째 사모님 노릇이나 해.”

허아연은 오른손에 이혼 서류를 든 채 해명하고 싶었지만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몇 번이나 꾹 참았다.

결국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생각이 짧았네요. 최대한 빨리 집안 어른들한테 얘기해 볼게요.”

주현우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책상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문밖으로 나갔다.

허아연이 이혼한다고?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었다.

주현우는 혼인신고하던 날 허아연이 기뻐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했다.

문이 닫히자, 허아연은 이마를 짚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

사무실로 돌아온 허아연은 주민경에게 털어놓았다.

주현우의 친여동생인 주민경도 같은 회사에 출근하고 있었다.

동갑인 허아연과 주민경은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였다.

주민경은 며칠 동안 출장 중이었다.

주민경과 주현우에게는 군에서 근무 중인 주진우라는 큰 오빠가 있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허아연의 보고를 듣던 주민경이 거의 고함을 치다시피 말했다.

"아이고, 드디어 정신 차렸네.”

"걱정 마, 난 무조건 네 편이야. 지금 네가 할 일은 집에 가서 할아버지한테 호적 등본 받아오는 거야. 너희 할아버지만 동의하면 반은 끝났어. 주씨 가문은 우리 다시 방법 생각해 보자.”

"민경아, 고마워.”

"우리 사이에 그게 무슨 소리야.”

둘째 오빠가 정말 쓰레기가 아니었으면 주민경도 둘째 새언니의 이혼을 돕는 이런 한심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주민경의 지지에 허아연도 한결 마음이 든든해졌다.

저녁 무렵, 허아연은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허씨 본가는 시내 한복판 오래된 골목에 자리 잡은 작은 한옥집이었다.

2층짜리 한옥은 몇 번의 리모델링을 거쳐 본연의 고풍스러운 멋과 현대적인 분위기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다.

골목 안은 아주 조용했다.

붉은 장미 넝쿨이 담을 타고 피어있었다.

허아연은 길가에 차를 세우고 허민수가 좋아하는 떡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가씨, 오셨어요?”

"정아 이모.”

허아연은 집안 가사 도우미에게 인사를 하고 허민수를 찾아갔다.

23살 또래의 여자아이라면 화려한 옷차림에 한창 생기 넘칠 시기였지만 허아연은 항상 단아한 모습에 낮게 묶은 머리를 하고 웃는 모습도 크게 볼 수 없었다.

경주 그룹의 부대표님이자 허씨 가문 둘째 사모님인 허아연은 자신의 이미지를 유지해야 했다.

허아연은 허민수와 함께 꽃구경을 하고 새와 장난치며 시간을 보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함께 바둑을 두던 그때 허민수가 말문을 뗐다.

"저녁 내내 얼굴 찡그리고 있더구나. 말해봐, 이번엔 또 어떤 어려운 부탁이냐?”

바둑 한 알을 들고 있던 허아연이 고개를 들었다.

"할아버지, 저 현우 씨와 더 이상 같이 못 살겠어요. 이혼할래요.”

갑자기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아주 오랫동안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 말을 들은 허민수의 표정이 굳어지며 긴 침묵이 흘렀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허민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없이 안방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나온 허민수는 여전히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애초에 잘 생각한 건지 물었을 때 잘 생각했다고 답했잖아.”

허민수는 더 이상 잔소리할 힘도 없다는 듯 체념한 듯 말했다.

"됐다. 네가 결혼 생활을 위해 할 만큼 했다는 거 알고 있어. 오늘 호적 등본 받으러 온 거지? 그래, 같이 못 살겠으면 가서 서류 접수해. 네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현우도 놓아주는 거야.”

허민수는 말하며 호적 등본을 허아연에게 건넸다.

인터넷을 하지 않아 요즘 떠도는 기사를 잘 알지는 못했지만 주현우에 관한 일은 허민수도 적잖이 들어왔었다.

‘정말 아연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만해야지.’

허씨 가문도 강요할 생각이 없었다.

허아연은 허민수가 건네는 호적 등본을 보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할아버지, 죄송해요.”

허아연과 주현우의 혼인은 허아연을 웃음거리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허민수까지 난처하게 만들었다.

허민수는 호적 등본을 허아연 손에 쥐여주고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너는 누구한테도 잘못한 거 없어. 너 자신한테 솔직하고 미안할 게 없으면 돼.”

허아연은 호적 등본을 꼭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아파왔지만 도대체 뭐가 슬픈지는 알 수 없었다.

밤 9시가 넘은 시간.

허아연은 호적 등본을 챙겨 본가를 나서며 주민경에게 메시지를 두 개 보냈다.

하나는 사진, 다른 하나는 [민경아, 호적 등본 받았어.]라는 문장이었다.

메시지를 받은 주민경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알려주는 60초짜리 음성메시지를 전송했다.

……

바 안에서 주현우는 전서진, 심유환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화려한 조명들이 번쩍였다.

주현우의 삶은 허아연보다 훨씬 화려했다.

몇몇 여자들이 들러붙어 아양을 떨었지만 주현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서진은 건들거리며 소파에 기대어 무심한 눈빛으로 주현우에게 물었다.

"아연이가 너한테 이혼하자고 했다며?”

주현우는 테이블 위 담배와 라이터를 집어 들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옅은 연기가 주현우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주현우는 담뱃재를 털고 웃으며 말했다.

"소식 참 빠르네. 또 민경이 대신 뭘 캐고 싶은 거야?”

전서진이 주현우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적당히 해. 아연이가 네 아내 노릇 하는 거 쉽지 않잖아. 놀 땐 놀더라도 가끔은 달래주기도 해.”

"허아연을 달래주라고?”

주현우는 웃음을 터뜨렸다.

담배를 피우며 내뱉은 연기 사이로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허아연을 달래주라고?

절대 그럴 일은 없었다. 다음 생에도 없을 것이다.

한바탕 웃던 그때, 테이블 위에 있던 주현우의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주민경이 보낸 두 통의 메시지였다.

[현우 오빠, 오빠 이혼 상황 보고해줄게. 아연이 이미 호적 등본 받아왔어.]

문자 메시지와 함께 허아연의 호적 등본 사진도 있었다.

주현우는 조금 의외였다.

‘허아연이 정말 이혼하려 한다고? 정말 호적 등본 가지러 갔다고?’

주현우는 진짜인지 확인하려는 듯 진지하게 사진을 확대했다.

남은 담배꽁초가 손에 닿자 그제야 깜짝 놀라며 담배를 던져버렸다.

그때 또 전화벨이 울렸다.

주현우가 전화를 받자 이내 유서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우야, 오늘 밤에는 또 어디 있어? 제발 걱정 좀 하지 않게 집에 좀 돌아가면 안 돼? 맨날 아연이를 혼자 집에 두다니, 말이 돼?”

주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다들 하나같이 허아연한테 홀린 거야 뭐야. 알았어요. 끊어요.”

할아버지와 주민경이 허아연을 좋아하는 건 그렇다 쳐도, 부모님까지 허아연 편이었다.

허아연이 도대체 뭐가 그렇게 대단한 걸까?

주현우는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나 정장 재킷을 집어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전서진과 심유환에게 말했다.

"일 있어서 먼저 갈게.”

전서진은 몸을 살짝 일으키고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가?”

대꾸할 기분이 아니었던 주현우는 전서진을 등진 채 손만 흔들고 밖으로 나갔다.

차를 몰고 바를 떠나는 주현우의 차 운전석 창문이 열려 있었다.

오른손으로 핸들을 잡고 차창에 걸친 왼손에는 담배가 쥐어져 있었다.

차 안에는 부르메스터 스피커에서 ‘Five Hundred Miles’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현우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허아연이 어떻게 주씨 가문 모든 사람을 홀린 걸까?

애초에…… 주현우도 정신이 나가서 이 결혼을 허락한 것이 분명했다.

도로에는 차가 아주 적었다.

주현우는 반쯤 남은 담배를 창밖으로 튕겨버리고 액셀을 밟아 속도를 올렸다.

……

신혼집 침실.

허아연은 욕실에서 샤워 용품과 스킨케어 제품들을 챙겨 품에 안고 침실 문을 나가려던 그때,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렸다.

고개를 든 허아연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주현우잖아!’

‘왜 돌아온 거야?’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버린 건 나였지만, 무너진 건 너였다   제30화

    주씨 가문은 오랜 명문가였고 허민수도 원래 주건영의 기사일 뿐이었다. 비록 뒤늦게 스스로 다른 일도 하면서 허아연에게 남겨줄 것들을 모았지만 결국 출신부터가 다른 두 사람이었다. 때문에 지금 주현우에게 이혼을 권하면서도 절대 주현우가 잘못했다거나, 허아연이 억울하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자신이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탓이라고 전부 본인 책임으로 돌렸다. 이 지경이 된 이상 누가 맞고 틀렸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두 사람이 서로 힘들게 하지 않고, 상처 주지 않고 각자 새 삶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허민수가 이혼을 권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허민수의 자책이 오히려 주현우를 더 난처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허아연과의 결혼 생활에서 본분을 지키지 않은 사람은 주현우였다. 아무리 억지로 떠밀려 한 결혼이라고 해도 남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미동도 하지 않고 허민수를 바라보던 주현우는 허민수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시원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르신, 저랑 아연이 일은 저희 둘이 정리할게요. 몸도 안 좋으신데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허아연에게는 차갑게 굴지 몰라도 어른한테 그러는 건 큰 불효였다. 이 정도 교양은 있는 주현우였다. 방금 허민수가 한 말이 놀랍기는 했지만 주현우도 마음에 담아두지는 않았다. 어쨌든 주현우 본인의 일이니까. 주현우가 웃으며 답하자 허민수는 다시 장기를 두며 말했다. "그래. 내 마음은 전했으니 앞으로 너무 부담 가질 거 없다." 허민수는 은근 돌려서 딱 잘라 말했다. '어차피 더 이상 손녀 사위도 아니고 나도 아연이를 설득하지 않을 거야. 앞으로 아연이가 너를 대하는 태도가 곧 내 태도야. 그러니 알아서 해." 주현우는 말없이 웃으며 계속 장기를 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아연이 허민수의 물건을 들고 들어왔다. 주현우가 아직도 병실에 있는 것을 본 허아연이 말했다. "아직 안 갔어요? 이제 그만 가서 쉬어요. 여긴 내가 있으면

  • 버린 건 나였지만, 무너진 건 너였다   제29화

    웬일일지 차갑게 외면하는 허아연은 주현우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전에는 이러지 않았었다. 주현우를 볼 수만 있으면, 주현우가 아레아 베이에 돌아가기만 해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곤 했다. 복도에 한참 앉아 있던 주현우는 다시 병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병실 문을 한참 바라보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앞에 도착해 안을 들여다보니 허아연은 여전히 침대 옆에 앉아 지키고 있었다. 주현우는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 아까 그 의자에 다시 앉았다. 그 뒤로 며칠 동안, 허민수는 입원하여 경과를 지켜보았다. 허아연도 일을 잠시 내려놓고 병원에 머물며 허민수를 돌봤다. 주현우도 며칠 동안 자주 찾아왔다. 허민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바둑도 두며 즐겁게 했다. 다만 허아연은 여전히 지나치게 깍듯했다. 허민수를 챙기듯 안부를 물었지만 지나치게 공손하고 거리감이 느껴졌다. 예전 같지 않았다. 그날 오후, 허아연과 허민수 둘이 병실에 있을 때였다. 허민수가 침대에 반쯤 기대어 앉아 허아연을 보며 물었다. "아연아, 며칠 동안 현우를 잘 챙기지도 않고 지나치게 깍듯하게 대하던데 무슨 일 있어?" 허아연은 껍질 깎은 사과를 잘라서 건네며 말했다. "아무 일도 없어요, 할아버지. 다른 생각하지 마세요. 저 현우 씨한테 항상 예의 지켜왔어요." 허민수는 믿지 않았다. "네 행동을 보고도 내가 모를 줄 알아?" 허아연은 난감하게 웃으며 허민수 손에 사과를 쥐여주었다. "뭐가 있겠어요. 그리고 곧 이혼할 텐데 너무 가까이 지내서 뭐 해요?" 허민수는 허아연이 건넨 사과를 침대 협탁 위 그릇에 고스란히 내려놓고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허민수의 시선에 괜히 뜨끔해진 허아연은 눈을 피하며 말했다. "할아버지, 그만 물어요. 제 일을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 허민수가 속상해할까 봐 너무 많은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허민수는 진지한 표정으로 허아연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아연아, 네 부모도 떠나고 가족은 나 하나밖에 없잖아. 할

  • 버린 건 나였지만, 무너진 건 너였다   제28화

    허아연은 의자를 뒤로 밀치며 벌떡 일어나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요?" 주현우가 지금 온 건 정말 예상 밖의 일이었다. 할아버지가 아프다는 얘기를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현우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담담한 눈빛으로 허아연을 바라봤다.조금 전 전서진이 전화와서 허아연 할아버지가 오후에 집에서 쓰러져서 지금 병원에 있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 말을 들은 주현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무도 얘기하지 않아서 모르는 일이었다. 바로 집에 연락해 보니 웬걸,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심지어 병문안까지 다녀간 뒤였다. 주현우만 몰랐고 심지어 전서진이 말해서 알게 된 것이었다. 주현우의 굳은 표정을 본 허아연은 허민수를 한 번 쳐다보고 서둘러 설명했다. "할아버지 지금은 괜찮아요. 오후에 바로 깨어나셨고 검사도 다 마쳤어요. 지금은 그냥 주무시는 중이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가서 일 봐요." 주현우가 허민수 걱정을 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예의상 한 말이었다. 아마 누군가 이 일을 알려서 오지은과 함께 할 시간을 방해받은 게 화가 나서 저런 표정일 것이다. 차라리 빨리 오지은 보러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깨어나서 저렇게 내키지 않아하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더 불편할 수도 있었다. 병실에 들어선 주현우는 허아연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한밤중에 무슨 볼일 보러 가라는 거야?" 주현우의 무심한 말에 허아연은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 보기만 할 뿐 까발리지는 않고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앉아요." 허아연은 말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허아연이 불러서 온 것도 아니고 괜히 말다툼할 필요도 없었다. 화난 표정이어도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날도 이젠 얼마 남지 않았다. 허아연의 시큰둥한 태도에 주현우는 자신이 늦게 온 걸 원망하는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허아연이 알리지 않은 것이었다. 주현우는 허아연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휴대폰도 보지 않고

  • 버린 건 나였지만, 무너진 건 너였다   제27화

    가끔 전화가 오면 주진우는 밖에 나가 통화를 했다. 허아연은 병상 앞에서 허민수의 손을 꼭 잡은 채 문밖에서 통화 중인 주진우를 바라보았다. 주진우에게 고마운 마음이 너무 컸다. 그날 밤. 주민경과 유서희도 오고 주석진까지 다 찾아왔다. 허씨 가문에는 식구도 적고 허아연도 친구가 많지 않았기에 주씨 가문 사람들 말고는 병문안 오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 다 도착했는데도 주현우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9시가 넘어서도 계속 머물러있는 주진우에게 허아연이 말했다. "진우 오빠, 여긴 제가 있을 테니 돌아가서 쉬어요." 허아연의 말에 주진우는 허민수도 잠이 든 걸 확인하고 말했다. "알았어. 그럼 먼저 갈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네." 허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한 허아연이 함께 내려가려 하자 주진우가 말리며 말했다. "여기까지만 배웅하고 돌아가. 어르신 큰 문제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너도 좀 쉬어." "네." 허아연은 여전히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끝나자마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주진우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허아연은 병실로 돌아갔다. 병실은 아주 조용했다. 조금 전 정아 이모도 쉬라고 돌려보낸 뒤였다. 허아연은 병상 옆에 앉아 깊이 잠든 허민수의 손을 꼭 잡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할아버지, 절대 무슨 일 생기면 안 돼요." 부모님도 떠나고 이제 남은 가족은 할아버지 한 사람뿐이었다. 허아연은 할아버지가 옆에 몇 년이라도 더 있어 주기를 바랐다. 침대 끝에 앉아 있던 허아연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중원 그룹 장도원의 전화였다. 허민수가 깰까 걱정된 허아연은 밖으로 나갔다. "장도원 대표님." 전화를 받자마자 허아연은 바로 프로답고 똑 부러진 허아연 부대표님으로 변신했다. 마치 집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통화 소리가 병실 안 환자들을 방해할까 걱정된 허아연은 전화를 받으며 복도 끝에 있는 박을 베란다로 걸어

  • 버린 건 나였지만, 무너진 건 너였다   제26화

    허아연은 주현우를 등진 채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잠시 침묵하던 허아연이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그냥 한 말이라는 거 알아요." 분명 욕먹은 것도, 난처해진 것도 다 허아연인데 되려 주현우를 위로해야 했다. 답을 들은 주현우는 허아연의 귀마개를 다시 꽂아주었다. 이어지는 며칠 동안은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주현우가 매일 집에 돌아오기는 했지만 둘 사이 대화는 여전히 많지 않았다. ……그날 오후,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허아연에게 정아 이모의 전화가 걸려 왔다. "아연 씨, 어르신께서 입원하셨어요. 방금 검사 다 마쳤으니까 퇴근하면 보러 오세요." 전화를 받던 허아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할아버지가 입원했는데 왜 일찍 알리지 않았어요?"요즘 허아연은 할아버지와 관련된 일에만 이토록 큰 반응을 보였다. "어르신께서 일하는데 방해된다고 알리지 말라고 하셨어요."허아연은 말문이 막혔다. 일이 아무리 중요해도 할아버지보다 중요할 수는 없었다. 정아 이모의 말을 더 들을 새도 없이 전화를 끊고 차를 몰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허민수는 이미 여러 가지 검사를 다 마친 상태였다. 컨디션도 괜찮아 보였다. 허아연은 병상 옆에 앉아 허민수의 손을 꼭 잡고 일부러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할아버지, 이렇게 큰일을 저한테 숨겼다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해요. 나 평생 후회하면서 살게 하려고 그랬어요?" 허민수는 허아연의 손등을 토닥이며 껄껄 웃었다. "그냥 사소한 심혈관 질병이야. 나이 들면 다 있는 거야. 너한테 알려도 결국은 의사가 치료해야 하는 거잖아." 허아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쓰러졌는데도 사소한 문제예요? 다시는 이러지 마요. 앞으로는 무슨 일이든 나한테 제일 먼저 알려요." 허아연의 걱정에 허민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알았어. 앞으로는 뭐든 제일 먼저 너한테 알릴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정아 이모는 옆에서

  • 버린 건 나였지만, 무너진 건 너였다   제25화

    입으로는 알겠다고 했지만 본가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허아연은 전혀 기운이 없었다. 힘없이 시트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머리를 받침대에 기댄 채 초점 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눈에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너무 힘들어. 마음이 너무 힘들어.' 이따금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을 확인하던 주현우는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는 허아연을 보며 아무 말도 걸지 않았다. 조금 전에는 정말 그냥 튀어나온 말이었다. 운전석에서 주현우의 휴대폰이 몇 번이나 울리고 통화를 몇 통이나 했지만 허아연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창밖만 바라보았다. 차가 집 마당에 도착해 주현우가 차 문을 열어주었을 때에야 허아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허아연은 급히 짐을 챙겨 내리며 깍듯하게 말했다. "고마워요."인사를 하고 다시 나긋나긋하게 이어 말했다. "또 일 봐야 하죠? 먼저 들어갈게요." 주현우가 답하기도 전에 허아연은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주현우는 손잡이를 잡은 채 허아연이 집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운전석으로 돌아가 바로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위층 침실로 돌아온 허아연은 주현우가 들어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문을 닫았다. 방문에 기댄 허아연은 그제야 숨을 길게 내쉴 수 있었다. 마당을 멍하니 바라보는 허아연의 머릿속에는 온통 주현우가 한 말이었다. 말실수인 건 허아연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주현우의 속심말이기도 했다. 허아연의 기분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에 쉽게 튀어나올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허아연의 기분을 신경 썼다면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감정 변화 하나 없는 눈빛으로 아주 오랫동안 마당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답답하고 괴로웠다. 또 한참 마당을 지켜보던 허아연은 그제야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직접 운전해서 할아버지를 뵈러 본가로 돌아갔다. ……저녁 10시, 본가에서 돌아온 허아연이 침실에 들어오자 주현우가 머리를 닦으며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허아연은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