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오랜만에 듣는 주건영의 목소리에 만감이 교차한 허아연도 인사를 건넸다."할아버지.""그래."주건영 역시 오랜만에 듣는 할아버지 소리에 감회가 새로운 듯 다시 말했다."돌아왔으면 됐다."며칠 전 주현우에게 허아연을 본가로 불러 밥 한 끼 하자고 했지만 거절당한 탓에 결국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허아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주건영이 물었다."돌아와서 지내는 데 불편한 건 없어?"2년 전 허아연이 죽음을 위장해 떠난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장 아저씨가 차에 시동을 걸자 허아연이 차분하게 대답했다."네, 잘 지내고 있어요."허아연의 대답을 들은 주건영이 장 아저씨를 보며 말했다."장 기사, 찻집으로 가."나이가 들면 다들 찻집을 즐겨 찾곤 했다. 장 아저씨는 주건영의 말에 답을 하고 두 사람을 싣고 찻집으로 향했다.주건영 옆에 앉은 허아연은 주현우와 있을 때처럼 거리낌 없지는 않았지만 예전처럼 쭈뼛거리지도 않았고 예전만큼 어렵지도 않았다.교진시를 떠난 2년 동안 허아연은 많이 성장했다.찻집으로 가는 길에 주건영이 업무 얘기를 나눴고 허아연은 차분하게 대답했다.찻집에 도착해 룸에 들어가자 허아연은 차를 우려 주건영에게 따랐다.그제야 주건영이 지팡이를 쥔 채 무겁게 입을 열었다."너와 현우가 이 지경까지 될 줄은 나도 몰랐다.""너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으니 민수를 볼 면목이 없구나."허씨 가문에 대한 주건영의 미안함은 진심이었다.다행히 허아연이 불길 속에서 목숨을 잃은 게 아니라 그냥 떠났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남은 평생을 지난 2년처럼 괴로움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허아연은 자책하는 주건영을 웃으며 위로했다."할아버지, 저와 주현우 씨 일은 사실 다른 분들과 상관없어요. 처음에 저를 진우 오빠와 결혼시키려 하셨는데 제가 굳이 주현우 씨를 선택한 거잖아요.""그러니 지금 이 상황도 제가 선택한 결과예요."주건영을 비롯한 어른들이 죄책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허아연도 알고 있었다.주건영이 계속 그런 마음을 가지게 하고
샤워기 물을 맞으며 샤워하던 허아연은 일에만 몰두하는 삶도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감정은 안정적이었고 2년 전처럼 스스로를 갉아먹거나 쓸데없는 생각에 시달리지도 않았다.다른 사람 속마음을 짐작할 일도 없으니 잠도 훨씬 잘 잤다.……전날 박혜숙과 영상통화를 하며 주말에 안서준과 강성시에 돌아가겠다고 약속한 허아연은 다음 날 새 사옥으로 찾아갔다.안서준에게 줄 아침 식사도 챙겨 갔다.허아연은 안서준의 책상 위에 아침 식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엄마가 이번 주말에 같이 강성시에 한번 다녀가래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보고 싶어 하신대요."책상 앞에 앉아 있던 안서준은 허아연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그래, 고 비서한테 티켓 끊으라고 할게."지금 안서준의 사무실은 임시로 마련한 곳이라 사옥 건물 공사가 끝나면 따로 꾸밀 예정이었다.일에만 몰두하는 안서준을 본 허아연은 오래 머물지 않고 아침 꼭 챙겨 먹으라는 당부를 남긴 뒤 사무실을 나왔다.허아연이 나가자 안서준은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방금 일부러 무심하게 굴거나 외면하려던 게 아니라 바라볼 용기가 없었을 뿐이었다.특히 허아연이 호텔에서 아파트로 이사 간 뒤 안서준은 마음이 꽤 복잡했다. 몇 번이나 찾아가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이성적으로 꾹 참았다.허아연을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최대한 좋은 오빠가 되려고 애썼다.그윽한 눈빛으로 한참 문 쪽을 바라보던 안서준은 겨우 시선을 거두고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두 사람이 강성시로 돌아갈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게 했다.안서준의 사무실을 나온 허아연은 역시 임시로 사용하는 본인 사무실로 돌아왔다.요즘 허아연은 연구개발 업무 말고도 실험실 부지를 알아보고 있었다.몇 군데를 둘러봤지만 역시 스타라이트 테크 실험실 근처가 가장 적합했다.지난주에 안서준에게 이미 부지를 추천했고 하루빨리 부지를 확보해 실험실을 세우려고 정부 측과 협의 중이었다.최근 몇 년 사이 내륙 시장이 빠르게 성장한 만큼 안서준도 지사 설립에는 꽤 자신이
허아연은 우울증 치료를 받으며 그 사실을 깨달았고 그때 많은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요즘 들어서는 상태도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진지하게 말하는 허아연을 보던 주현우는 주머니에서 오른손을 꺼내 허아연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눈빛이 애틋했다.허아연은 뺨에 닿은 주현우의 손을 떼어내며 조용히 말했다."주현우 씨, 친구끼리는 이러지 않아요."그리고 말을 덧붙였다."이제 올라갈게요. 당신도 일찍 들어가서 쉬어요."말을 마친 허아연은 어깨에 멘 가방을 추켜올리고 아무렇지 않게 팔짱을 낀 채 돌아서서 아파트 안으로 걸어갔다.멀어지는 허아연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주현우의 눈에 아쉬움이 가득했다.시간이 조금만 더 천천히 흘렀으면 얼마나 좋을까.주현우는 허아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한참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멀지 않은 곳에는 오늘따라 눈에 잘 띄지 않는 검은색 아우디를 몰고 온 권승준이 있었다.주현우가 허아연을 데려다줄 때부터 이미 그곳에 있었다.두 손을 핸들에 얹은 권승준은 주현우가 적극적으로 허아연을 붙잡는 모습을 보며 부담감이 느껴졌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둠 속에서 자신과 허아연을 지켜보던 주현우였다.그런데 이제는 두 사람의 위치가 뒤바뀌었다.참 짓궂은 운명의 장난이었다. 주현우가 떠나지 않자 권승준도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한참 뒤 주현우가 차를 몰고 떠난 뒤에야 따라 시동을 걸었다.허아연과 얘기를 나누려 했는데 지금은 타이밍도, 분위기도 아닌 것 같았다. ……한편 위층으로 올라가 집에 들어간 허아연은 가방을 걸어두고 슬리퍼로 갈아 신은 뒤 소파에 몸을 푹 기대고 나서야 한결 홀가분해졌다.요즘은 지사 설립을 준비하는 데다 연구개발 프로젝트까지 두 개나 맡고 있어서 꽤 피곤했다.잠깐 휴식한 뒤 허아연은 박혜숙과 영상통화를 했다.화면 너머의 박혜숙은 허아연이 혼자 지낸다는 걸 알고 걱정스럽게 물었다."아연아, 혼자 있으면 무섭지 않아? 무서우면 서준이한테 와서 같이 지내달라고 해."권유성이 허아연과 권승준의 사이
그래도 억울했는지 주현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허아연, 나 너보다 세 살밖에 안 많아."나이 든 걸 인정하지 않는 모습에 허아연은 문득 2년 전 주현우가 유건희를 두고 했던 말이 떠올라 일부러 약을 올렸다."머리도 하얗게 세었잖아요. 몇 년만 더 지나면 아저씨 냄새 나겠어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현우가 고개를 들었다.허아연이 아저씨 냄새가 날 거라며 상처 주는 말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두 손에 그릇과 젓가락을 든 채 한참 허아연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주현우가 입을 열었다."머리 다시 염색했잖아. 그리고 허아연, 내가 유건희한테 했던 말 기억하고 대신 복수하는 거지?"아저씨 냄새라니?주현우는 올해 고작 스물여덟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발끈하는 주현우를 보자 허아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계속 밥을 먹었다.이제는 주현우와 함께 있어도 마음이 평온하고 예전처럼 긴장하지도 않았다.예전만큼 신경 쓰지도 않았다.그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더 집중할 수 있었다.그런데 자신에게 집중하고 나니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허아연에게 더 관심을 보였다. 주현우도 권승준도 마찬가지였다.허아연의 입가에 번진 옅은 미소에 주현우도 따라 웃었다.허아연이 돌아온 뒤로 두 사람 사이에 이렇게 편안한 분위기는 처음이었다.식사를 마치자 주현우는 남은 음식을 정리해 쓰레기통에 버리고 시동을 걸어 허아연을 아파트까지 데려다주었다.예전에 살던 아파트, 익숙한 건물 앞이었다.허아연이 차 문을 열고 내리자 주현우도 따라 내려 배웅했다.고개를 들어 허아연의 집이 있는 쪽을 올려다보던 주현우는 만감이 교차했다.헤어져 있던 2년이 주현우에게는 억겁의 시간 같았다.주현우의 시선을 따라 집 쪽을 올려다본 허아연이 다시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럼 먼저 올라갈게요."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앞으로는 데리러 오지 않아도 돼요, 밥 먹으러 데려갈 필요도 없고요. 나 스스로 잘 챙길 수 있으니까요."주현우가 없을 때도 스스로를 잘 챙겼던 허아연
차 안의 은은한 무드등 덕분에 분위기가 유난히 따뜻해졌다. 주현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허아연은 문득 두 사람이 어렸던 학창 시절을 떠올렸다.고등학생 시절 자전거로 등교하던 주현우는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면 종종 허아연을 허씨 본가까지 먼저 데려다준 뒤에야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학년이 달라도 늘 허아연을 기다려줬다.그때만 해도 두 사람은 무척 가깝게 지냈었다. 교진시로 돌아오기 전까지 과거 일들을 거의 다 잊고 지낸 탓에 마치 전생에 있었던 일만 같았다. 기억도 흐릿해진 지 오래였다.그런데 돌아와서 주현우와 자꾸 마주치다 보니 잊혀졌던 기억이 다시 선명해졌다.허아연이 꼼짝 않고 쳐다보자 주현우가 웃으며 말했다."왜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봐? 나 보고 있으면 배가 불러?"느긋한 주현우의 말에 정신이 든 허아연이 딱 잘라 말했다."주현우 씨, 이럴 필요 없어요."몇 번의 실랑이 끝에 허아연은 어느새 다시 주현우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그 말에도 주현우는 여전히 여유롭게 웃었다."안 선생님, 긴장 풀어요. 그냥 친구로 지내자는 건데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잖아요. 내가 뭘 한 것도 아니고요."아무것도 안 하긴 무슨.주현우는 지금껏 누군가를 이렇게 기다려본 적도, 잠든 모습을 지켜본 적도 없었고 몰래 입을 맞춘 적은 더더욱 없었다.사실 주현우는 오래전부터 허아연을 좋아했지만 누구나 혈기왕성하고 오만함이 넘치던 시절이 있는 법이었다.능청스럽게 몰아가는 말에 허아연은 순간 어이없다는 듯 눈을 흘겼다. 십 대였다면 분명 주현우의 말을 믿었을 것이다.하지만 이제 25살인데다 진짜 바보도 아니고 누가 그 말을 믿을까. 허아연의 못마땅한 눈빛에도 주현우는 여전히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태연하게 말했다."배 안 고파? 아니면 내가 먹여줘야 하나?"그 말에 허아연은 더 질색하며 주현우가 건넨 그릇과 젓가락을 낚아채듯 받아 들었다."내가 먹을게요."허아연이 그릇을 받자 주현우는 그제야 웃음이 환하게 번진 얼굴로 다른 그릇과 젓가락을 집어 들었
계속 티격태격하고 허아연이 귀찮아하며 만나고 싶지 않은 기색을 내비쳐도……이렇게 만날 수 있고 조수석에 앉아 있는 것만 해도 주현우는 만족스러웠다. 주현우는 핸들을 잡고 있던 오른손을 떼어 허아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허아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며 손길을 피했다.허아연이 손도 못 대게 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아진 주현우는 다시 핸들을 잡고 식당으로 향했다.……30분 뒤 차가 식당 밖 주차장에 멈췄다.주현우가 내리라고 말하려 옆을 돌아보니 허아연은 팔짱을 낀 채 세상 모르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여전히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옆에서 잠든 허아연을 본 순간 주현우는 가슴이 뭉클해졌다.이런 편안함과 소속감은 두 사람의 학창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몸을 돌려 뒷좌석에 있던 재킷을 가져와 허아연에게 살며시 덮어주는 주현우의 손길은 혹시라도 깰까 봐 유난히 조심스러웠다. 어둑한 차 안에서도 허아연의 피부는 여전히 희었고 이목구비는 또렷하고 예뻤다.손등으로 허아연의 뺨을 살며시 쓸어내리던 주현우가 중얼거렸다."아연아, 네가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야."허아연의 정체를 안 뒤로 주현우가 스스로에게 수없이 되뇐 말이었다.조수석에 앉은 허아연은 여전히 경계하듯 팔짱을 낀 자세 그대로 곤히 잠들어 있었지만 주현우의 손길에도 깨지 않았다.원래 주현우의 차에서 잘 생각은 없었는데 요즘 너무 피곤했던 데다 차가 기분 좋게 흔들리는 바람에 차에 타서 눈을 감자마자 잠들어 버린 것이다. 허아연이 깨지 않자 주현우도 깨우지 않았고 그저 잠든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옆으로 돌아앉아 눈도 깜빡이지 않고 한참 바라보던 주현우는 불쑥 몸을 기울여 허아연의 하얀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은은한 향기가 났다.허아연에게서는 여전히 특유의 향기가 났다.주현우는 몰래 입을 맞춘 것으로도 모자라 허아연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욕심껏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그리웠던 향기였다.허아연은 옆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곤히 잠들어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