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당신한테 하나만 물어볼게.”
재헌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사람이 돌아오지 않았어도 나한테 이혼하자고 했을 거야?”
재헌은 잠시 생각했다.
“우리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건 너도 알잖아.”
“그건 어제도 들었어.”
서희는 물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니야.”
재헌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서희야,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그는 식탁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네가 납득할 때까지 설명할 수는 있어. 하지만 그걸 이유로 내 결정을 계속 미루지는 않을 거야. 나도 내 인생을 살아야 하니까.”
서희는 한동안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피로가 묻어 있었다. 마치 자신이 불필요하게 시간을 끌고 있다는 듯한 태도였고, 서희는 더 설명을 요구해 봐야 남편이 같은 말만 반복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식탁 아래에서 손을 꼭 쥐었다.
“나한테 정말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아?”
재헌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이야?”
서희는 입술을 적셨다.
“어제 내가 병원에 다녀왔다고 했잖아.”
재헌은 그제야 그 말을 떠올렸다.
“아픈 건 아니라며.”
“응. 아픈 건 아니야.”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남편이 조금만 더 물어봐 주기를 기다렸다.
어떤 병원이었는지, 왜 갔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중 하나만 물어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재헌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그럼 다행이고. 오늘 오전에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먼저 나가 봐야겠어.”
서희는 물컵을 감싸 쥔 손에서 천천히 힘을 풀었다. 밤새 마음속으로 되뇌었던 말들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갔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가 천천히 들었다.
“그래. 다녀와.”
재헌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제와 달리 서희는 붙잡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고, 이혼을 다시 생각해 달라고 말하지도 않았으므로, 그는 그녀가 상황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고 판단했다.
“서류는 변호사 통해서 정리할게. 필요한 게 있으면 성재에게 이야기해.”
서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재헌은 더 기다리지 않고 현관으로 향했다.
문이 닫힌 뒤에도 서희는 식탁에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남편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일어난 그녀는 전날 사 온 꽃들의 물을 갈았다.
아직 시들지 않은 꽃들이 물 위에서 가볍게 흔들렸다.
서희는 꽃병을 제자리에 내려놓은 뒤 침실로 올라갔다.
초음파 사진을 넣어 둔 봉투가 눈에 들어오자 그녀는 서랍 앞에 멈춰 섰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 사진을 남편에게 보여 줄 생각에 가슴이 뛰었는데, 이제는 봉투를 꺼내는 일조차 망설여졌다.
그녀는 사진을 꺼내 두 아이의 작은 형체를 한참 바라보았다.
재헌은 이혼을 원했다.
그것도 첫사랑이 돌아왔다는 이유로.
서희는 초음파 사진을 다시 봉투에 넣다가 자신도 모르게 아랫배에 손을 얹었다. 겉으로는 아직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 안에서는 일곱 해 동안 기다려 온 두 생명이 작은 심장을 뛰게 하고 있었다.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열자 아침부터 흐렸던 하늘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서희는 바깥을 한참 바라보다가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재헌에게서 온 메시지가 마지막 화면에 남아 있었다.
*이혼 관련 서류는 변호사 통해 정리할게. 필요한 게 있으면 성재에게 이야기해.*
서희는 그 문장을 천천히 읽었다.
남편은 자신이 일곱 해 동안 지켜 온 결혼을 끝내겠다고 결정하면서, 그 뒤에 남겨질 아내의 삶까지 비서와 변호사를 통해 정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녀는 메시지 창을 닫았다.
아직 이혼서류에 서명하지 않았고, 아이들의 존재도 알리지 않았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떤 선택이 두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인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 시간조차 남편은 기다려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서희는 초음파 사진을 서랍 깊숙이 넣고 조심스럽게 닫았다.
그날 오전, 권성그룹 본사에서는 재헌이 예정된 회의를 마치고 집무실로 돌아왔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억지로 돌아온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들을 진심으로 원하고 지켜 줄 사람이었다.그날 밤 행사를 마치고 호텔 객실로 돌아온 지혜는 거울 앞에서 귀걸이를 풀었다.백명숙이 자신의 손을 잡고 웃던 장면이 떠오르자 입술이 절로 휘어졌다.그녀는 행사 사진 가운데 재헌과 가장 가까이 서 있는 사진을 골라 저장했다. 사진 속 자신의 얼굴은 아름다웠고, 재헌의 옆자리는 자연스러워 보였다.그러나 곧 산부인과 앞에서 찍힌 서희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지혜의 미소가 서서히 걷혔다.그 여자가 임신했다면 오늘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할 수도 있었다.지혜는 정혜원에게 전화를 걸었다.“혜원 씨, 오랜만이에요.”안부를 나누던 그녀는 자연스럽게 혜원의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빚 때문에 생활이 어렵다는 말을 듣자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위로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본론을 꺼냈다.“사실 제가 부탁드릴 일이 하나 있어요.”“무슨 일인데요?”“아는 사람이 병원에 다녀왔는데, 무슨 일인지 말을 안 해서요. 혹시 진료받은 이유를 확인할 수 있을까요?”혜원의 목소리가 굳었다.“그건 안 돼요. 환자 정보는 업무 목적 없이 확인하면 안 됩니다.”지혜는 실망한 척 작게 한숨을 쉬었다.“그렇겠죠. 제가 너무 걱정돼서 무리한 부탁을 했네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부드럽게 덧붙였다.“그런데 혜원 씨, 지난번에 말씀하신 가족 빚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어요?”혜원은 대답을 망설였다.지혜는 창밖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기다렸다.“제가 조금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부탁 때문이 아니라, 예전부터 마음에 걸렸거든요.”그 말은 친절하게 들렸지만 혜원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지혜는 상대의 침묵이 길어지자 목소리를 한층 부드럽게 낮췄다.“부담 갖지는 마세요. 다만 그 사람이 정말 걱정돼서 그래요.”잠시 후 혜원이 물었다.“누구인데요?”지혜는 기다렸다는 듯 이름을 말했다.“윤서희 씨요.”혜원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혜는 그녀가 그 이름을 기억하
재헌은 고개를 끄덕였다.“전하겠습니다.”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서희가 공을 들였다는 사실은 알겠지만, 그것이 이혼 결정을 바꿀 이유는 아니었다. 필요한 보상은 이미 충분히 준비하고 있었다.잠시 뒤 후원사 관계자들의 기념사진 촬영이 시작됐다.지혜는 재헌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자연스럽게 팔을 가까이 붙이자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고, 명숙은 두 사람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행사 진행자는 지혜를 소개하면서 해외에서 쌓은 경력과 후원사와의 관계를 설명했다.무대 한편에는 서희가 준비한 겨울 외투가 전시되어 있었다.그 옷들을 고르고 수정한 사람은 집에 있었고, 그 앞에서 박수를 받는 사람은 다른 여자였다.사진 촬영을 마친 기자가 재헌에게 물었다.“부회장님, 오늘 사모님께서는 참석하지 않으셨습니까?”“개인 사정으로 불참했습니다.”재헌은 짧게 대답했다.기자가 더 묻지 않았지만 주변의 시선은 지혜에게로 옮겨 갔다.“저분이 예전에 부회장님과 가까웠던 분이라던데.”“백 여사님도 무척 반가워하시네.”낮은 속삭임이 이어지는 동안 지혜는 못 들은 척 미소를 유지했다.오히려 재헌의 팔 가까이에 조금 더 다가섰다.그녀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이 불편하기는커녕 달콤했다.오래전 자신이 떠났던 남자가 이제는 권성그룹 부회장이 되어 있었다.그의 옆자리에는 더 이상 윤서희가 없었다.지혜는 명숙이 건네는 샴페인 잔을 받으며 우아하게 웃었다.그날 밤 여덟 시가 조금 지나자 행사 사진이 기사로 올라왔다.서희는 거실에서 임신 초기 안내문을 읽다가 한유림의 메시지를 받았다.*서희야, 이게 무슨 일이야?*기사 링크를 누른 순간, 그녀는 숨을 멈췄다.재헌의 옆에 서지혜가 있었다.두 사람은 중앙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있었고, 다른 사진에서는 명숙까지 함께 웃고 있었다.서희는 화면을 확대했다.시어머니는 지혜의 손을 잡고 있었다.일곱 해 동안 자신에게는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다정한 표정이었다.행사장
지금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면 명숙의 태도가 달라질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변화가 자신을 향한 존중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 터였다.손주를 가진 며느리라는 이유로 다시 그 집에 붙잡히고 싶지는 않았다.무엇보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거래 조건이 되는 일만큼은 막고 싶었다.“제 몸을 모욕하실 권리는 없어요.”명숙은 잠시 말을 잃었다.서희가 일곱 해 동안 시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지금 나한테 대드는 거니?”“제 존엄을 지키겠다는 거예요.”명숙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좋아. 그럼 네 마음대로 해 봐. 대신 오늘 행사에는 절대 나타나지 마. 지혜가 재헌이 옆에 앉기로 했으니까 괜히 분위기 흐리지 말고.”서희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제가 준비한 물품은 아이들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 있게 해 주세요.”“아직도 네가 안주인인 줄 아니? 직원들이 알아서 할 일이야.”서희는 잠시 침묵했다가 조용히 대답했다.“그 물품을 받는 아이들에게는 누가 안주인인지 중요하지 않아요.”명숙이 다시 언성을 높이려는 순간, 서희는 통화를 마쳤다.휴대전화를 내려놓자 손끝이 떨렸다.속이 울렁거려 잠시 소파에 앉아 있던 그녀는 물을 천천히 마셨다. 임신 초기라 쉽게 피로해졌고, 빈속에 감정이 격해지면 메스꺼움이 심해지곤 했다.서희는 아랫배를 감싸며 숨을 골랐다.“엄마가 지킬게.”그 말을 입 밖으로 내고 나서야 자신이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조금 실감 났다.그날 저녁, 권성그룹 자선행사가 열리는 호텔 연회장은 화려한 조명과 취재진의 카메라로 가득했다.재헌은 박성재에게 행사 진행 상황을 보고받으며 중앙 테이블로 향했다.그의 오른쪽에는 서지혜가 앉아 있었다.짙은 남색 드레스에 진주 귀걸이를 착용한 지혜는 재헌을 발견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드럽게 휘어진 입술과 반가움이 어린 눈빛은 누구에게나 다정하게 보일 만큼 자연스러웠다.“재헌아, 왔어?”“일찍 왔네.”“후원사 관계자들하고 인사하고 있었어.”지혜는 테이블 위 이름표를 슬쩍
서희가 병원에서 돌아와 두 아이의 초음파 사진을 서랍에 넣어 두던 시간이었다.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제가 준비한 물품은 예정대로 전달되나요?”“네. 일정에는 변동 없습니다.”“겨울 외투 사이즈가 섞이지 않도록 마지막으로 확인해 주세요. 재단 담당자에게도 전달해 두었지만 현장에서 실수하면 아이들이 맞지 않는 옷을 받게 돼요.”성재는 곧바로 확인하겠다고 대답했다.통화를 끝낸 서희는 행사 자료를 내려놓았다.자신이 준비한 일은 그대로 진행된다. 자신이 작성한 문서도, 담당자들과 주고받은 약속도 모두 유효했다.다만 자신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현관에서 구두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재헌은 출근 준비를 마친 채 식당으로 들어왔다. 평소처럼 커피잔을 찾던 그는 준비된 커피가 없자 직접 머신을 작동시켰다.서희는 식탁 위에 행사 자료를 펼쳐 놓았다.“제 이름을 빼셨더군요.”재헌은 커피잔을 들고 돌아섰다.“행사 명단 봤어?”“서지혜 씨가 제 자리에 앉는다고요.”“이혼할 사이인데 공식 일정부터 정리하는 게 맞지.”재헌은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마치 오래된 업무 하나를 처리한 사람처럼 태연했다.서희는 그의 앞으로 기부 물품 목록을 밀었다.“제가 두 달 동안 준비한 행사예요.”재헌은 서류를 내려다보다가 시계를 확인했다.“그동안 수고한 건 보상하지.”서희는 남편이 돌려놓은 종이를 바라보았다. 외투 사이즈를 수정한 붉은 표시와 담당자들의 연락처가 빼곡하게 남아 있었다.“일곱 해도 그렇게 계산했어요? 돈으로 갚으면 끝나는 시간이라고.”재헌의 눈썹이 조금 움직였다.“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마. 네가 기여한 부분을 인정하겠다는 뜻이야.”“인정한다면서 제 이름부터 지우셨네요.”“앞으로 참석하지 않을 자리잖아.”서희는 그를 바라보았다.“아직 이혼하지 않았어요.”“서류에 서명만 하면 끝날 일이야.”재헌은 커피잔을 내려놓고 재킷 단추를 채웠다.“지혜는 후원사 관계자로 참석하는 거니까 괜한 오해는 하지 마
서지혜는 휴대전화에 떠 있는 사진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산부인과 건물에서 나오는 윤서희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손에 든 서류 봉투를 가슴 가까이 끌어안은 모습이 유난히 마음에 걸렸다.남편에게 이혼을 통보받은 여자가 산부인과에서 저런 표정으로 나올 이유가 무엇일까.지혜는 사진을 확대하다가 건물 입구에 걸린 병원 이름을 확인했다. 단순한 여성 질환으로 방문했을 수도 있었지만, 결혼한 지 일곱 해가 되도록 아이가 없던 여자라는 사실을 떠올리자 불길한 가능성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그녀는 사진을 보낸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서희 씨, 혼자 나왔어?”“응. 내가 본 건 건물에서 나오는 순간뿐이야.”“표정은 어땠는데?”“글쎄, 기분이 좋아 보이던데. 그런데 왜?”지혜는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올렸다. 목소리에는 조금의 불안도 묻어나지 않았다.“아는 사람이라서. 요즘 힘든 일이 있다기에 걱정됐거든.”전화를 끊자마자 웃음기가 사라졌다.서희가 임신했다면 재헌의 이혼 결정도 흔들릴 수 있었다. 백명숙이 일곱 해 동안 후계자를 낳지 못했다며 며느리를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사실을 지혜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집안에서 아이가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 없었다.하필 지금이라니.지혜는 손톱 끝으로 휴대전화 테두리를 천천히 쓸었다.재헌은 이미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그러나 서희가 아직 서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일곱 해를 차지했던 여자가 아이까지 갖게 된다면, 자신이 돌아온 의미가 흐려질 수도 있었다.지혜는 주소록에서 정혜원의 이름을 찾았다. 예전에 알게 된 병원 행정직원으로, 최근 가족의 빚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당장 전화를 걸지는 않았다.확인해야 할 것은 하나 더 있었다.그녀는 다음 날 저녁 열리는 권성그룹 자선행사 초청장을 꺼냈다. 후원사 관계자로 참석할 예정이었지만 중앙 테이블에는 아직 자신의 자리가 없었다.지혜는 재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재헌아,
책상 위에는 성재가 정리해 둔 보고서와 결재 서류가 놓여 있었고, 재헌은 몇 장을 넘기다가 휴대전화를 확인했다.서희에게 보낸 메시지는 읽음 표시만 떠 있었다.답장은 없었다.서희는 원래 답장을 빠르게 하는 편이었다. 늦게 들어간다고 하면 알겠다고 했고, 식사를 못 한다고 하면 다음에 함께 먹자고 했으므로, 오늘처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일이 재헌에게는 낯설었다.그러나 그는 그것이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다.이혼을 요구받았으니 화가 났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감정도 가라앉을 테고, 필요한 조건을 정리하면 서로에게 더 나은 선택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재헌이 보고서에 다시 시선을 돌리려는 순간 지혜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재헌아, 혹시 서희 씨 어디 아픈 거야?*재헌은 눈썹을 찌푸렸다.*왜?*잠시 뒤 답장이 왔다.*아니, 그냥 걱정돼서. 병원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재헌은 전날 서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병원에 다녀왔다고 했다.꼭 이야기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도 했다.그는 휴대전화를 손에 쥔 채 잠시 생각했다. 서희는 분명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자신이 시간이 없다고 했고, 결국 듣지 못했다.재헌은 통화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지금이라도 전화해 볼까.그때 집무실 문이 두드려졌다.“부회장님,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성재의 목소리였다.재헌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알겠습니다.”그는 재킷을 집어 들고 집무실을 나섰다. 서희에게 전화하는 일은 또다시 뒤로 밀렸지만, 재헌은 그 일을 특별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나중에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그날 오전 늦게, 서지혜는 호텔 객실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로 전송된 사진 한 장을 바라보고 있었다.아는 지인에게서 온 메시지였다.*어제 병원에서 권 부회장님 사모님을 본 것 같아. 혹시 어디 아프신가?*함께 첨부된 사진에는 병원 건물 앞을 걸어 나오는 여자가 찍혀 있었다.지혜는 화면을 확대했다.윤서희였다.사진 속 서희는 손에 서류 봉투를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