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10화

Author: 레몬티
‘내가 직접... 서명한 거라고?’

영민의 뇌리를 스친 기억.

한 달 전, 지설이 어떤 서류를 들고 와 사인을 부탁했었다.

그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또 돈 달라는 건가?’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성의 없이 이름만 적어줬다.

지금 와서야 알았다.

그 서류가 바로 이혼합의서였다는 사실을.

‘왜? 왜 말하지 않았지?’

‘떠날 생각이었으면 적어도 한 번은 내게 직접 얘기했어야지.’

영민은 혼란스러웠다.

지설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어왔다.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차갑게 대해도, 늘 곁을 지키던 여자가 아니었나?

‘그런데... 왜 갑자기? 왜 이제 와서 날 버린 거야?’

영민은 전화를 붙잡은 채 장경은 여사에게 물었다.

“어머니, 왜 그 사람을 막지 않았어요? 전 이혼할 생각,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장 여사는 더더욱 어리둥절했다. 아들은 지설에게 마음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 네가 지설한테 관심도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네가 이혼을 원하지 않았다니...]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낮게 말했다.

[지설은 이미 떠났어. 그 아이의 마음이 완전히 돌아선 것 같아. 이젠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니?]

그 말에 영민의 표정은 더 일그러졌다.

“아니에요! 전 동의한 적 없어요. 이건 무효예요. 그리고 지설은 제 아내예요. 설령 죽어도 제 여자예요. 절대... 놓지 않을 거예요!”

장 여사는 말을 잇지 못했다.

...

전화를 끊은 영민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내리며 리정을 불렀다.

“사모님 지금 어디 있는지 당장 찾아.”

리정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은 늘 주유연 씨만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사모님이 깨끗하게 떠나 주면 더 좋은 거 아닌가?’

‘왜... 버려진 사람처럼 안달이신 거지?’

옆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유연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귀국하면 지설과는 확실히 갈라서고, 자신과 결혼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왜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 걸까?

‘설마... 심지설을 좋아한다고? 말도 안 돼.’

그녀는 애써 스스로를 설득했다.

‘부영민... 자존심이 강해. 이혼 얘기를 먼저 꺼내는 건 본인이어야 해.’

‘그런데 심지설이 먼저 이혼을 진행했으니, 체면이 상한 거야.’

‘분명 그래서 저렇게 집착하는 거야. 그렇지, 절대 사랑은 아니야...’

유연은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반복하며, 마음속의 불안을 억눌렀다.

...

지설은 새집에서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다.

아침 햇살이 비집고 들어왔을 때, 그녀는 낯선 평온함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음 날, 장경은 여사의 비서와 함께 전원주택 명의 이전 절차를 밟았다.

모든 서류에 도장이 찍히고 끝난 순간, 지설은 곧장 부동산 공인중개사를 찾아가 집을 팔겠다고 말했다.

“큰 거래라서 바로 매수자 찾겠습니다, 사모님. 걱정하지 마세요. 최대한 빠르게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공인중개사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연신 공손했다.

지설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팔리는 건 시간문제지. 더는 머리 아플 일 없어.’

이후 그녀가 향한 곳은 병원이었다.

어머니 예연숙은 예전보다 훨씬 안정된 모습이었다.

병실엔 웃음소리가 가득했고, 병동 친구들과 고스톱을 치고 있었다.

지설은 가져온 과일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칼로 정성스럽게 잘랐다.

“이거 같이 드세요.”

그녀는 이모, 아저씨들에게 나눠주며 웃었다.

작게 썰어 포크에 꽂은 과일을 어머니 입에 가져다주자, 예연숙은 자연스럽게 받아먹으며 말했다.

“지설아, 부 서방은 같이 안 왔니?”

지설의 손이 잠시 굳었다.

“응, 부서방이 요즘 바빠서. 다음에 시간 되면 같이 올 거야.”

“그래? 그럼 너희 언제 아기는 낳을 거야? 엄마가 기다리잖아.”

지설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예연숙은 병으로 기억이 많이 흐릿해져 있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것도, 집안 사업이 무너진 것도 전혀 알지 못했다.

지금도 그녀는 남편이 출장 나갔다고 생각했고, 지설과 영민이 막 결혼한 새 신혼부부라고 믿고 있었다.

‘엄마에게 충격 주면 안 돼. 아직은 말할 때가 아니야.’

지설은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지갑에서 꺼낸 잔돈을 고스톱판 위에 툭 올려놓으며 말했다.

“엄마, 또 아기 얘기야? 그런 얘기 들으면 머리 아파. 얼른 고스톱이나 치셔. 내 돈 잃지 말고.”

예연숙은 소녀처럼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에이, 네 아빠가 다 벌어다 주는데, 내가 돈이 없냐. 네 건 필요 없어.”

지설은 장단을 맞추듯 다정히 말했다.

“그럼, 아빠가 엄마 많이 사랑하시잖아.”

...

고스톱 한 판 끝나고 난 뒤, 지설은 예연숙을 부축해 병원 정원으로 나갔다.

햇살 아래 앉은 어머니는 바람을 맞으며 천진하게 물었다.

“지설아, 나 입원한 지 벌써 두 달이 다 돼 가는데... 너희 아빠는 왜 아직도 안 와? 전화는 해 봤어?”

지설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는 지금 외국에서 프로젝트 때문에 바빠. 금방 들어온다고 했어.”

“그 사람 참... 일만 알지 가족은 몰라. 이런 나이에 뭐가 그리 바쁜지.”

잠시 후, 예연숙의 눈빛이 의아하게 흔들렸다.

“근데 내가 메시지 몇 번이나 보냈는데 왜 답이 없지?”

지설은 익숙한 듯 태연히 대답했다.

“엄마도 알잖아. 아빠는 원래 일할 땐 핸드폰 잘 안 봐. 아마 못 본 거야.”

“흥, 이번에 오면 내가 가만 안 둔다. 회사 일 좀 내려놓고 날 챙기라고 할 거야.”

“맞아. 나도 옆에서 잘 거들게.”

딸의 든든한 대답에 예연숙은 기분이 풀렸는지 다시 웃었다.

병실에 예연숙을 돌려보낸 뒤, 지설은 홀가분하게 집으로 향했다.

새로 얻은 전셋집.

넓지도,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그곳에서만큼은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그래, 이제부터는 내 인생을 살면 돼.’

...

며칠 푹 쉰 뒤, 지설은 드디어 출근을 시작했다.

지난 3년 동안 낮에는 꾸준히 피아노를 연습했기에, 손이 굳지는 않았다.

실기 시험도 무난히 통과했고, 바로 학원에서 수습 강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내가 뭐랬어? 넌 분명 잘할 줄 알았다니까. 정식으로 채용되면 내가 한턱 크게 쏠게.”

소은화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선배님.”

지설은 연신 고개를 숙였다.

첫 직장이라 그런지, 마음 한구석이 조마조마했다.

‘괜히 실수하면 어쩌지... 학생들 앞에서 당황하면 안 되는데.’

그런 불안감에 지설은 매번 수업 전날 밤에도 피아노 앞에서 여러 번 시뮬레이션을 해보았다.

다행히 처음 맡은 제자 두 명은 순하고 성격이 좋아서 수업 분위기는 원만했다.

하지만 학원 수습 기간에는 평가 항목이 많아,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갔다.

지설은 매일 집에 돌아오면 그대로 뻗듯 잠들었고,

그 덕에 지난 결혼 생활의 불쾌한 기억을 곱씹을 여유조차 없었다.

...

어느 날, 야간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길.

병원 간병인 하희자에게서 급한 전화가 걸려 왔다.

[지설 씨, 큰일이에요! 어머님이 병원에서 안 보이세요.]

지설은 순간 핏기가 가시는 듯했다.

“네? 지금요?!”

심장이 쿵쾅거려 손에 쥔 핸드폰이 덜덜 흔들렸다.

그녀는 곧장 뛰어가려다, 급한 마음에 발이 헛디뎌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

강한 충격이 발목을 찌르듯 훑고 지나갔다.

지설은 숨을 몰아쉬며, 난간을 붙잡고 억지로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 등 뒤에서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세요?”

지설은 고통에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역광 속에서 길고 곧은 실루엣이 서 있었고, 낯선 남자의 눈빛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버림받은 아내, 재혼에 눈물 쏟는 전남편   제100화

    말을 마친 은화는 장난스럽게 도진을 향해 윙크까지 했다. 옆에서 팔짱을 낀 우란은 흥미로운 듯 이 장면을 지켜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역시 우리 은화, 분위기 띄우는 데는 선수네.’‘기도환 대표님도 보통 사람이 아니야. 우리 대표님을 이렇게 끌어내다니.’예린은 촉촉한 눈동자를 깜빡이며 도진에게 물었다.“도진 오빠, 이분들은 오빠 친구들이야?”그 말과 함께, 예린의 시선은 자연스레 은화 옆에 앉아 있는 지설에게로 옮겨갔다. 위아래로 찬찬히 훑어보는 눈빛.아무리 봐도, 세 사람 중 단연 눈에 띄는 건 지설이었다. 단정하면서도 또렷한 이목구비, 은근한 고집이 묻어나는 기품 있는 분위기.‘위험해. 이런 여자는... 분명 도진 오빠 곁에 오래 남을지도 몰라.’예린의 마음속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피어올랐다.하지만 도진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설명은커녕, 관심조차 없는 듯한 무심한 태도.그러나 속으로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역시... 형이 여기 오자고 고집부린 이유가 이거였군.’도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도환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엔 당장이라도 목을 조를 듯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그럼에도 도환은 태연했다. 동생의 서늘한 기색 따위 전혀 느끼지 못한 듯, 오히려 환한 미소로 사람들을 하나하나 소개하기 시작했다.“이쪽은 구예린, 내 친구예요.”그러고는 반대편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예린아, 여긴 우란 씨. 도진 로펌의 에이스 변호사라고 할 수 있지.”우란은 가볍게 손사래를 치며 겸손하게 웃었다.“별말씀을요. 저는 그냥 작은 새우일 뿐이에요.”도환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이 두 분은 심지설 씨랑 소은화 씨. 유명한 피아노 강사님들이지. 지금 창업 준비 중이라고 들었어.”은화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도환을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어머, 우리가 조금만 더 일찍 대표님을 알았더라면 정말 좋았을 텐데요. 그럼 든든한 투자자 한 분 더 모실 수 있었을 텐데요?”그 말에 도환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 버림받은 아내, 재혼에 눈물 쏟는 전남편   제99화

    도환은 동생의 신호 따위 전혀 못 알아챈 듯, 오히려 싱긋 웃으며 예린에게 말을 건넸다.“예린아,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데도 네 눈엔 여전히 이 답답한 도진이만 보이니... 난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도대체 도진이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거냐?”그 말에 예린의 얼굴이 순간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부끄럽다는 듯 살짝 고개를 돌리더니, 곧바로 애교 섞인 목소리로 불렀다.“도환 오빠!!”이내 마치 도진을 두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듯 재빨리 말을 보탰다.“도진 오빠는 전혀 답답한 사람 아니야!”그 목소리에는 도진을 지켜 주고 싶은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도환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어차피 이렇게 만난 김에 도진이 한번 제대로 대접해야 하지 않겠어? 오늘 점심은 도진이 쏘는 거다.”예린은 기다렸다는 듯,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해맑게 웃었다. 시선은 곧장 도진에게 향했다.하지만 정작 도진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형이 예린을 정리해 줄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같이 밥 먹자고?’예상치 못한 전개에 도진의 마음은 불편해졌다.길을 걷는 동안, 도환이 슬쩍 예린에게 속삭였다.“우리 형제 사이라는 건, 아는 사람 거의 없어. 꼭 비밀로 해 줘.”예린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무슨 사정인지 자세히는 몰랐지만, 도진과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 기꺼이 맞춰 주고 싶었다....잠시 후, 도환은 주도적으로 두 사람을 데리고 한 식당 앞에 멈췄다. 전통 있는 분위기에 손님들로 가득한, 소문난 맛집이었다.그러나 뒤따라온 도진은 그저 무심한 얼굴로 간판을 올려다봤다.‘또 이런 데야? 난 자극적인 음식은 별로인데...’입맛에 맞지 않는 메뉴를 떠올리며, 그는 이마에 잔주름을 만들었다.옆에 있던 예린이 서둘러 도환 곁으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도환 오빠, 도진 오빠 매운 거 잘 못 먹잖아. 우리 그냥 다른 데로 가면 안 돼? 그래야 다 같이 기분 좋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아.”말하면서도 예린의 시선은 계속

  • 버림받은 아내, 재혼에 눈물 쏟는 전남편   제98화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지설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어떻게 해야 이 복잡한 상황을 풀 수 있을까...’그 순간, 우란이 눈을 껌뻑였다. 그러고는 슬쩍 핸드폰을 집어 들더니, 지설의 옆모습을 조용히 찍어 버렸다. 한숨과 함께 떨어져 나온 쓸쓸하고도 애잔한 표정 그대로였다.우란은 곧바로 사진을 열어보더니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볍게 터치했다. 곧 사진은 도환에게 전송되었다.요즘 들어 도환은 로펌에 자주 들락날락했다. 활달하고 유쾌한 성격 덕분에 변호사들과도 금세 친해졌다. 그 과정에서 우란이 지설의 친구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고, 도환은 속으로 생각했다.‘이 기회다. 우리 도진, 이제라도 여자를 만나야지.’‘백년솔로’라는 별명이 따라붙는 법무법인 도진의 대표변호사 기도진. 괜찮은 남자임은 틀림없었고, 지설과 함께라면 참 잘 어울릴 거라는 확신이 도환에게 있었다. 우란도 그 말에 흔쾌히 동의하며 협조를 약속했다.잠시 후, 도환의 핸드폰에 사진이 도착했다. 화면 속 지설의 표정을 본 순간, 도환은 피식 웃으며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그리고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주소는요?]거의 동시에 우란의 핸드폰에 메시지가 울렸다. 우란은 지체 없이 레스토랑의 위치를 찍어 보냈다.그 시각, 도환은 이미 로펌 건물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그는 동생의 사무실로 향해 문을 열었다. 여전히 책상 앞에서 업무를 처리하던 도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도환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동생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야, 그만 해. 밥 먹으러 가자.”도진은 고개를 들어 형을 바라보았다. 흥분한 듯 들뜬 표정이 역력한 도환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필요 없어. 이따가 배달시켜 먹을 거야.”도진의 단호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도환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밥 같이 안 먹겠다면... 오늘은 여기 눌러앉아 로펌 한번 제대로 뒤집어 놓을 거다. 네가 나가 달라 빌기 전까진 안 나간다.”그 말과 함께 도환은 두 팔을

  • 버림받은 아내, 재혼에 눈물 쏟는 전남편   제97화

    아침 일찍, 지설과 은화는 학원 내부 물건들을 정리하러 학원에 나왔다.마침 학원은 법무법인 도진이 있는 같은 빌딩에 있었다. 은화는 자연스럽게 우란에게 연락을 넣어 점심을 함께하자고 제안했고, 곧 우란이 약속 장소로 나타났다.세 사람은 근처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식사가 채 시작되기도 전에, 우란의 시선은 자꾸만 지설에게로 향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망설이다가, 결국 그녀는 입을 열었다.“지설 씨, 혹시 모르셨죠? 우리 대표님... 소꿉친구가 있다네요. 그것도 꽤 각별한 사이래요.”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란은 핸드폰을 꺼내 빠르게 화면을 뒤적였다. 그리고 회사 단톡방에서 이미 화제가 된 사진 한 장을 지설 앞으로 내밀었다.지설은 핸드폰을 받아 들고 순간 숨이 막히듯 굳어 버렸다. 화면 속 여자애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눈빛은 맑고 반짝였으며, 그 자체로 싱그러움이 가득했다.‘왜 이렇게 답답하지? 숨이 잘 안 쉬어져.’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뒤섞여 지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도진과 자신은 공식적인 연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도진의 사적인 문제에 간섭할 자격이 없다는 걸,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다.그런데도 지설은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와, 정말 잘됐네요. 보니까 기 변호사님이랑 아주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그녀는 억지로 짜낸 미소였다.우란과 은화는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서로 얼굴을 마주 본 뒤,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지설 씨, 정말 하나도 안 신경 쓰여요?”사실 지켜보는 이들 눈에도, 지설과 도진 사이에는 늘 알 수 없는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그 미묘한 온도를, 가장 가까이 지켜보는 우란과 은화가 모를 리 없었다.게다가 은화와 지설의 학원이 입주해 있는 이 층의 임대 문제도, 사실상 도진이 직접 발로 뛰며 해결해 준 일이었다.늘 바쁘게 일하며 숨 돌릴 틈조차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사소한 일에까지 정성을 쏟을 수 있었을까?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 뒤에는 분

  • 버림받은 아내, 재혼에 눈물 쏟는 전남편   제96화

    도진은 차갑게 입술을 열었다.“나 지금 바빠. 중요한 일 아니면, 당장 나가.”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곧장 사무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단호하고 결연한 발걸음,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뚜렷했다.하지만 예린은 도진의 차가운 태도와 짜증을 전혀 느끼지 못한 듯, 재빠르게 그 뒤를 따라붙었다.예린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눈이 예쁘게 초승달처럼 휘어지며,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이구, 괜찮아! 난 그냥 오빠 일하는 거 보고 싶어서 온 거야. 점심도 같이 먹으면 되잖아?”도진은 조금도 감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대체 왜 저렇게 집요하게 따라붙는 거지?’‘분명 여러 번 말했잖아. 난 너한테 그런 감정 없다고.’도진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뿐이었다.‘하루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 해.’하지만 예린은 마치 거절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는 듯, 계속해서 따라붙었다.시간은 흘러 두 시간이 지났다. 도진이 창밖을 바라보니, 예린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미친 거 아냐? 아직도 안 갔어?’도진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고, 마음속 불편함은 더 짙어졌다. 결국 그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번호를 눌렀다.잠시 후, 수화기 너머로 차분하고 다정한 도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무슨 일인데?]도진은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구예린이 아직도 여기 있어. 두 시간이나 붙어 있다니까. 형, 어떻게 좀 해봐.”그 말과 함께 도진의 머릿속에는 어릴 적 기억이 스쳤다. 언제나 자기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떨어질 줄 모르던 꼬마 예린.매번 그런 상황을 해결해 준 건 늘 도환이었다. 꾀 많고 눈치 빠른 형이 나서야만, 그는 간신히 숨통을 틀 수 있었다.이번에도 도진은 본능처럼 형에게 기대고 있었다.[예린, 결국 또 찾아왔지?]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도환의 목소리엔 묘한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그는 이미 모든 걸 꿰뚫고 있다는 듯한 자신감이 가득했

  • 버림받은 아내, 재혼에 눈물 쏟는 전남편   제95화

    예린은 로펌 휴게실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한 손에 잡지까지 펼쳐 놓고, 마치 이곳이 자기 집인 양 편안한 모습이었다.그 앳된 얼굴에는 은근한 미소가 걸려 있었고, 지나가던 변호사들과 직원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녀에게 꽂혔다.‘누구지?’‘처음 보는 사람인데...’‘...’속으로 웅성거렸지만, 정작 예린은 그런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익숙하다는 듯, 우아하고 당당한 태도로 주변을 장악하고 있었다.언뜻 보면, 예린이는 마치 오래전부터 이곳을 드나들던 로펌의 안주인 같았다.잠시 후, 데스크 직원 유진이 다가와 뜨거운 커피를 건넸다.“손님, 커피 드시죠.”예린은 자연스레 커피를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곧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미소 지었다.“음... 커피가 조금 달네요. 저는 반만 당 넣은 게 좋아요. 그리고 얼음을 조금 넣어주면 더 산뜻하겠어요. 다음엔 그렇게 부탁드릴게요.”유진은 순간 멈칫했다. 이 여자분을 자신도 본 건 처음인데, 어쩐지 너무 당연하게 요구하는 태도에 말문이 막힌 것이다.게다가 예린의 옷차림은 눈에 띌 정도로 고가의 명품들이었다. 한눈에 봐도 흔한 사람이 아니었다.유진의 머릿속에 스친 건 단 한 사람.‘혹시... 우리 대표님 여자 친구?’‘근데 우리 모두 심지설 씨라고 알고 있었는데... 내가 착각한 건가?’유진은 마음속에 물음표를 잔뜩 품은 채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네, 알겠습니다. 불편하시지 않게 준비해 드리겠습니다.”그렇게 말한 뒤, 유진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아침 9시 정각, 로펌 현관문이 열렸다.도진이 들어섰다.잘 재단된 수트가 그의 넓은 어깨와 곧은 허리를 따라 매끈하게 떨어졌다.고급 원단 특유의 은은한 광택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흘러내렸고, 주변 공기마저 긴장하게 만드는 존재감이 뚜렷하게 풍겼다.도진은 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 차분하게 휴게실 쪽으로 향했다.그 순간, 소파에 앉아 있던 예린과 눈이 마주쳤다.바로 그 순간, 예린의 눈길이 번개처럼 도진의 모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