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마친 은화는 장난스럽게 도진을 향해 윙크까지 했다. 옆에서 팔짱을 낀 우란은 흥미로운 듯 이 장면을 지켜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역시 우리 은화, 분위기 띄우는 데는 선수네.’‘기도환 대표님도 보통 사람이 아니야. 우리 대표님을 이렇게 끌어내다니.’예린은 촉촉한 눈동자를 깜빡이며 도진에게 물었다.“도진 오빠, 이분들은 오빠 친구들이야?”그 말과 함께, 예린의 시선은 자연스레 은화 옆에 앉아 있는 지설에게로 옮겨갔다. 위아래로 찬찬히 훑어보는 눈빛.아무리 봐도, 세 사람 중 단연 눈에 띄는 건 지설이었다. 단정하면서도 또렷한 이목구비, 은근한 고집이 묻어나는 기품 있는 분위기.‘위험해. 이런 여자는... 분명 도진 오빠 곁에 오래 남을지도 몰라.’예린의 마음속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피어올랐다.하지만 도진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설명은커녕, 관심조차 없는 듯한 무심한 태도.그러나 속으로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역시... 형이 여기 오자고 고집부린 이유가 이거였군.’도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도환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엔 당장이라도 목을 조를 듯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그럼에도 도환은 태연했다. 동생의 서늘한 기색 따위 전혀 느끼지 못한 듯, 오히려 환한 미소로 사람들을 하나하나 소개하기 시작했다.“이쪽은 구예린, 내 친구예요.”그러고는 반대편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예린아, 여긴 우란 씨. 도진 로펌의 에이스 변호사라고 할 수 있지.”우란은 가볍게 손사래를 치며 겸손하게 웃었다.“별말씀을요. 저는 그냥 작은 새우일 뿐이에요.”도환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이 두 분은 심지설 씨랑 소은화 씨. 유명한 피아노 강사님들이지. 지금 창업 준비 중이라고 들었어.”은화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도환을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어머, 우리가 조금만 더 일찍 대표님을 알았더라면 정말 좋았을 텐데요. 그럼 든든한 투자자 한 분 더 모실 수 있었을 텐데요?”그 말에 도환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도환은 동생의 신호 따위 전혀 못 알아챈 듯, 오히려 싱긋 웃으며 예린에게 말을 건넸다.“예린아,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데도 네 눈엔 여전히 이 답답한 도진이만 보이니... 난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도대체 도진이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거냐?”그 말에 예린의 얼굴이 순간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부끄럽다는 듯 살짝 고개를 돌리더니, 곧바로 애교 섞인 목소리로 불렀다.“도환 오빠!!”이내 마치 도진을 두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듯 재빨리 말을 보탰다.“도진 오빠는 전혀 답답한 사람 아니야!”그 목소리에는 도진을 지켜 주고 싶은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도환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어차피 이렇게 만난 김에 도진이 한번 제대로 대접해야 하지 않겠어? 오늘 점심은 도진이 쏘는 거다.”예린은 기다렸다는 듯,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해맑게 웃었다. 시선은 곧장 도진에게 향했다.하지만 정작 도진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형이 예린을 정리해 줄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같이 밥 먹자고?’예상치 못한 전개에 도진의 마음은 불편해졌다.길을 걷는 동안, 도환이 슬쩍 예린에게 속삭였다.“우리 형제 사이라는 건, 아는 사람 거의 없어. 꼭 비밀로 해 줘.”예린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무슨 사정인지 자세히는 몰랐지만, 도진과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 기꺼이 맞춰 주고 싶었다....잠시 후, 도환은 주도적으로 두 사람을 데리고 한 식당 앞에 멈췄다. 전통 있는 분위기에 손님들로 가득한, 소문난 맛집이었다.그러나 뒤따라온 도진은 그저 무심한 얼굴로 간판을 올려다봤다.‘또 이런 데야? 난 자극적인 음식은 별로인데...’입맛에 맞지 않는 메뉴를 떠올리며, 그는 이마에 잔주름을 만들었다.옆에 있던 예린이 서둘러 도환 곁으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도환 오빠, 도진 오빠 매운 거 잘 못 먹잖아. 우리 그냥 다른 데로 가면 안 돼? 그래야 다 같이 기분 좋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아.”말하면서도 예린의 시선은 계속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지설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어떻게 해야 이 복잡한 상황을 풀 수 있을까...’그 순간, 우란이 눈을 껌뻑였다. 그러고는 슬쩍 핸드폰을 집어 들더니, 지설의 옆모습을 조용히 찍어 버렸다. 한숨과 함께 떨어져 나온 쓸쓸하고도 애잔한 표정 그대로였다.우란은 곧바로 사진을 열어보더니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볍게 터치했다. 곧 사진은 도환에게 전송되었다.요즘 들어 도환은 로펌에 자주 들락날락했다. 활달하고 유쾌한 성격 덕분에 변호사들과도 금세 친해졌다. 그 과정에서 우란이 지설의 친구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고, 도환은 속으로 생각했다.‘이 기회다. 우리 도진, 이제라도 여자를 만나야지.’‘백년솔로’라는 별명이 따라붙는 법무법인 도진의 대표변호사 기도진. 괜찮은 남자임은 틀림없었고, 지설과 함께라면 참 잘 어울릴 거라는 확신이 도환에게 있었다. 우란도 그 말에 흔쾌히 동의하며 협조를 약속했다.잠시 후, 도환의 핸드폰에 사진이 도착했다. 화면 속 지설의 표정을 본 순간, 도환은 피식 웃으며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그리고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주소는요?]거의 동시에 우란의 핸드폰에 메시지가 울렸다. 우란은 지체 없이 레스토랑의 위치를 찍어 보냈다.그 시각, 도환은 이미 로펌 건물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그는 동생의 사무실로 향해 문을 열었다. 여전히 책상 앞에서 업무를 처리하던 도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도환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동생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야, 그만 해. 밥 먹으러 가자.”도진은 고개를 들어 형을 바라보았다. 흥분한 듯 들뜬 표정이 역력한 도환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필요 없어. 이따가 배달시켜 먹을 거야.”도진의 단호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도환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밥 같이 안 먹겠다면... 오늘은 여기 눌러앉아 로펌 한번 제대로 뒤집어 놓을 거다. 네가 나가 달라 빌기 전까진 안 나간다.”그 말과 함께 도환은 두 팔을
아침 일찍, 지설과 은화는 학원 내부 물건들을 정리하러 학원에 나왔다.마침 학원은 법무법인 도진이 있는 같은 빌딩에 있었다. 은화는 자연스럽게 우란에게 연락을 넣어 점심을 함께하자고 제안했고, 곧 우란이 약속 장소로 나타났다.세 사람은 근처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식사가 채 시작되기도 전에, 우란의 시선은 자꾸만 지설에게로 향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망설이다가, 결국 그녀는 입을 열었다.“지설 씨, 혹시 모르셨죠? 우리 대표님... 소꿉친구가 있다네요. 그것도 꽤 각별한 사이래요.”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란은 핸드폰을 꺼내 빠르게 화면을 뒤적였다. 그리고 회사 단톡방에서 이미 화제가 된 사진 한 장을 지설 앞으로 내밀었다.지설은 핸드폰을 받아 들고 순간 숨이 막히듯 굳어 버렸다. 화면 속 여자애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눈빛은 맑고 반짝였으며, 그 자체로 싱그러움이 가득했다.‘왜 이렇게 답답하지? 숨이 잘 안 쉬어져.’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뒤섞여 지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도진과 자신은 공식적인 연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도진의 사적인 문제에 간섭할 자격이 없다는 걸,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다.그런데도 지설은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와, 정말 잘됐네요. 보니까 기 변호사님이랑 아주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그녀는 억지로 짜낸 미소였다.우란과 은화는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서로 얼굴을 마주 본 뒤,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지설 씨, 정말 하나도 안 신경 쓰여요?”사실 지켜보는 이들 눈에도, 지설과 도진 사이에는 늘 알 수 없는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그 미묘한 온도를, 가장 가까이 지켜보는 우란과 은화가 모를 리 없었다.게다가 은화와 지설의 학원이 입주해 있는 이 층의 임대 문제도, 사실상 도진이 직접 발로 뛰며 해결해 준 일이었다.늘 바쁘게 일하며 숨 돌릴 틈조차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사소한 일에까지 정성을 쏟을 수 있었을까?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 뒤에는 분
도진은 차갑게 입술을 열었다.“나 지금 바빠. 중요한 일 아니면, 당장 나가.”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곧장 사무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단호하고 결연한 발걸음,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뚜렷했다.하지만 예린은 도진의 차가운 태도와 짜증을 전혀 느끼지 못한 듯, 재빠르게 그 뒤를 따라붙었다.예린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눈이 예쁘게 초승달처럼 휘어지며,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이구, 괜찮아! 난 그냥 오빠 일하는 거 보고 싶어서 온 거야. 점심도 같이 먹으면 되잖아?”도진은 조금도 감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대체 왜 저렇게 집요하게 따라붙는 거지?’‘분명 여러 번 말했잖아. 난 너한테 그런 감정 없다고.’도진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뿐이었다.‘하루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 해.’하지만 예린은 마치 거절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는 듯, 계속해서 따라붙었다.시간은 흘러 두 시간이 지났다. 도진이 창밖을 바라보니, 예린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미친 거 아냐? 아직도 안 갔어?’도진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고, 마음속 불편함은 더 짙어졌다. 결국 그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번호를 눌렀다.잠시 후, 수화기 너머로 차분하고 다정한 도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무슨 일인데?]도진은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구예린이 아직도 여기 있어. 두 시간이나 붙어 있다니까. 형, 어떻게 좀 해봐.”그 말과 함께 도진의 머릿속에는 어릴 적 기억이 스쳤다. 언제나 자기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떨어질 줄 모르던 꼬마 예린.매번 그런 상황을 해결해 준 건 늘 도환이었다. 꾀 많고 눈치 빠른 형이 나서야만, 그는 간신히 숨통을 틀 수 있었다.이번에도 도진은 본능처럼 형에게 기대고 있었다.[예린, 결국 또 찾아왔지?]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도환의 목소리엔 묘한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그는 이미 모든 걸 꿰뚫고 있다는 듯한 자신감이 가득했
예린은 로펌 휴게실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한 손에 잡지까지 펼쳐 놓고, 마치 이곳이 자기 집인 양 편안한 모습이었다.그 앳된 얼굴에는 은근한 미소가 걸려 있었고, 지나가던 변호사들과 직원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녀에게 꽂혔다.‘누구지?’‘처음 보는 사람인데...’‘...’속으로 웅성거렸지만, 정작 예린은 그런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익숙하다는 듯, 우아하고 당당한 태도로 주변을 장악하고 있었다.언뜻 보면, 예린이는 마치 오래전부터 이곳을 드나들던 로펌의 안주인 같았다.잠시 후, 데스크 직원 유진이 다가와 뜨거운 커피를 건넸다.“손님, 커피 드시죠.”예린은 자연스레 커피를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곧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미소 지었다.“음... 커피가 조금 달네요. 저는 반만 당 넣은 게 좋아요. 그리고 얼음을 조금 넣어주면 더 산뜻하겠어요. 다음엔 그렇게 부탁드릴게요.”유진은 순간 멈칫했다. 이 여자분을 자신도 본 건 처음인데, 어쩐지 너무 당연하게 요구하는 태도에 말문이 막힌 것이다.게다가 예린의 옷차림은 눈에 띌 정도로 고가의 명품들이었다. 한눈에 봐도 흔한 사람이 아니었다.유진의 머릿속에 스친 건 단 한 사람.‘혹시... 우리 대표님 여자 친구?’‘근데 우리 모두 심지설 씨라고 알고 있었는데... 내가 착각한 건가?’유진은 마음속에 물음표를 잔뜩 품은 채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네, 알겠습니다. 불편하시지 않게 준비해 드리겠습니다.”그렇게 말한 뒤, 유진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아침 9시 정각, 로펌 현관문이 열렸다.도진이 들어섰다.잘 재단된 수트가 그의 넓은 어깨와 곧은 허리를 따라 매끈하게 떨어졌다.고급 원단 특유의 은은한 광택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흘러내렸고, 주변 공기마저 긴장하게 만드는 존재감이 뚜렷하게 풍겼다.도진은 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 차분하게 휴게실 쪽으로 향했다.그 순간, 소파에 앉아 있던 예린과 눈이 마주쳤다.바로 그 순간, 예린의 눈길이 번개처럼 도진의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