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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Penulis: 바람노래
주인정은 은혁 앞에서 단 한 번도 말로 이겨 본 적이 없었다.

은혁에게 대놓고 맞설 용기는 없었고, 늘 뒤에서 은근히 훼방을 놓는 식이었다.

심지어 방금 은혁이 자신을 겨냥한 것도, 자신이 서하에 대해 흘린 말을 듣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주인정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은혁과 서하의 사이가 특별히 돈독해서는 아니었다.

다만 은혁의 권위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었다.

은혁이 당시 배진국의 강요로 서하와 결혼했을 때도, 두 사람 사이는 그저 체면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은혁 마음속에 다른 여자가 있다는 소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떠돌았고, 주인정은 그 결말을 지켜보며 비웃게 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정은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억지웃음을 지었다.

“나 서하랑 그냥 농담한 거지. 서하는 과학자잖아. 나라에 이름을 알리고, 배씨 집안의 자랑이 될 사람인데 내가 어떻게 주방에 세울 수 있겠니?”

말투는 웃고 있었지만 속에는 날카로운 비아냥이 가득했다.

‘나라를 빛낸 과학자라니,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인재도 아니잖아!’

은혁은 무심히 정장 외투를 벗어 옆에 던졌다.

“참 궁금하네요. 어머니께서는 우리나라에 뭘 얼마나 보탠 게 있고, 또 이 집안에는 무슨 자랑이 되셨는지...”

주인정의 얼굴에 걸린 웃음이 거의 무너져 내렸다.

그때 마침 레나가 들어와 은혁 뒤에서 부드럽게 불렀다.

“은혁 오빠, 무슨 일이에요?”

은혁 얼굴에 드리웠던 불쾌감와 날카로움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는 레나를 돌아보며 짧게 답했다.

“아무 일도 아니야.”

그 말과 함께 셔츠 소매 단추를 풀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서하 옆을 지나며 한마디 던졌다.

“뭐 하고 있어? 올라가.”

그리고 먼저 계단을 올라갔다.

서하는 시선을 돌려 레나를 바라봤다.

레나는 서하를 향해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

‘배은혁이 나를 감쌌던 건, 주 여사를 못마땅해하기 때문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이 사람의 성질이 폭발하면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데...’

‘민레나의 한마디 ‘은혁 오빠’에 그 모든 기세가 사라지는구나.’

서하는 스스로를 괴롭히듯 레나와 눈을 마주하다가, 곧 시선을 거두고 뒤돌아 올라갔다.

주인정은 다시 표정을 추스르며 적당히 따뜻한 미소를 띠고 레나를 맞았다.

“어서 들어와, 문가라서 춥잖니.”

레나는 얌전히 대답했다.

“감사해요, 이모.”

“이제 이모라고 부를 날도 얼마 안 남았지.”

주인정은 레나의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

“조만간 호칭 바꿔 불러야지.”

서하는 계단을 돌아 올라가면서 더 이상 아래 대화가 들리지 않는 지점에 다다르자,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어서 곧장 자신과 은혁의 방으로 향했다.

...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은혁이 샤워 중이었다.

서하는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창밖의 불빛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핸드폰이 울렸고, 서하는 곧바로 받았다.

“재희 씨.”

짧은 응답 후, 이재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후에 그 데이터, 정리 다 됐어요?]

서하는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네, 끝냈어요.”

[다른 데이터는 제가 메일로 보내 드렸습니다. 내일은 조금 수월하실 거예요.]

“재희 씨가 벌써 처리했어요?”

서하는 놀란 듯 물었다.

“그쪽도 바쁘지 않아요?”

[괜찮아요. 이 부분은 서하 씨가 다뤄본 경험이 많지 않아 오래 걸리잖아요. 저는 익숙해서 금방 끝냈습니다.]

데이터 하나가 돌아가는 데만 두 시간이 걸릴 때도 있었다.

새 파트너가 데이터 처리에 서툰 탓에 고생하던 걸 떠올리자, 서하는 마음속 깊이 고마움이 차올랐다.

“정말 고마워요. 재희 씨도 필요할 때 언제든 말씀하세요.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그 순간 욕실 문이 열리며 은혁이 나왔다.

서하는 무심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봤다.

은혁은 한 손으로 수건을 들고 젖은 머리칼을 닦아 내리고 있었다. 욕실에서 흘러나오는 수증기의 온기로도 얼굴선을 부드럽게 만들진 못했고, 젖은 속눈썹마저 차갑고 날카롭게 보였다.

허리에 걸친 수건은 느슨했고, 남자의 선명한 복근과 매끈한 근육 라인이 그대로 드러났다.

서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려 했다. 은혁과 스쳐 지나가려는 순간, 손목을 단단히 붙잡혔다.

“뭐 하는 거야?”

서하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밥 먹으러 내려가야지.”

레나를 본 순간부터 서하의 마음과 표정은 계속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서하는 말을 끝내자마자 손을 빼내려 했지만, 은혁은 오히려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숙여 입술을 맞추려 했다.

‘민레나 앞에서 지었던 그 웃음, 선물까지 건네던 모습...’

서하의 속이 뒤틀리며 치밀어 올랐고, 양손을 은혁의 가슴팍에 대고 단번에 그를 밀어냈다.

은혁의 미간이 좁혀졌다. 얼굴에는 불편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잠시 침묵 끝에 은혁이 물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서하는 알고 있었다. 은혁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절대적인 주도권을 쥐고 있는 쪽은 은혁이라는 것을.

은혁이 부부관계를 원한다면 서하는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배은혁에게 욕망을 풀기 위한 도구일 뿐이겠지.’

서하는 더 깊은 통증을 느끼며 은혁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

“앞으로, 내 허락 없이는 절대 건드리지 마.”

말을 내뱉는 순간까지도 온몸이 떨렸지만, 끝까지 눈을 맞추지 않은 채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아래엔 배효산이 서 있었다.

그는 참으로 운 좋은 재벌 2세였다.

젊을 적엔 아버지 배진국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고, 배진국이 세상을 떠나기도 전에 이미 배은혁이 후계자 자리를 확고히 했다.

배효산은 훌륭한 아버지를 두었고, 또 훌륭한 아들을 두었다.

그에게는 특별히 내세울 만한 재능이 없었지만, 그런데도 셀 수 없이 많은 부를 누릴 수 있었다.

덕분에 쉰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사십 대 초반처럼 보였고, 온화한 눈빛에 점잖은 기품까지 갖추고 있었다.

배효산은 서하를 보자 손을 흔들며 말했다.

“서하야, 어서 와서 밥 먹자. 은혁이는?”

이 결혼은 배진국이 직접 정해 둔 혼사였다.

배효산은 누구보다 효심이 깊었기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서하에게 딱히 불만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곧 내려올 거예요.”

서하가 담담히 대답했다.

그때 레나가 다정하게 다가와 서하의 팔에 팔짱을 끼며 말했다.

“서하 언니, 이리로 앉아요.”

서하는 고개를 저으며 팔을 빼냈다.

“이 집에선 내가 레나 씨보다 더 오래 있었지.”

말이 끝나자 레나의 눈가가 금세 촉촉해졌다.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당황스레 말을 잇는다.

“저, 저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요...”

주인정이 곧바로 얼굴을 찡그리며 끼어들었다.

“레나가 그냥 좋은 마음으로 그런 건데, 왜 그렇게 별것도 아닌 걸로 억지를 부려? 정말 네가 이 집안 안주인인 줄 아는 거야? 그럼 나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하니? 어른 모시는 마음이 있기는 해?”

그녀는 곧장 배효산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보, 계속 이런 식이면, 우리 레나가 앞으로 이 집에서 어떻게 버티겠어요. 괜히 기죽어서 어디 살겠어요?”

레나는 적당히 눈물을 훔치며, 억울하다는 듯 훌쩍였다.

배효산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뭘 그렇게 괴롭혔다고 해. 다들 앉아, 앉아. 레나야, 울지 마라... 아이구, 서하야, 얼른 레나한테 사과해. 괜히 은혁이나 성우가 오해하면 안 되잖아.”

서하는 천천히 레나를 바라봤다.

레나는 몸을 살짝 틀어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게 했지만, 서하만은 그 표정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승리감에 젖은 오만한 눈빛.

레나는 배씨 가문 본가에 들어온 첫날부터 서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든 상황이 흡족했다.

아쉬운 건 단 하나, 은혁이 이 장면을 직접 보지 못한 것뿐이었다.

‘내가 어떻게 사과를 해? 사과할 이유 따위는 없어.’

주인정이 놓치지 않고 몰아붙였다.

“서하야, 네 시아버지가 사과하라고 하시잖아. 못 들었니?”

그때 계단 위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동시에 위쪽으로 향했다.

은혁이 소매를 걷으며 내려오고 있었다. 진한 회색 트레이닝복 차림인데도 여전히 기품과 차가운 기세가 풍겨 나왔다.

시선은 곧장 서하에게 꽂혔다. 냉정하고 위압적인 눈빛 속엔 분명한 불만과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래, 오늘이 첫날인데 내가 배은혁의 첫사랑을 울게 했네.’

‘아까 날 안으려던 순간, 이 사람이 마음속에 떠올린 게 과연 나였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서하는 마치 타인의 손이 심장을 움켜쥐기라도 한 듯 가슴이 아렸다.

그리고 동시에 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역겨움이 휘몰아쳤다.

은혁의 눈은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밤 같았다. 그 안에는 서하를 위한 한마디 변명도 없었다.

배효산은 늘 우유부단했으나, 큰아들 은혁 앞에서는 늘 고개를 숙였다.

방금 중재하려던 말마저, 은혁의 표정을 확인한 순간 속으로 삼키고 말았다.

주인정은 은혁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싫은 건 서하였다.

‘똑같은 여자인데 나는 배효산의 아내 자리를 얻으려고 죽을 고생을 했고...’

‘결국 이 집안에 들어와서도 배은혁 눈치를 봐야 하는데.’

‘그런데 임서하는 뭐야? 변변찮은 집안 출신 주제에...’

‘배은혁과 결혼해 들어와서는 작은 안주인 행세를 다 하고 있잖아.’

은혁과 서하의 사이가 멀어질수록, 주인정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서하는 모든 차가운 시선을 견뎌낼 수 있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차갑게 내리꽂히는 은혁의 의심하는 눈길만은 서하의 가슴을 얼어붙게 했다.

손끝이 살짝 떨렸다. 그러고 나서 스스로를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처음부터 알고 있잖아.’

‘배은혁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 이제는 익숙해져야지.’

그런데도 서하의 마음은 여전히 아팠고, 또 서글펐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가슴 어딘가에서, 실처럼 가늘고 아릿한 고통이 잔뜩 얽혀 있었다.

그녀는 배효산을 흘끗 바라봤다. 시아버지의 얼굴에는 어색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곧 배효산이 상황을 수습하듯 말했다.

“그만해라. 다 한가족인데, 어서 앉아서 밥이나 먹자.”

서하는 등을 곧게 세우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식사 내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과라니... 나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내가 왜 사과해야 하지?’

레나는 얌전하게 모두의 그릇에 반찬을 덜어주었다. 서하의 그릇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은혁 앞에 젓가락이 다가가자, 은혁이 낮게 말했다.

“네 거나 먹어.”

레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오빠, 지금 먹을게요. 걱정 마세요. 나 많이 먹을 거예요.”

서하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배성우는 도대체 왜 이렇게 늦는 거야?’

‘자기 약혼녀랑 형이 저렇게 다정하게 앉아 있는데...’

‘설마 저 둘 사이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못 챈 거야?’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배성우가 느지막이 들어왔다.

그는 요즘 지도교수와 프로젝트를 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를 댔다.

성우의 인상은 아버지 배진국을 빼닮았지만, 은혁만큼 키가 크지는 않았다. 겉멋만 잔뜩 든 분위기와 눈빛 속에는 얄팍한 계산이 가득 배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주인정은 아들의 귀에 대고 은혁을 경쟁자로 여기라고 다그쳤다.

언젠가 배씨 가문의 가업을 자기 손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우의 능력으로는 아직 역부족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은혁 앞에서는 언제나 고개를 숙이며 형이라고 불렀다.

자리에 앉자마자 성우는 레나가 앉은 의자에 팔을 걸치고는, 프로젝트의 수익과 전망을 자랑하듯 늘어놓았다.

주인정은 눈을 반짝이며 감탄했다.

“우리 아들 참 대단하지. 아직 대학 졸업도 안 했는데 벌써 돈을 벌다니.”

서하는 속으로 비웃음을 삼켰다.

‘이게 대단한 거라고?’

‘같은 나이인 나는 이미 석사를 마치고 연구원에서 일하고 있는데...’

‘배성우는 아직 학부생 아닌가?’

‘그 프로젝트라는 것도 집안에서 돈을 밀어준 결과물인데...’

‘처음으로 돈을 벌었다는 말을 가져다 붙이려면, 그건 배은혁에게 어울리는 말이지.’

서하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마침 은혁의 깊고 어두운 눈빛과 마주쳤다.

오늘 이 자리는 본래 성우가 레나를 데리고 와서 약혼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자리였다.

배효산이 양가 어른끼리 자리를 마련하자는 말을 막 꺼낸 순간이었다.

딱!

은혁이 젓가락을 내려놓은 것이다.

서하는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은혁은 겉으론 잔잔한 물 같았지만, 눈빛은 이미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먹구름이 몰려드는 하늘처럼 언제든 폭풍이 터져 나올 듯했다.

‘첫사랑이 동생의 약혼녀가 되려 하는데... 배은혁도 결국 못 참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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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하가 산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소진은 여전히 이한 옆에 앉아 그림책을 보고 있었다.이한은 해외에서 자랐고, 서하는 어릴 때부터 이한에게 이중 언어로 교육했다.영어 그림책 정도는 이한에게 전혀 부담되지 않았다.다만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이한이 평소 잠자리에 드는 시간도 훌쩍 넘겼고, 낮에 이것저것 많이 놀아 피곤한 상태였다.잠깐 낮잠을 자긴 했지만, 지금은 확실히 졸려 보였다.서하가 옆에서 소진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이한의 작은 머리가 점점 앞으로 쏠렸다.마치 고개를 끄덕이는 새처럼, 천천히, 반복해서.서하와 소진은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이한을 침대에 눕히자, 이한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그대로 잠들어버렸다.소진은 그날 집에 가지 않았다.밤은 서하와 함께 보냈다.불을 끄고 누운 뒤에야, 서하가 물었다.“하 변호사님은 언제 돌아온대?”“돌아와서 뭐 하게.”소진이 나른하게 대답했다.“외국에 있으면 얼마나 편한데.”‘내가 쪼아대는 일도 없고, 집안 어른들 눈치 볼 필요도 없고.’“그렇게 말하지 마.”서하가 조용히 말했다.“너랑 하 변호사님이 잘 지내면, 해결 못 할 문제가 뭐가 있어. 그러니까 하 변호사님이 나간 거잖아.”“넌 생각이 너무 단순해.”“네가 ‘예스’만 하면 되는 문제 아니야?”소진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하선우 어머니가 나 찾아온 적 있어.”서하의 눈이 커졌다.소진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헤어지라고 하신 건 아니야. 근데 며느리에 대한 기준이 분명하더라. 결혼하면 집안 돌보고, 남편 내조하고, 밖에서 일하면 안 되고, 3년 안에 아이 둘.”서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소진이 그런 삶을 선택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아이 문제를 떠나서, 일을 그만두라는 조건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소진은 타고난 일 중독자였다.소진 인생의 절반 이상은 일이 주는 성취감으로 채워져 있었다.“그 얘기, 하 변호사님한테는 했어?”서하가 물었다.“해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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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혁이 걸음을 멈췄다.“그럼 왜?”은혁은 스스로에게 여러 번 말했다.이 일은 이제 내려놓자고, 더 붙잡지 말자고.하지만 그날 봤던 서하의 단호한 표정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쪽이 여전히 아렸다.서하가 말했다.“그때 화공 공장에서 연락이 왔어. 방사선 수치가 아주 높은 장비가 가동됐다고. 그날 내가 그 공간에 있었고,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어. 그래서... 임신중절수술이 유일한 선택이었어.”‘그래서였구나.’은혁의 머릿속에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하지만 곧이어 다른 생각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그때 나는 이혼을 원하지 않았고, 서하는 이혼을 원했지.’‘게다가 서하는 내가 바람을 피웠다고 오해하고 있었고.’‘나를 이혼하게 만들려면, 완전히 마음을 접게 해야 했을 거야.’‘임신중절수술은... 나를 무너뜨리기에 가장 확실한 선택이었겠지.’서하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은혁의 가슴은 조금 가벼워졌다.‘서하는 아이를 원하지 않았던 게 아니었어.’‘선택지가 없었던 거지.’“알겠어.”은혁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그때 당신을 오해해서... 미안해.”서하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방사선 문제 이후에 있었던 일들.수술대에 누운 뒤에야 알게 된 사실들.그날 실제로는 공장에 가지 않았다는 어이없는 착오까지.그 착오 덕분에 이한은 살아남았고, 세상에 태어났다.하지만 이 이야기를 은혁에게 할지 말지는, 아직 서하 자신도 정하지 못했다.지금은 좋은 타이밍이 아니었다.은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이한이 아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서하가 대답하지 않자, 은혁은 말을 덧붙였다.“물론, 말하고 싶지 않으면 그냥 안 물은 걸로 할게.”서하는 고개를 저었다.거짓말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하나의 거짓말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말을 덧붙여야 한다는 걸 서하는 알고 있었다.“말하고 싶지 않아.”은혁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물었다.“그럼,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물어봐.”“당신 마음에 아직 이한이 아빠가 있어?”서하는

  • 버림받은 아내의 화려한 귀환   제396화

    “다 네 생각이잖아. 난 네 편이야.”소진이 말했다.“어쨌든, 너 스스로한테 상처 주는 선택은 하지 마. 알겠지?”소진은 늘 그랬다.서하에게 인생의 교훈을 늘어놓지도 않았고, 서하가 은혁과 다시 시작하는 걸 말리지도 않았다.다만 하나뿐이었다. 서하가 억지로 참지 않기를 바랐다.서하가 은혁과 다시 만난다고 해서 뭐가 문제일까?배은혁은 돈도 있고, 힘도 있고, 외모도 훌륭했다.소진의 기준에서는, 서하가 손해 볼 일은 없었다.‘서하만 괜찮다면, 배은혁 쪽은 뭐든 상관없지.’소진은 그렇게 생각했다.저녁을 먹은 뒤, 소진은 이한과 함께 게임했다.서하가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보며 소진이 말을 덧붙였다.“천천히 얘기해. 분위기 좋아지면, 바로 옆에 호텔도 있잖아. 여자는 자기 욕망을 절대 억누르면 안 돼. 피임만 잘하면 돼.”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배은혁... 다른 건 몰라도 몸은 진짜 좋잖아. 근데 말 나온 김에, 배은혁 기술은 어때?”소진과의 사이가 아무리 깊어도, 서하는 이런 이야기까지는 쉽지 않았다.서하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야!!”서하는 소진을 한 번 노려보고는 그대로 현관 쪽으로 향했다.소진은 끝까지 따라와 현관에서 서하를 배웅했다.“뭐가 그렇게 부끄러워. 남자랑 여자 사이 일은 밥 먹는 거랑 똑같아. 배은혁은 보기 드문 요리야. 공짜로 먹게 해주겠다는데, 왜 거절해?”서하는 소진을 밀어냈다.“말 좀 줄여. 나 간다!”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자마자, 서하의 시야에 은혁이 들어왔다.은혁의 손에는 꽃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말 그대로 딱 한 송이였다.깔끔한 포장지에 싸인, 막 꺾은 것처럼 신선한 붉은 장미.“많이 사면 부담스러울까 봐.”은혁이 꽃을 내밀었다.“이 정도면 괜찮지?”대부분의 여자가 그렇듯, 서하 역시 꽃을 싫어하지 않았다.한 송이라서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서하는 꽃을 받아 들었다.“고마워.”“아파트 단지 안에서 좀 걸을까?”은혁이 물었다.“아니면 밖으로 나갈까? 방금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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