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소진을 통해 전해 들은 말이든, 은혁이 직접 입으로 인정한 말이든, 그 모든 사실은 서하에게 큰 충격이었다.지금의 서하는 솔직히 은혁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이성적으로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아무렇지 않게 넘기려 애썼다.하지만 한때 그렇게나 좋아했던 남자가... 이제 와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외면하는 건 불가능했다.집에 도착했을 때 서하는 천후가 와 있는 걸 발견했다.요즘 천후는 서하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한을 보러 오는 걸 멈추지는 않았다.서하를 마주한 천후는 예전 같은 온기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거리를 두는 듯한 차가움도 아니었다.그저 무심한 얼굴로 인사만 건넸다.서하는 마음을 정리하려 애썼다.은혁에게는 차갑게 선을 그을 수 있었지만, 천후 앞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이한을 위한 방문을 거절하기에도 애매했다.천후는 단 한 번도 서하에게 감정을 고백한 적이 없었다.그렇다고 이대로 두자니, 지금의 관계는 묘하게 애매했고 그 미묘함이 서하에게는 불편했다.예전에 한 번 이야기해 본 적도 있었지만, 아무런 결론도 나지 않았다.천후는 늘 ‘이한의 대디’라는 위치에 머물렀다.그 자격으로 아이를 보러 오는 것을 서하는 막을 명분이 없었다.이한이 낮잠에 들고 나서야 천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얘기 좀 할까?”두 사람은 거실에서 마주 앉았다. 각자 소파 하나씩을 차지하고 앉았다.천후는 이 집에서도 유난히 편안해 보였다. 아마도 이런 성격은 어디에 있든 늘 자기 공간처럼 느끼게 만드는 타입일 것이다.천후는 군더더기 없이 곧바로 물었다.“배은혁한테 기회 줄 생각이야?”서하는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아니라...”천후는 작게 웃었다.“여자는 입과 마음이 서로 다르다더니, 오늘 제대로 보네.”“그런 거 아니야.”서하가 말했다.“난 그런 생각 없어. 배은혁이 뭘 하든, 그건 배은혁 일이야.”“난 네 선택을 설득할 생각은 없어.”천후가 말했다.
주말이 되자 소진은 서하와 아정을 불러 밖에서 밥을 먹자고 했다.아정이 서하에게 돈을 송금했던 일에 대해, 서하는 이미 소진에게 이야기해 두었다.그 돈을 그냥 받기엔 마음이 불편해서 셋이 상의한 끝에 아정에게 선물을 하나 사주기로 했다.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큰돈을 받은 게 계속 마음에 걸릴 것 같았다.소진은 몇 가지를 추천해 주었고, 고심 끝에 서하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골랐다.세 사람이 만났을 때, 서하는 양손에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하나는 아정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소진의 것이었다.아정에게는 목걸이, 소진에게는 팔찌였다.두 개 다 눈에 띄게 예뻤다.어떤 나이든, 어떤 관계든, 여자는 선물을 받는 걸 좋아한다.아정과 소진도 예외는 아니었다.선물을 받은 뒤, 아정은 기뻐하다가 곧 얼굴을 찌푸렸다.“근데 저는 언니들한테 아무것도 못 사드렸잖아요.”“넌 아직 어리잖아.”서하는 웃으며 아정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나중에 돈 벌면, 그때 사줘.”소진은 팔찌를 바로 손목에 차 보더니, 아정을 보며 물었다.“소개팅 건은 어떻게 됐어?”아정은 턱을 괴고 한숨을 쉬었다.“뭐, 뻔하죠. 엄마는 그냥 저를 몰아붙이고 싶은 거예요. 생각해 보니까요... 정 안 되면 유민석이랑 한 번쯤은 만나볼까 싶기도 해요.”소진은 가볍게 웃었다.“뭐, 그것도 방법이긴 하지. 대신 유민석한테 네 몸에 손대게만 하지 마.”“절대 안 돼요.”아정은 얼굴 가득 혐오를 담았다.“유민석은 얼마나 많은 여자를 만났는지도 모르잖아요. 너무 더러워요.”“다른 방법은 없어?”서하가 물었다.“엄마랑 진지하게 이야기해 보는 건?”“저희 엄마요, 완전 고집불통이에요.”아정이 고개를 저었다.“엄마는 늘 고모가 너무 자유분방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고모 닮을까 봐 항상 경계해요.”소진이 말했다.“근데 네 고모, 인생 진짜 멋지게 사시잖아. 그걸 닮는 게 왜 문제야?”“그렇죠?”아정이 고개를 끄덕였다.“근데 엄마는 걱정이 되는 거죠.”소진이 다
어느 순간부터였는지... 은혁은 서하를 안고 있었다.평소처럼 가볍게 끌어안는 포옹이 아니었다.은혁은 허리를 굽혀, 서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듯이 가져다 댔다.뺨이 서하의 목선에 닿았고, 두 팔은 단단하게 서하의 허리를 감싸안고 있었다.두 사람이 헤어진 이후, 이렇게 가까이 몸을 밀착한 건 처음이었다.서하는 본능적으로 은혁을 밀어내려 했다.하지만 그보다 먼저 자기 피부 위로 전해지는 무언가를 느꼈다.눈물이었다.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저 미지근한 온기였을 뿐인데...서하의 목덜미에 닿는 순간, 그 온도는 이상하리만큼 뜨겁게 느껴졌다.배은혁이라는 남자는 서하에게 수많은 ‘처음’을 안겨준 사람이었다.처음 안겼던 날, 처음 손을 잡았던 순간, 처음 입을 맞춘 기억까지.그리고 지금 은혁은 이런 방식으로 서하에게 자신의 눈물을 처음 느끼게 하고 있었다.이 순간, 서하는 자기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분명한 건, 지금 이 타이밍에 은혁을 밀어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내가 착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너무 마음이 약해서 그런 건지...’서하 자신도 딱 맞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즈음, 서하는 은혁이 자기 몸에 기대 잠들어 있다는 걸 알아챘다.두 사람이 있던 곳은 식당 밖에 놓인 긴 벤치였다.서하는 조심스럽게 은혁을 부축해 벤치 위에 눕혔다.그리고 머리 아래에 은혁의 재킷을 접어 받쳐주었다.잠시 후, 서하가 밖으로 나오자 룸 앞에 서 있는 재도를 만났다.“배 대표... 잠들었어요.”서하는 낮게 말하며 상황을 전했다.“배 대표님 잠드셨다고요? 그럼 저는 먼저 가겠습니다.”재도가 서하를 불러 세웠다.“대표님께서 최근에 거의 쉬지 못하셨습니다. 한동안 하루에 두세 시간밖에 못 주무셨고, 어젯밤은 거의 밤을 새우셨습니다.”서하는 등을 곧게 편 채 말했다.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죠?”재도는 잠시 말을 잃었고, 서하는 더 이상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
“미안해. 예전에... 내가 정말 많이 잘못했어.”은혁은 고개를 숙인 채 서하를 내려다보았다.목소리는 낮았고, 말투에는 꾸밈없는 진심이 묻어 있었다.서하는 고개를 떨군 채 자기 손에 들린 가방의 무늬만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은혁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두 사람의 과거를 하나하나 꺼냈다.사소한 일들, 별것 아니었던 순간들...서하가 이미 잊어버린 기억들까지도 은혁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자신이 서하에게 보였던 냉담함, 서하를 오해했던 순간들, 감정이 앞서 내뱉었던 말들, 차갑게 몰아붙였던 기억들까지.처음엔 서하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하지만 은혁의 말 중, 어느 한 부분이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렸는지...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졌고 눈가가 붉어졌다.사실, 소진에게서 은혁이 자신을 좋아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서하는 한 번쯤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혹시... 그동안의 일들이... 전부 오해였던 건 아닐까?’하지만 설마... 정말로 그럴 줄은 몰랐다.은혁의 할아버지, 배진국이 처음부터 은혁에게 원했던 상대는 민레나였다.하지만 은혁이 결혼하고 싶었던 사람은 처음부터 서하였다.배진국은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쥐고 있었고, 은혁이 할아버지의 허락을 얻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그중 하나가 레나를 잘 보살필 것.마치 친여동생처럼 지켜줄 것이라는 약속이었다.은혁에게 레나는 단 한 번도 연애의 대상이 아니었다.그는 그저 할아버지의 말을 따랐고, 책임처럼 레나를 돌봤을 뿐이었다.서하에게 차갑게 굴었던 이유 역시 은혁 나름의 오해 때문이었다.서하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고 믿었고, 이 결혼을 원치 않았다고 생각했다.은혁의 이야기를 듣던 서하는 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내가 이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당신이랑 결혼하지도 않았어.”그 말을 듣는 순간, 은혁의 심장은 더 깊이 가라앉았다.말을 할수록 자기 잘못을 더 또렷이 마주하게 되었다.어젯밤 이미 수없이 자신을 돌아
10시가 조금 넘어서야 서하는 겨우 물 한 모금을 마실 수 있었다. 책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을 힐끗 보다가 서하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오늘은 배은혁이 보이지 않았다.메시지도, 전화도 없었다.은혁이 처음 학교에 나타났던 날부터 지금까지, 벌써 열흘이 훌쩍 넘었다.그동안 은혁은 매일 학교에 나왔다.서하는 알고 있었다.은혁은 저녁이 되면 다시 회사로 돌아가 밤늦게까지 일한다는 걸.그 이야기는 서하가 직접 은혁에게서도 들었고, 재도에게서 들은 적도 있었다.서하가 재도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은혁이 얼마나 힘든지를 슬쩍 흘리며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흔들어보려는 계산이라는 걸.그래서 서하는 분명히 말했었다.자기에게 더 이상 시간을 쓰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하지만 은혁은 듣지 않았다.그런데 오늘 마치 이제야 그 말을 받아들인 것처럼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은혁이 말하던 ‘쫓아다니는 일’도 아마 여기까지였을 것이다.서하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그리고 교안을 정리해 들고 강의실로 향했다.강단에 올라가서도 처음엔 학생들을 보지 않았다.자료를 정리하고, 노트를 정돈한 뒤, 습관처럼 시선을 강의실 맨 뒤로 옮겼다.그 순간, 은혁과 눈이 마주쳤다.순간 서하는 멈칫했다.그러나 곧바로 시선을 거두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수업을 시작했다.‘배은혁... 또 왔네.’몇 초 만에 마음을 다잡았다.마치 은혁을 보지 못한 것처럼 행동했다.수업이 끝난 뒤, 몇몇 학생들이 다가와 질문했다.서하는 학교 안에서 여전히 주목받는 교수였지만, 이곳은 어디까지나 최상위권 대학이었다.대부분의 학생은 소문보다는 공부에 더 집중했다.그리고 서하는 학생들에게 질문하기 좋은 교수이자, 설명이 명확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은혁은 강의실 맨 뒤에 앉아 학생들 사이에 둘러싸인 서하를 바라보고 있었다.도자기처럼 희고 맑은 피부, 은은한 미소가 차가운 인상을 부드럽게 눌러주고, 눈동자에는 작은 빛들이 잔잔히 떠 있었다.은혁은 쉽게 시선을 거두지 못했
은혁이 말했다.“구민준이랑은 몇 번 본 적은 있는데, 딱히 친하진 않아. 왜?”민석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구민준 완전 여동생 바보잖아. 집에서 나랑 아정이 엮을 생각이 있다는 거 알고 나서부터 나만 보면 눈엣가시처럼 굴어.”그리고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덧붙였다.“네가 구민준이랑 좀 아는 사이면, 내가 구아정한테 관심 없다고 한마디만 해줘.”은혁이 물었다.“그걸 왜 네가 직접 안 하고?”민석이 코웃음을 쳤다.“구민준 눈에는 자기 여동생이 세상에서 제일이거든. 내가 뭐라고 해도 안 믿어. 도대체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어.”은혁은 더 말 얹지 않았다.“나중에 보자.”민석은 여전히 투덜거렸다.“아니, 어린애 하나 때문에 이렇게 골치 아플 줄 누가 알았냐? 우리 엄마는 도대체 구아정의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 거야. 왜 하필이면 꼭 걔야.”민석은 몰랐다.구아정이 이미 그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그 평가는 이미 바닥을 뚫고, 더 내려갈 곳도 없을 만큼 낮아져 있었다....서하는 이른 아침에 아정에게서 전화받았다.[언니, 세상에 어떻게 유민석 같은 남자가 있을 수가 있어요? 여자 바꾸는 게 옷 갈아입는 것보다 빠르잖아요. 유민석은 진짜 병 걸릴까 봐 무섭지도 않나 봐요.]서하는 웃으며 말했다.“걱정 마. 너희 집에서 너를 유민석이랑 결혼시키지는 않을 거야.”[그게 문제예요.]아정의 목소리가 축 처졌다.[엄마가 저한테 선택권을 줬어요. 회사에 들어가서 일하든지, 아니면 유민석이랑 사귀든지. 둘 중 하나 안 하면 딸로 안 보시겠대요.]서하는 의아했다.“그럼 회사 가서 일하면 되잖아.”‘유민석이랑 사귀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아정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야 조심스럽게 말했다.[저... 회사 가기 싫어요. 고모랑 같이 에베레스트 등반하러 가고 싶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서하는 아정의 어머니가 왜 그런 선택지를 내밀었는지 알 것 같았다.완전히 막다른 길까지 몰린 상태였다는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