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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 누군가 황태자와 계약했다

Author: 혜진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6 17:51:13

002. 누군가 황태자와 계약했다

저주라면 차라리 쉬웠다.

끊으면 된다.

정확히 어디를 잘라야 하는지 찾고, 반동을 계산하고, 남은 마력흔을 봉합하면 끝이다.

계약은 달랐다.

계약은 누군가의 의지와 선택을 전제로 한다.

나는 별궁의 작은 서재를 임시 연구실로 바꾼 뒤 세 시간째 같은 문장을 뜯고 있었다.

바닥에는 실패한 술식지가 쌓였고, 창가 탁자에는 분석용 마석이 다섯 개나 식어 있었다.

레오니스는 맞은편 소파에서 한 번도 재촉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오히려 더 신경 쓰였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그가 문서에서 눈을 들었다.

“좋은 것부터 듣지.”

“당장 죽지는 않으십니다.”

“그게 좋은 소식인가.”

“제국 기준으로는 상당히 좋은 소식입니다.”

옆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에드윈이 고개를 숙였다.

웃음을 참는 건지 한숨을 참는 건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레오니스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나쁜 소식은.”

“지금 당장은 이 계약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나는 책상 위에 황실 결계도를 펼쳤다.

“전하의 몸에 있는 계약문은 황실 결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전하의 마력만 잘라내면 결계가 반동을 일으킵니다.”

레오니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에 섰다.

“반동이 일어나면?”

“황궁 일부가 무너지거나, 전하의 마력핵이 먼저 깨집니다.”

“어느 쪽이 더 가능성이 높지.”

“후자입니다.”

그는 놀라지 않았다.

결계도 위에 올린 손끝이 아주 잠깐 멈췄을 뿐이었다.

죽을 수 있다는 말을 너무 익숙하게 듣는 사람 같았다.

나는 그 손에서 시선을 떼고 빈 종이를 끌어왔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네 칸을 그었다.

대상.

조건.

명령.

대가.

“계약을 부술 수 없다면 다른 계약으로 속이면 됩니다.”

레오니스의 시선이 종이 위를 따라왔다.

“새 계약이 기존 계약보다 먼저 반응하게 만들겠다는 건가.”

“정확합니다.”

처음으로 답이 빨랐다.

나는 그의 이름을 적었다.

레오니스 발테른.

그 아래에 내 이름을 썼다.

비비안 아르델.

두 이름 사이에 선을 하나 그었다.

에드윈의 손이 멈췄다.

“아르델 경도 계약에 들어갑니까?”

“그래야 합니다. 전하에게 들어가는 부담 일부를 제 쪽으로 흘려야 하니까요.”

레오니스가 내 얼굴을 봤다.

“그대에게 어떤 영향이 가지.”

“마력 일부를 씁니다. 피로가 조금 늘 수 있고요.”

“조금?”

“계산상으로는.”

“계산이 틀리면.”

“제가 알아서 감당합니다.”

그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그 답은 마음에 들지 않는군.”

펜끝이 멈췄다.

황태자가 자기 목숨을 앞에 두고 치료자의 안전부터 확인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전하, 이건 자선이 아닙니다. 계약금도 받았고 성공하면 추가 보수도 받을 겁니다.”

“결국 돈으로 해결하겠다는 건가.”

“대부분의 문제는 그렇습니다.”

“이것도?”

그가 자기 가슴의 검푸른 문양을 가리켰다.

“저주는 비쌉니다. 계약은 더 비싸고요.”

레오니스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방 안의 긴장이 그제야 느슨해졌다.

나는 다시 종이로 시선을 내렸다.

“조건은 하루 한 번 상호 인식. 서로 살아 있고 계약 의지가 유지되는 걸 확인하는 정도면 됩니다. 인사나 악수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감정이나 기억에는 영향을 주나.”

“없습니다.”

“의지에는?”

“없습니다.”

그 질문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레오니스는 차분했다.

“계약이라면 그 부분부터 확인해야 하지 않나.”

맞는 말이었다.

황태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이름으로 수많은 계약을 맺었을 것이다.

조약, 서약, 정치적 약속, 언젠가는 혼인까지.

그래서 더 이상했다.

누군가 그런 사람의 몸에 수락 조건을 숨겨 넣었다.

“진행하겠습니다.”

레오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지.”

책상 위를 비우고 마석 네 개를 사방에 배치했다.

“셔츠를 조금 풀어 주세요. 계약문의 중심이 심장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가 손을 들어 단추를 풀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검푸른 문양이 드러났다.

나는 한 걸음 가까이 갔다.

“닿겠습니다.”

“허락하지.”

손바닥을 그의 가슴 바로 위에 대고 마력을 흘렸다.

금빛 선이 검푸른 문장 사이로 스며들었다.

기존 계약이 내 마력을 밀어내려다가, 내가 새로 그은 선을 읽고 방향을 바꿨다.

좋다.

여기까지는 계산대로였다.

문제는 마지막이었다.

새 계약에는 레오니스가 원하는 하나의 문장이 필요했다.

나는 손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전하께서 가장 원하는 건 무엇입니까?”

그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호흡 한 번이 내 손바닥 바로 아래에서 느껴졌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해방되고 싶다.”

그 순간.

금빛 선 하나가 내가 예상한 방향이 아니라 그의 옷깃 쪽으로 번졌다.

나는 시선을 들었다.

셔츠 가장 위 단추가 아주 작게 떨렸다.

딱.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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