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제 남은 건 절망뿐이라 떠나기로 결심했는데 이강우는 오히려 끈질기게 달라붙어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처음에는 홍경자 할머니와의 정을 생각하여 서로에게 마지막 체면이라도 남겨주려 했다.그런데 왜 결국 이렇게 칼날이 곤두선 듯, 서로에게 상처만 입히는 결말을 맞이해야 하는 걸까?다음 날 아침.이강우는 밤새 가시지 않은 울화통을 안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그의 안색은 창밖의 흐릿한 날씨보다 몇 배는 더 침울했다.주방에 막 발을 들여놓자 이미 안주인 석에 앉아 있던 홍경자가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으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추궁을 시작했다.“너 또 하나 괴롭혔지?”이강우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딱딱한 말투로 부인했다.“그런 적 없어요.”“내 앞에서 거짓말할 생각 마!”홍경자의 말투가 더욱 강경해졌다.“하나가 오늘 아침 일찍 떠났어! 아침도 나랑 같이 안 먹고 가버렸단 말이야. 비록 아무 말도 없었지만,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잔 게 훤히 알리더라. 네가 아니면 하나가 뭣 하러 급하게 떠났겠니?”이강우는 어젯밤에 뺨을 맞은 일을 떠올리니 또다시 분노가 치솟았다.그는 목소리를 한껏 내리깔았다.“아니라고 했잖아요. 제발 억측 좀 하지 마세요.”홍경자는 그의 고집스러운 태도에 이제 막 나무라려던 참인데 무심코 볼에 난 손자국을 발견했다.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다시 한번 확인해보려는 듯싶었다. 한편 두 눈동자에는 놀라운 기색이 역력했다.“얼굴에 난 붉은 자국은 뭐냐? 뺨 맞은 자국 같은데? 설마 하나가 때렸어?”이강우는 피식 웃으며 야유 조로 대답했다.“걔 말고 누가 더 있겠어요? 제가 허구한 날 스스로 뺨 때리면서 놀 리는 없잖아요.”이 말을 들은 홍경자는 화내긴커녕 되레 바짝 긴장하며 그에게 따져 물었다.“그럼 넌 혹시... 하나한테 손찌검했니?”그녀는 자신의 손자가 얼마나 오만한 성격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이강우의 인생에 본인이 남을 괴롭히는 일은 부지기수여도 이런 수모를 겪은 적은 단 한
송하나도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보더니 모든 걸 깨달았다.그녀는 야유 섞인 어조로 말했다.“그러니까 방금 했던 말들 모두 핑계였네요? 실은 강우 씨가 이혼하기 싫은 거죠?”이강우는 입술을 꾹 다물고 딱히 부인하지 않았다.이에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이혼 안 하면 강우 씨가 그토록 사랑하는 송태리는 과연 순순히 받아들일까요? 설마 평생 명분도 없는 내연녀로 살게 하려고요?”“걔한테는 내가 알아서 보상해줄 거야.”이강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른 방식으로.”너무나도 당연하다는 식의 태도에 송하나는 참고 참았던 분노가 그대로 폭발해버렸다.“내가 지금 그 제안을 받아들일 것 같아요?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이런 말을 내뱉는 거죠?”“할머니가 널 많이 좋아하셔.”이강우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했다.“친손자인 나보다 너를 더 아끼시지. 네가 만약 우리 집에 계속 머물러 준다면 할머니가 엄청 기뻐하실 거야.”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덧붙였다.“앞으로는 일주일에 시간을 내서 꼭 너랑 함께해줄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만족시켜 줄 수 있어. 태리보다 뒤처지지 않을 거야.”은혜를 베푼다는 식의 말투, 하지만 그 속에서 존중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태도, 송하나는 이제 마지막 남은 인내심마저 완전히 고갈되었다.그녀는 문을 가리키며 한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꺼져 당장!”순간 이강우의 안색이 확 굳어졌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송하나의 손목을 거칠게 잡았다. 힘이 너무 센 나머지 그녀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야, 송하나, 대체 뭐가 불만이야?”이강우의 목소리에는 모욕감과 이해할 수 없다는 식의 분노가 가득했다.“전에 내가 한 달에 한 번이나 집에 돌아올까 말까 해도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잖아! 이제 시간도 내주고 원하는 건 뭐든 다 들어준다니까. 왜 이렇게 까칠하게 구냐고? 투정도 정도껏 부려!”찰싹.찰진 뺨 소리가 마침내 계속 폭주하려는 이강우의 입을 틀어막았다.송하나는 이 뺨 한 대에 온 힘을 쏟아서
화장대 위 가지런히 놓인 화장품들, 옷장 안 그녀가 즐겨 입던 잠옷 몇 벌,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읽다 만 책들까지...송하나에게 속한 모든 흔적이 깨끗하게 치워진 상태였다.마치 그녀가 이곳에 살아본 적이 없는 것처럼 너무 깔끔하게 정리됐다.이강우는 문득 그녀가 자신을 마주할 때마다 보이던 차가운 표정을 떠올리며 이유 없는 분노가 버럭 치솟았다.아직 이혼 절차도 안 밟았는데 송하나는 자꾸 그와 선을 긋고 있었다.이런 것도 나름 밀당의 수법일까?전에 그녀는 갖은 수단으로 이강우의 환심을 사려 애썼고 가까이 다가오지 못해 안달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칼같이 선을 긋고 남보다도 못하게 쌀쌀맞은 태도만 보인다.그토록 오랫동안 품어왔던 애틋한 감정을 불과 몇 달 사이에 이렇게까지 깔끔하게 떨쳐낼 수 있을까? 사랑하지 않기로 마음먹으면 바로 그렇게 되는 걸까? 그는 도통 믿기 힘들었다.이강우는 불쾌한 기분을 안고 샤워하러 들어갔다.하지만 차가운 물줄기조차 마음속의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잠재우지 못했다.그는 대충 잠옷을 걸치고 위스키 한 잔을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독한 술이 목구멍을 태웠지만 오히려 답답함만 더욱 선명해졌다.‘이대론 안 되겠어. 직접 가서 물어봐야겠다!’이제 막 문을 열자 안정인이 우유 한 잔을 들고 객실 앞에서 조심스럽게 노크하고 있었다.이강우는 걸음을 멈추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 주세요.”안정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네, 도련님.”그녀는 따뜻한 우유를 이강우에게 건네고는 곧바로 물러났다.객실 문이 이내 열리고 송하나가 옅은 색 홈웨어 차림으로 나왔다. 머리는 느슨하게 묶어 올리고 가늘고 하얀 목덜미를 드러냈다.문밖에 떡하니 서 있는 이강우를 보자 그녀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방금 샤워를 마친 노곤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또다시 차가운 눈길로 그와 거리감을 두었다.이강우가 건넨 우유 잔을 받으며 그녀가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고마워요.”이제 곧 문을 닫으려 하는데 이 남자가 긴 팔을 뻗어
안정인은 곧장 객실을 정리했다.정리를 마친 후, 송하나는 자신의 베개를 들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살며시 닫았다.한편 이 모든 장면을 멀지 않은 곳에서 홍경자가 지켜보고 있었다.어르신은 말없이 한숨을 내쉬며 걱정 가득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안정인이 그런 홍경자를 보며 나직이 말했다.“어르신, 사모님께서... 도련님과는 정말 관계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으신 것 같아요... 도련님이 쓰시던 침대도 이제 안 쓰려 하시네요.”홍경자는 짙은 눈길로 굳게 닫힌 객실 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보이는구나.”어르신은 누구보다 잘 안다.예전에 두 아이가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아져도 송하나가 이강우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항상 빛이 담겨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아예 낯선 사람을 대하듯 삭막함과 거리감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하나가 강우에게 정말 상처가 깊은 것 같아.”홍경자는 탄식하며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한편 송하나는 본가에서 할머니와 함께 며칠 더 보냈다.매일 함께 산책하고, 차를 마시고, 바둑을 두며 아늑하고 한적한 시간을 보냈다.눈 깜짝할 사이에 주말이 되었다.저녁 무렵, 홍경자는 주방에 친히 분부하여 음식을 한 상 가득 차렸는데 전부 송하나가 평소 즐겨 먹는 음식이었다.이제 막 테이블 앞에 앉았을 때 문밖에서 차분하고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이강우가 돌아온 것이다.그는 양복 재킷을 벗어 가정부에게 건네며 은근한 피로감을 드러냈다.홍경자도 회사 일을 대충 들은 터라 관심 조로 물었다.“회사 일은 어떻게 됐어?”“다 처리했어요. 별일 아니에요.”이강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그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식탁을 훑어보다가 그제야 발견했다.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 중에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은 단 하나도 없었다.홍경자가 곧바로 그의 속내를 꿰뚫었다.“오면 온다고 미리 말하지. 오늘은 하나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차렸어. 우리 하나는 몇 년 동안 네 입맛에 습관까지 다 맞춰가면서 살았으니 이제 네가
김지영은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며 변명에 나섰다.“하나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너희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넌 아직 미성년자였어. 우리가 차마 널 보육원에 보낼 수 없어서 네 후견인이 되어주고 집안 재산을 관리해 준 거잖아!”송종현 역시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맞장구쳤다.“그래! 너희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서 회사는 빚더미만 안고 집도 이미 담보로 넘어간 상태라 빈 껍데기나 다름없었어. 하도 가족이니까 엉망진창인 걸 뒷수습해 준 거지 누가 손이나 대고 싶었겠어? 너무 주제넘게 굴지 마라!”송하나는 변명하는 두 인간을 싸늘하게 지켜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아직은 때가 아니다.아버지의 옛 운전기사 안재준 씨가 그날의 진실을 파헤치는 중이고 아직 결정적인 단서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이니 일단 참아야만 한다.결정적인 단서를 손에 쥐거든 반드시 이들을 죗값을 치르게 해줄 것이다.그녀의 냉혹하고 결연한 눈빛에 송종현 부부는 서늘한 한기가 온몸을 휘감았고 감히 송하나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바로 그때, 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천천히 길가에 멈춰 서더니 이강우의 운전기사가 안에서 내려와 정중하게 뒷문을 열었다.“송태리 씨, 대표님께서 댁으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송종현과 김지영은 마치 구명줄이라도 잡은 듯 재빨리 송태리를 끌고 차에 올라탔다.“태리야, 얼른 타! 이 년이랑 여기서 시간 낭비할 거 없어!”송태리는 아무 이득도 얻지 못했고 더 붙잡고 있어봤자 본인만 망신당할 꼴이 될 테니 송하나를 힐긋 노려보곤 차에 올라탔다.차는 금세 멀어져 갔다.송하나는 제자리에 선 채 눈가의 한기가 계속 서려 있었다.한참 후,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눈빛에 드리운 증오와 냉랭한 기운을 천천히 짓눌렀다.돌아서 차 문을 열 때, 얼굴에는 어느덧 평온을 되찾은 뒤였다.“괜찮니, 하나야? 그 사람들이 또 험한 말로 널 속상하게 하진 않았어?”홍경자는 그녀의 손을 잡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송하나가 얼른 할머니의 손을 따뜻하게 맞잡으며 안심시키는 미소를
그녀는 선뜻 한 걸음 나아가 뒤에서 송하나를 불렀다.“송하나! 너 도망갈 생각 마!”“하나야, 쟤 신경 쓰지 말고 차에 타, 얼른.”할머니는 송하나가 손해 볼까 걱정하며 그녀의 손을 잡고 차 안으로 밀어 넣으려 했다.이에 송하나가 할머니의 손등을 부드럽게 토닥이며 안심시켰다.“할머니, 괜찮아요. 먼저 타고 계세요. 저 잠깐 얘기 좀 하고 올게요.”그녀는 이 가족들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꼭 듣고 싶었다.홍경자를 차에 모신 후, 송하나는 드디어 송태리를 향해 덤덤한 어투로 물었다.“용건이 뭐야?”송태리는 그녀의 태연한 모습을 보며 분노가 순식간에 불타올랐다.방금 겪었던 억울함과 모욕감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송하나, 너 진짜 대단하다! 강우 씨가 나한테 별장 사줄 걸 알고 일부러 할머니를 모시고 와서 가로챈 거잖아! 어른 등쌀에 남의 것을 빼앗기나 하고 양심이 찔리진 않니?”이때 김지영도 다가와 앙칼진 목소리로 한마디 거들었다.“하나 네가 이렇게 심보 나쁘고 악독한 애일 줄은 몰랐구나! 아무리 강우가 우리 태리 좋아해서 질투 난다고 해도 어떻게 이런 비열한 수법으로 물건을 뺏으려 하니? 뻔뻔스러워 정말!”송하나는 그녀들의 터무니없는 질책에 너무 황당해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녀는 살짝 눈썹을 치켜 올리며 야유 조로 말했다.“대체 내가 불안할 게 뭐지? 강우 씨는 법적으로 내 남편이라 벌어들인 돈의 절반은 내 몫인데. 내가 내 돈 주고 집 사는 일이 뭐가 양심에 찔린다는 거냐고?”“오히려 당신들이야말로 내연녀 주제에 뻔뻔스럽게 내 앞에 기어 와서 으름장을 놓고 있잖아. 파렴치함은 당신들이야말로 최고죠!”“야!”송태리는 이 말을 듣고 얼굴이 빨개졌고 송하나를 가리키는 손까지 파르르 떨렸다.“넌 그냥 무늬만 강우 씨 아내야. 강우 씨는 너한테 마음 없어. 나야말로 장차 강우 씨 와이프가 될 거라고!”“그래?”송하나는 목소리를 길게 늘이며 눈동자에 노골적인 조롱을 담았다.“정말? 그럼 제발 좀 빨리 나랑 이혼하고 너랑 결혼해